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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임명미, 「韓·中·日 3국의 圭·笏에 관한 연구」, 『한국복식학회지』 V.51, N.2. 한국복식학회, 2001, 5~2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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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명칭= 홀 | + | |사진출처= 심동신(沈東臣], 1824~?)의 홀, 문화재청,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복식․자수편』, 문화재청, 2006, 12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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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용 및 참조=== | ||
+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 ||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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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희경,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 * 류희경,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 ||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문화재청, 2007. |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문화재청, 2007. | ||
*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 *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 ||
− | + | * 임명미, 「韓·中·日 3국의 圭·笏에 관한 연구」, 『한국복식학회지』 51권 2호, 한국복식학회, 2001. | |
− | * 임명미, 「韓·中·日 3국의 圭·笏에 관한 연구」, 『한국복식학회지』 | ||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
* 최규순, 『中國歷代帝王冕服硏究』, 동화대학출판부, 2007. | * 최규순, 『中國歷代帝王冕服硏究』, 동화대학출판부, 2007. | ||
− | * 최규순, 「이 시대의 진정한 ‘紳士’를 위하여」, 『전통 의생활 연구』 | + | * 최규순, 「이 시대의 진정한 ‘紳士’를 위하여」, 『전통 의생활 연구』 제 2집, 단국대학교 전통복식연구소, 2008. |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 ||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
− | + | * 홍나영ㆍ신혜성ㆍ이은진 지음,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 교문사, 20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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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9일 (화) 02:17 기준 최신판
홀 (笏) |
|
대표명칭 | 홀 |
---|---|
한자표기 | 笏 |
이칭별칭 | 수판(手板) |
구분 | 기타 |
착용신분 | 백관, 종친, 왕세자 |
착용성별 | 남성 |
정의
조선의 종친과 백관이 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손에 드는 판이다.[1]
내용
장방형(長方形)의 판으로, 잡는 아랫부분은 비단으로 만든 싸개[甘伊]로 감쌌다.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였다. 본래 군주 앞에 나아가 어떤 일을 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였으나, 후대로 내려 오면서 형식적으로 바뀌었다. 홀은 제도상으로는 대한제국 말까지 변함이 없다.[2] 신하는 군주 앞에서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킬 일이 있을 때, 손으로 직접 가리키면 예의가 없다고 여겨 홀을 들어서 가리키도록 했다.[3] 명대 백관용 수판의 명칭이 홀로 정해져, 1393년(홍무 26)에 1~5품은 '상아(象牙)', 6품 이하는 나무[木]로 정해졌다. 조선은 명의 제도에 기준해 1~4품은 상아(象牙), 5~9품은 나무(木)를 사용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왕세자 | 홀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백관 | 홀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종친 | 홀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백관의 조복 | 홀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백관의 제복 | 홀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홀 | 제복 상의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홀 | 제복 하상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홀 | 조복 상의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홀 | 조복 하상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의 홀.[5]
영상
주석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1~92쪽.
-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124쪽.
-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80쪽.
- ↑ 임명미, 「韓·中·日 3국의 圭·笏에 관한 연구」, 『服飾』51권 2호, 한국복식학회, 2001, 5~25쪽.
- ↑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 류희경,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문화재청, 2007.
-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 임명미, 「韓·中·日 3국의 圭·笏에 관한 연구」, 『한국복식학회지』 51권 2호, 한국복식학회, 2001.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최규순, 『中國歷代帝王冕服硏究』, 동화대학출판부, 2007.
- 최규순, 「이 시대의 진정한 ‘紳士’를 위하여」, 『전통 의생활 연구』 제 2집, 단국대학교 전통복식연구소, 2008.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홍나영ㆍ신혜성ㆍ이은진 지음,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 교문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