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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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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는 1399년(정종 1) 지리산 덕기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불서이다. 이 불서는 송의 고봉화상(高峰和尙)이 남긴 『선요(禪要)』를 간행한 목판본 불서 1책이다. 이 덕기사본은 1358년에 원나라 운집정사에서 간행한 판본을 입수하여 번각한 목판에 결판된 부분만을 1399년에 새로 보충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와 동일한 판본은 보림사·규장각 등에만 보관되어 있는 희귀본이다. 법장사 도서는 표지가 개장되어 있고 권수의 서문이 빠져 있으나, 본문과 발문 부분은 가장 초기 판본으로 원간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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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9년(정종 1) 지리산 덕기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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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화상선요』는 송나라 고봉화상 원묘(原妙, 1238~1295)가 남긴 어록과 서간 중에서 선(禪) 수행의 요체를 간추려서 해설한 선 수행의 지침서로, 그의 시자 지정(持正)이 기록하고 참학거사 홍교조(洪喬祖)가 편록하여 ‘선요(禪要)’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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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화상은 1238년(고종 25) 강소성(江蘇省) 소주부 오강현(吳江縣)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서(徐)씨로 법명은 원묘(原妙)이고, 법호가 고봉(高峰)이다. 남송(南宋) 말기인 1238년(고종 25)부터 원대(元代) 초기인 1295년(충렬왕 21)까지 송원 교체기에 일생을 보낸 선승(禪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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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5세에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의 법주(法住) 스님에게 출가하여 1254년(고종 41)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1295년에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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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법장사 도서는 1399년에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덕기사본으로 현전본 중 가장 오래된 고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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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복장에서 수습한 이후 근래 오침으로 개장하고 표지에 ‘고봉화상선요’로 표제가 묵서되어 있으며, 전체 크기는 세로 22.8㎝, 가로 14.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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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권수에는 1354년(공민왕 3)에 쓴 홍교조의 서문과 주영원(朱潁遠)의 발문이 있으나, 성룡사본에는 빠져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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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에는 중국 광선사 주지 진원(眞圓) 등이 쓴 발문이 있으며, 발문 끝부분에 “지리산덕기사개판 건문원년기묘팔월일중간(智異山德奇寺開板 建文元年己卯八月日重刊”이라는 간기(刊記)가 수록되어 있어 1399년에 지리산의 덕기사(德奇寺)에서 중간(重刊)된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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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기 아래에 간선도인 ‘지봉(志峯)’과 각수(刻手) ‘신지(信智)’의 이름이 보이고 있어 이들이 중심적으로 개판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그 이듬해 덕기암에서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을 간행한 사실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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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문과 발문의 맨 끝에 1358년(공민왕 7)에 원나라 집운정사(集雲精舍)에서 중간한 중국 원판의 원간기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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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과 좌우쌍변이 혼재되어 있으며, 반곽(半郭)을 기준으로 크기는 세로 17㎝, 가로 13㎝이며, 행자수는 10행 18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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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심부(版心部)에는 위쪽에 흑어미(黑魚尾)가 아래로 하향하고 그 아래에 판심제 ‘요(要)’와 장차가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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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판은 모두 2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체로 앞쪽의 12장은 무계판(無界版)이고 13장 이후는 유계판(有界版)으로 혼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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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판식상의 특징으로 보아 덕기사판은 이전에 원판(元板)을 번각한 목판에 결판된 부분만을 별도로 보판(補板)하여 중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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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덕기사본과 동일본이 전라도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사천왕상(四天王像)에서 수습한 복장본을 비롯하여 규장각과 국립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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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덕기사판이 중국에서 1358년에 간행된 판본을 저본으로 개판된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원나라에서 전래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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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고승 벽송 지엄(智嚴)이 이 책을 매우 중시하여 수행인은 반드시 읽고 장애를 없앨 것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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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청허(淸虛)의 4세 법손인 설제(雪霽)가 사집과에 편입시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불교 전문강원의 교재로 채택 학습되어 왔기 때문에 전국 사찰에서 30여 차례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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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유통되고 있는 판본은 1399년 지리산 덕기사에서 개판된 것을 비롯하여 1731년(영조 7) 영변 보현사(普賢寺) 판본 등 30여 종이 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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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요 내용은 개당보설(開堂普說) 1편, 시중(示衆) 14편, 결제시중(結制示衆) 2편, 해제시중(解制示衆) 3편, 입양시중(立陽示衆) 1편, 제야소참(除夜少參) 2편, 만참(晩參) 1편, 직옹(直翁) · 신옹(信翁) · 이통(理通)에게 내린 법어 3편, 통앙산화상의사서(通仰山和尙疑嗣書) 1편, 실중삼관(室中三關) 1편 등 모두 2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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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고봉의 첫 법문인 개당보설에서는 자기의 경험을 예로 들어 의정(疑情: 의심)을 크게 가져서 도를 깨칠 것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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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7편 시중에서는 마음을 밝히려면 일체의 선악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제26편 시중에서는 참선할 때 밝고 밝지 않음을 논하지 말고 큰 분발심과 큰 의심으로 일관해서 수행하여야 함을 밝히고 있다. 끝으로 제29편 실중삼관은 고봉의 3대 가풍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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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정본은 조선시대 간행된 30여 종 가운데 조선 초기 1399년 지리산 덕기사에서 개판한 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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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사본은 1358년에 원나라 운집정사에서 간행한 판본을 입수하여 번각한 목판에 결판된 부분만을 새로 보충하여 간행한 것이다. 현재 이와 동일한 판본은 보림사와 규장각 등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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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법장사 도서는 표지가 개장되어 있고 권수의 서문이 빠져 있으나, 본문과 발문 부분은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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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화상선요』의 가장 초기 판본으로 원간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2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4년 3월 1일 (금) 10:14 판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는 1399년(정종 1) 지리산 덕기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불서이다. 이 불서는 송의 고봉화상(高峰和尙)이 남긴 『선요(禪要)』를 간행한 목판본 불서 1책이다. 이 덕기사본은 1358년에 원나라 운집정사에서 간행한 판본을 입수하여 번각한 목판에 결판된 부분만을 1399년에 새로 보충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와 동일한 판본은 보림사·규장각 등에만 보관되어 있는 희귀본이다. 법장사 도서는 표지가 개장되어 있고 권수의 서문이 빠져 있으나, 본문과 발문 부분은 가장 초기 판본으로 원간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399년(정종 1) 지리산 덕기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불서.


