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쌍릉"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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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당시 높이는 3.1m, 양 무덤의 너비는 약 0.5km였다. 현재는 보수되어 대왕묘의 지름은 30m, 높이는 5m, 소왕묘의 지름은 24m, 높이은 3.5m이다. 대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꼭대기에서 7.2m 아래에 있는데, 널방〔玄室〕 규모는 길이 3.80m, 너비 1.78m, 높이 2.27m이다. 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이 설치되었는데 널문〔羨門〕과 널길 입구는 판석을 세워 막았고 4면벽과 바닥·천장을 모두 돌널[板石]로 조립하였다. 바닥 중앙에는 널받침〔棺臺〕이 놓였다. 소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윗면에서 5.5m 아래에 있는데 돌방의 형식과 석재 등은 대왕묘와 같다. 널방은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1.7m로 규모가 약간 작다. | 발굴 당시 높이는 3.1m, 양 무덤의 너비는 약 0.5km였다. 현재는 보수되어 대왕묘의 지름은 30m, 높이는 5m, 소왕묘의 지름은 24m, 높이은 3.5m이다. 대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꼭대기에서 7.2m 아래에 있는데, 널방〔玄室〕 규모는 길이 3.80m, 너비 1.78m, 높이 2.27m이다. 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이 설치되었는데 널문〔羨門〕과 널길 입구는 판석을 세워 막았고 4면벽과 바닥·천장을 모두 돌널[板石]로 조립하였다. 바닥 중앙에는 널받침〔棺臺〕이 놓였다. 소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윗면에서 5.5m 아래에 있는데 돌방의 형식과 석재 등은 대왕묘와 같다. 널방은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1.7m로 규모가 약간 작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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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쌍릉이라는 말 자체는 봉분이 2개인 무덤을 뜻하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즉 예를 들어 황남대총도 무덤의 형식을 말할 때 쌍릉이라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는 전북 익산시의 백제 무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두 기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서의 쌍릉을 다룬다. 둘 중 큰 것을 대왕릉(또는 대왕묘, 북총), 작은 것을 소왕릉(또는 소왕묘, 남총)이라고 한다. 이 왕릉은 이미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때에 도적들에 의해 도굴을 당했으며, 또한 백제 멸망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며 원래 주인이 누군지는 잊혀지고 마한의 무강왕의 능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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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 고고학적 접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있었다. 그리고 쌍릉을 조사하여 발굴한 유물들은 광복 이후로 한국에 남았다. 2018년에 쌍릉을 재발굴하여 정확한 실측조사를 했는데, 발굴과정에서 추가로 유물을 발굴하였다. |
2022년 9월 23일 (금) 16:04 판
익산 쌍릉(益山 雙陵)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백제시대 무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 6-13 등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백제 말기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쌍릉이라 부르며, 북쪽의 것은 대왕묘, 남쪽의 것은 소왕묘라고 한다.
마한(馬韓)의 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의 능이라고도 하며, 백제 무왕(武王)과 선화비(善花妃)의 능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도굴된 기사가 있고, 1917년에 학술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그 구조는 원분(圓墳)으로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 왕릉과 동일 형식에 속하는 판석제 굴식돌방으로 밝혀졌다.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당시의 돌방 안에서 비교적 완전한 나무널〔木棺〕이 출토되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6·25전쟁 중 파손되었다. 지금은 복원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발굴 당시 높이는 3.1m, 양 무덤의 너비는 약 0.5km였다. 현재는 보수되어 대왕묘의 지름은 30m, 높이는 5m, 소왕묘의 지름은 24m, 높이은 3.5m이다. 대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꼭대기에서 7.2m 아래에 있는데, 널방〔玄室〕 규모는 길이 3.80m, 너비 1.78m, 높이 2.27m이다. 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이 설치되었는데 널문〔羨門〕과 널길 입구는 판석을 세워 막았고 4면벽과 바닥·천장을 모두 돌널[板石]로 조립하였다. 바닥 중앙에는 널받침〔棺臺〕이 놓였다. 소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윗면에서 5.5m 아래에 있는데 돌방의 형식과 석재 등은 대왕묘와 같다. 널방은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1.7m로 규모가 약간 작다.
쌍릉이라는 말 자체는 봉분이 2개인 무덤을 뜻하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즉 예를 들어 황남대총도 무덤의 형식을 말할 때 쌍릉이라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는 전북 익산시의 백제 무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두 기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서의 쌍릉을 다룬다. 둘 중 큰 것을 대왕릉(또는 대왕묘, 북총), 작은 것을 소왕릉(또는 소왕묘, 남총)이라고 한다. 이 왕릉은 이미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때에 도적들에 의해 도굴을 당했으며, 또한 백제 멸망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며 원래 주인이 누군지는 잊혀지고 마한의 무강왕의 능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근대 고고학적 접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있었다. 그리고 쌍릉을 조사하여 발굴한 유물들은 광복 이후로 한국에 남았다. 2018년에 쌍릉을 재발굴하여 정확한 실측조사를 했는데, 발굴과정에서 추가로 유물을 발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