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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의 경신환국(1680), 노론과 소론 명목의 첫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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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의 경신환국(1680), 노론과 소론 분화의 시초====
 
경신환국은 김석주, 김만기 등 숙종의 척신 세력이 숙종과 함께 허적 등 남인을 내치고 송시열과 김수항 등 서인 세력을 불러들인 일을 가리킨다. 환국 이후 이들 척신 세력은 남인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 기찰과 고변을 통한 정탐정치까지 동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삼사의 언관들이 훈척의 이러한 정치행태를 비판하면서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명목이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삼사에 포진한 연소(年少)한 청류(淸流)들이 훈척의 정탐정치를 비판한 것은 사림정치의 원칙인 공론정치를 내세우면서 전개되었는데, 사림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자 서인 산림을 대표하는 송시열이 연소 청류의 기대를 저버리고 훈척을 지지하였다. 송시열이 사림 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저버리고 훈척의 정탐정치를 긍정한 것은 남인을 축출하는 것이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송시열은 '군자의 붕당'만을 인정하는 주자 붕당론을 실천하는 것이 사림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송시열의 이러한 논리와 입장은 재야와 재조를 막론하고 서인 내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삼사의 연소한 언관을 포함하여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을 두고 분열되었다.
 
경신환국은 김석주, 김만기 등 숙종의 척신 세력이 숙종과 함께 허적 등 남인을 내치고 송시열과 김수항 등 서인 세력을 불러들인 일을 가리킨다. 환국 이후 이들 척신 세력은 남인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 기찰과 고변을 통한 정탐정치까지 동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삼사의 언관들이 훈척의 이러한 정치행태를 비판하면서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명목이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삼사에 포진한 연소(年少)한 청류(淸流)들이 훈척의 정탐정치를 비판한 것은 사림정치의 원칙인 공론정치를 내세우면서 전개되었는데, 사림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자 서인 산림을 대표하는 송시열이 연소 청류의 기대를 저버리고 훈척을 지지하였다. 송시열이 사림 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저버리고 훈척의 정탐정치를 긍정한 것은 남인을 축출하는 것이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송시열은 '군자의 붕당'만을 인정하는 주자 붕당론을 실천하는 것이 사림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송시열의 이러한 논리와 입장은 재야와 재조를 막론하고 서인 내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삼사의 연소한 언관을 포함하여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을 두고 분열되었다.
 
<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6-247쪽  .</ref>
 
<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6-247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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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461 회니시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ref> 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461 회니시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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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의 이경석 신도비문(1702), 노론과 소론 탕평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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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이 이경석 신도비명을 작성한 1702년은 남구만이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를 비호한 책임을 지고 아산에 유배되었을 때였다. 여기서 박세당은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이라고 찬양하고, 그를 모욕한 사람을 '상서롭지 못한 사람'으로 규정하였는데, 이것은 송시열을 지목한 것이 분명하였다. 이어서 두 사람을 각각 봉황과 올빼미에 비유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박세당이 이경석을 찬양하고 송시열을 비판한 것은 인현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소론 탕평론이 좌절된 것을 의식하고 나온 것임이 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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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4쪽  .</ref>
  
====박세당의 이경석 신도비문(1702), 노론과 소론 탕평론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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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이듬해인 1703년 홍계적 등 송시열 문인들이 상소하여 박세당이 자신들의 스승인 송시열을 모함하였으니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상소문에서 박세당이 『사변록』을 저술한 것을 들어서 "주자를 능멸하였다"는 죄목을 함께 거론한 것은 이 사건의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판한 것은 주자학 의리론에 입각한 것인데, 박세당이 『사변록』에서 주자 주석을 비판하더니, 이제는 송시열마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박세당이 사문난적인 윤휴를 편드는 무리이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귀결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상소문의 실제 작성자는 김창협이었는데, 그와 그 아우 김창흡은 모두 박세당을 윤휴와 동일시하면서 '사문난적'으로 몰아간 것이었다. 이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양란기 이래 주자학 정치론이 분화되어 새롭게 형성된 정치론인 탕평론을 부정하고, 주자와 송시열을 존숭하는 노론만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표출한 것이었다.
 
<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4쪽  .</ref>
 
<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4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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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일 (화) 19:37 기준 최신판

개요

인조반정을 계기로 북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쥔 서인은, 숙종 재위 당시 경신환국, 회니시비, 가례원류시말 등의 사건을 통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진다. 송시열, 윤증, 권상하, 박세당, 박세채, 남구만, 김석주 등은 그러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자, 노론과 소론 분화 초기의 정국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내용

김석주의 경신환국(1680), 노론과 소론 분화의 시초

경신환국은 김석주, 김만기 등 숙종의 척신 세력이 숙종과 함께 허적 등 남인을 내치고 송시열과 김수항 등 서인 세력을 불러들인 일을 가리킨다. 환국 이후 이들 척신 세력은 남인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 기찰과 고변을 통한 정탐정치까지 동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삼사의 언관들이 훈척의 이러한 정치행태를 비판하면서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명목이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삼사에 포진한 연소(年少)한 청류(淸流)들이 훈척의 정탐정치를 비판한 것은 사림정치의 원칙인 공론정치를 내세우면서 전개되었는데, 사림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자 서인 산림을 대표하는 송시열이 연소 청류의 기대를 저버리고 훈척을 지지하였다. 송시열이 사림 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저버리고 훈척의 정탐정치를 긍정한 것은 남인을 축출하는 것이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송시열은 '군자의 붕당'만을 인정하는 주자 붕당론을 실천하는 것이 사림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송시열의 이러한 논리와 입장은 재야와 재조를 막론하고 서인 내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삼사의 연소한 언관을 포함하여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을 두고 분열되었다. [1]

