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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아버지 [[전창혁|전창혁(全彰爀)]]은 고부 군수 [[조병갑|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 |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아버지 [[전창혁|전창혁(全彰爀)]]은 고부 군수 [[조병갑|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9437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04월 30일.</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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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민란]] 주도=== | ===[[고부민란]] 주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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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 ||
− | [[ | + | [[이용태]]의 악행은 또 다시 동학교도들의 격분을 샀다.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김기범(金箕範)]]·[[손화중|손화중(孫華中)]]·[[최경선|최경선(崔敬善)]]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창의문(倡儀文)을 발표하였다. 이 창의문에 근방의 10여 읍에서 호응하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
전봉준은 1894년 4월부터 12월까지 [[1차 동학농민운동]]과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으나, 부하였던 [[김경천|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 교수형을 당하였다.<ref>"부하였던...교수형을 당하였다." - 출처: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전봉준은 1894년 4월부터 12월까지 [[1차 동학농민운동]]과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으나, 부하였던 [[김경천|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 교수형을 당하였다.<ref>"부하였던...교수형을 당하였다." - 출처: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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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 |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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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9일 (수) 09:23 기준 최신판
전봉준(全琫準) | |
대표명칭 | 전봉준 |
---|---|
한자표기 | 全琫準 |
생몰년 | 1855년-1895년 4월 23일 |
본관 | 천안 |
이칭 | 녹두장군 |
호 | 해몽(海夢) |
자 | 명좌(明佐) |
시대 | 근대 |
국적 | 조선 |
대표직함 | 동학접주 |
부 | 전창혁(全彰爀) |
유형 | 농민운동가 |
목차
정의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로 일명 녹두장군이라 불렸다.
서장옥은 전봉준·김개남·손화중의 스승으로 남접파의 거두이며 최시형에게서 떨어져 남접을 창도하였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
동학에 입교하다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아버지 전창혁(全彰爀)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1]
1890년(조선 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2]
고부민란 주도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무기를 탈취하고 강탈당하였던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였으며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3]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이용태의 악행은 또 다시 동학교도들의 격분을 샀다.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창의문(倡儀文)을 발표하였다. 이 창의문에 근방의 10여 읍에서 호응하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4]
전봉준은 1894년 4월부터 12월까지 1차 동학농민운동과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으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 교수형을 당하였다.[5]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전봉준 | 전창혁 | A는 아버지 B가 있다 | A ekc:hasFather B |
전봉준 | 동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edm:isRelatedTo B |
동학 | 최시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edm:isRelatedTo B |
최시형 | 전봉준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전봉준 | 김개남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전봉준 | 손화중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전봉준 | 최경선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전봉준 | 고부민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전봉준 | 동학농민운동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전봉준 | 정읍 전봉준 유적 | A는 B에서 거주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94년 1월 | 전봉준이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다 |
1894년 4월 | 전봉준이 1차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
1894년 9월-12월 | 전봉준이 2차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
1894년 12월 30 | 전봉준이 체포되었다 |
1895년 4월 23일 | 전봉준이 처형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5.720230 | 126.806633 | 전봉준은 백산성에서 봉기하였다 |
35.671222 | 126.814583 | 전봉준은 정읍 전봉준 유적에 기거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전봉준[6]
영상
주석
- ↑ 김창수, "전봉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04월 30일. - ↑ 김창수, "전봉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04월 30일. - ↑ "전봉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부하였던...교수형을 당하였다." - 출처: "전봉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김창수, "전봉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