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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족_일러_항일결사.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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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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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개화자강파들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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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개화자강파들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단체이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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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고, 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최광옥(崔光玉)·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강(李剛)·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ref>신용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74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9월 22일.</ref>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고, 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최광옥(崔光玉)·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강(李剛)·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ref>신용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74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9월 22일.</ref>
  
===창립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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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집단의 공통점===
신민회의 창립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존재했던 다섯 개의 비공식집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중심으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이며, 둘째는 [[상동교회]](尙洞敎會)를 중심으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이다. 셋째는 서북지방과 서울 등지에 있어서의 신흥시민세력의 집단이고, 넷째는 무관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집단이며, 다섯째는 미주에 있던 [[공립협회]](共立協會)의 집단이다. 이 다섯 개 집단의 인사들은 그들 세력의 역사적 배경이 같았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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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의 창립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존재했던 다섯 개의 비공식집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중심으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이며, 둘째는 [[상동교회]](尙洞敎會)를 중심으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이다. 셋째는 서북지방과 서울 등지에 있어서의 신흥시민세력의 집단이고, 넷째는 무관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집단이며, 다섯째는 미주에 있던 [[공립협회]](共立協會)의 집단이다. 이 다섯 개 집단의 인사들은 그들 세력의 역사적 배경이 같았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동학당에서 출발한 [[김구]] 등 극소수와 미주지역동포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독립협회]](1896-1898)의 청년회원들이었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동학당에서 출발한 [[김구]] 등 극소수와 미주지역동포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독립협회]](1896-1898)의 청년회원들이었던 것이다. [[독립협회]가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는 그들은 아직 간부로 진출하지 못하고 주로 [[만민공동회운동]]에 앞장섰던 청소년들이었는데, 1905년 이후에는 각기 자기의 관련분야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위의 다섯 개 집단이 중핵이 되어 만든 국권회복운동단체이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0771&cid=41708&categoryId=41711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어국문학자료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사전연구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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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으로 성장한 재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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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가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는 그들은 아직 간부로 진출하지 못하고 주로 [[만민공동회운동]]에 앞장섰던 청소년들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이후에는 각기 자기의 관련분야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써 교육구국운동을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위의 다섯 개 집단이 중핵이 되어 만든 국권회복운동단체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0771&cid=41708&categoryId=41711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어국문학자료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사전연구사.</ref>
  
 
===교육구국운동===
 
===교육구국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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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강연·학회운동===
 
===계몽강연·학회운동===
신민회의 계몽 강연과 학회 활동에는 신민회의 모든 회원과 간부들이 전국 각지에서 적극 참여했는데, 그 활동은 매우 광범하였다.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학회로는,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奬會)·연학회(練學會)·동제회(同濟會)·서북학회 등이 대표적이었다. 신민회 회원들은 주로 각종 학회의 통상회와 토론회·강연회·친목회·학교·교회·운동회·기타 각종 집회를 활용, 큰 성과를 거두었다.<ref>신용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74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9월 22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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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의 계몽 강연과 학회 활동에는 신민회의 모든 회원과 간부들이 전국 각지에서 적극 참여했는데, 그 활동은 매우 광범하였다.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학회로는,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奬會)·연학회(練學會)·동제회(同濟會)·서북학회 등이 대표적이었다. 신민회 회원들은 주로 각종 학회의 통상회와 토론회·강연회·친목회·학교·교회·운동회·기타 각종 집회를 활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ref>신용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74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9월 22일.</ref>
  
 
===잡지서적 출판운동===
 
===잡지서적 출판운동===
계몽강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구습타파, 자발적 의무교육실시, 민족단합의식 등을 고취했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이용했고, 최남선을 중심으로 1908년 11월에 창간한 잡지 『[[소년]]』 역시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출판물 보급과 사업연락을 위해서는 평양·서울·대구에 각각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합법적인 활동을 했으며, 민족문화와 국사학에 관심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외곽단체로서 출판사업을 이끌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77639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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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강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구습타파, 자발적 의무교육실시, 민족단합의식 등을 고취했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이용했고, 최남선을 중심으로 1908년 11월에 창간된 잡지 『[[소년]]』 역시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출판물 보급과 사업연락을 위하여 평양·서울·대구에 각각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합법적인 활동을 하였다. 민족문화와 국사학에 관심 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외곽단체로서 출판사업을 이끌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77639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민족산업진흥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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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운동===
 
