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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현지(顯之). 호 죽서당(竹漵堂). [[서간석]](徐榦碩)의 아들. 돈암(遯菴)의 8세손. | 자 현지(顯之). 호 죽서당(竹漵堂). [[서간석]](徐榦碩)의 아들. 돈암(遯菴)의 8세손. | ||
− | 공은 1807년(순조7)의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삼례도찰방(三禮道察訪) 및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음. | + | 공은 1807년(순조7)의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삼례도찰방(三禮道察訪) 및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음. 영주영풍향토지(榮州榮豊鄕土誌)에, “청렴으로 알려지다.”라고 함. 공은 소수서원의 원임(院任)을 맡기도 하였고, 향시관(鄕試官)이 되어 유생들에게 출제하고 고과하기도 하는 등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였음. |
유고가 있음. 족질(族侄)인 재우(在愚)가 가장(家狀)을 찬함. | 유고가 있음. 족질(族侄)인 재우(在愚)가 가장(家狀)을 찬함. |
2022년 8월 24일 (수) 08:41 판
1773년(영조49)~1836년(헌종2).
자 현지(顯之). 호 죽서당(竹漵堂). 서간석(徐榦碩)의 아들. 돈암(遯菴)의 8세손.
공은 1807년(순조7)의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삼례도찰방(三禮道察訪) 및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음. 영주영풍향토지(榮州榮豊鄕土誌)에, “청렴으로 알려지다.”라고 함. 공은 소수서원의 원임(院任)을 맡기도 하였고, 향시관(鄕試官)이 되어 유생들에게 출제하고 고과하기도 하는 등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였음.
유고가 있음. 족질(族侄)인 재우(在愚)가 가장(家狀)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