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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1617(광해군 9)-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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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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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의 가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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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윤갱(尹鍞),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이다. 이조참판 [[윤호|윤호(尹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희손|윤희손(尹喜孫)]]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윤효전|윤효전(尹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ref>이태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718 윤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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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초명은 (), 자는 희중(希仲)이며,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이다. 이조참판 [[윤호|윤호(尹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희손|윤희손(尹喜孫)]]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윤효전|윤효전(尹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ref>이태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718 윤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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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과 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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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은 1635년(인조 13) 19세 때에 이미 10년 연장자로 당대의 석학이던 [[송시열|송시열(宋時烈)]]과 대등한 토론을 벌일 정도로 그 수준이 매우 높았다. [[권시|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권준(權儁)]] 그리고 [[이유]]·[[장충함|장충함(張沖涵)]]·[[이해|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 교분이 특별했으며, 1659년(효종 10) 43세 무렵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서인]] 측 인사들과도 친교가 잦았다. 공주 유천에서 지내던 20대 때부터 [[송시열]]·[[송준길|송준길(宋浚吉)]]·[[이유태|이유태(李惟泰)]]·[[유계(兪啓]])·[[윤문거|윤문거(尹文擧)]]·[[윤선거|윤선거(尹宣擧)]] 등 서인 계열의 명유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민정중(閔鼎重)·유중(維重) 형제는 특히 윤휴가 28세 이후 정착한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ref>이태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718 윤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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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고 짧았던 관직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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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에 벼슬에 나갈 뜻으로 [[만언소|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바로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신하로서의 부끄러움을 자책해 치욕을 씻을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다시 벼슬에 나갈 뜻을 가진 것은 38년 뒤인 1674년(현종 15) 7월로, 중국에서 [[오삼계|오삼계(吳三桂)]]의 [[삼번의 난|반청(反淸)]] 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난 뒤였다. 이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고 [[대의소|대의소(大義疏)]]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바로 [[조선 현종|현종]]이 죽자 [[조선 숙종|숙종]]이 즉위한 뒤인 이듬해 정월에 유일(遺逸)로서 정4품 벼슬인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의 직을 받았다. 이후 5개월 만에 대사헌에 오르고, 이어서 판서직을 몇 차례 거쳐 1679년(숙종 5) 9월 우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경신환국]]의 정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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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신념,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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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으로 [[서인]] 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기해예송]] 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했으며,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 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남인]]으로서 [[허적|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해 [[허목|허목(許穆)]]과 함께 [[청남|청남(淸南)]]을 이루었다. 재직 중의 업적으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고, 무과인 만과(萬科)를 설행하는 한편, 병거(兵車: 戰車)와 화차(火車)의 개발을 고안해 보급하고자 한 것 등은 모두 평생의 신념이던 북벌을 실현시키려는 뜻에서였다. 그 중에 군권(軍權)의 의 통합을 위해 도체찰사부 설치에 동조하여 [[서인]] 및 종척인 [[김석주|김석주(金錫胄)]] 등의 반발을 샀다. 이는 [[경신환국]]이 일어나게 된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ref>이태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718 윤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윤휴]]의 생애 및 활동===
 
====[[윤휴]]의 학업과 인맥====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은 1635년(인조 13) 19세 때에 이미 10년 연장자로 당대의 석학이던 [[송시열|송시열(宋時烈)]]과 대등한 토론을 벌일 정도로 그 수준이 매우 높았다. [[권시|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권준(權儁)]] 그리고 [[이유]]·[[장충함|장충함(張沖涵)]]·[[이해|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 교분이 특별했으며, [[서인]]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 10) 43세 무렵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시절부터 [[송시열]]·[[송준길|송준길(宋浚吉)]]·[[이유태|이유태(李惟泰)]]·[[유계(兪啓]])·[[윤문거|윤문거(尹文擧)]]·[[윤선거|윤선거(尹宣擧)]] 등 서인 계열의 명유들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민정중(閔鼎重)·유중(維重) 형제는 특히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ref>이태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718 윤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윤휴]]의 관직활동====
 
1636년에 벼슬에 나갈 뜻으로 [[만언소|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바로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신하로서의 부끄러움을 자책해 치욕을 씻을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다시 벼슬에 나갈 뜻을 가진 것은 38년 뒤인 1674년(현종 15) 7월으로, 중국에서 [[오삼계|오삼계(吳三桂)]]의 [[삼번의 난|반청(反淸)]] 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이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고 해 [[대의소|대의소(大義疏)]]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마침 [[조선 현종|현종]]이 죽자 [[조선 숙종|숙종]]이 즉위한 뒤인 이듬해 정월에 유일(遺逸)로서 정4품 벼슬인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의 직을 받았다. 이후 5개월 만에 대사헌에 오르고, 이어서 판서직을 몇 차례 거쳐 1679년(숙종 5) 9월 우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경신환국]]의 정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으로 [[서인]] 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기해예송]] 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했으며,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남인]]으로서 [[허적|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해 [[허목|허목(許穆)]]과 함께 [[청남|청남(淸南)]]을 이루었다. 재직 중의 업적으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고, 무과인 만과(萬科)를 설행하는 한편, 병거(兵車: 戰車)와 화차(火車)의 개발을 고안해 보급하고자 한 것 등은 모두 평생의 신념이던 북벌을 실현시키려는 뜻에서였다. 그 중에 군권(軍權)의 통합을 기한 도체찰사부의 설치는 [[서인]] 및 종척인 [[김석주|김석주(金錫胄)]] 등의 반발을 사서 [[경신환국]]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ref>이태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718 윤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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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E050/E050.htm 윤증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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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3일 (토) 21:24 기준 최신판

