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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득경|심득경(沈得經, 1673-1710)]]은 1673년(현종14)에 태어났다. 청송(靑松)이 본관이며, 자는 사상(士常)이다. 그의 아버지인 [[심주|심주(沈柱)]]는 성균생원을 지냈다. 그는 원래 판중추부사, 판의금부사, 도총관 등을 역임한 생부인 [[심단|심단(沈檀)]]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큰아버지인 [[심주]]에게 자식이 없어 양자로 가게 되었다.<ref>문동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994&cid=58840&categoryId=58851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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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심단]]은 해남 백련동에서 출생하여 [[윤선도]]에게 학문을 익혔고 윤선도의 큰 딸과 혼인하여 심득경을 낳았다. 윤선도의 외손인 윤두서(1668~1715)와 심단의 둘째 아들인 심득경은 내종숙질 사이로 어려서부터 어울려 지냈던 사이였다. <ref>문동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994&cid=58840&categoryId=58851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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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득경]]은 [[윤두서]]보다 다섯살 아래였지만 21세가 되던 해인 1693년(숙종19년)에 [[윤두서]]와 함께 식년시(式年試)에 응하였다. 당시 과거시험 결과를 기록한 '계유식년 사마방목(癸酉式年司馬榜目)' 에는 과거에 응시한 100명 가운데 [[심득경]]이 3등(三等)에 합격하여, 30위를 차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는 공재 [[윤두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처지였던 두 사람은 서로 벗하면서 늘 시문을 읊는 초야의 짝이 되었다. 이후 [[심득경]]은 1710년 8월 21일 38세에 숨을 거두었다.<ref>문동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994&cid=58840&categoryId=58851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html>.</ref> | [[심득경]]은 [[윤두서]]보다 다섯살 아래였지만 21세가 되던 해인 1693년(숙종19년)에 [[윤두서]]와 함께 식년시(式年試)에 응하였다. 당시 과거시험 결과를 기록한 '계유식년 사마방목(癸酉式年司馬榜目)' 에는 과거에 응시한 100명 가운데 [[심득경]]이 3등(三等)에 합격하여, 30위를 차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는 공재 [[윤두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처지였던 두 사람은 서로 벗하면서 늘 시문을 읊는 초야의 짝이 되었다. 이후 [[심득경]]은 1710년 8월 21일 38세에 숨을 거두었다.<ref>문동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994&cid=58840&categoryId=58851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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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득경과 친한 벗인 [[이서(李潊, 1662-?)]]는 [[윤두서]]가 그림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어려운 [[심득경]]의 기질과 품성을 보완이라도 하듯 또 다른 찬시로 덧붙였다. 또 [[윤두서]]의 둘째형인 [[윤흥서]]가 1717년 [[심득경]]을 위해 쓴 묘지에서는 [[심득경]]이 향기로움과 깨끗함을 지닌 조선시대의 선비였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ref>문동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994&cid=58840&categoryId=58851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html>.</ref> | 심득경과 친한 벗인 [[이서(李潊, 1662-?)]]는 [[윤두서]]가 그림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어려운 [[심득경]]의 기질과 품성을 보완이라도 하듯 또 다른 찬시로 덧붙였다. 또 [[윤두서]]의 둘째형인 [[윤흥서]]가 1717년 [[심득경]]을 위해 쓴 묘지에서는 [[심득경]]이 향기로움과 깨끗함을 지닌 조선시대의 선비였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ref>문동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994&cid=58840&categoryId=58851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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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 ===더 읽을 거리=== | ||
− | * |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46866&cid=40942&categoryId=33383 심득경 초상]",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769 심득경초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4880000,24&flag=Y 심득경 초상]",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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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초상화]] | [[분류:역사인물초상화]] | ||
+ | [[분류:역사인물초상화 문맥]] | ||
+ | [[분류:역사인물초상화 문맥 인물]] | ||
[[분류:인물]] | [[분류:인물]] |
2018년 1월 12일 (금) 17:07 기준 최신판
심득경(沈得經) | |
대표명칭 | 심득경 |
---|---|
한자표기 | 沈得經 |
생몰년 | 1673-1710 |
본관 | 청송(靑松) |
자 | 사상(士常) |
시대 | 조선 |
부 | 심주(沈柱) |
모 | 윤선도(尹善道)의 딸 |
유형 | 인물 |
목차
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내용
가계
심득경(沈得經, 1673-1710)은 1673년(현종14)에 태어났다. 청송(靑松)이 본관이며, 자는 사상(士常)이다. 그의 아버지인 심주(沈柱)는 성균생원을 지냈다. 그는 원래 판중추부사, 판의금부사, 도총관 등을 역임한 생부인 심단(沈檀)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큰아버지인 심주에게 자식이 없어 양자로 가게 되었다.[1]
생애
심단은 해남 백련동에서 출생하여 윤선도에게 학문을 익혔고 윤선도의 큰 딸과 혼인하여 심득경을 낳았다. 윤선도의 외손인 윤두서(1668~1715)와 심단의 둘째 아들인 심득경은 내종숙질 사이로 어려서부터 어울려 지냈던 사이였다. [2]
심득경은 윤두서보다 다섯살 아래였지만 21세가 되던 해인 1693년(숙종19년)에 윤두서와 함께 식년시(式年試)에 응하였다. 당시 과거시험 결과를 기록한 '계유식년 사마방목(癸酉式年司馬榜目)' 에는 과거에 응시한 100명 가운데 심득경이 3등(三等)에 합격하여, 30위를 차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는 공재 윤두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처지였던 두 사람은 서로 벗하면서 늘 시문을 읊는 초야의 짝이 되었다. 이후 심득경은 1710년 8월 21일 38세에 숨을 거두었다.[3]
심득경 초상
심득경이 죽고 난 후 윤두서는 4개월 동안 그의 초상을 그려 11월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 그림을 심득경 집으로 보냈는데, 당시의 상황은 남태응(南泰膺)이 쓴 「청죽화사(聽竹畵史)」 에서 생생히 전한다. 그에 의하면 “초상화가 터럭하나 틀리지 않아 벽에 걸었더니 온 집안이 놀라서 울었고, 마치 손숙오(孫叔敖)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연민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는 의롭고 영민한 초나라의 재상에 비유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4]
심득경 추모 글
심득경과 친한 벗인 이서(李潊, 1662-?)는 윤두서가 그림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어려운 심득경의 기질과 품성을 보완이라도 하듯 또 다른 찬시로 덧붙였다. 또 윤두서의 둘째형인 윤흥서가 1717년 심득경을 위해 쓴 묘지에서는 심득경이 향기로움과 깨끗함을 지닌 조선시대의 선비였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5]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심득경 초상 | 초상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심득경 초상 | 심득경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심득경 초상 | 국립광주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심득경 초상 | 윤두서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심득경 | 윤두서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심득경 | 이서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윤선도 | 심득경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심주 | 심득경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주석
- ↑ 문동수,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문동수,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문동수,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문동수,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문동수,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문동수,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