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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삼국사기>는 ‘상좌평의 관직이 이때부터 생겼으며 지금의 재상과 같다.(上佐平之職始於此若今之冢宰)’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상좌평은 [[여신]] 한 사람을 위해 만든 특별한 관직이다. 오늘날의 각부 장관이 6좌평(내신,내두,내법,위사,조정,병관)이라면 상좌평은 각부 장관을 총괄하는 국무 총리에 해당한다. 전지왕은 여신을 등용하면서 나랏일(군사/정사) 전체를 맡긴다. 실로 왕에 버금가는 대단한 권력자가 갑자기 출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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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는 ‘상좌평의 관직이 이때부터 생겼으며 지금의 재상과 같다.(上佐平之職始於此若今之冢宰)’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상좌평은 여신 한 사람을 위해 만든 특별한 관직이다. 오늘날의 각부 장관이 6좌평(내신,내두,내법,위사,조정,병관)이라면 상좌평은 각부 장관을 총괄하는 국무 총리에 해당한다. 전지왕은 여신을 등용하면서 나랏일(군사/정사) 전체를 맡긴다. 실로 왕에 버금가는 대단한 권력자가 갑자기 출현한다. | ||
부여백제 왕족집단의 분리 | 부여백제 왕족집단의 분리 | ||
+ | [[여신]]은 <삼국사기>가 기록한 한성백제 최초의 [[부여씨]](扶餘)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씨]] 원조는 대륙에서 서부여를 건국한 (위)구태[[우태]]이다. 구태의 후손집단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며 부여백제를 건국하고, 이후 고구려 광개토왕에 깨져 일본열도로 망명하며 야마토(大倭)로 재탄생한다. 부여기마족의 대륙→한반도→일본열도로 이어지는 대장정의 역사이다.여신은 바로 부여백제왕족 출신이다. | ||
− | + | 한반도 부여백제는 광개토왕에게 깨지면서 왕족 집단이 세 계열로 분리된다. 첫째는 [[여휘]](餘暉)집단이다. 야마토 건국의 주체세력이자 실질시조인 응신왕 계열이다. 둘째는 [[여찬]](餘贊)집단이다. 응신왕의 뒤를 쫓아 삼한백성 120현민을 이끌고 일본열도로 엑소더스(Exodus)한 궁월군이다. 대륙사서가 왜왕 찬(贊)으로 기록한 인덕왕 계열이다. 셋째는 [[여신]](餘信)집단이다. [[전지왕]] 재위초기에 한성백제에 합류하며 훗날 [[부여씨]] 왕조를 개창한 [[비유왕]](20대) 계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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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여신]]집단은 한반도 잔류세력이다. 그런데 그 출처가 불분명하다. 처음 여휘집단을 따라가 야마토 건국에 참여한 후에 다시 한반도로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여찬집단과 함께 엑소더스한 이후에 다시 한반도로 돌아온 것이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두 경우가 아니라면 [[여신]]집단은 처음부터 한반도에 잔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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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마토 인덕왕은 여신의 한성백제 합류를 특별히 축하한다. [[여신]]이 상좌평에 임명된 이듬해인 409년(전지5)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며 야명주를 보낸다. 이때 [[전지왕]]은 야마토 사신에게 특별한 예우를 한다.(五年倭國遣使送夜明珠王優禮待之) 야명주는 여신의 상좌평 보임을 축하하는 일종의 축하 선물이다. 전지왕의 특별 예우는 지극히 여신을 배려한 조치이다. | ||
− | + | [[여신]]의 등장으로 한성백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온조왕]]-[[비류]]계열의 해씨왕조가 마감하고 새로이 구태계열[[우태]]의 [[부여씨]] 왕조가 들어선다. 한때 광개토왕에게 깨져 어쩔 수 없이 일본 열도로 망명한 한반도 부여기마족이 다시금 한성백제를 숙주(宿主) 삼아 한반도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 |
− | + | 이후 [[부여씨]]왕조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혈통을 이어가며 백제만의 독특하고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다. 특히 성왕(30대)은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면서까지 부여기마족의 명맥을 놓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부여기마족의 원조 구태[[우태]]는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백제의 3번째 시조로 당당히 자리매김한다. 백제의 진정한 주류세력은 부여기마족이다. | |
− | + | 이란 인물이 나온다. [[여신]]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여 407년(전지3) 내신좌평에 임명되고 또 이듬해인 408년(전지4) 상좌평에 전격 보임되며 군국정사(軍國政事)를 위임받는다. |
2022년 9월 4일 (일) 12:12 판
여신(餘信)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을 보면 전지왕(18대) 재위초기에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을 보면 전지왕(18대) 재위초기에 여신(餘信)이란 인물이 나온다. 여신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여 407년(전지3) 내신좌평에 임명되고 또 이듬해인 408년(전지4) 상좌평에 전격 보임되며 군국정사(軍國政事)를 위임받는다.
