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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이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보내 문학하는 선비를 뽑아 보내달라 하니, [[근구수왕]]은 손자인 [[진손왕]]과 함께 왕인(王仁)을 일본으로 보냈다. 그는 오진 천황 때 일본에 귀화하였으며, 그의 아들 [[태아랑왕]](太阿郞王)은 닌토쿠 천황 때의 시종으로 활동했다. 다른 칭호는 [[지종왕]](知宗王) 또는 [[지종왕]](智宗王)이다. | 《속일본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이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보내 문학하는 선비를 뽑아 보내달라 하니, [[근구수왕]]은 손자인 [[진손왕]]과 함께 왕인(王仁)을 일본으로 보냈다. 그는 오진 천황 때 일본에 귀화하였으며, 그의 아들 [[태아랑왕]](太阿郞王)은 닌토쿠 천황 때의 시종으로 활동했다. 다른 칭호는 [[지종왕]](知宗王) 또는 [[지종왕]](智宗王)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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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손왕]]은 [[진사왕]]의 아들이자 [[근구수왕]]의 손자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제16대 [[진사왕]]의 다음은 [[진손왕]]으로, “[[진손왕]], 오진 조에 도래”로 되어 있다. 그 다음은 [[태아랑왕]]이고, ‘해양군-오정군’으로 이어진다. 할아버지 [[근구수왕]]이 백제 왕으로 있을 때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 등을 백제로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근구수왕]]은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왕인을 《논어 (論語)》 10권과 《천자문 (千字文)》 1권을 가지고 건너가게 하였다. 이후 귀국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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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일본기》에 따르면, 그는 왕인과 함께 서적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하여 유풍을 일으켰다 하며 오진 천황 재위기간 중 귀화하였다 한다. [[진손왕]]의 후손은 아들 [[태아랑왕]]이 닌도쿠 천황의 근시가 되고 가계는 [[해양군]]과 [[해양군]]의 아들 [[오정군]], [[미사(일본)|미사]](味沙) 등으로 이어졌다.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파하였다 하여 일본에서는 그를 다른 이름으로 [[지종왕]](知宗王)으로도 부른다. 그의 후손에서는 왕진이(王辰爾) 등의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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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손자 [[오정군]]의 세 아들인 [[미사(일본)|미사]](味沙), [[진이(일본)|진이]](辰璽), [[마여군]](麻呂君) 등은 일본 조정으로부터 관야조신(菅野朝臣)에 임명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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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손왕]]은 왕인 등을 동행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다. 한때 [[진손왕]]이 왕인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속일본기》와 《일본서기》, 《신찬성씨록》에는 각각 다른 인물로 규정하고 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왕인은 중국 사람으로 할아버지 때에 백제로 귀화한 귀화인의 후손이라 한다. |
2022년 9월 27일 (화) 20:37 판
백제 진손왕(百濟 辰孫王, 356년 ~ ?)은 백제의 왕족이며 근구수왕의 손자이고, 진사왕의 아들이다.
근구수왕의 명으로 유학자 왕인과 함께 사절로 일본에 건너갔다. 성은 부여씨(夫餘氏), 이름은 미상이다. 그의 증손 오정군의 세 아들이 일본에서 관야조신(菅野朝臣)에 임명되어 관야조신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오진 천황이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보내 문학하는 선비를 뽑아 보내달라 하니, 근구수왕은 손자인 진손왕과 함께 왕인(王仁)을 일본으로 보냈다. 그는 오진 천황 때 일본에 귀화하였으며, 그의 아들 태아랑왕(太阿郞王)은 닌토쿠 천황 때의 시종으로 활동했다. 다른 칭호는 지종왕(知宗王) 또는 지종왕(智宗王)이다.
진손왕은 진사왕의 아들이자 근구수왕의 손자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제16대 진사왕의 다음은 진손왕으로, “진손왕, 오진 조에 도래”로 되어 있다. 그 다음은 태아랑왕이고, ‘해양군-오정군’으로 이어진다. 할아버지 근구수왕이 백제 왕으로 있을 때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 등을 백제로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근구수왕은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왕인을 《논어 (論語)》 10권과 《천자문 (千字文)》 1권을 가지고 건너가게 하였다. 이후 귀국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그는 왕인과 함께 서적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하여 유풍을 일으켰다 하며 오진 천황 재위기간 중 귀화하였다 한다. 진손왕의 후손은 아들 태아랑왕이 닌도쿠 천황의 근시가 되고 가계는 해양군과 해양군의 아들 오정군, 미사(味沙) 등으로 이어졌다.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파하였다 하여 일본에서는 그를 다른 이름으로 지종왕(知宗王)으로도 부른다. 그의 후손에서는 왕진이(王辰爾) 등의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한다.
증손자 오정군의 세 아들인 미사(味沙), 진이(辰璽), 마여군(麻呂君) 등은 일본 조정으로부터 관야조신(菅野朝臣)에 임명되었다.
진손왕은 왕인 등을 동행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다. 한때 진손왕이 왕인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속일본기》와 《일본서기》, 《신찬성씨록》에는 각각 다른 인물로 규정하고 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왕인은 중국 사람으로 할아버지 때에 백제로 귀화한 귀화인의 후손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