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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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에서 [[강감찬|강감찬(姜邯贊)]]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ref>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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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이다.
  
 
=='''내용'''==
 
=='''내용'''==
===설화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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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 필적 서계유묵]]』은 실학자 [[박세당|서계 박세당(朴世堂)]]이 문인 [[이정신|이정신(李正臣)]]에게 써준 시문과 간찰을 모은 서첩<ref>유지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0904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이다. 이 중 하첩에는 [[박태보|박태보(1654~1689)]] 명의로 보낸 간찰 6점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 5점은 겉봉의 수신처가 ‘李進士’ 또는 ‘伯翼兄’이라 쓰여 있어 백익(伯翼)인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임을 알 수 있다. 부친 [[박세당]]의 영정을 그리는 일과 관련한 내용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간찰로서 회화사적으로 주목을 받는 자료이다.<ref>유지복, [http://jsg.aks.ac.kr/cmm/fms/FileDown.do?fileSn=0&atchFileId=OLD_000000000001443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12쪽.</ref>  
'모기없는 구시장터 설화'는 [[강감찬]] 장군이 [[강민첨|강민첨(姜民瞻)]] 장군과 함께 하동을 지날 때 읍내 구시장(舊市場)터에 머물고서 잠을 자는데 모기가 너무 많아 모기에게 호통을 친 이후로 모기가 없어졌다는 [[이인담|이인담(異人談)]]이다.<ref>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대장군 [[강감찬]]이 진주가 고향인 [[강민첨]]과 함께 어느 날 하동을 지나게 되었다.<ref>하동군 옥종면은 행정구역상 원래 진주 지역이었다.</ref> 날이 어두워 오늘날의 읍내 구시장터에 머물고 잠을 자는데 밤에 모기가 너무 많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강감찬 장군은 벌떡 일어나 군사를 호령하듯, "요망한 모기들이 무엄하게 덤벼 잠을 잘 수 없구나. 썩 없어져라."고 기백 찬 호통을 치자 모기가 모두 도망을 가고 없어져 잠을 편히 잤다고 한다. 그때부터 구시장에는 모기가 없어졌다고 한다.<ref>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채록 및 수집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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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의 내용===
1986년 [[하동문화원]]에서 간행한 『마을의 유래 및 사적전설』에 실려 있다. 또한 2004년 하동군 각지에서 채록·수집한 설화 자료를 중심으로 [[하동향토사연구위원회]]가 집필하여 2005년 [[하동문화원]]에서 발행한 『하동의 구전설화』의 59~60쪽에 수록되어 있다. 「모기 없는 구시장터」는 하동읍 조사위원 [[박용규가]] 현지에서 채록한 것이다.<ref>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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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점의 편지에는 영정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과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영정을 그릴 화사(畵師)를 당시 명성이 있던 평양화가 [[조세걸|조세걸(曺世傑, 1635~?)]]로 결정하려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수신인 이진사는 박태보에게 [[조세걸]]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영정제작에 관한 제반 사항을 주선한 인물로 보이는데, 그 인명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ref>유지복, [http://jsg.aks.ac.kr/cmm/fms/FileDown.do?fileSn=0&atchFileId=OLD_000000000001443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4쪽.</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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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걸]]이 [[박세당]]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등 두 사람은 20여 년에 걸쳐 인연이 깊었다. 해당 간찰에는 [[조세걸]]이 [[박세당]]의 야복본과 [[학창의]]를 입은 전신상 두 점을 그렸다고 쓰여 있는데, 반신상으로 그려진 [[박세당 초상]] 또한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ref>윤진영, 「평양화사 조세걸의 도사활동과 화풍」,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 사회평론, 2006, 248-257쪽.</ref>
  