<삼국사기>는 ‘상좌평의 관직이 이때부터 생겼으며 지금의 재상과 같다.(上佐平之職始於此若今之冢宰)’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상좌평은 여신 한 사람을 위해 만든 특별한 관직이다. 오늘날의 각부 장관이 6좌평(내신,내두,내법,위사,조정,병관)이라면 상좌평은 각부 장관을 총괄하는 국무 총리에 해당한다. 전지왕은 여신을 등용하면서 나랏일(군사/정사) 전체를 맡긴다. 실로 왕에 버금가는 대단한 권력자가 갑자기 출현한다.
부여백제 왕족집단의 분리
여신은 <삼국사기>가 기록한 한성백제 최초의 부여씨(扶餘)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씨 원조는 대륙에서 서부여를 건국한 (위)구태우태이다. 구태의 후손집단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며 부여백제를 건국하고, 이후 고구려 광개토왕에 깨져 일본열도로 망명하며 야마토(大倭)로 재탄생한다. 부여기마족의 대륙→한반도→일본열도로 이어지는 대장정의 역사이다.여신은 바로 부여백제왕족 출신이다.
한반도 부여백제는 광개토왕에게 깨지면서 왕족 집단이 세 계열로 분리된다. 첫째는 여휘(餘暉)집단이다. 야마토 건국의 주체세력이자 실질시조인 응신왕 계열이다. 둘째는 여찬(餘贊)집단이다. 응신왕의 뒤를 쫓아 삼한백성 120현민을 이끌고 일본열도로 엑소더스(Exodus)한 궁월군이다. 대륙사서가 왜왕 찬(贊)으로 기록한 인덕왕 계열이다. 셋째는 여신(餘信)집단이다. 전지왕 재위초기에 한성백제에 합류하며 훗날 부여씨 왕조를 개창한 비유왕(20대) 계열이다.
여신집단은 한반도 잔류세력
여신집단은 한반도 잔류세력이다. 그런데 그 출처가 불분명하다. 처음 여휘집단을 따라가 야마토 건국에 참여한 후에 다시 한반도로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여찬집단과 함께 엑소더스한 이후에 다시 한반도로 돌아온 것이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두 경우가 아니라면 여신집단은 처음부터 한반도에 잔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야마토 인덕왕은 여신의 한성백제 합류를 특별히 축하한다. 여신이 상좌평에 임명된 이듬해인 409년(전지5)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며 야명주를 보낸다. 이때 전지왕은 야마토 사신에게 특별한 예우를 한다.(五年倭國遣使送夜明珠王優禮待之) 야명주는 여신의 상좌평 보임을 축하하는 일종의 축하 선물이다. 전지왕의 특별 예우는 지극히 여신을 배려한 조치이다.
여신의 등장으로 한성백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온조왕-비류계열의 해씨왕조가 마감하고 새로이 구태계열우태의 부여씨 왕조가 들어선다. 한때 광개토왕에게 깨져 어쩔 수 없이 일본 열도로 망명한 한반도 부여기마족이 다시금 한성백제를 숙주(宿主) 삼아 한반도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후 부여씨왕조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혈통을 이어가며 백제만의 독특하고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다. 특히 성왕(30대)은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면서까지 부여기마족의 명맥을 놓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부여기마족의 원조 구태우태는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백제의 3번째 시조로 당당히 자리매김한다. 백제의 진정한 주류세력은 부여기마족이다.
이란 인물이 나온다. 여신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여 407년(전지3) 내신좌평에 임명되고 또 이듬해인 408년(전지4) 상좌평에 전격 보임되며 군국정사(軍國政事)를 위임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