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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23:33 기준 최신판
궁예(弓裔) | |
대표명칭 | 궁예 |
---|---|
한자표기 | 弓裔 |
생몰년 | ?-918년 |
이칭 | 선종(善宗) |
시대 | 신라시대 |
배우자 | 왕비 강씨(王后 康氏) |
부 | 헌안왕 또는 경문왕 |
모 | 후궁 장씨(後宮 張氏) |
정의
후고구려를 건국한 왕이다.
내용
스스로 왕이 되다
궁예는 원래 신라 왕족이나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왕실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나 유모가 몰래 키웠다고 한다. 세달사(世達寺)에서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 지었다. 891년 호족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역시 호족인 양길의 부하로 들어가 신임을 얻었고, 군사를 나누어 받아 세력을 키웠다. 894년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후 양길을 쳐서 그 세력이 강원·경기·황해 뿐 아니라 충청북도 일대까지 미쳤다. 901년(효공왕 5)에는 송악(개성)을 근거로 후고구려를 세워 스스로 왕이 되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이듬해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으며,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泰封)이라 하였다.[1]
스스로 미륵을 칭하다
그 후 차츰 교만하여져서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고 맏아들을 청광 보살(靑光菩薩), 막내를 신광 보살(神光菩薩)이라 하며 신격화하였다. 일반 민중에게 기괴한 모습으로 그 위세를 과시하고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고안하여 더욱 포악하고 잔인하게 행동함으로써 인심을 잃었다.[2] 이 과정에서 역모를 의심하여 평소 우대하던 승려 형미(逈微)를 처형하기도 했다. 특히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3]. 이에 장군 홍유ㆍ신숭겸 등은 마침내 왕건을 추대하고 반기를 들었으므로 궁예는 난을 피해 도망가다가 백성에게 살해되었다.[4]
안성 칠장사(安城 七長寺)에는 궁예가 활을 쏘던 활터가 남아 있다. 또 명부전 외벽에는 궁에가 등장하는 벽화가 여럿 있는데, 이는 궁예가 13세까지 이 절에서 활연습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식 관계망
- 고려 태조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궁예 | 고려 태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궁예 | 형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궁예 | 안성 칠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궁예", 한국고중세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참고:"궁예",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궁예",
『두산백과』online .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참고:"궁예",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더 읽을 거리
- 웹 자원
- 논문
- 서금석, 「궁예의 국도 선정과 국호·연호 제정의 성격」, 『한국중세사연구』 제42호, 2015. 213-246쪽.
- 이재범,이광섭 「궁예의 불교사상에 관한 고찰」, 『신라사학보』 제 31호, 2014. 185-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