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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사학위논문, 2000, 14-15쪽.</ref> 따라서 가체의 풍습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가체의 풍습은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영향도 받아 더욱 크게 성행하였다. <ref>유희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80 가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석사학위논문, 2000, 14-15쪽.</ref> 따라서 가체의 풍습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가체의 풍습은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영향도 받아 더욱 크게 성행하였다. <ref>유희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80 가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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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초기 여인들의 머리 모양은 고려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 | + | ===조선 시대 [[가체]]의 유행과 금지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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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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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논문 | ||
**송승희, 「가체를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여성의 머리장식 연구, 신윤복의 풍속화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 **송승희, 「가체를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여성의 머리장식 연구, 신윤복의 풍속화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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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주, 『조선 사대부가의 살림살이』,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 **이민주, 『조선 사대부가의 살림살이』,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 ||
**반주원, 『조선시대 살아보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생활사』, 미래의 창, 2017. | **반주원, 『조선시대 살아보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생활사』, 미래의 창, 20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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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윤미, "[http://www.k-heritage.tv/brd/board/275/L/CATEGORY/325/menu/251?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325&bbIdx=2763&brdType=R 머리가 무거울수록 멋쟁이]",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채널』<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문화재재단, 2012년 4월 4일. | + | *박윤미, "[http://www.k-heritage.tv/brd/board/275/L/CATEGORY/325/menu/251?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325&bbIdx=2763&brdType=R 머리가 무거울수록 멋쟁이]",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채널』<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문화재재단, 작성일: 2012년 4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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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Main.do?search_div=CP_AGE&search_div_id=CP_AGE001&cp_code=cp0413 전통머리모양과 머리치레거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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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개념]] |
2017년 11월 30일 (목) 11:42 기준 최신판
가체 (加髢) |
|
대표명칭 | 가체 |
---|---|
한자표기 | 加髢 |
이칭 | 체(髢) |
유형 | 장신구 |
목차
정의
여자의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넣는 딴 머리인 다리를 여러개 이어 올린 머리가발이다.
내용
조선 이전의 가체 사용
『당서(唐書)』 에는 신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두발을 머리에 두르고 장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미체(美髢)'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다리이며, 신라의 명물로 외국에 수출도 하였다.[1] 고구려의 경우 안악 3호분 동수부인 벽화에서 동수부인과 시녀들이 가체를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의 복식이 비슷했고,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용 금제 머리 장식을 보아 가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따라서 가체의 풍습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가체의 풍습은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영향도 받아 더욱 크게 성행하였다. [3]
조선 시대 가체의 유행과 금지령
조선시대 초기 여인들의 머리 모양은 고려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 중엽부터는 가체가 더욱 사치스러워지고, 후기로 갈수록 크기도 커졌다. 전에는 한두 개 정도였던 다리를 여러 개 이어 올려 높게 만든 가체를 왕비부터 천민까지 모두 사용하였다. 가체의 유행은 다양한 머리 모양의 출현과 더불어 비녀, 뒤꽂이, 떨잠과 같은 머리 장신구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정도가 극심하여 조정에서는 수십 년 동안 가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결국 1788년 조선 정조는 가체를 금지하는 「가체신금사목」을 반포한다. [4]
지식 관계망
- 가체신금사목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당서 | 가체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삼국사기 | 가체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안악 3호분 동수부인 벽화 | 가체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가체신금사목 | 가체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가체신금사목 반포 | 가체신금사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조선 정조 | 가체신금사목 반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가체 | 다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788년 | 조선 정조가 가체신금사목 반포를 명령하였다. |
1801년 | 조선 정조가 가체의 금지를 명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유희경, "가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주, 「조선시대 가체 변화에 관한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14-15쪽.
- ↑ 유희경, "가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주, 「조선시대 가체 변화에 관한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17-18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송승희, 「가체를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여성의 머리장식 연구, 신윤복의 풍속화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 김성아·박명주, 「가체금지령 이후 가체를 이용한 머리모양에 관한 연구 : 가체머리, 얹은머리, 트레머리와 비교 분석」, 『미용산업연구』4, 한국미용산업학회, 2003.
- 박수향, 「조선시대 여인의 머리모양과 화장에 관한 연구 - 가체머리를 중심으로 - 」, 『코리아뷰티디자인학회지』4, 코리아뷰티디자인학회, 2008.
- 김민정·이상은, 「미용학적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가체 문화사」, 『역사민속학』31, 한국역사민속학회, 2009.
- 단행본
- 이민주, 『조선 사대부가의 살림살이』,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 반주원, 『조선시대 살아보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생활사』, 미래의 창, 2017.
유용한 정보
- 박윤미, "머리가 무거울수록 멋쟁이",
『문화유산채널』online , 한국문화재재단, 작성일: 2012년 4월 4일.
- "전통머리모양과 머리치레거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