===청년운동===
신민회의 청년운동은 청년단체로서 주로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 중앙본부에 의하여 1909년 8월에 신민희의 합법외곽단체로서 조직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중앙총회 외에 한성연회(漢城聯會)ㆍ평양연회ㆍ의주연회ㆍ안주연회 등 지방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밖에 곽산ㆍ선천ㆍ용천ㆍ진남포 등지에서 지방연회의 발기가 있었으나 설립을 보지 못한 채, 1910년 8월 일제의 병탄을 맞게 되었다. 청년학우회운동은 민족산업 진흥운동과 비슷하게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하여 청년 단체의 조직을 너무 늦게 시작하였기 때문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28407&cid=42140&categoryId=42140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21세기 정치학대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사전연구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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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의 청년운동은 주로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 중앙본부에 의하여 1909년 8월에 신민희의 합법외곽단체로 조직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중앙총회 외에 한성연회(漢城聯會)ㆍ평양연회ㆍ의주연회ㆍ안주연회 등 지방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밖에 곽산ㆍ선천ㆍ용천ㆍ진남포 등지에서 지방연회의 발기가 있었으나 설립을 보지 못한 채, 1910년 8월 일제의 병탄을 맞게 되었다. 청년학우회운동은 민족산업 진흥운동과 마찬가지로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하여 청년 단체의 조직을 너무 늦게 시작하였기 때문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28407&cid=42140&categoryId=42140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21세기 정치학대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사전연구사.</ref>
  
 
===독립군 양성운동===
 
===독립군 양성운동===
의병운동이 패퇴하고 일제의 한반도 병탄작업이 막바지로 치닫던 1909년 봄, 신민회 간부들은 양기탁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기관의 설립을 결의했다. 1910년 3월에는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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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운동이 패퇴하고 일제의 한반도 병탄작업이 막바지로 치닫던 1909년 봄, 신민회 간부들은 양기탁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기관의 설립을 결의하였다. 1910년 3월에는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화하였다.<br/>
이어 4월 안창호 신채호 등을 만주로 보내 독립군기지 건설 후보지를 물색했고, 그해 말부터 1911년 초 사이 이회영 이시영(李始榮) 형제를 비롯해 양기탁 안태국 이동녕 등이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섰다. 이들은 1911년 4월 지린(吉林)성 류허(柳河)현 삼원보(三源堡)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식산흥업과 민족교육을 위한 항일 독립운동단체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그리고 독립군 양성기관의 전신 격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강습소라는 명칭을 내걸었으나, 이동녕이 초대 교장을 맡아 초보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했던 사실상의 무관학교였다.<ref>"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종합』, 굿모닝미디어.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46965&cid=43124&categoryId=43124 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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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4월 안창호 신채호 등을 만주로 보내 독립군기지 건설 후보지를 물색했고, 그해 말부터 1911년 초 사이 이회영·이시영 형제를 비롯해 양기탁 안태국 이동녕 등이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섰다. 이들은 1911년 4월 지린(吉林)성 류허(柳河)현 삼원보(三源堡)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식산흥업과 민족교육을 위한 항일 독립운동단체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그리고 독립군 양성기관의 전신 격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강습소라는 명칭을 내걸었으나, 이동녕이 초대 교장을 맡아 초보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했던 사실상의 무관학교였다.<ref>"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종합』, 굿모닝미디어.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46965&cid=43124&categoryId=43124 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해체===
 
===해체===
 
일제는 1911년 1월에 안악군을 중심으로 하여 황해도일대의 애국적 지도자 160여 명을 검거하고, 동시에 양기탁·임치정·주진수·이동휘·이승훈·고정화(高貞華)·김도희(金道熙)·옥관빈 등 17명을 검거하였다.<br/>
 
