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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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정보
 
{{문헌정보
|사진= 민족기록화 일러 관련기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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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민족팀_일러_관련기사.png
|사진출처= 김현승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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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대표명칭=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대표명칭=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한자표기=
 
|한자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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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민족기록화 [[김기창-명량대첩]] 고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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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이 그린 민족기록화 [[김기창-명량대첩]]고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은 기사이다.
  
 
=='''내용'''==
 
=='''내용'''==
고증 제대로 안된 민족 기록화 중앙일보 197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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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작품에 그려진 전선(戰船)은 평선(平船)으로, 선체 안에 병사들이 발을 붙이고 싸울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에 갑판을 깔고, 배를 움직이기 위하여 여러 개의 노를 달아놓는 형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f>"선체 안에...형태" : 김재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9680 판옥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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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 [[명량대첩]] 때 크게 활약한 전선은 [[판옥선|판옥선(板屋船)]]으로, 1555년([[조선 명종|명종]] 10)때 만들어져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이미 125명 이상의 군사를 수용한 그 크기는 종전에 기껏 80명을 정원으로 한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며, 그 구조도 튼튼하였다.<ref>"임진왜란 때에 이미...튼튼하였다." : 김재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9680 판옥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개개 작품의 우열보다 전체 그림들에 대한 일관된 고저이다. 가령 전선의 경우- 이번 전승편 20점 중 해상 전투 광경이 4점인데 배의 모양이 제각기 판이하다. 『장보고의 해상 활동』 (박광진)은 요즘 데구리 배라 일컫는 어선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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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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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한산대첩』의 일부 배는 유람선이라면 알맞을 정도로 섬약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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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 병술 2번째기사. 온라인 참조: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6015_002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병술) 두번째 기사. 온라인 참조: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6015_002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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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의 대몽항전』에서는 아적이 같은 배 모양인데다가 현호에 붙인 여장이며 배 크기 등이 걸맞지 않는다. 노는 재래의 입식 노가 아니라 모두 서구의 좌식 노 (커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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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mode=packed caption=" "  heights=1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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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_문헌_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_판옥선.jpg|[[각선도본]]에 그려진 [[판옥선]]<ref>김재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9680 판옥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명량대첩』 (김기창)의 전투는 장관이나 배의 동력에 관해선 불분명하다. 모두 깃발이 나부끼는데 노에 의존돼 있을 뿐 돛 (범)을 찾아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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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복과 자결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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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은 선체 위에 상장(上粧)을 꾸려 2층으로 꾸민 옥선(屋船)으로, 갑판 중앙에 따로 지휘소인 2층 누각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상장을 높게 2층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였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ref>김재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9680 판옥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있고, 왼손 근처에 작은 칼이 놓여져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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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당 작품에서 [[이순신]]은 누각이 아니라 갑판 앞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으며, 포 역시 낮은 위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그의 자결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상반되는 의견들이 있는데, 당시 그의 최후를 목격했던 [[김우현]]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민영환]]은 한복차림으로 사망했고, 장도(粧刀)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br/>
 
그의 사망 현장 목격자 중 한 명인 [[시종무관]] [[어담|어담(魚潭)]]은 그가 오른손에 손톱 깎기만한 작은 칼을 쥔 채로 사망하였고, 할복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여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었다고 회고하였고, [[민영환]]의 장남 [[민장식]]의 아들인 [[민병진]]도 그의 조부가 단도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다.
 
 
 
===자결장소===
 
작품에 묘사된 배경은 승려와 마당의 석등<ref>"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95 석등]",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br/>
 
그러나 [[민영환]][[민영환 자결터|순국 자결한 장소]]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시종무관]] [[어담|어담(魚潭)]]과 [[김우현]] 목사, [[민병진]]의 회고에 따르면, [[민영환 집터|민영환의 집]]에 [[민영환]]의 어머니와 가족이 있었기에 자결 장소를 청지기였던 [[이완식]]의 집으로 택했으며, 그의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본저(本邸)로 옮겨졌기 때문에 자결한 당시 모습을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만 목격했다고 한다.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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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손수광-민충정공순국(민영환)-1976s.jpg|[[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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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기창-명량대첩(이순신)-1975s.jpg | [[김기창-명량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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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족기록화_문헌_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_판옥선.jpg|[[각선도본]]에 그려진 [[판옥선]]<ref>김재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9680 판옥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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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인용 및 참조===
#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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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
#* 조정래, 『[https://books.google.co.kr/books?id=cbwjCgAAQBAJ&pg=PT210&lpg=PT210&dq=%EB%AF%BC%EC%98%81%ED%99%98+%EC%96%B4%EB%8B%B4&source=bl&ots=V3ZNfYHXnk&sig=mJh3-X1iInejy2gJZf4_QcmsF8A&hl=ko&sa=X&ved=0ahUKEwiS1a7W-cjSAhWKULwKHa1nD0oQ6AEIGDAA#v=onepage&q=%EB%AF%BC%EC%98%81%ED%99%98%20%EC%96%B4%EB%8B%B4&f=false 아리랑 1: 조정래 대하소설]』, 해냄, 2001,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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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 병술 2번째기사. 온라인 참조: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6015_002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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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자원
#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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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9680 판옥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강신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2600329205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2-26&officeId=00032&pageNo=5&printNo=10586&publishType=00020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작성일: 1980년 02월 26일.  
+
 
#* 김태완, "[http://pub.chosun.com/client/news/print.asp?cate=C01&mcate=M1003&nNewsNumb=20151018483 항일(抗日)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 후손들의 120년 영락]", 『월간조선』, 작성일: 2015년 10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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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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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2600329205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2-26&officeId=00032&pageNo=5&printNo=10586&publishType=00020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작성일: 1980년 0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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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0&cp_code=cp0231&index_id=cp02310009&content_id=cp023100090001&search_left_menu= 전선(판옥선)]", 한국의 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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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분류:문헌]]
 
[[분류:민족기록화]][[분류:문헌]]

2017년 12월 26일 (화) 23:54 기준 최신판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민족팀 일러 관련기사.png
대표명칭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정의

김기창이 그린 민족기록화 「김기창-명량대첩」 고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은 기사이다.

내용

해당 작품에 그려진 전선(戰船)은 평선(平船)으로, 선체 안에 병사들이 발을 붙이고 싸울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에 갑판을 깔고, 배를 움직이기 위하여 여러 개의 노를 달아놓는 형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1]
그러나 실제 명량대첩 때 크게 활약한 전선은 판옥선(板屋船)으로, 1555년(명종 10)때 만들어져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이미 125명 이상의 군사를 수용한 그 크기는 종전에 기껏 80명을 정원으로 한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며, 그 구조도 튼튼하였다.[2]

Quote-left.png 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Quote-right.png
출처: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 병술 2번째기사. 온라인 참조: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3]


판옥선은 선체 위에 상장(上粧)을 꾸려 2층으로 꾸민 옥선(屋船)으로, 갑판 중앙에 따로 지휘소인 2층 누각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상장을 높게 2층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였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5]
그러나 해당 작품에서 이순신은 누각이 아니라 갑판 앞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으며, 포 역시 낮은 위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기창-명량대첩 관련 기사 김기창-명량대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갤러리

영상

주석

  1. "선체 안에...형태" :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임진왜란 때에 이미...튼튼하였다." :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년) 6월 15일(병술) 두번째 기사. 온라인 참조: '사도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사료
  2. 웹 자원
    • 김재근,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용한 정보

  1. 강신철,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작성일: 1980년 02월 26일.
  2. "전선(판옥선)", 한국의 배,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