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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가 일어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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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조선시대
 
|시대=조선시대
 
|날짜=1871년  
 
|날짜=1871년  
|관련인물=[[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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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흥선대원군 이하응]]
 
|관련단체=
 
|관련단체=
 
|관련장소=강화도
 
|관련장소=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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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유물유적=[[척화비]]
 
|관련유물유적=[[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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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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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이다.
 
=='''내용'''==
 
=='''내용'''==
 
===[[신미양요]]가 일어난 배경===
 
===[[신미양요]]가 일어난 배경===
*[[제너럴 셔먼호]]는 청국 상선의 안내를 받아 1866년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이들의 동태를 탐지하고 그 행동을 예의 주시한 뒤 [[제너럴 셔먼호]] 측에 회선을 요구하였다.평안병사 [[이용강]]은 [[제너럴 셔먼호]]와의 접촉하여 이들과 대화를 시도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측은 자신들이 평양성에 있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 왔음을 밝히고 자신들이 가져온 무기들을 조선인들 앞에서 과시하였다. 27일 [[제너럴 셔먼호]]는 순영 중군 [[이현익|이현익(李玄翼)]] 일행을 나포하고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서 [[제너럴 셔먼호]]는 [[이현익]] 일행에 대한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을 요구하였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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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조선 고종 3)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조선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측에 회선을 요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자신들이 평양성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 왔음을 밝히고 자신들이 가져온 무기들을 조선인들 앞에서 과시하였다. 그리고 [[이현익|이현익(李玄翼)]] 일행을 나포하고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제너럴 셔먼호]]는 [[이현익]] 일행에 대한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을 요구하였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이러한 상황은 평양인들에게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강한 경각심과 적개감을 불러일으켰다. 평양 주민들은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제너럴 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 시위로 전개되었다. 이후 조선 측과 [[제너럴 셔먼호]]의 교전이 발생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와의 교전 과정. 포격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가 단단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아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박규수]]화공 작전을 주도하여 은밀하게 소형 선박을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시켰다.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피하는 와중에 모래톱에 좌초되어 기동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조선 군민들의 최후의 공격에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전원 사망하였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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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평양 주민들은 [[제너럴 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 시위로 전개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박규수]]화공 작전을 피하다가 모래톱에 좌초되어 기동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조선 군민들의 공격에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들은 미국 정부는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에 분노하여 군사적 조치를 취하였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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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9월과 10월 초에 프랑스가 침공했을 시 이들과 동행했던 신부 [[리델]]에 의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전말을 미국 영사 [[샌포드]]가 알게 되었다. 그 해 12월 청국 주재 미국 공사 [[버링게임]]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고 그 해 12월 15일부로 본국 정부에 정식으로 시말을 보고하였다. 동시에 청국의 총리아문에도 조선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청 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미국 영사 [[조지 시워드|시워드]]는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미국측은 [[페비거]] 함장의 보고가 맞다고 판단했지만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은 심각한 일이며 이에 대해 군사적 조치를 동원해서라도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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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9월과 10월 초에 프랑스가 침공했을 시 이들과 동행했던 신부 [[리델]]이 조선인들로부터 서양 선박이 평양에 나타났고 이것이 왕의 아버지, 즉 [[흥선대원군|대원군]]의 명령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소식은 프랑스 측에 의해 미국 영사 [[샌포드]]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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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의 발발과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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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는 [[로저스|로저스(Rodgers, J.)]]에게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이끌고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면서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그 해 12월 청국 주재 미국 공사 [[버링게임]]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고 그 해 12월 15일부로 본국 정부에 정식으로 시말을 보고하였다. 동시에 청국의 총리아문에도 조선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청 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미국 영사 [[조지 시워드|시워드]]는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미국측은 [[페비거]] 함장의 보고가 맞다고 판단했지만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은 심각한 일이며 이에 대해 군사적 조치를 동원해서라도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신미양요]]일어나다===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였다.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함대를 집결,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5월 16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미군은 6월 11일에는 [[덕진진|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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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인 6월 11일에는 [[덕진진|덕진진(德津鎭)]]을 점거하였다. [[광성보]]에는 [[어재연|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잇었으나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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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 분할이나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조선 개항을 실현시키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미국은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 분할이나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조선 개항을 실현시키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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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이후 끼친 조선사회의 영향===
 
조선인들은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자신들이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군사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져 삼군부(三軍府)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사비의 확충과 중앙군·지방군의 전력 강화가 이루어졌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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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가 일어난 배경===
 
===[[신미양요]]가 일어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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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시아 함대와 [[손돌목 포격사건]]이 일어나다. 그리고 일어난 보복상륙작전====
 
====미국 아시아 함대와 [[손돌목 포격사건]]이 일어나다. 그리고 일어난 보복상륙작전====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 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군은 6월 11일에는 [[덕진진|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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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 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군은 6월 11일에는 [[덕진진|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신미양요]]의 성격===
 
===[[신미양요]]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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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포함외교]] 실패의 원인====
 
