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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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정보
 
{{복식정보
|이미지= 부금 복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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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부금 복건.jpg
|대표명칭= 복건[幅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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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국립고궁박물관(http://www.gogung.go.kr)
|이칭별칭= 絡頭, 帕頭, 陌頭, 幧頭, 帩頭, 綃頭, 幓頭<ref>孫機(2001) 中國古與服論叢. 文物出版社. pp. 205~20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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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복건
|착용시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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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幅巾
|착용신분= 왕실, 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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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관 및 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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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용신분= [[왕세자]], 사대부
 
|착용성별= 남성
 
|착용성별= 남성
|착용연령= 성인, 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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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복식= 성인 [[치관|치관(緇冠)]], [[심의|심의(深衣)]], [[학창의|학창의(鶴氅衣)]] / 아동 [[사규삼|사규삼(四揆衫)]], [[쾌자|쾌자(褂子)]], [[배자|배자(褙子)]], [[주의|주의(周衣;두루마기)]]
 
|복식구분= 남성 예관
 
|필드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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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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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조선시대 쓰던 건(巾)의 하나. 베의 온 폭을 사용해 만들기 때문에 복건[幅巾]이라 이름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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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대부들이 일반적으로 [[심의|심의(深衣)]]와 함께 쓰던 [[건|건(巾)]]하나로, [[관례]]에도 착용하였다.
  
==착용신분과 착용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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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어린이: 어린아이의 백일과 돌 때 [[사규삼|사규삼(四䙆衫)]]이나 [[전복|전복(戰服)]] 등과 착용하던 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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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의 온 폭(幅)을 사용해 만들기 때문에 복건[幅巾]이라 이름 붙였다. 조선시대 [[왕세자]]는 [[관례]]를 행하기 위해 [[쌍동계]] 안에 착용하고, 사대부는 [[삼가례|삼가례(三加禮)]]에 첫번째로 착용하는 쓰개이다. [[주자가례|『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전래되면서 사대부의 [[예복]]이자 [[연거복]]으로 착용했다. 또한 어린아이의 백일이나 돌에 [[사규삼|사규삼(四䙆衫)]]이나 [[전복|전복(戰服)]] 등과 착용하기도 하였다. 위는 둥글고 뾰쪽하며 뒤에는 넓고 긴 자락이 늘어지게 해서 양쪽 옆에 있는 끈을 뒤로 잡아맸다. 옛날에는 흰색 베로 만들었는데 후에 검게 물들였고, 차차 검은 비단으로 바꿔서 제작했다.<ref>『[[임원경제지|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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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옛날에는 검은색 견[黑絹]으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겨울에는 검은색 단[黑緞]을 사용하고, 여름에는 검은색 사[皁紗]를 사용한다.(『林園經濟志』 卷50, 「贍用志, 服飾之具」, ‘幅巾’: “……古以皁絹爲之, 今冬用黑緞, 夏用皁紗.”)
파일:부금 복건.jpg| 왕자가 착용한 복건<ref>국립고궁박물관 소장.</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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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권50, 「섬용지(贍用志), 복식지구(服飾之具)」}}</ref> 어린이는 금박(金箔)으로 각종 무늬를 입히거나 이마 부분에 옥이나 석웅황(石雄黃)을 달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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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 조선시대 일반 사가의 [[관례복]]으로 [[초가]]시의 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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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 성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전래와 함께 사대부의 의례복이자 연거복(일상복)으로 착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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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漢代)의 두건(頭巾)에서 변형된 형태로, 처음에는 재야의 선비가 썼으나, 한말(漢末)에 이르러 왕공(王公)들이 선비의 옷을 입고 [[복건]]을 썼는데, 우아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인해 착용하게 되었다고 한다.<ref> [[삼재도회|『삼재도회(三才圖會)』]]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Blockquote|옛날 서인들은 복건을 쓰고 사는 관을 썼다. 『傅子』에서 이르기를, ‘한나라 말 왕공들은 士의 복장인 복건을 우아하고 소박하다고 여긴 사람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건()을 착용하는 것은 옛날 미천한 사람들의 옷인데, 한나라 말에 비로소 士人의 옷이 되었다.(古庶人幅巾, 士則冠矣. 『傅子』曰: ‘漢末王公, 多委士服以幅巾爲雅素, 則服巾.’ 古賤者之服也, 漢末始爲士人之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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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三才圖會』, 「衣服1」, '幅巾'. }}</ref>  
파일:송시열 복건.jpg|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초상화<ref>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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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온공|사마온공(司馬溫公)]]에 이르러 [[심의]]와 함께 연거할 때 착용하는 관복[燕居冠服]이 되었고, [[주자]]가 다시  [[『가례(家禮)』]]에 실어<ref>『[[가례|가례(家禮)]]』에는 제작법도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 방법은 아래와 같다.
파일:이진숭 복건.JPG| 이진숭(李鎭嵩, 1702~1756) 묘 출토<ref>국립민속박물관 소장.</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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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검은 비단 6척 남짓을 사용한다. 가운데를 접고, 오른쪽 가장자리는 접은 바로 그곳에 가로로 두 귀를 만들고, 왼쪽 가장자리는 반대로 접는다. 두 귀에서 왼쪽으로 4~5촌 거리에서부터 비스듬히 꿰매어 왼쪽을 향해 둥글게 아래로 내려가고, 그대로 왼쪽 가장자리를 따라 양 끝에 이른다. 다시 시접을 반대로 하여, 그것을 안으로 향하게 한다. 첩은 이마 앞에 오게 해서 감싼다. 양쪽 상투 옆에 이르러서는 각각 하나의 끈을 다는데, 너비는 2촌이고 길이는 2척이다. 복건의 밖으로부터 뒷머리(뒤통수)로 넘겨 서로 묶어 드리운다.(“用黑繒六尺許. 中屈之, 右邊就屈處爲橫㡇, 左邊反屈之, 自㡇左四五寸間斜縫, 向左圓曲而下, 遂循左邊至於兩末, 復反所縫餘繒, 使之向裏, 以㡇當額前裹之, 至兩鬢旁, 各綴一帶, 廣二寸, 長二尺, 自巾外過頂後, 相結而垂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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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주자가례(朱子家禮)』 권1, 「통례(通禮)」}}</ref> 마침내 예복이 되었다.<ref> 『林園經濟志』 卷50, 「贍用志, 服飾之具」, ‘幅巾’: “……及司馬溫公, 與深衣同作燕居冠服, 朱子又載之 『家禮』, 則遂爲禮服矣.……”</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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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정보===
파일:복식구성,복건고궁.jpg| 원룡문단 부금 복건<ref>국립고궁박물관 소장.</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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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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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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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 한대(漢代)의 두건(頭巾)에서 변형된 형태.
 