===모티프 분석===
+
===간찰의 서체===
「모기 없는 구시장터」의 주요 모티프는 '모기에게 호통을 쳐서 모기를 사라지게 한 [[강감찬]] 장군의 높은 기백'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일화는 전국에 전한다. 그 지역을 지나면서 있었던 사건으로 하여금 위인의 기개와 업적을 드러낸다. 이렇게 위인들의 특이한 행적을 보여 주는 것을 인물전설([[이인담]]·[[고승담]])이라고 한다. 모기를 쫓으며 군사들에게 호령하듯 하니 모기들이 놀라 모두 없어졌다고 하는 데서 [[강감찬]] 장군의 기개를 알 수 있으며, 모기가 없어진 구시장은 좀 더 살기 좋아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ref>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이진사에게 보낸 5점의 간찰 중 2점은 유려한 행초로 씌어 있다. 아버지 [[박세당]]의 행초 필적에 비해 둥글게 돌아가는 원필세(圓筆勢)의 흐름이 더욱 돋보인다. 이를 외할아버지 [[윤선거]]와 사촌 [[박태상]]의 장인인 서화가 [[조속]]의 글씨와 비교하면 [[윤선거]]의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필치와 [[조속]]의 깔끔하고 단아한 필치를 섞어놓은 듯한 운필을 보여 외가 쪽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서풍이 [[박태보]]의 글씨에 절충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ref>유지복, [http://jsg.aks.ac.kr/cmm/fms/FileDown.do?fileSn=0&atchFileId=OLD_000000000001443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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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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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
#* 윤진영, 「평양화사 조세걸의 도사활동과 화풍」,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 사회평론, 2006.
 
# 웹 자원
 
# 웹 자원
#* 한양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3401002 모기 없는 구시장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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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0904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더 읽을거리===
 
===더 읽을거리===
# 장덕순·조동일·서대석·조희웅 공저,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18809 구비문학개설]』, 일조각, 2004.
+
# 단행본
 +
#* 김학수, 「《서계유묵》의 내용과 가치」, 『朴世堂의 西溪遺墨』,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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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1일 (목) 22:58 기준 최신판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5쪽.
대표명칭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
유형 간찰
저자 박태보
저술시기 1688년
시대 조선
수량 5점
표기문자 행초


정의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이다.

내용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은 실학자 서계 박세당(朴世堂)이 문인 이정신(李正臣)에게 써준 시문과 간찰을 모은 서첩[1]이다. 이 중 하첩에는 박태보(1654~1689) 명의로 보낸 간찰 6점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 5점은 겉봉의 수신처가 ‘李進士’ 또는 ‘伯翼兄’이라 쓰여 있어 백익(伯翼)인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임을 알 수 있다. 부친 박세당의 영정을 그리는 일과 관련한 내용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간찰로서 회화사적으로 주목을 받는 자료이다.[2]

간찰의 내용

5점의 편지에는 영정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과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영정을 그릴 화사(畵師)를 당시 명성이 있던 평양화가 조세걸(曺世傑, 1635~?)로 결정하려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수신인 이진사는 박태보에게 조세걸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영정제작에 관한 제반 사항을 주선한 인물로 보이는데, 그 인명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3]
조세걸박세당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등 두 사람은 20여 년에 걸쳐 인연이 깊었다. 해당 간찰에는 조세걸박세당의 야복본과 학창의를 입은 전신상 두 점을 그렸다고 쓰여 있는데, 반신상으로 그려진 박세당 초상 또한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4]

간찰의 서체

이진사에게 보낸 5점의 간찰 중 2점은 유려한 행초로 씌어 있다. 아버지 박세당의 행초 필적에 비해 둥글게 돌아가는 원필세(圓筆勢)의 흐름이 더욱 돋보인다. 이를 외할아버지 윤선거와 사촌 박태상의 장인인 서화가 조속의 글씨와 비교하면 윤선거의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필치와 조속의 깔끔하고 단아한 필치를 섞어놓은 듯한 운필을 보여 외가 쪽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서풍이 박태보의 글씨에 절충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 박태보 A는 B가 썼다 A dcterms:creator B
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 조세걸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 박세당 초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 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 박세당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박태보 박세당 A는 B의 아들이다 A ekc:hasFather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유지복,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12쪽.
  3.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4쪽.
  4. 윤진영, 「평양화사 조세걸의 도사활동과 화풍」,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 사회평론, 2006, 248-257쪽.
  5.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4쪽.
  6.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5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논문
    •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 윤진영, 「평양화사 조세걸의 도사활동과 화풍」,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 사회평론, 2006.
  2. 웹 자원

더 읽을거리

  1. 단행본
    • 김학수, 「《서계유묵》의 내용과 가치」, 『朴世堂의 西溪遺墨』,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