====미국의 [[포함외교]] 실패의 원인====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해군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원정을 단행한 지상목표는 조선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미전쟁 결과 조선 개항은 무위로 끝났다. 실패 요인은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미국은 조선 당국과의 입약 교섭에서 화해적 교섭을 지양하고 시종일관 포함책략으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물리적 힘으로 조선을 굴복시켜 개항하고자 하였다. 둘째,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상호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이 철두철미하게도 미국과의 불교섭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이에 대한 불신감과 배외감정이 강한 조선은 미군을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반면 미군은 백인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을 호전적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서 양국간의 화해적 교섭은 불가능하였다. 넷째, 미국은 조선원정을 단행할 때 처음부터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에 내침하였다는 것이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군사적 제한지역이었다. 그러기에 해협 입구에는 외국배의 항행을 금지하는 이른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비가 서 있었다. 이처럼 국방 안보상 중요한 수로에 정식허가 없이 미군 함대가 들어온 것은 엄연한 주권침해이고 영토침략행위였다. 그러기에 조선 측은 이를 틈입(闖入: 느닷없이 불쑥 침입함.) 또는 내범(內犯)으로 단죄하고 있다. 다섯째, 1871년 조선은 아직도 개항 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가운데 미군 함대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854년의 일본개항 성공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1871년에도 동일한 결과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일양국의 개항 여건은 정반대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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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해군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원정을 단행한 지상목표는 조선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미전쟁 결과 조선 개항은 무위로 끝났다. 실패 요인은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미국은 조선 당국과의 입약 교섭에서 화해적 교섭을 지양하고 시종일관 포함책략으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물리적 힘으로 조선을 굴복시켜 개항하고자 하였다. 둘째,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상호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이 철두철미하게도 미국과의 불교섭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이에 대한 불신감과 배외감정이 강한 조선은 미군을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반면 미군은 백인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을 호전적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서 양국간의 화해적 교섭은 불가능하였다. 넷째, 미국은 조선원정을 단행할 때 처음부터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에 내침하였다는 것이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군사적 제한지역이었다. 그러기에 해협 입구에는 외국배의 항행을 금지하는 이른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비가 서 있었다. 이처럼 국방 안보상 중요한 수로에 정식허가 없이 미군 함대가 들어온 것은 엄연한 주권침해이고 영토침략행위였다. 그러기에 조선 측은 이를 틈입(闖入: 느닷없이 불쑥 침입함.) 또는 내범(內犯)으로 단죄하고 있다. 다섯째, 1871년 조선은 아직도 개항 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가운데 미군 함대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854년의 일본개항 성공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1871년에도 동일한 결과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일양국의 개항 여건은 정반대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미국의 [[포함외교]]가 조선과 일본에 다르게 나타난 원인====
 
====미국의 [[포함외교]]가 조선과 일본에 다르게 나타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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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은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자신들이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군사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져 삼군부(三軍府)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사비의 확충과 중앙군·지방군의 전력 강화가 이루어졌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조선인들은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자신들이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군사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져 삼군부(三軍府)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사비의 확충과 중앙군·지방군의 전력 강화가 이루어졌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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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자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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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자원1=[[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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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자원2=[[어제 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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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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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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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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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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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A040/A040.htm 어제 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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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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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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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 「1871년 미군의 강화도 침공과 전황 분석」, 『역사와 경계』, Vol 93, 2014, 3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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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 「1871년 미군의 강화도 침공과 전황 분석」, 『역사와 경계』, Vol.93, No.-, 부산경남사학회, 2014, 31-64쪽.  
**심기재, 「明治 4(1871)年, 辛未洋擾와 明治政策의 대응」, 『한국정책과학학회보』, Vol 3, 1999, 17-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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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재, 「明治 4(1871)年, 辛未洋擾와 明治政策의 대응」, 『한국정책과학학회보』, Vol.3, No.1, 한국정책과학학회, 1999, 17-26쪽.  
===유용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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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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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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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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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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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1일 (금) 20:32 기준 최신판

신미양요(辛未洋擾)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신미양요
한자표기 辛未洋擾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871년
관련인물 흥선대원군 이하응
관련장소 강화도
관련유물유적 척화비


정의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이다.

내용

신미양요가 일어난 배경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조선 고종 3)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조선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측에 회선을 요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자신들이 평양성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 왔음을 밝히고 자신들이 가져온 무기들을 조선인들 앞에서 과시하였다. 그리고 이현익(李玄翼) 일행을 나포하고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제너럴 셔먼호이현익 일행에 대한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을 요구하였다.[1]

이에 평양 주민들은 제너럴 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 시위로 전개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박규수의 화공 작전을 피하다가 모래톱에 좌초되어 기동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조선 군민들의 공격에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들은 미국 정부는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에 분노하여 군사적 조치를 취하였다.[2]

신미양요의 발발과 경과

미국 정부는 로저스(Rodgers, J.)에게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이끌고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면서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3]

다음 날인 6월 11일에는 덕진진(德津鎭)을 점거하였다. 광성보에는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잇었으나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4]

연계 자원 보러 가기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어제 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지식 관계망

  •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미양요 박규수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미양요 흥선대원군 이하응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미양요 천주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흥선대원군 이하응 쇄국양이정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미양요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천주학 천주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66년 7월-8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나다
1871년 6월 1일 미군 함대와 강화포대와 충돌이 벌어져 손돌목 포격사건이 일어나다
1871년 6월 10일 미국 함대가 초지진을 점령하다
1871년 6월 11일 미국 함대가 광성보를 점령하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632555 126.532528 미국 함대가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37.66496 126.530074 미국 함대가 광성보를 점령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논문
    • 신효승, 「1871년 미군의 강화도 침공과 전황 분석」, 『역사와 경계』, Vol.93, No.-, 부산경남사학회, 2014, 31-64쪽.
    • 심기재, 「明治 4(1871)年, 辛未洋擾와 明治政策의 대응」, 『한국정책과학학회보』, Vol.3, No.1, 한국정책과학학회, 1999, 17-26쪽.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