* 처음에는 재야의 사(士)가 썼으나, 한말(漢末)에 이르러 왕공(王公)들이 사의 옷을 입고 복건을 썼는데, 모습이 우아하고 소박한 것이 착용 계기가 됨.<ref> 『三才圖會』 「衣服1」, 幅巾: “옛날 서인들은 복건을 쓰고 사는 관을 썼다. 󰡔傅子󰡕에서 이르기를, ‘한나라 말 왕공들은 士의 복장인 복건을 우아하고 소박하다고 여긴 사람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巾을 착용하는 것은 옛날 미천한 사람들의 옷인데, 한나라 말에 비로소 士人의 옷이 되었다.(古庶人幅巾, 士則冠矣.  『傅子』曰: ‘漢末王公, 多委士服以幅巾爲雅素, 則服巾.’ 古賤者之服也, 漢末始爲士人之服.)”</ref>
 
* 위진남북조시기 도교가 유행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추어 더욱 유행.
 
* 사마온공(司馬溫公)에 이르러 심의와 함께 연거할 때 착용하는 관복[燕居冠服]이 되었고, 주자가 다시  『가례(家禮)』에 싣자 마침내 예복이 됨.<ref> 『林園經濟志』 卷50, 「贍用志, 服飾之具」, ‘幅巾’: “……及司馬溫公, 與深衣同作燕居冠服, 朱子又載之 『家禮』, 則遂爲禮服矣.……”</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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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주자가례 복건.jpg|  『주자가례(朱子家禮)』 「가례도(家禮禮)」  
 
파일:주자가례 복건.jpg|  『주자가례(朱子家禮)』 「가례도(家禮禮)」  
 
파일:사례편람 복건.jpg|  『사례편람(四禮便覽)』 卷1, 「관례(冠禮) 9」
 
파일:사례편람 복건.jpg|  『사례편람(四禮便覽)』 卷1, 「관례(冠禮)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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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송시열 복건.jpg|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초상화<ref>국립중앙박물관(http://www.museum.go.kr/) 소장.</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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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진숭 복건.JPG| 이진숭(李鎭嵩, 1702~1756) 묘 출토<ref>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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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복식구성,복건고궁.jpg| 원룡문단 부금 복건<ref>국립고궁박물관(http://www.gogung.go.kr/) 소장.</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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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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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위는 둥글고 뾰쪽하며 뒤에는 넓고 긴 자락이 늘어지게 해서 양쪽 옆에 있는 끈을 뒤로 잡아맨 것.
+
<references/>
* 옛날에는 흰색 베로 만들었는데 뒤에 검게 물들이게 되었고, 차차 검은 비단으로 바꿔서 제작.<ref>李永馥(1983) 深衣에 關한 硏究.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P. 23.; 金仁淑(1977) 深衣考. 의류직물연구 5,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직물학회. p. 67.</ref>
 
* 어린이는 금박(金箔)으로 각종 무늬를 입히거나 이마 부분에 옥이나 석웅황을 달아 장식.
 
