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무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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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1일 (목) 23:35 기준 최신판
번무사 (辨誣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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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번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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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辨誣使 |
유형 | 사신(使臣) |
정의
조선시대 명·청나라에서 조선을 곡해(曲解)한 일이 생겼을 때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해 파견한 사신이다.[1]
내용
‘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라고도 한다. 왕실이나 국가의 중요한 사실이 중국조정에 잘못 전해졌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어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이를 해명하고 그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왕실의 종계(宗系)나 누명은 특히 국가의 체면에 관계된 일이어서 변무사가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했던 것은 태조의 종계변무(宗系辨誣)였는데 이는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기 위한 일이었다.[2]
조선 초기부터 여러 차례 변무사가 파견되었으나 진전이 없다가 1584년(선조 17) 황정욱(黃廷彧) 일행에 의하여 마침내 시정되었다.[3] 이후 1598년 9월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丁應泰)와 지휘관 양호(楊鎬) 사이에 소위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나서 명나라에 변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4] 1676년(숙종 2)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관한 모욕적인 기록이 『명십육조기(明十六朝紀)』에 모욕적으로 기록되어 있던 인조반정(仁祖反正) 기록을 해명하기 위하여 변무사가 파견되기도 하였다.[5]
지식관계망
- 이항복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황정욱 | 변무사 | A는 B로 파견되었다 | A ekc:founder B |
변무사 | 인조반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변무사 | 정응태 무고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주석
- ↑ "변무사",
『두산백과』online . - ↑ 이영춘, "변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춘, "변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병주, "임진왜란 기록물 ‘징비록’ 남긴 류성룡 이순신·권율 천거한 왜란극복 최고 공신",
『매경이코노미』online , 작성일: 2017년 09월 18일. - ↑ 이영춘, "변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변무사",
『두산백과』online .< - 이영춘, "변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신병주, "임진왜란 기록물 ‘징비록’ 남긴 류성룡 이순신·권율 천거한 왜란극복 최고 공신",
『매경이코노미』online , 작성일: 2017년 09월 18일.
- "변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