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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계몽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화가이다. |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계몽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화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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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해주, 자는 중명(仲銘), 아호는 위창(葦滄), 천도교 도호는 한암(閒菴)이다. 서울 출생으로 조선 말기 중국어 역관이며 서화가·수집가였던 경석(慶錫)의 장남이다. | 본관은 해주, 자는 중명(仲銘), 아호는 위창(葦滄), 천도교 도호는 한암(閒菴)이다. 서울 출생으로 조선 말기 중국어 역관이며 서화가·수집가였던 경석(慶錫)의 장남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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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는 개화파 정치인이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3.1운동|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화와 고미술품 감정 등의 활동도 하였다. 한국의 역대 왕조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저자이다. 1918년 설립된 조선인 미술가, 서예가, 조각가단체인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 조선 말기에는 개화파 정치인이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3.1운동|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화와 고미술품 감정 등의 활동도 하였다. 한국의 역대 왕조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저자이다. 1918년 설립된 조선인 미술가, 서예가, 조각가단체인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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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였던 부친 [[오경석]]의 영향으로 조선 말기에는 [[개화운동]]에 동참했고, [[을미사변]]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했으나 190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귀국 후 만세보, 대한민보의 대표이사로 언론 활동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과 천도교 사역 활동에 종사하였다. 1918년 말부터는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 1919년 3월의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 개화파였던 부친 [[오경석]]의 영향으로 조선 말기에는 [[개화운동]]에 동참했고, [[을미사변]]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했으나 190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귀국 후 만세보, 대한민보의 대표이사로 언론 활동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과 천도교 사역 활동에 종사하였다. 1918년 말부터는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 1919년 3월의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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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술활동== | + | 그는 서예가이면서 예술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독립촉성중앙회, 민주의원 등에 참여하였다. 서예가로도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위창체, 오세창체라 부른다. <ref>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84%B8%EC%B0%BD 오세창]",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 Wikimedia Foundation, Inc.</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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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과 함께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편술하였다. 이 책은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으로 삼국시대부터 근대를 망라하였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를 편찬하였다. 그가 수집한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畫彙)』 등은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부친과 함께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편술하였다. 이 책은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으로 삼국시대부터 근대를 망라하였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를 편찬하였다. 그가 수집한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畫彙)』 등은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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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로서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즐겨 썼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瓦當), 고전(古錢), 갑골문형태의 구성적인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또한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篆刻)에 있어서도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다.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 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의 두전(頭篆:빗몸의 머리에 돌려가며 쓴 전자)을 비롯한 기념비 글씨도 전국 곳곳에 많이 남겼다. | 서예가로서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즐겨 썼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瓦當), 고전(古錢), 갑골문형태의 구성적인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또한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篆刻)에 있어서도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다.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 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의 두전(頭篆:빗몸의 머리에 돌려가며 쓴 전자)을 비롯한 기념비 글씨도 전국 곳곳에 많이 남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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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교,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72 오세창]",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정숭교,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72 오세창]",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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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3일 (토) 20:46 기준 최신판
오세창(吳世昌) | |
대표명칭 | 오세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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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吳世昌 |
생몰년 | 1864년-1953년 |
본관 | 해주 |
자 | 중명(仲銘) |
시대 | 대한제국/일제강점기 |
국적 | 대한민국 |
대표저서 | 근역서화징 |
대표직함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
부 | 오경석 |
자녀 | 오일육 |
성격 | 독립운동가 |
유형 | 인물 |
목차
정의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계몽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화가이다.
내용
가계
본관은 해주, 자는 중명(仲銘), 아호는 위창(葦滄), 천도교 도호는 한암(閒菴)이다. 서울 출생으로 조선 말기 중국어 역관이며 서화가·수집가였던 경석(慶錫)의 장남이다.
생애
조선 말기에는 개화파 정치인이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화와 고미술품 감정 등의 활동도 하였다. 한국의 역대 왕조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저자이다. 1918년 설립된 조선인 미술가, 서예가, 조각가단체인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개화파였던 부친 오경석의 영향으로 조선 말기에는 개화운동에 동참했고, 을미사변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했으나 190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귀국 후 만세보, 대한민보의 대표이사로 언론 활동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과 천도교 사역 활동에 종사하였다. 1918년 말부터는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 1919년 3월의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서예가이면서 예술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독립촉성중앙회, 민주의원 등에 참여하였다. 서예가로도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위창체, 오세창체라 부른다. [1]
저술활동
부친과 함께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편술하였다. 이 책은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으로 삼국시대부터 근대를 망라하였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를 편찬하였다. 그가 수집한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畫彙)』 등은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서예가로서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즐겨 썼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瓦當), 고전(古錢), 갑골문형태의 구성적인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또한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篆刻)에 있어서도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다.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 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의 두전(頭篆:빗몸의 머리에 돌려가며 쓴 전자)을 비롯한 기념비 글씨도 전국 곳곳에 많이 남겼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오세창 | 오경석 | A는 B의 아들이다 | A ekc:hasFather B |
오세창 | 3.1운동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서화협회 | 오세창 | A는 B에 의해 창시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근역서화징 | 오세창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민족대표 33인 | 오세창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민족대표 33인 | 손병희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최대섭-민족대표의 독립선언 | 최대섭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최대섭-민족대표의 독립선언 | 민족대표 33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최대섭-민족대표의 독립선언 | 3.1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오세창 | 손병희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19년 | 오세창은 3.1운동에 참여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예진, 「《한동아집첩(漢동雅集帖)》과 오세창의 시회활동(詩會活動) 연구」, 『동양학』 4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10, 105-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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