 
 
===일반적인 제작법===
 
{{Blockquote|검은 비단 6척 남짓을 사용한다. 가운데를 접고, 오른쪽 가장자리는 접은 바로 그곳에 가로로 두 귀를 만들고, 왼쪽 가장자리는 반대로 접는다. 두 귀에서 왼쪽으로 4~5촌 거리에서부터 비스듬히 꿰매어 왼쪽을 향해 둥글게 아래로 내려가고, 그대로 왼쪽 가장자리를 따라 양 끝에 이른다. 다시 시접을 반대로 하여, 그것을 안으로 향하게 한다. 첩은 이마 앞에 오게 해서 감싼다. 양쪽 상투 옆에 이르러서는 각각 하나의 끈을 다는데, 너비는 2촌이고 길이는 2척이다. 복건의 밖으로부터 뒷머리(뒤통수)로 넘겨 서로 묶어 드리운다.<ref> 『朱子家禮』 卷1, 「通禮」, 幅巾: “用黑繒六尺許. 中屈之, 右邊就屈處爲橫㡇, 左邊反屈之, 自㡇左四五寸間斜縫, 向左圓曲而下, 遂循左邊至於兩末, 復反所縫餘繒, 使之向裏, 以㡇當額前裹之, 至兩鬢旁, 各綴一帶, 廣二寸, 長二尺, 自巾外過頂後, 相結而垂之.”</ref>}}
 
{{Blockquote|옛날에는 검은색 견[黑絹]으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겨울에는 검은색 단[黑緞]을 사용하고, 여름에는 검은색 사[皁紗]를 사용한다.<ref> 『林園經濟志』 卷50, 「贍用志, 服飾之具」, ‘幅巾’: “……古以皁絹爲之, 今冬用黑緞, 夏用皁紗.”</ref>}}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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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가례집람|『가례집람(家禮輯覽)』]]
 
* [[가례집람|『가례집람(家禮輯覽)』]]
 
* [[주자가례|『주자가례(朱子家禮)』]]
 
* [[주자가례|『주자가례(朱子家禮)』]]
 
* [[삼재도회|『삼재도회(三才圖會)』]]
 
* [[삼재도회|『삼재도회(三才圖會)』]]
 
* [[임원경제지|『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임원경제지|『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金仁淑(1977) 深衣考. 의류직물연구 5,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직물학회.  
+
*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2015.
* 李永馥(1983) 深衣에 關한 硏究.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
* 金仁淑, 「深衣考」, 『의류직물연구』, 제 5권,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직물학회, 1977
* 정혜경(1998) 深衣. 경남대학교 출판부: 창원.  
+
* 김혜경, 「韓國 冠禮와 그 服飾 硏究」, 『한복문화』 제5권 1호, 한복문화학회, 2002.
* 孫機(2001) 中國古與服論叢. 文物出版社: 北京.
+
* 李永馥, 「深衣에 關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
* 朴垈洵, 「朝鮮時代 冠禮의 史的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
==주석==
+
* 孫機, 『中國古與服論叢』, 文物出版社, 2001.
<references/>
+
* 李倫姃, 「冠禮의 節次·服飾에 內在된 意味」,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
* 정혜경, 『深衣』,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8.
  
[[분류:궁중기록화]] [[분류:왕실]] [[분류:반가]] [[분류:성인]] [[분류:아동]] [[분류:남성 예관]]
+
[[분류:궁중기록화]]
 +
[[분류:복식]]

2017년 12월 16일 (토) 23:33 기준 최신판


복건
(幅巾)
국립고궁박물관(http://www.gogung.go.kr)
대표명칭 복건
한자표기 幅巾
구분 관 및 쓰개
착용신분 왕세자, 사대부
착용성별 남성



정의

조선의 사대부들이 일반적으로 심의(深衣)와 함께 쓰던 건(巾)의 하나로, 관례에도 착용하였다.

내용

베의 온 폭(幅)을 사용해 만들기 때문에 복건[幅巾]이라 이름 붙였다. 조선시대 왕세자관례를 행하기 위해 쌍동계 안에 착용하고, 사대부는 삼가례(三加禮)에 첫번째로 착용하는 쓰개이다.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전래되면서 사대부의 예복이자 연거복으로 착용했다. 또한 어린아이의 백일이나 돌에 사규삼(四䙆衫)이나 전복(戰服) 등과 착용하기도 하였다. 위는 둥글고 뾰쪽하며 뒤에는 넓고 긴 자락이 늘어지게 해서 양쪽 옆에 있는 끈을 뒤로 잡아맸다. 옛날에는 흰색 베로 만들었는데 후에 검게 물들였고, 차차 검은 비단으로 바꿔서 제작했다.[1] 어린이는 금박(金箔)으로 각종 무늬를 입히거나 이마 부분에 옥이나 석웅황(石雄黃)을 달아 장식했다.