박세채의 황극탕평론(1683), 노론과 소론 탕평의 시도

[2]


윤증의 신유의서(1684), 노론과 소론 갈등의 심화

회니시비와 관련하여, 흔히 송시열이 지은 윤선거 묘갈명에 대해서 윤증이 불만을 품고 이를 고쳐달라고 청하였는데 송시열이 이를 고쳐주지 않아서 회니시비가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의 일면만을 말한 것이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요청한 것은 윤선거를 칭찬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송시열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혀 달라는 것이었다. 즉 윤선거와 송시열의 40여 년에 걸친 우정에 비추어 볼 때, 윤선거에 대한 평가를 후배인 박세채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는 것은 윤선거에게 허물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송시열 자신 역시 후세 사람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송시열은 윤휴에 대한 윤선거, 윤증 부자의 모호한 태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3]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공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윤선거가 이에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북벌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인조대 병자호란에 이은 1637년 삼전도의 치욕 이후 호서 사림들은 '복수설치'의 방안 모색에 여념이 없었는데, 결국 양반과 지주의 특권을 양보 내지 제거해서라도 국방력을 강화시켜 오랑캐로부터 당한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계, 윤선거 등은 양반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완화 내지 제거할 수 있는 제도개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었는데, 송시열은 이에 반대하고 북벌을 도덕과 의리의 측면으로 제한하려 하였다. 그리고 제도개혁 주장에 대해서는 이단 논쟁을 제기하여 정치 쟁점을 치환하는 것으로 맞섰다. [4]

윤휴에 대한 태도에서 이들의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윤휴 역시 북벌 추진을 위해서는 당시의 지배층인 양반, 지주의 기득권을 제거 내지 약화시키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었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학을 비판한 '사문난적'이고 이단이라는 측면을 정치 공세의 쟁점으로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체제 개혁론을 부정하려 하였다. 이것은 송시열이 주자를 내세워서 북벌을 부정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선거는 주자학에 대한 작은 차이를 문제 삼지 말고 그의 체제 개혁론을 수용하여 북벌에 적극 나서라고 송시열에게 요구하였다. 송시열이 북벌보다 주자학을 중시하면서 정책 논쟁을 이단 논쟁으로 치환하려 하였다면, 윤선거는 주자학보다 북벌을 중시하면서 당파를 떠나서 체제 개혁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예송에서 송시열과 윤휴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대립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윤선거는 이들을 모두 비판하였다. 그는 예론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고 비판하고, 그로 인해 사림이 분열되어 국가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가 송시열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윤휴를 비롯한 남인을 포용하려고 한 것은 북벌에 대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윤선거는 예송보다 북벌을 중시한 것이었다. [5]

이와 같은 맥락에서 표출된 송시열의 애매모호한 태도로 인해, 윤증은 1681년 송시열에게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는데, 여기에는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고-의리쌍행(義利雙行),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였다-왕패병용(王覇幷用)'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 하는데, 이 '신유의서'가 송시열의 사위이며 윤증의 사촌이었던 윤박(尹搏)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84년 4월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되었다. 윤증의 제자였던 나양좌(羅良佐)와 친구 박세채(朴世采) 등은 그를 옹호하였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데 있어서 큰 작용을 하였다. [6]

박세당의 이경석 신도비문(1702), 노론과 소론 탕평의 좌절

박세당이 이경석 신도비명을 작성한 1702년은 남구만이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를 비호한 책임을 지고 아산에 유배되었을 때였다. 여기서 박세당은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이라고 찬양하고, 그를 모욕한 사람을 '상서롭지 못한 사람'으로 규정하였는데, 이것은 송시열을 지목한 것이 분명하였다. 이어서 두 사람을 각각 봉황과 올빼미에 비유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박세당이 이경석을 찬양하고 송시열을 비판한 것은 인현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소론 탕평론이 좌절된 것을 의식하고 나온 것임이 분명하였다. [7]

이에 대해 이듬해인 1703년 홍계적 등 송시열 문인들이 상소하여 박세당이 자신들의 스승인 송시열을 모함하였으니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상소문에서 박세당이 『사변록』을 저술한 것을 들어서 "주자를 능멸하였다"는 죄목을 함께 거론한 것은 이 사건의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판한 것은 주자학 의리론에 입각한 것인데, 박세당이 『사변록』에서 주자 주석을 비판하더니, 이제는 송시열마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박세당이 사문난적인 윤휴를 편드는 무리이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귀결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상소문의 실제 작성자는 김창협이었는데, 그와 그 아우 김창흡은 모두 박세당을 윤휴와 동일시하면서 '사문난적'으로 몰아간 것이었다. 이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양란기 이래 주자학 정치론이 분화되어 새롭게 형성된 정치론인 탕평론을 부정하고, 주자와 송시열을 존숭하는 노론만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표출한 것이었다. [8]



지식 관계망

중심요소

문맥요소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송시열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권상하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윤증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박세당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박세채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남구만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김석주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80년 경신환국이 발생하였다.
1715년 가례원류시말이 발생하였다.
1716년 병신처분이 발생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700350 127.057418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의정부 서계종택과 관련이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영상

예송2차와 환국(게시일: 2014.09.15.)

주석

  1.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6-247쪽 .
  2.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2쪽 .
  3.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7쪽 .
  4.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8쪽 .
  5.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8-249쪽 .
  6. 이영춘, 회니시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4쪽 .
  8.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54쪽 .

참고 자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