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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오하여, 7세 때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을 배울 때 능히 글자마다 뜻을 이해하였다고 함. 10세 때 이웃 마을에서 과거 급제를 축하하는 잔치자리가 벌어져 온 동네가 시끄러웠으나, 공은 단정히 앉아 태연하게 독서를 하니, 공의 부친이 “너만은 어째서 가서 구경하지 않느냐?”라고 하자, 공은 “제가 이 책을 읽으면 그 경사를 이룰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분주하게 남의 영화를 부러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함. |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오하여, 7세 때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을 배울 때 능히 글자마다 뜻을 이해하였다고 함. 10세 때 이웃 마을에서 과거 급제를 축하하는 잔치자리가 벌어져 온 동네가 시끄러웠으나, 공은 단정히 앉아 태연하게 독서를 하니, 공의 부친이 “너만은 어째서 가서 구경하지 않느냐?”라고 하자, 공은 “제가 이 책을 읽으면 그 경사를 이룰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분주하게 남의 영화를 부러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함. | ||
2022년 8월 24일 (수) 01:07 판
1726년(영조2)~1781(정조5).
자 상보(尙甫). 호 오산(梧山). 서엽(徐曄)의 아들. 내자시정(內資寺正) 서연(徐兗)의 후손.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오하여, 7세 때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을 배울 때 능히 글자마다 뜻을 이해하였다고 함. 10세 때 이웃 마을에서 과거 급제를 축하하는 잔치자리가 벌어져 온 동네가 시끄러웠으나, 공은 단정히 앉아 태연하게 독서를 하니, 공의 부친이 “너만은 어째서 가서 구경하지 않느냐?”라고 하자, 공은 “제가 이 책을 읽으면 그 경사를 이룰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분주하게 남의 영화를 부러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함.
15세가 되어 ������상서(尙書)������를 읽었는데, 기삼백(朞三百)의 집전(集傳) 부분에 이르러서 윗사람이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자, 공은 방에 단정히 앉아 침식을 잊어가며 연구하여 마침내 밝게 이해하였고, ������역경(易經)������은 스승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능히 대의(大義)를 이해하였다고 함. 또한 음양(陰陽)・복서(卜筮)・병진(兵陣)의 학설도 폭넓게 공부하여 모두 그 귀결점을 이해하였음.
약관에 되어, 공령문을 공부하여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입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한 이후 37세 무렵에는 완전히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및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취하여 잠심하여 쉼 없이 연구하였음. 공은 권구연(權九淵)・홍준(洪遵)・권정운(權正運)・배시진(裴是袗) 등과 같은 고을의 명사(名士)들과 함께 서로 강마(講磨)하였고, 이상정(李象靖)과는 누차 만나고 또 많은 서신을 왕복하였음.
약관에 되어, 공령문을 공부하여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입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한 이후 37세 무렵에는 완전히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및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취하여 잠심하여 쉼 없이 연구하였음. 공은 권구연(權九淵)・홍준(洪遵)・권정운(權正運)・배시진(裴是袗) 등과 같은 고을의 명사(名士)들과 함께 서로 강마(講磨)하였고, 이상정(李象靖)과는 누차 만나고 또 많은 서신을 왕복하였음.
공은 유생들이 단계서원(丹溪書院)에서 거재(居齋)할 때에 훈장(訓長)으로 추대되어 유생들을 부지런히 가르쳐 계발시켜 주었으며, 다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강좌에 나가서 경전을 토론하니, 원근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자들이 매우 많았음.
공은 만년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주정(主靜)”이라고 명명하고, 좌우에 퇴계(退溪)의 유묵을 걸고 책상에 성현(聖賢)의 글을 놓아두고 항상 완미하였으며, 글 가운데 의미가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이해할 때까지 깊이 사색하기를 그만두지 않았음.
또한 ������대학(大學)������, ������중용(中庸)������에 더욱 힘을 써서 여러 해 동안 연구하면서, 「중용질의(中庸質疑)」를 저술하기도 하였고, ������수학계몽(數學啓蒙)������의 주석을 연구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풀어서 자질(子姪)들에게 보이기도 하였음.
또한 예서(禮書)에도 유의하여, ������가례(家禮)������의 편목을 나누고, 송대(宋代) 명현으로부터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들의 변론에 이르기까지 뜻을 다해 수집하여 내・외편을 만들었음.(곧 ������가례집해(家禮輯解)������임. 후에 여기서 관례 부분이 ������관례고정(冠禮考定)������으로 출간되었음.)
문집이 간행됨. 이상정이 「梧山處士徐公行狀」을 찬하고, 채제공이 「處士徐公墓誌銘」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