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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23일 (수) 16:51 판

서희(徐禧, 1035~1082)

북송의 문신으로, 자는 덕점이며, 홍주 분녕 사람이다. 북송 강주 태수 황서의 사위이며 황정견의 형부로, 서부의 아버지이다. 왕안석의 신법파에 속하였고 1082년 심괄과 함께 영락성 신축을 주장한다. 그 뒤 부장의 말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영락성에서 서하군과의 난전 중 사망한다. 시호는 충민(忠愍).

2. 생애 어린 시절부터 지도가 있었고 고금의 사변과 풍속의 이폐를 알고 과거를 응시하지 않아 두루 돌아다녔다. 이후 1068년 왕안석의 신법 시행 당시 《치책》 24편을 지어 바쳐 왕안석의 인정을 받았고, 이후 송 신종의 칭찬을 받아 태자중윤, 관각교감으로 승진한다.

당시 등완과 범백록이 이사녕을 탄핵하며 조세거를 요망으로 현혹시켰으나, 서희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이사녕을 반신으로 규정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왕안석이 여혜경과 대립하던 시기 등완은 여혜경이 부친상을 당하고 부자 화정에게 500만 전의 돈을 빌려 밭을 샀다고 고했고 서희는 심문에 참가해 형호북로 환적부사로 파견되었고 1078년 지간원으로 소환된다.

여혜경이 연안에서 번한병전수조약을 변경하자 신종은 이를 각 방면으로 보급토록 하고 서희로 하여금 계획을 세우게 한다. 채연경이 이를 반대하자 신종은 채연경으로 하여금 서희를 대신케 하고 채연경을 직룡도각 학사로 승진시킨다. 서희가 모친상을 당한 이후 다시 돌아오고 등완이 장안을 지킬 때 등완을 지청주로 바꾸고 서희도 강등된다.

이후 충악이 서하로 출정하여 은주, 하주, 유주 3개의 주를 탈환하나 지키지 못하였고 심괄이 영락성을 축조할 것을 주장한다. 이에 신종이 서희와 내시 이순거를 보내 충악과 상의하고 심괄로 하여금 전 병력을 통제하게 했다. 서희가 영락성 축조를 강력히 주장하였음에도 충악이 수원 부족을 이유로 반드시 패한다고 하였고 고영형도 반대하자, 서희는 이를 무시하고 영락성 수축을 강행했다.

1082년 9월 서하의 양태후가 30만 대군을 영락성으로 진군시키고 이에 맞서 서희가 이를 구원하러 갔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부장 곡진이 군대를 거두어 성으로 돌아오라고 하나 서희는 이를 무시하였고 서하군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소수 패잔병들을 이끌고 성으로 퇴각한다.

서하군이 성을 포위하자 성 내 병사들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곡진이 남쪽으로 도망치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희는 서하군과 맞서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었고 이순거, 고영능 등과 함께 난전 중 전사한다.

이 소식을 들은 신종은 슬퍼하면서 단식했다.

3. 대표 작품 《치책》[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