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재(조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4번째 줄: | 4번째 줄: | ||
조선 전기 무주 지역으로 이거한 유학자. | 조선 전기 무주 지역으로 이거한 유학자. | ||
− |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계광(啓光), 호는 취정(翠亭). 달성군(達城君) [[서영(고려)|서영] | + |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계광(啓光), 호는 취정(翠亭). 달성군(達城君) [[서영(고려)|서영]](徐潁)의 9세손이며, 삼남 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 귀계(龜溪) [[서침]](徐沈)의 7세손이다. 대구에서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하였다. |
서효재(徐孝載)는 성품이 순하고 말이 적으며, 효심이 극진하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門人)이다. 1565년(명종 20)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선조 23) 대구에서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의 대덕산(大德山) 아래로 이거(移居)하여 가족이 모두 무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대덕산으로 들어가 띠집을 짓고 살며 한동네 사람 모두를 살렸다고 한다. | 서효재(徐孝載)는 성품이 순하고 말이 적으며, 효심이 극진하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門人)이다. 1565년(명종 20)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선조 23) 대구에서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의 대덕산(大德山) 아래로 이거(移居)하여 가족이 모두 무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대덕산으로 들어가 띠집을 짓고 살며 한동네 사람 모두를 살렸다고 한다. |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에 있는 분양 서원(汾陽書院)[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61호]의 숭모사(崇慕祠)에 향사(享祠)되었다. 분양 서원은 달성 서씨(達成徐氏) 문중의 서당이던 풍성당(豊城堂)을 옮겨 온 것으로, 1901년(고종 38) 분양 정사(汾陽精舍)라고 하고 제사를 지내 오다 1945년 동편에 숭모사를 세웠고, 1973년 분양 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세종(世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내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유배된 충신 남은(南隱) [[서섭]](徐涉)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에 있는 분양 서원(汾陽書院)[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61호]의 숭모사(崇慕祠)에 향사(享祠)되었다. 분양 서원은 달성 서씨(達成徐氏) 문중의 서당이던 풍성당(豊城堂)을 옮겨 온 것으로, 1901년(고종 38) 분양 정사(汾陽精舍)라고 하고 제사를 지내 오다 1945년 동편에 숭모사를 세웠고, 1973년 분양 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세종(世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내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유배된 충신 남은(南隱) [[서섭]](徐涉)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
2022년 9월 10일 (토) 09:47 판
서효재(徐孝載 학자)
조선 전기 무주 지역으로 이거한 유학자.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계광(啓光), 호는 취정(翠亭). 달성군(達城君) 서영(徐潁)의 9세손이며, 삼남 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 귀계(龜溪) 서침(徐沈)의 7세손이다. 대구에서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하였다.
서효재(徐孝載)는 성품이 순하고 말이 적으며, 효심이 극진하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門人)이다. 1565년(명종 20)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선조 23) 대구에서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의 대덕산(大德山) 아래로 이거(移居)하여 가족이 모두 무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대덕산으로 들어가 띠집을 짓고 살며 한동네 사람 모두를 살렸다고 한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에 있는 분양 서원(汾陽書院)[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61호]의 숭모사(崇慕祠)에 향사(享祠)되었다. 분양 서원은 달성 서씨(達成徐氏) 문중의 서당이던 풍성당(豊城堂)을 옮겨 온 것으로, 1901년(고종 38) 분양 정사(汾陽精舍)라고 하고 제사를 지내 오다 1945년 동편에 숭모사를 세웠고, 1973년 분양 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세종(世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내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유배된 충신 남은(南隱) 서섭(徐涉)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