일제는 1911년 1월에 안악군을 중심으로 하여 황해도일대의 애국적 지도자 160여 명을 검거하고, 동시에 양기탁·임치정·주진수·이동휘·이승훈·고정화(高貞華)·김도희(金道熙)·옥관빈 등 17명을 검거하였다.<br/>
또한, 1911년 9월에는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신민회 평안남북도지회의 회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지도적 애국계몽운동가 700여 명을 검거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고 그 중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한국인 애국자들의 지하단체가 결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나, 일제에 의하여 신민회는 해체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0771&cid=41708&categoryId=41711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어국문학자료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사전연구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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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11년 9월에는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신민회 평안남북도지회의 회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지도적 애국계몽운동가 700여 명을 검거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고 그 중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한국인 애국자들의 지하단체가 결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났다. 결국 신민회는 일제에 의하여 해체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0771&cid=41708&categoryId=41711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어국문학자료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사전연구사.</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  [http://dh.aks.ac.kr/Encyves/Graph/C051/C051.htm "민족을 계몽하고 있는 안창호선생"(장리석)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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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C051/C051.htm "민족을 계몽하고 있는 안창호선생"(장리석)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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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C052/C052.htm "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박각순)"]'''
 
===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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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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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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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자원
#* 신용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74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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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74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0771&cid=41708&categoryId=41711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어국문학자료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사전연구사.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0771&cid=41708&categoryId=41711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어국문학자료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사전연구사.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77639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77639 신민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 "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종합』, 굿모닝미디어.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46965&cid=43124&categoryId=43124 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종합』, 굿모닝미디어.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46965&cid=43124&categoryId=43124 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분류:민족기록화]][[분류:단체]][[분류:민족/교열요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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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분류:단체]]

2017년 12월 25일 (월) 02:29 기준 최신판

신민회(新民會)
민족 일러 항일결사.png
대표명칭 신민회
한자표기 新民會
유형 독립운동단체
창립자 안창호,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창립시대 근대
창립일 1907년 4월


정의

1907년에 개화자강파들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단체이다.

내용

신민회의 설립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고, 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최광옥(崔光玉)·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강(李剛)·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1]

다섯 집단의 공통점

신민회의 창립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존재했던 다섯 개의 비공식집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중심으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이며, 둘째는 상동교회(尙洞敎會)를 중심으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이다. 셋째는 서북지방과 서울 등지에 있어서의 신흥시민세력의 집단이고, 넷째는 무관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집단이며, 다섯째는 미주에 있던 공립협회(共立協會)의 집단이다. 이 다섯 개 집단의 인사들은 그들 세력의 역사적 배경이 같았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동학당에서 출발한 김구 등 극소수와 미주지역동포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독립협회(1896-1898)의 청년회원들이었던 것이다.

핵심으로 성장한 재목들

[[독립협회]가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는 그들은 아직 간부로 진출하지 못하고 주로 만민공동회운동에 앞장섰던 청소년들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이후에는 각기 자기의 관련분야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써 교육구국운동을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위의 다섯 개 집단이 중핵이 되어 만든 국권회복운동단체였다.[2]

교육구국운동

신민회 회원들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는 수십 개에서 1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는 완전한 시설을 갖춘 중학교였으며,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둔 보창학교(普昌學校)는 강화군에만 21개 소학교 분교를 열었으며, 북부와 중부 각 지역에도 보창학교가 설립되었다. 신민회의 학교설립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3]

계몽강연·학회운동

신민회의 계몽 강연과 학회 활동에는 신민회의 모든 회원과 간부들이 전국 각지에서 적극 참여했는데, 그 활동은 매우 광범하였다.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학회로는,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奬會)·연학회(練學會)·동제회(同濟會)·서북학회 등이 대표적이었다. 신민회 회원들은 주로 각종 학회의 통상회와 토론회·강연회·친목회·학교·교회·운동회·기타 각종 집회를 활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4]

잡지서적 출판운동

계몽강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구습타파, 자발적 의무교육실시, 민족단합의식 등을 고취했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이용했고, 최남선을 중심으로 1908년 11월에 창간된 잡지 『소년』 역시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출판물 보급과 사업연락을 위하여 평양·서울·대구에 각각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합법적인 활동을 하였다. 민족문화와 국사학에 관심 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외곽단체로서 출판사업을 이끌었다.[5]