『고봉화상선요』는 송나라 고봉화상 원묘(原妙, 1238~1295)가 남긴 어록과 서간 중에서 선(禪) 수행의 요체를 간추려서 해설한 선 수행의 지침서로, 그의 시자 지정(持正)이 기록하고 참학거사 홍교조(洪喬祖)가 편록하여 ‘선요(禪要)’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봉화상은 1238년(고종 25) 강소성(江蘇省) 소주부 오강현(吳江縣)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서(徐)씨로 법명은 원묘(原妙)이고, 법호가 고봉(高峰)이다. 남송(南宋) 말기인 1238년(고종 25)부터 원대(元代) 초기인 1295년(충렬왕 21)까지 송원 교체기에 일생을 보낸 선승(禪僧)이다.

그는 15세에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의 법주(法住) 스님에게 출가하여 1254년(고종 41)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1295년에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법장사 도서는 1399년에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덕기사본으로 현전본 중 가장 오래된 고판본이다.

이 책은 복장에서 수습한 이후 근래 오침으로 개장하고 표지에 ‘고봉화상선요’로 표제가 묵서되어 있으며, 전체 크기는 세로 22.8㎝, 가로 14.3㎝이다.

일반적으로 권수에는 1354년(공민왕 3)에 쓴 홍교조의 서문과 주영원(朱潁遠)의 발문이 있으나, 성룡사본에는 빠져 있는 상태이다.

