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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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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수전에서 활약한 거북 모양의 전투선.<ref>박혜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833 거북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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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활약한 거북 모양의 전투선이다.<ref>박혜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833 거북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내용'''==
 
=='''내용'''==
 
===기록 상의 거북선===
 
===기록 상의 거북선===
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龜船)'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1413년(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그 후 180여년 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임진년(1592) 일기인 『[[난중일기]](亂中日記)』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帆布)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년(壬辰年: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狀啓)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이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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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龜船]'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다. 1413년([[조선 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다시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br/>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創製龜船)의 일반적인 외부의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에 대해서는 기록한 것이 없다. 따라서 [[조선 태종|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과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羅大用)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龍頭)는 거북머리(龜頭)로 바뀌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長大)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는데,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28183 거북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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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80여년 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임진년(1592) 일기인 『[[난중일기]](亂中日記)』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帆布)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년(壬辰年: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狀啓)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이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創製龜船)의 일반적인 외부의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조선 태종|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과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羅大用)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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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龍頭]는 거북머리[龜頭]로 바뀌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長大)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다.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28183 거북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구조와 형태===
 
===구조와 형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1592년(선조 25) 5월 1일의 기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을 정리할 수 있다.<br/>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1592년(선조 25) 5월 1일의 기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을 정리할 수 있다.<br/>
①기존의 배([[판옥선]])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었다, ②군사가 통행할 수 있는 십자로를 만들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줄지어 꽂았으며,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배 위에 올라타려는 적군에게 상처를 입혔다, ③배의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그 입을 대포 구멍으로 활용했으며, ④배의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고 그 밑에 총구멍을 설치했다, ⑤배의 좌우에 총구멍을 여섯 개씩 설치하였다, ⑥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⑦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빨랐다는 점 등이다. 아군의 병력을 보호하고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 적진을 휘젓는 돌격선으로서의 거북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ref>박혜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833 거북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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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기존의 배([[판옥선]])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었다, ②군사가 통행할 수 있는 십자로를 만들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줄지어 꽂았으며,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배 위에 올라타려는 적군에게 상처를 입혔다, ③배의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그 입을 대포 구멍으로 활용했으며, ④배의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고 그 밑에 총구멍을 설치했다, ⑤배의 좌우에 총구멍을 여섯 개씩 설치하였다, ⑥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⑦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빨랐다. 이 같은 점으로 미루어 아군의 병력을 보호하고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 적진을 휘젓는 돌격선으로서의 거북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ref>박혜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833 거북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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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7일 (수) 00:11 기준 최신판

거북선
(龜船)
민족 일러 거북선.png
대표명칭 거북선
한자표기 龜船
유형 전함
시대 조선
관련인물 이순신
관련장소 명량



정의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활약한 거북 모양의 전투선이다.[1]

내용

기록 상의 거북선

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龜船]'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다. 1413년(조선 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다시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그 후 180여년 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임진년(1592) 일기인 『난중일기(亂中日記)』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帆布)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년(壬辰年: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狀啓)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이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創製龜船)의 일반적인 외부의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과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羅大用)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龍頭]는 거북머리[龜頭]로 바뀌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長大)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다.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2]

구조와 형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1592년(선조 25) 5월 1일의 기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을 정리할 수 있다.
①기존의 배(판옥선)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었다, ②군사가 통행할 수 있는 십자로를 만들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줄지어 꽂았으며,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배 위에 올라타려는 적군에게 상처를 입혔다, ③배의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그 입을 대포 구멍으로 활용했으며, ④배의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고 그 밑에 총구멍을 설치했다, ⑤배의 좌우에 총구멍을 여섯 개씩 설치하였다, ⑥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⑦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빨랐다. 이 같은 점으로 미루어 아군의 병력을 보호하고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 적진을 휘젓는 돌격선으로서의 거북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기창-명량대첩 명량대첩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A ekc:depicts B
김기창-명량대첩 명량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A ekc:depicts B
이순신 명량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거북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나대용 거북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거북선 판옥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박혜일, "거북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거북선", 『doopedia』online, 두산백과.
  3. 박혜일, "거북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박혜일, "거북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박혜일, "거북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거북선", 『doopedia』online, 두산백과.

유용한 정보

  1. "거북선", 전통시대 수상교통- 뱃길(水上路), 『문화콘텐츠닷컴』online, 문화콘텐츠닷컴.
  2. "거북선", 전통한선의 디지털복원, 『문화콘텐츠닷컴』online, 문화콘텐츠닷컴.
  3. "거북선", 한민족 전투원형, 『문화콘텐츠닷컴』online, 문화콘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