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후행"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1595년(선조28)~1671년(현종12) 자 백순(伯順). 호 동고(東皐). 시시당(是是堂) 서량(徐亮)의 아들. 돈암(遯菴)의 6세손. 공은 일찍이 문단(...)
 
5번째 줄: 5번째 줄:
 
공은 일찍이 문단(文壇)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모두 12번이나 향시(鄕試)에 입격하기도 하였음. 또한 행의(行義)가 드러나서 향리(鄕里)의 모범이 되었다고 함.
 
공은 일찍이 문단(文壇)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모두 12번이나 향시(鄕試)에 입격하기도 하였음. 또한 행의(行義)가 드러나서 향리(鄕里)의 모범이 되었다고 함.
  
공이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러 갔을 때에, 두 동생 후득(後得)・후종(後從)과 함께 모두 초시에 입격하여 복시(覆試)를 보게 되었는데, 당시 집권하고 있던 이이첨(李爾瞻)에게 빌붙은 자들은 모두 뜻을 이루던 형편이었으나, 공은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이이첨을 한 번 만나볼 것을 권하는 자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과거장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곧장 귀향하였음. 후에 이이첨이 패사(敗事)하였고, 사주를 받아 권하던 자도 연루되어 정배(定配)되어 가게 되었는데, 그가 도리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할 지경이었음. 또한 군(郡)의 아전배들도 “행실에 돈독한 군자를 알려 하거든, 서(徐) 공의 행동을 보라.”고 할 만큼, 독실한 군자로 칭송받았다고 함.
+
공이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러 갔을 때에, 두 동생 [[서후득]](徐後得)・[[서후종]](徐後從)과 함께 모두 초시에 입격하여 복시(覆試)를 보게 되었는데, 당시 집권하고 있던 이이첨(李爾瞻)에게 빌붙은 자들은 모두 뜻을 이루던 형편이었으나, 공은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이이첨을 한 번 만나볼 것을 권하는 자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과거장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곧장 귀향하였음. 후에 이이첨이 패사(敗事)하였고, 사주를 받아 권하던 자도 연루되어 정배(定配)되어 가게 되었는데, 그가 도리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할 지경이었음. 또한 군(郡)의 아전배들도 “행실에 돈독한 군자를 알려 하거든, 서(徐) 공의 행동을 보라.”고 할 만큼, 독실한 군자로 칭송받았다고 함.
  
 
만년에는 생도(生徒)들을 가르쳤는데, 장랑(長廊)을 설치하여 이들을 늘 거처하게 하니, 원근에서 배우려는 자들이 운집하였고, 학업을 성취한 자도 많았다고 함.
 
만년에는 생도(生徒)들을 가르쳤는데, 장랑(長廊)을 설치하여 이들을 늘 거처하게 하니, 원근에서 배우려는 자들이 운집하였고, 학업을 성취한 자도 많았다고 함.

2022년 8월 24일 (수) 09:27 판

1595년(선조28)~1671년(현종12)

자 백순(伯順). 호 동고(東皐). 시시당(是是堂) 서량(徐亮)의 아들. 돈암(遯菴)의 6세손.

공은 일찍이 문단(文壇)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모두 12번이나 향시(鄕試)에 입격하기도 하였음. 또한 행의(行義)가 드러나서 향리(鄕里)의 모범이 되었다고 함.

공이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러 갔을 때에, 두 동생 서후득(徐後得)・서후종(徐後從)과 함께 모두 초시에 입격하여 복시(覆試)를 보게 되었는데, 당시 집권하고 있던 이이첨(李爾瞻)에게 빌붙은 자들은 모두 뜻을 이루던 형편이었으나, 공은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이이첨을 한 번 만나볼 것을 권하는 자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과거장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곧장 귀향하였음. 후에 이이첨이 패사(敗事)하였고, 사주를 받아 권하던 자도 연루되어 정배(定配)되어 가게 되었는데, 그가 도리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할 지경이었음. 또한 군(郡)의 아전배들도 “행실에 돈독한 군자를 알려 하거든, 서(徐) 공의 행동을 보라.”고 할 만큼, 독실한 군자로 칭송받았다고 함.

만년에는 생도(生徒)들을 가르쳤는데, 장랑(長廊)을 설치하여 이들을 늘 거처하게 하니, 원근에서 배우려는 자들이 운집하였고, 학업을 성취한 자도 많았다고 함.

특히 공은 순흥부의 복설(復設)을 청원하는 소(疏)를 조정에 올리기도 하였음.

현손(玄孫)인 창재(昌載)가 「處士東皐徐公墓誌」를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