민족산업진흥운동

민족산업의 진흥을 위하여 우선 신민회 회원들이 출자해서 '본보기'공장과 회사를 설립하여 실업가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의 영업방침을 지도함으로써 민족산업자본의 발흥을 촉진하고자 하였다. 신민회가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실업체의 사례로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ㆍ협성동사(協成同事)ㆍ상무동사(商務同事)ㆍ조선실업회사, 안악의 소방직공장(小紡織工場) ㆍ연초공장, 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신민회의 민족산업진흥운동은 민족자본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제의 대독점자본의 압력을 받고 그에 대항해야 하였으므로 교육구국운동과 같은 큰 성과는 내지 못하였다.[6]

청년운동

신민회의 청년운동은 주로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 중앙본부에 의하여 1909년 8월에 신민희의 합법외곽단체로 조직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중앙총회 외에 한성연회(漢城聯會)ㆍ평양연회ㆍ의주연회ㆍ안주연회 등 지방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밖에 곽산ㆍ선천ㆍ용천ㆍ진남포 등지에서 지방연회의 발기가 있었으나 설립을 보지 못한 채, 1910년 8월 일제의 병탄을 맞게 되었다. 청년학우회운동은 민족산업 진흥운동과 마찬가지로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하여 청년 단체의 조직을 너무 늦게 시작하였기 때문이다.[7]

독립군 양성운동

의병운동이 패퇴하고 일제의 한반도 병탄작업이 막바지로 치닫던 1909년 봄, 신민회 간부들은 양기탁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기관의 설립을 결의하였다. 1910년 3월에는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화하였다.
이어 4월 안창호 신채호 등을 만주로 보내 독립군기지 건설 후보지를 물색했고, 그해 말부터 1911년 초 사이 이회영·이시영 형제를 비롯해 양기탁 안태국 이동녕 등이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섰다. 이들은 1911년 4월 지린(吉林)성 류허(柳河)현 삼원보(三源堡)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식산흥업과 민족교육을 위한 항일 독립운동단체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그리고 독립군 양성기관의 전신 격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강습소라는 명칭을 내걸었으나, 이동녕이 초대 교장을 맡아 초보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했던 사실상의 무관학교였다.[8]

해체

일제는 1911년 1월에 안악군을 중심으로 하여 황해도일대의 애국적 지도자 160여 명을 검거하고, 동시에 양기탁·임치정·주진수·이동휘·이승훈·고정화(高貞華)·김도희(金道熙)·옥관빈 등 17명을 검거하였다.
또한, 1911년 9월에는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신민회 평안남북도지회의 회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지도적 애국계몽운동가 700여 명을 검거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고 그 중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한국인 애국자들의 지하단체가 결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났다. 결국 신민회는 일제에 의하여 해체되었다.[9]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민회 윤치호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신민회 안창호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신민회 장지연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신민회 신채호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신민회 박은식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신민회 이동휘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신민회 이갑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신민회 이승훈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신민회 오산학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민회 대성학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대한매일신보 신민회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A dcterms:publisher B
신민회 잡지 소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민회 105인 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07년 04월 안창호신민회를 설립하였다
1908년 11월 신민회소년을 창간하였다
1909년 09월 신민회청년학우회을 창립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신용하, "신민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9월 22일.
  2. "신민회", 『국어국문학자료사전』online, 한국사전연구사.
  3. "신민회", 『doopedia』online, 두산백과.
  4. 신용하, "신민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9월 22일.
  5. "신민회", 『doopedia』online, 두산백과.
  6. "신민회", 『21세기 정치학대사전』online, 한국사전연구사.
  7. "신민회", 『21세기 정치학대사전』online, 한국사전연구사.
  8. "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종합』, 굿모닝미디어. 온라인 참조: "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9. "신민회", 『국어국문학자료사전』online, 한국사전연구사.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신용하, "신민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신민회", 『국어국문학자료사전』online, 한국사전연구사.
    • "신민회",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종합』, 굿모닝미디어. 온라인 참조: "신민회",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