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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관의 조복]]으로 입을 때 앞판과 뒤판을 따로 만들어 하나의 허리말기에 이어 붙인다. 앞쪽은 양을 상징하는 홀수로 3폭이며, 뒤쪽은 음을 상징하는 짝수인 4폭으로 구성한다. 붉은색 가장자리에 흑색 선(縇)을 두르며, [[백관의 조복]]인 [[조복 상의|적초의]]와 [[백관의 제복]]인 [[제복 상의|청초의]]와 같이 입는다.<ref>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0쪽.</ref> [[제복 하상]]과 [[조복 하상]]은 허리말기에 주름이 | + | [[백관의 조복]]으로 입을 때 앞판과 뒤판을 따로 만들어 하나의 허리말기에 이어 붙인다. 앞쪽은 양을 상징하는 홀수로 3폭이며, 뒤쪽은 음을 상징하는 짝수인 4폭으로 구성한다. 붉은색 가장자리에 흑색 선(縇)을 두르며, [[백관의 조복]]인 [[조복 상의|적초의(赤綃衣)]]와 [[백관의 제복]]인 [[제복 상의|청초의(靑綃衣)]]와 같이 입는다.<ref>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0쪽.</ref> [[제복 하상]]과 [[조복 하상]]은 허리말기에 주름이 잡혀 있는 형태였다가 조선후기로 갈수록 허리말기 부분부터 치마 끝까지 좁은 간격으로 주름을 잡았다. 또한 전상과 후상이 허리말기의 연결된 부분에서 조금씩 겹쳐진 형태에서 전상과 후상이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형태로 바뀐 것이 특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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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京子, 「祭禮의 思想과 祭服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5. | * 朴京子, 「祭禮의 思想과 祭服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5. | ||
* 李善熙, 「祭服의 起源과 變遷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 李善熙, 「祭服의 起源과 變遷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
− | * 高光林, 「金冠 朝服에 關한 硏究」, 인천교육대학교 | + | * 高光林, 「金冠 朝服에 關한 硏究」, 논문집12, 인천교육대학교, 1978. |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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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8일 (월) 20:27 기준 최신판
제복 하상 (祭服 下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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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제복 하상 |
---|---|
한자표기 | 祭服 下裳 |
구분 | 의복 |
착용신분 | 백관, 종친 |
착용성별 | 남성 |
정의
조선의 백관, 종친 등이 국가 제사를 지내거나 정월 초하루, 동짓날, 경축일 등에 왕에게 하례(賀禮)를 드리는 의례에 참석할 때 하체에 입는 옷이다.[1]
내용
백관의 조복으로 입을 때 앞판과 뒤판을 따로 만들어 하나의 허리말기에 이어 붙인다. 앞쪽은 양을 상징하는 홀수로 3폭이며, 뒤쪽은 음을 상징하는 짝수인 4폭으로 구성한다. 붉은색 가장자리에 흑색 선(縇)을 두르며, 백관의 조복인 적초의(赤綃衣)와 백관의 제복인 청초의(靑綃衣)와 같이 입는다.[2] 제복 하상과 조복 하상은 허리말기에 주름이 잡혀 있는 형태였다가 조선후기로 갈수록 허리말기 부분부터 치마 끝까지 좁은 간격으로 주름을 잡았다. 또한 전상과 후상이 허리말기의 연결된 부분에서 조금씩 겹쳐진 형태에서 전상과 후상이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형태로 바뀐 것이 특징이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백관 | 제복 하상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백관의 제복 | 제복 하상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제복 하상 | 양관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신경유(申景裕, 1581~1633)묘 출토 조복과 제복 하상. [3]
밀창군 이직묘 출토 조복과 제복 하상.[4]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착용한 조복과 제복 하상.[5]
흥완군(興完君, 1815~1849)의 제복 일습.[6]
영상
주석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0쪽.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0쪽.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정사공신 신경유공 묘 출토복식』,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8, 20쪽.
- ↑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 ↑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 ↑ 문화재청,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복식․자수편』, 문화재청, 2006, 189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石宙善, 『衣』, 고려서적주식회사, 1985.
- 古光林, 『韓國의 冠服』, 和成社, 1990.
- 李相恩, 『朝鮮王朝服飾史論』, 東方圖書, 1992.
- 김동욱, 『종묘와 사직』, 대원사, 2002.
- 朴京子, 「祭禮의 思想과 祭服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5.
- 李善熙, 「祭服의 起源과 變遷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高光林, 「金冠 朝服에 關한 硏究」, 논문집12, 인천교육대학교, 1978.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