윤휴(尹鑴)
문맥 인물 윤휴 01 윤휴초상.jpg
대표명칭 윤휴
한자표기 尹鑴
생몰년 1617년-1680년
본관 남원(南原)
백호(白湖)·하헌(夏軒)
희중(希仲)
출생지 경주부 관사
시대 조선시대
국적 조선
대표저서 독서기
대표직함 우찬성
윤효전(尹孝全)
윤효전 처 경주 김씨
성격 문신
유형 인물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내용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초명은 갱(鍞), 자는 희중(希仲)이며,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이다. 이조참판 윤호(尹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희손(尹喜孫)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윤효전(尹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1]

학업과 인맥

두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은 1635년(인조 13) 19세 때에 이미 10년 연장자로 당대의 석학이던 송시열(宋時烈)과 대등한 토론을 벌일 정도로 그 수준이 매우 높았다. 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權儁) 그리고 이유·장충함(張沖涵)·이해(李澥)남인계 인사들과 교분이 특별했으며, 1659년(효종 10) 43세 무렵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서인 측 인사들과도 친교가 잦았다. 공주 유천에서 지내던 20대 때부터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啓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 등 서인 계열의 명유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민정중(閔鼎重)·유중(維重) 형제는 특히 윤휴가 28세 이후 정착한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2]

늦고 짧았던 관직활동

1636년에 벼슬에 나갈 뜻으로 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바로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신하로서의 부끄러움을 자책해 치욕을 씻을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다시 벼슬에 나갈 뜻을 가진 것은 38년 뒤인 1674년(현종 15) 7월로,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반청(反淸) 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난 뒤였다. 이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고 대의소(大義疏)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바로 현종이 죽자 숙종이 즉위한 뒤인 이듬해 정월에 유일(遺逸)로서 정4품 벼슬인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의 직을 받았다. 이후 5개월 만에 대사헌에 오르고, 이어서 판서직을 몇 차례 거쳐 1679년(숙종 5) 9월 우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경신환국의 정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평생의 신념, 북벌

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으로 서인 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기해예송 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했으며,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 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남인으로서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해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淸南)을 이루었다. 재직 중의 업적으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고, 무과인 만과(萬科)를 설행하는 한편, 병거(兵車: 戰車)와 화차(火車)의 개발을 고안해 보급하고자 한 것 등은 모두 평생의 신념이던 북벌을 실현시키려는 뜻에서였다. 그 중에 군권(軍權)의 의 통합을 위해 도체찰사부 설치에 동조하여 서인 및 종척인 김석주(金錫胄) 등의 반발을 샀다. 이는 경신환국이 일어나게 된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윤효전 윤휴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윤효전 처 경주 김씨 윤휴 A는 B의 어머니이다 A ekc:hasSon B
윤영 윤휴 A는 B와 형제이다 A ekc:hasBrother B
송시열 윤휴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권시 윤휴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권준 윤휴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서인 송시열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남인 청남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남인 탁남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청남 허목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청남 윤휴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탁남 허적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만언소 윤휴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대의소 윤휴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윤휴 병자호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오삼계 삼번의 난 A는 B를 주도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삼번의 난 대의소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기해예송 윤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인예송 윤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독서기 윤휴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경신환국 윤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명성대비전유 윤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고산유고 윤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36년 윤휴만언소를 올려 관직에 오르려고 하였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포기하였다
1659년 윤휴기해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1674년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발생하자 윤휴대의소를 지어 현종에게 바쳤다
1674년 갑인예송이 일어나자 윤휴서인측 주장을 반박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이 일어나 윤휴는 사사(賜死) 되었다

갤러리

주석

  1. 이태진, "윤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태진, "윤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태진, "윤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정호훈, 「윤휴(尹鑴)의 《대학》 해석과 그 정치적 성격」, 『다산과학대』 7,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실, 2014, 331-376쪽.
    • 丁洛贊, 「白湖 尹鑴 敎育方法論의 現代 敎育的 意味」, 『동아인문학』 30, 동아인문학회, 2015, 345-389쪽.
  • 웹자원
    • 이태진, "윤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