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초상화관 개관

"영주 숙수사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유물유적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 영주 숙수사지 |한자표기= 榮州 宿水寺址 |영문명칭= |이칭= |유형= |시대= 통일신라 |지정번...)
 
잔글 (관계정보)
 
(사용자 4명의 중간 판 7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2번째 줄: 12번째 줄:
 
|소장처=  
 
|소장처=  
 
|소재지=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8
 
|소재지=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8
|경도=36.924097,
+
|경도=128.579312
|위도=128.579312
+
|위도=36.924097
 
|수량=  
 
|수량=  
 
|관련인물= [[안향]], [[주세붕]]
 
|관련인물= [[안향]], [[주세붕]]
23번째 줄: 23번째 줄:
  
 
==정의==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내용==
 
==내용==
숙수사가 언제 법통이 끊어졌는지 알길은 없으나 고려 후기의 학자인 [[안향|안향(安珦)]]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 숙수사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더구나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하여 이것이 조선 건국의 정신적인 이념이 되었으므로, 중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주세붕(周世鵬)]]1543년([[조선 중종|중종]] 38) [[안향]]의 고향이며, 또 [[안향]]이 공부했던 숙수사의 옛터에 사우(祠宇)와 강당을 세우고 유생(儒生)들을 공부하도록 하였다.<ref>조유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1811 숙수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숙수사가 언제 법통이 끊어졌는지 알 길은 없으나 기록에는 고려 후기의 학자인 [[안향|안향(安珦)]]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 숙수사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더구나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도입한 주자학은 조선 건국의 정신적인 이념이 되었으므로, 중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주세붕(周世鵬)]]1543년([[조선 중종|중종]] 38) [[안향]]의 고향이며, 또 [[안향]]이 공부했던 숙수사의 옛터에 사우(祠宇)와 강당을 세우고 유생(儒生)들을 공부하도록 하였다.<ref>조유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1811 숙수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것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되었다. 이로 보아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어 고려시대까지 존속되었으며, 조선시대의 어느 시기에 법통이 끊기고 터만 남아오다 1543년에 이르러 이 절터에 서원을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1953년 현재의 [[영주 소수서원|소수서원]] 뒷편에 있는 소수중학교 운동장 공사과정에서 청동불상 25구가 출토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밝혀졌다. 또 서원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석조물이 남아 있어 사찰의 규모와 존폐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숙수사 경내에 있었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보물 제5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ref>조유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1811 숙수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것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되었다. 이로 보아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어 고려시대까지 존속되어오다 조선시대의 어느 시기에 법통이 끊기고 터만 남아오다 1543년에 이 절터에 서원을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1953년 현재의 [[영주 소수서원|소수서원]] 후편으로 소수중학교 운동장을 마련하다 청동불상 25구가 출토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밝혀졌다. 또 서원경내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석조물이 남아 있어 사찰의 규모와 존폐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사찰경내에 있었던 숙수사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보물 제5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ref>조유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1811 숙수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지식 관계망==
 +
* '''안향과 주세붕 지식관계망'''
 +
<html>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
<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E010/E010.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관계정보===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center;  width:100%;"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center;  width:100%;"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영주 숙수사지]] || [[영주 소수서원]] || A는 B와 관련이있다|| A edm:isRelatedTo B
+
| [[영주 숙수사지]] || [[영주 소수서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
 
|-
| [[영주 숙수사지]] || [[안향]] || A는 B와 관련이있다 || A edm:isRelatedTo B
+
| [[영주 숙수사지]] || [[안향]]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 [[영주 숙수사지]] || [[주세붕]] || A는 B와 관련이있다 || A edm:isRelatedTo B
+
| [[영주 숙수사지]] || [[주세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
 
|}
51번째 줄: 56번째 줄:
  
 
{{틀:역사인물초상화 Top icon}}
 
{{틀:역사인물초상화 Top icon}}
 +
 
[[분류:역사인물초상화]]
 
[[분류:역사인물초상화]]
 +
[[분류:역사인물초상화 문맥]]
 +
[[분류:역사인물초상화 문맥 문화유산]]
 
[[분류:문화유산]]
 
[[분류:문화유산]]

2018년 1월 13일 (토) 20:27 기준 최신판

영주 숙수사지
(榮州 宿水寺址)
대표명칭 영주 숙수사지
한자표기 榮州 宿水寺址
시대 통일신라
관련인물 안향, 주세붕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내용

숙수사가 언제 법통이 끊어졌는지 알 길은 없으나 기록에는 고려 후기의 학자인 안향(安珦)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 숙수사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더구나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도입한 주자학은 조선 건국의 정신적인 이념이 되었으므로, 중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은 1543년(중종 38) 안향의 고향이며, 또 안향이 공부했던 숙수사의 옛터에 사우(祠宇)와 강당을 세우고 유생(儒生)들을 공부하도록 하였다.[1] 이것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되었다. 이로 보아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어 고려시대까지 존속되었으며, 조선시대의 어느 시기에 법통이 끊기고 터만 남아오다 1543년에 이르러 이 절터에 서원을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1953년 현재의 소수서원 뒷편에 있는 소수중학교 운동장 공사과정에서 청동불상 25구가 출토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밝혀졌다. 또 서원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석조물이 남아 있어 사찰의 규모와 존폐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숙수사 경내에 있었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보물 제5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2]

지식 관계망

  • 안향과 주세붕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주 숙수사지 영주 소수서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영주 숙수사지 안향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영주 숙수사지 주세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조유전,"숙수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조유전,"숙수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조유전,"숙수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