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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 + |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학교에 있던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 명칭은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ref>신재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417 보성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 | + |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 간부가 [[손병희]](孫秉熙)에게 보성사의 폐쇄를 건의한 적도 있었다.<ref>신재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417 보성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독립선언서 인쇄=== | ===독립선언서 인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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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경찰의 방해=== | ===일본경찰의 방해=== | ||
− | [[이종일]]은 총 2만 | + | [[이종일]]은 이 중 총 2만 1,000매의 선언서를 자신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인쇄소의 작업소리를 듣고 형사 신승희(申勝熙)가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에 놀란 [[이종일]]이 형사의 옷자락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와 뒤에 [[손병희]]로부터 받은 5,000원을 주며 눈감아주기를 간청해서 위기를 넘겼다.<ref>신재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417 보성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또 10시가 넘어 인쇄 완료된 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교당으로 가는 도중 일본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손수레의 짐은 인쇄된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옮길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무사히 은닉됨으로써 [[3·1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ref>신재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417 보성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또 10시가 넘어 인쇄 완료된 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교당으로 가는 도중 일본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손수레의 짐은 인쇄된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옮길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무사히 은닉됨으로써 [[3·1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ref>신재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417 보성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일제의 방화=== | ===일제의 방화=== | ||
− | 또한, 3월 1일에는 윤익선과 이종린, [[이종일]], 김홍규 등이 지하 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부를 | + | 또한, 3월 1일에는 윤익선과 이종린, [[이종일]], 김홍규 등이 지하 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부를 연이어 발행하였다. 일본 경찰은 보성사를 즉각 폐쇄하였으며, 1919년 6월 28일 밤에는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이후 보성사는 터만 남아 오늘에 전한다. 보성사는 현 종로구 조계사 경내에 있으며, 기념비와 동상은 조계사 후문 맞은편 근린공원에 있다.<ref>"보성사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29985&cid=42856&categoryId=42856 보성사터]", 대한민국 구석구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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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417 보성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재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417 보성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29985&cid=42856&categoryId=42856 보성사터]", <html><online style="color:purple"> | + | #* "보성사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29985&cid=42856&categoryId=42856 보성사터]", 대한민국 구석구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http://search.i815.or.kr/e-book/index.html#/16 독립선언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소장자료 사진집』<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 | #* "[http://search.i815.or.kr/e-book/index.html#/16 독립선언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소장자료 사진집』<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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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5일 (월) 02:38 기준 최신판
보성사(普成社) | |
대표명칭 | 보성사 |
---|---|
한자표기 | 普成社 |
창립자 | 천도교 |
창립일 | 1910년 |
주요업무 | 인쇄소 |
목차
정의
1910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인쇄소이다.
내용
천도교와 보성사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학교에 있던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 명칭은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1]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 간부가 손병희(孫秉熙)에게 보성사의 폐쇄를 건의한 적도 있었다.[2]
독립선언서 인쇄
보성사의 가장 큰 업적은 1919년 3·1운동 때 발표된 독립선언서의 인쇄였다. 보성사의 소유주이기도 했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특명으로 최남선이 초안을 집필하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아 사장 이종일, 공장감독 김흥규, 총무 장효근이 1919년 2월 27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3만 5천 매를 인쇄하였다.[3]
일본경찰의 방해
이종일은 이 중 총 2만 1,000매의 선언서를 자신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인쇄소의 작업소리를 듣고 형사 신승희(申勝熙)가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에 놀란 이종일이 형사의 옷자락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와 뒤에 손병희로부터 받은 5,000원을 주며 눈감아주기를 간청해서 위기를 넘겼다.[4] 또 10시가 넘어 인쇄 완료된 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교당으로 가는 도중 일본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손수레의 짐은 인쇄된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옮길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무사히 은닉됨으로써 3·1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5]
일제의 방화
또한, 3월 1일에는 윤익선과 이종린, 이종일, 김홍규 등이 지하 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부를 연이어 발행하였다. 일본 경찰은 보성사를 즉각 폐쇄하였으며, 1919년 6월 28일 밤에는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이후 보성사는 터만 남아 오늘에 전한다. 보성사는 현 종로구 조계사 경내에 있으며, 기념비와 동상은 조계사 후문 맞은편 근린공원에 있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보성사 | 천도교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보성사 | 손병희 | A와 B는 관계가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보성사인쇄소 | 보성사 | A는 B의 전신이다 | A ekc:isOldNameOf B |
독립선언서 | 보성사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조선독립신문 | 보성사 |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 A dcterms:publisher B |
보성사 | 조계사 경내 | A는 B에 있었다 | A ekc:formerLocation B |
공간정보
-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 전자지도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독립기념관 소장 독립선언서.[7]
영상
주석
- ↑ 신재홍, "보성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재홍, "보성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보성사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온라인 참조: "보성사터", 대한민국 구석구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재홍, "보성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재홍, "보성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보성사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온라인 참조: "보성사터", 대한민국 구석구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독립선언서",
『소장자료 사진집』online ,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