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응태 무고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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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정의'''== | ||
+ |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정응태(丁應泰)]]와 지휘관 [[양호|양호(楊鎬)]] 사이에 일어난 내분 사건이다. | ||
=='''내용'''== | =='''내용'''== | ||
+ | 1598(조선 선조 31)년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한다'는 무고(誣告)를 올려 파란이 일었다. 당시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조정에서는 정승인 [[류성룡|류성룡(柳成龍)]] 등 동인들을 사신으로 보내려 했으나 [[류성룡]]은 한양에 대신이 아무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0%95%EA%B5%AC_(1564%EB%85%84) 이정구(1564년)]",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 ==''' | + |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선은 1차로 7월 1일에 [[최천건|최천건(崔天健)]] 일행을, 2차로 8월 1일에 [[이원익|이원익(李元翼)]] 일행을, 3차로 10월 21일에 [[이항복|이항복(李恒福)]] 일행을 파견하였다.<ref>緣田, "[http://blog.daum.net/lrrock5050/330 조천록 상(上) 기문(記聞)]",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블로그 - 경주(慶州 月城)이씨』<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0년 09월 21일.</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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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항복]]이 이 사건으로 인해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기록한 『[[조천록|조천록(朝天錄)]]』에 의하면 [[정응태]]의 무고는 크게 다섯 가지였다. | ||
+ | {{Blockquote| | ||
+ | # 조선의 군신들이 명나라 장수 양호와 결탁하여 천자를 기만하고 항거하려 하였다. | ||
+ | # 왜구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범하고 요하를 탈취하여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려 한다. | ||
+ | #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에는 조선과 일본의 사신들이 서로 지극히 친절하다고 적혀 있다. | ||
+ | # 연호를 기록함에 있어 일본의 연호는 크게 쓰고 중국의 연호는 작게 표시하여 일본을 더 높이고 있다. | ||
+ | # 임금을 '태조(太祖)', '세조(世祖)'라 하여 천자의 칭호와 같이 '조(祖)'자를 사용한다. | ||
+ | |출처= 緣田, 『Daum 블로그 - 경주(慶州 月城)이씨』, 조천록 상(上) 기문(記聞).<ref>緣田, "[http://blog.daum.net/lrrock5050/330 조천록 상(上) 기문(記聞)]",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블로그 - 경주(慶州 月城)이씨』<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0년 09월 21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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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조선정부의 지속적인 노력과 [[이정귀|이정귀(李廷龜)]]가 작성한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의 논리로 해명에 성공하여 [[정응태]]를 파면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ref>緣田, "[http://blog.daum.net/lrrock5050/330 조천록 상(上) 기문(記聞)]",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블로그 - 경주(慶州 月城)이씨』<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0년 09월 21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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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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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자원 | ||
+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0%95%EA%B5%AC_(1564%EB%85%84) 이정구(1564년)]",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 | ===유용한 정보=== | ||
+ | * 緣田, "[http://blog.daum.net/lrrock5050/330 조천록 상(上) 기문(記聞)]", <html><online style="color:purple">『Daum 블로그 - 경주(慶州 月城)이씨』<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0년 09월 21일. | ||
− | [[분류: | + | [[분류:역사인물초상화]] |
+ | [[분류:역사인물초상화 문맥]] | ||
+ | [[분류:역사인물초상화 문맥 사건]] | ||
+ | [[분류:사건]] |
2018년 1월 5일 (금) 17:53 기준 최신판
정응태 무고사건(丁應泰 誣告事件) | |
대표명칭 | 정응태 무고사건 |
---|---|
한자표기 | 丁應泰 誣告事件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598년 |
관련인물 | 류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 이정구(李廷龜) |
관련단체 | 변무사(辨誣使) |
정의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丁應泰)와 지휘관 양호(楊鎬) 사이에 일어난 내분 사건이다.
내용
1598(조선 선조 31)년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한다'는 무고(誣告)를 올려 파란이 일었다. 당시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조정에서는 정승인 류성룡(柳成龍) 등 동인들을 사신으로 보내려 했으나 류성룡은 한양에 대신이 아무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하였다.[1]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선은 1차로 7월 1일에 최천건(崔天健) 일행을, 2차로 8월 1일에 이원익(李元翼) 일행을, 3차로 10월 21일에 이항복(李恒福) 일행을 파견하였다.[2]
이항복이 이 사건으로 인해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기록한 『조천록(朝天錄)』에 의하면 정응태의 무고는 크게 다섯 가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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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緣田, 『Daum 블로그 - 경주(慶州 月城)이씨』, 조천록 상(上) 기문(記聞).[3] |
결국 조선정부의 지속적인 노력과 이정귀(李廷龜)가 작성한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의 논리로 해명에 성공하여 정응태를 파면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4]
지식관계망
- 이항복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정응태 무고사건 | 정응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응태 무고사건 | 조천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응태 무고사건 | 변무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응태 무고사건 | 이항복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응태 무고사건 | 이정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이정구(1564년)",
『위키백과』online . - ↑ 緣田, "조천록 상(上) 기문(記聞)",
『Daum 블로그 - 경주(慶州 月城)이씨』online , 작성일: 2010년 09월 21일. - ↑ 緣田, "조천록 상(上) 기문(記聞)",
『Daum 블로그 - 경주(慶州 月城)이씨』online , 작성일: 2010년 09월 21일. - ↑ 緣田, "조천록 상(上) 기문(記聞)",
『Daum 블로그 - 경주(慶州 月城)이씨』online , 작성일: 2010년 09월 21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이정구(1564년)",
『위키백과』online .
- "이정구(1564년)",
유용한 정보
- 緣田, "조천록 상(上) 기문(記聞)",
『Daum 블로그 - 경주(慶州 月城)이씨』online , 작성일: 2010년 09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