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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조선 후기의 화가. 생몰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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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내용==
 
==내용==
이명기는 [[조선 정조]] 때의 화가로 본관은 개성(開城), 호는 화산관(華山館), 사과(司果) [[이종수|이종수(李宗秀)]]의 아들. 복헌(複軒) [[김응환|김응환(金應煥)]]의 사위. 화원(畫員)으로 있다가 찰방(察訪)을 지냈다.<Ref>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3822&cid=43671&categoryId=43671 이명기]", 인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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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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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때의 화가로 본관은 개성(開城), 호는 화산관(華山館)이다. 사과(司果) [[이종수|이종수(李宗秀)]]의 아들이며, 복헌(複軒) [[김응환|김응환(金應煥)]]의 사위이다. 화원(畫員)으로 있다가 찰방(察訪)을 지냈다.<Ref>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83822&cid=43671&categoryId=43671 이명기]", 인명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초상]]을 잘 그려 1791년([[조선 정조|정조]] 15)에 정조어진원유관본(正祖御眞遠遊冠本) 도사(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畫師)로 활약하였고, 1796년에는 [[김홍도|김홍도(金弘道)]]와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을 합작하였다. 산수화는 화중인물과 바위의 모습, 필법 등에서 [[김홍도]]의 화풍을 짙게 반영하고 있어 독자적인 개성은 뚜렷하지 못한 편이다. 석양의 뱃놀이를 소재로 삼은 「장범선유도(張帆船遊圖)」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을 따르면서도 괴석(怪石)에 명암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양감을 표현하는 등 서양화법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나비를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작품은 없다.<ref>홍선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206 이명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대표적인 초상화로는 [[강세황 초상(단령본)]], [[유언호 초상]], [[허목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채제공 초상(시복본)]], [[채제공 초상(금관조복본)]], [[채제공 초상(흑단령포본)]] 등이 있다. 또한 [[윤증|명재 윤증]]의 초상화 제작 작업에도 참여 하였는데, 그 기록은 [[영당기적]]에 잘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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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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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을 잘 그려 1791년([[조선 정조|정조]] 15)에 정조어진원유관본(正祖御眞遠遊冠本) 도사(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畫師)로 활약하였고, 1796년에는 [[김홍도|김홍도(金弘道)]]와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을 합작하였다. 산수화는 화중인물과 바위의 모습, 필법 등에서 [[김홍도]]의 화풍을 짙게 반영하고 있어 독자적인 개성은 뚜렷하지 못한 편이다. 석양의 뱃놀이를 소재로 삼은 「장범선유도(張帆船遊圖)」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을 따르면서도 괴석(怪石)에 명암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양감을 표현하는 등 서양화법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나비를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작품은 없다.<ref>홍선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206 이명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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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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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초상화로는 [[강세황 초상(단령본)]], [[유언호 초상]], [[허목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채제공 초상(시복본)]], [[채제공 초상(금관조복본)]], [[채제공 초상(흑단령포본)]] 등이 있다. 또한 [[윤증|명재 윤증]]의 초상화 제작 작업에도 참여하였는데, 그 과정은 『[[영당기적]]』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2018년 1월 13일 (토) 22:10 기준 최신판

이명기(李命基)
Artist.png
대표명칭 이명기
한자표기 李命基
본관 개성(開城)
화산관(華山館), 오로(五露)
사수(士受)
시대 조선
대표저서 서직수초상, 장범선유도, 관폭도, 산수인물도, 송하독서도
대표직함 도화서 화원, 찰방
배우자 김응환(金應煥)의 딸
이종수(李宗秀)
자녀 이인식(李寅植)
성격 화가
유형 인물


정의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내용

가계

조선 정조 때의 화가로 본관은 개성(開城), 호는 화산관(華山館)이다. 사과(司果) 이종수(李宗秀)의 아들이며, 복헌(複軒) 김응환(金應煥)의 사위이다. 화원(畫員)으로 있다가 찰방(察訪)을 지냈다.[1]

화풍

초상을 잘 그려 1791년(정조 15)에 정조어진원유관본(正祖御眞遠遊冠本) 도사(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畫師)로 활약하였고, 1796년에는 김홍도(金弘道)와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을 합작하였다. 산수화는 화중인물과 바위의 모습, 필법 등에서 김홍도의 화풍을 짙게 반영하고 있어 독자적인 개성은 뚜렷하지 못한 편이다. 석양의 뱃놀이를 소재로 삼은 「장범선유도(張帆船遊圖)」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을 따르면서도 괴석(怪石)에 명암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양감을 표현하는 등 서양화법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나비를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작품은 없다.[2]

작품

대표적인 초상화로는 강세황 초상(단령본), 유언호 초상, 허목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채제공 초상(시복본), 채제공 초상(금관조복본), 채제공 초상(흑단령포본) 등이 있다. 또한 명재 윤증의 초상화 제작 작업에도 참여하였는데, 그 과정은 『영당기적』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종수 이명기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강세황 초상(단령본) 이명기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유언호 초상 이명기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허목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이명기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채제공 초상(시복본) 이명기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채제공 초상(금관조복본) 이명기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채제공 초상(흑단령포본) 이명기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영당기적 이명기 A는 B를 언급한다 A mentions B
이명기 김홍도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이명기 강세황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주석

  1.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이명기",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홍선표, "이명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이명기",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홍선표, "이명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더 읽을거리

  • "이명기", 여항문화,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이명기",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장인석, 「화산관 이명기의 생애와 회화세계」, 『미술사학연구』 265, 한국미술사학회, 2010, 137-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