한대(漢代)의 두건(頭巾)에서 변형된 형태로, 처음에는 재야의 선비가 썼으나, 한말(漢末)에 이르러 왕공(王公)들이 선비의 옷을 입고 복건을 썼는데, 우아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인해 착용하게 되었다고 한다.[2] 사마온공(司馬溫公)에 이르러 심의와 함께 연거할 때 착용하는 관복[燕居冠服]이 되었고, 주자가 다시 『가례(家禮)』에 실어[3] 마침내 예복이 되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왕세자 복건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사대부 복건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기록되어 있다.
    Quote-left.png 옛날에는 검은색 견[黑絹]으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겨울에는 검은색 단[黑緞]을 사용하고, 여름에는 검은색 사[皁紗]를 사용한다.(『林園經濟志』 卷50, 「贍用志, 服飾之具」, ‘幅巾’: “……古以皁絹爲之, 今冬用黑緞, 夏用皁紗.”) Quote-right.png
    출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권50, 「섬용지(贍用志), 복식지구(服飾之具)」

  2. 『삼재도회(三才圖會)』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Quote-left.png 옛날 서인들은 복건을 쓰고 사는 관을 썼다. 『傅子』에서 이르기를, ‘한나라 말 왕공들은 士의 복장인 복건을 우아하고 소박하다고 여긴 사람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건(巾)을 착용하는 것은 옛날 미천한 사람들의 옷인데, 한나라 말에 비로소 士人의 옷이 되었다.(古庶人幅巾, 士則冠矣. 『傅子』曰: ‘漢末王公, 多委士服以幅巾爲雅素, 則服巾.’ 古賤者之服也, 漢末始爲士人之服.) Quote-right.png
    출처: 『三才圖會』, 「衣服1」, '幅巾'.

  3. 가례(家禮)』에는 제작법도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 방법은 아래와 같다.
    Quote-left.png 검은 비단 6척 남짓을 사용한다. 가운데를 접고, 오른쪽 가장자리는 접은 바로 그곳에 가로로 두 귀를 만들고, 왼쪽 가장자리는 반대로 접는다. 두 귀에서 왼쪽으로 4~5촌 거리에서부터 비스듬히 꿰매어 왼쪽을 향해 둥글게 아래로 내려가고, 그대로 왼쪽 가장자리를 따라 양 끝에 이른다. 다시 시접을 반대로 하여, 그것을 안으로 향하게 한다. 첩은 이마 앞에 오게 해서 감싼다. 양쪽 상투 옆에 이르러서는 각각 하나의 끈을 다는데, 너비는 2촌이고 길이는 2척이다. 복건의 밖으로부터 뒷머리(뒤통수)로 넘겨 서로 묶어 드리운다.(“用黑繒六尺許. 中屈之, 右邊就屈處爲橫㡇, 左邊反屈之, 自㡇左四五寸間斜縫, 向左圓曲而下, 遂循左邊至於兩末, 復反所縫餘繒, 使之向裏, 以㡇當額前裹之, 至兩鬢旁, 各綴一帶, 廣二寸, 長二尺, 自巾外過頂後, 相結而垂之.”) Quote-right.png
    출처: 『주자가례(朱子家禮)』 권1, 「통례(通禮)」

  4. 『林園經濟志』 卷50, 「贍用志, 服飾之具」, ‘幅巾’: “……及司馬溫公, 與深衣同作燕居冠服, 朱子又載之 『家禮』, 則遂爲禮服矣.……”
  5. 국립중앙박물관(http://www.museum.go.kr/) 소장.
  6.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7. 국립고궁박물관(http://www.gogung.go.kr/) 소장.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가례집람(家禮輯覽)』
  • 『주자가례(朱子家禮)』
  • 『삼재도회(三才圖會)』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2015.
  • 金仁淑, 「深衣考」, 『의류직물연구』, 제 5권,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직물학회, 1977
  • 김혜경, 「韓國 冠禮와 그 服飾 硏究」, 『한복문화』 제5권 1호, 한복문화학회, 2002.
  • 李永馥, 「深衣에 關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 朴垈洵, 「朝鮮時代 冠禮의 史的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
  • 孫機, 『中國古與服論叢』, 文物出版社, 2001.
  • 李倫姃, 「冠禮의 節次·服飾에 內在된 意味」,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 정혜경, 『深衣』,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