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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4일 (목) 19:18 기준 최신판
요석공주(瑤石公主) | |
대표명칭 | 요석공주 |
---|---|
한자표기 | 瑤石公主 |
생몰년 | ?-? |
배우자 | 김흠운(金歆運), 원효(元曉) |
부 | 신라 태종무열왕 |
자녀 | 설총(薛聰) |
정의
신라 제29대 왕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이다.
내용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화랑세기(花郎世記)』에서는 김흠운(金歆運)에게 시집갔으나 남편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일찍 과부가 되었다고 한다.[1]
그 후 요석공주는 원효(元曉)와 만난다. 두 사람이 만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태종(太宗)이 원효가 길거리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요석공주의 남편 김흠운이 전사한 이후, 태종무열왕의 집권기인 655년부터 660년까지 6년 사이에 있었던 일로 추측한다. 이 시기는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에 해당되는데 그 중에서도 무열왕 말년(660년)경이다.[2]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신라 중대의 대학자인 설총(薛聰)이다.
원효와 요석공주에 관련한 설화
스님이 일찍이 어느 날 갑자기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겠는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에 과부 공주(公主)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는 궁리를 보자마자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그 후에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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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요석공주 ,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3] |
지식 관계망
- 원효와 의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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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운 | 요석공주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Son B |
원효 | 요석공주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Son B |
신라 태종무열왕 | 요석공주 | A는 딸 B를 두었다 | A ekc:hasDaughter B |
요석공주 | 설총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