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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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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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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의 서화가 및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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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의 서화가 및 사진가이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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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중화(中和)의 농가에서 태어나 외숙인 이희수(李喜秀)로부터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공부하다가, 18세 되던 1885년([[조선 고종|고종]] 22년)에 중국에 건너가 8년간 수학하였다. 청나라에 유학을 간 김규진은 북경, 양주, 상해지역을 돌아다니며 [[오창석|오창석(吳昌碩)]], [[서신주|서신주(徐新周)]], [[오대징|오대징(吳大澂)]], [[민영익|민영익(閔泳翊)]] 등의 서화가들과 교유하였고 당시 청에서 유행하는 화풍을 연구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 [[천연당사진관|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하였고, 1913년 [[천연당사진관]]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병설하였다. 1915년에는 '서화연구회'를 발족하였는데, 이는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에 이어 두 번째 출현한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이었다.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에는 조석진(趙錫晉), 안중식(安中植), 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785 김규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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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중화(中和)의 농가에서 태어나 외숙인 이희수(李喜秀)로부터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공부하다가, 18세 되던 1885년(조선 고종 22년)에 중국에 건너가 8년간 수학하였다. 청나라에 유학을 간 김규진은 북경, 양주, 상해지역을 돌아다니며 [[오창석|오창석(吳昌碩)]], [[서신주|서신주(徐新周)]], [[오대징|오대징(吳大澂)]], [[민영익|민영익(閔泳翊)]] 등의 서화가들과 교유하였고 당시 청에서 유행하는 화풍을 연구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 [[천연당사진관|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하였고, 1913년 [[천연당사진관]]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병설하였다. 1915년에는 '서화연구회'를 발족하였는데, 이는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에 이어 두 번째 출현한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이었다.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에는 조석진(趙錫晉), 안중식(安中植), 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785 김규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묘경(妙境)을 이루었고, 산수화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죽(蘭竹)은 절묘하였다. 사군자(四君子)도 즐겨 그렸고 글씨는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다. [[영친왕 이은|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에게 서법(書法)을 가르쳤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2101&cid=40942&categoryId=34387 김규진]",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묘경(妙境)을 이루었고, 산수화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죽(蘭竹)은 절묘하였다. 사군자(四君子)도 즐겨 그렸고 글씨는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다. [[영친왕 이은|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에게 서법(書法)을 가르쳤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2101&cid=40942&categoryId=34387 김규진]",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관련 사진 작품===
 
===관련 사진 작품===
*1905년 김규진은 [[덕수궁 중명전|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서 [[조선 고종|고종]]의 초상 사진을 촬영했다. [[조선 고종|고종]]은 1905년 미국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아시아를 순회하던 사절단을 만나 미국 재벌인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이 사진을 건넸고, 1934년 해리먼의 부인은 1934년 미국 뉴어크박물관(Newark Museum)에 사진을 기증했다고 한다.<ref>"[http://www.huffingtonpost.kr/2015/10/05/story_n_8242448.html 한국인이 찍은 것 중 가장 오래된 고종 사진이 발견됐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허핑턴포스트코리아』<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5년 10월 5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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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김규진은 [[덕수궁 중명전|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서 [[조선 고종|고종]]의 초상을 촬영했다. [[조선 고종|고종]]은 1905년 미국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아시아를 순회하던 사절단을 만나 미국 재벌인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이 사진을 건넸고, 1934년 해리먼의 부인은 1934년 미국 뉴어크박물관(Newark Museum)에 사진을 기증했다고 한다.<ref>"[http://www.huffingtonpost.kr/2015/10/05/story_n_8242448.html 한국인이 찍은 것 중 가장 오래된 고종 사진이 발견됐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허핑턴포스트코리아』<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5년 10월 5일.</ref>
*1909년 김규진은 [[황현|매천 황현(黃玹)]]의 초상 사진을 촬영했다.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된 [[황현 초상]]은 이 사진을 보고 화가인 [[채용신|채용신(蔡龍臣)]]이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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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김규진은 [[황현|매천 황현(黃玹)]]의 초상 사진을 촬영했다.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된 [[황현 초상]]은 이 사진을 보고 화가인 [[채용신|채용신(蔡龍臣)]]이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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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은 영친왕을 가르칠 때 서화교본으로 『김규진 화첩』을 만들었다. 또 서화교육을 위한 교재로 『서법진결(書法眞訣)』, 『육체필론(六體筆論)』,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 등을 펴냈다.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8년 1월 4일 (목) 17:01 기준 최신판

김규진(金圭鎭)
대표명칭 김규진
한자표기 金圭鎭
생몰년 1868년 4월 14일-1933년
본관 남평(南平)
해강(海岡),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 무기옹(無己翁))
용삼(容三)
출생지 평안남도 중화(中和)
시대 근대
유형 인물



정의

한국 근대의 서화가 및 사진가이다.

내용

평안남도 중화(中和)의 농가에서 태어나 외숙인 이희수(李喜秀)로부터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공부하다가, 18세 되던 1885년(조선 고종 22년)에 중국에 건너가 8년간 수학하였다. 청나라에 유학을 간 김규진은 북경, 양주, 상해지역을 돌아다니며 오창석(吳昌碩), 서신주(徐新周), 오대징(吳大澂), 민영익(閔泳翊) 등의 서화가들과 교유하였고 당시 청에서 유행하는 화풍을 연구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하였고, 1913년 천연당사진관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병설하였다. 1915년에는 '서화연구회'를 발족하였는데, 이는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에 이어 두 번째 출현한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이었다.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에는 조석진(趙錫晉), 안중식(安中植), 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1]

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묘경(妙境)을 이루었고, 산수화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죽(蘭竹)은 절묘하였다. 사군자(四君子)도 즐겨 그렸고 글씨는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다.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에게 서법(書法)을 가르쳤다.[2]

관련 사진 작품

1905년 김규진은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서 고종의 초상을 촬영했다. 고종은 1905년 미국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아시아를 순회하던 사절단을 만나 미국 재벌인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이 사진을 건넸고, 1934년 해리먼의 부인은 1934년 미국 뉴어크박물관(Newark Museum)에 사진을 기증했다고 한다.[3] 1909년 김규진은 매천 황현(黃玹)의 초상 사진을 촬영했다.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된 황현 초상은 이 사진을 보고 화가인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작품이다. 김규진은 영친왕을 가르칠 때 서화교본으로 『김규진 화첩』을 만들었다. 또 서화교육을 위한 교재로 『서법진결(書法眞訣)』, 『육체필론(六體筆論)』,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 등을 펴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천연당사진관 김규진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고금서화관 김규진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황현 초상 사진 김규진 A는 B가 촬영하였다 A dcterms:creator B
고종 초상 사진 김규진 A는 B가 촬영하였다 A dcterms:creator B
김규진 오창석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김규진 서신주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김규진 오대징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김규진 민영익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김규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규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한국인이 찍은 것 중 가장 오래된 고종 사진이 발견됐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online, 작성일: 2015년 10월 5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