권말에는 중국 광선사 주지 진원(眞圓) 등이 쓴 발문이 있으며, 발문 끝부분에 “지리산덕기사개판 건문원년기묘팔월일중간(智異山德奇寺開板 建文元年己卯八月日重刊”이라는 간기(刊記)가 수록되어 있어 1399년에 지리산의 덕기사(德奇寺)에서 중간(重刊)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간기 아래에 간선도인 ‘지봉(志峯)’과 각수(刻手) ‘신지(信智)’의 이름이 보이고 있어 이들이 중심적으로 개판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그 이듬해 덕기암에서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을 간행한 사실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본문과 발문의 맨 끝에 1358년(공민왕 7)에 원나라 집운정사(集雲精舍)에서 중간한 중국 원판의 원간기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서지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과 좌우쌍변이 혼재되어 있으며, 반곽(半郭)을 기준으로 크기는 세로 17㎝, 가로 13㎝이며, 행자수는 10행 18자이다.

판심부(版心部)에는 위쪽에 흑어미(黑魚尾)가 아래로 하향하고 그 아래에 판심제 ‘요(要)’와 장차가 표시되어 있다.

본판은 모두 2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체로 앞쪽의 12장은 무계판(無界版)이고 13장 이후는 유계판(有界版)으로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판식상의 특징으로 보아 덕기사판은 이전에 원판(元板)을 번각한 목판에 결판된 부분만을 별도로 보판(補板)하여 중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덕기사본과 동일본이 전라도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사천왕상(四天王像)에서 수습한 복장본을 비롯하여 규장각과 국립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덕기사판이 중국에서 1358년에 간행된 판본을 저본으로 개판된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원나라에서 전래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고승 벽송 지엄(智嚴)이 이 책을 매우 중시하여 수행인은 반드시 읽고 장애를 없앨 것을 강조하였다.

이후 청허(淸虛)의 4세 법손인 설제(雪霽)가 사집과에 편입시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불교 전문강원의 교재로 채택 학습되어 왔기 때문에 전국 사찰에서 30여 차례 간행되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판본은 1399년 지리산 덕기사에서 개판된 것을 비롯하여 1731년(영조 7) 영변 보현사(普賢寺) 판본 등 30여 종이 현전하고 있다.


선요 내용은 개당보설(開堂普說) 1편, 시중(示衆) 14편, 결제시중(結制示衆) 2편, 해제시중(解制示衆) 3편, 입양시중(立陽示衆) 1편, 제야소참(除夜少參) 2편, 만참(晩參) 1편, 직옹(直翁) · 신옹(信翁) · 이통(理通)에게 내린 법어 3편, 통앙산화상의사서(通仰山和尙疑嗣書) 1편, 실중삼관(室中三關) 1편 등 모두 2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고봉의 첫 법문인 개당보설에서는 자기의 경험을 예로 들어 의정(疑情: 의심)을 크게 가져서 도를 깨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제7편 시중에서는 마음을 밝히려면 일체의 선악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제26편 시중에서는 참선할 때 밝고 밝지 않음을 논하지 말고 큰 분발심과 큰 의심으로 일관해서 수행하여야 함을 밝히고 있다. 끝으로 제29편 실중삼관은 고봉의 3대 가풍을 소개하고 있다.

이 지정본은 조선시대 간행된 30여 종 가운데 조선 초기 1399년 지리산 덕기사에서 개판한 판본이다.

덕기사본은 1358년에 원나라 운집정사에서 간행한 판본을 입수하여 번각한 목판에 결판된 부분만을 새로 보충하여 간행한 것이다. 현재 이와 동일한 판본은 보림사와 규장각 등에 보관되어 있다.

비록 법장사 도서는 표지가 개장되어 있고 권수의 서문이 빠져 있으나, 본문과 발문 부분은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고봉화상선요』의 가장 초기 판본으로 원간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2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