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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8일 (화) 16:57 기준 최신판
김시습(金時習) | |
대표명칭 | 김시습 |
---|---|
한자표기 | 金時習 |
생몰년 | 1435년-1493년 |
본관 | 강릉(江陵) |
이칭 | 설잠(雪岑) |
호 |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
자 | 열경(悅卿) |
출생지 | 서울 |
사망지 | 부여 무량사 |
시대 | 조선 |
대표저서 | 매월당집,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
배우자 | 남씨 부인 |
부 | 김일성 |
모 | 선산 장씨 부인 |
정의
조선 초기의 문인.
내용
생애
김시습(金時習)은 1437년(세종 19)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또한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오세(五歲,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1]
21세 때, 1455년(세조 1)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특히 사육신의 충절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으로 자처하면서 은둔과 방랑으로 울분을 삭였다.[2] 1465년(세조 11)에는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입산하였는데, 이곳에서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그러다가 마침내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서울로 올라오지만 1482년(성종 13)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 정국이 흉흉해지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가 부여의 무량사(無量寺)에 거처를 정하였는데 이곳에서 병사하였다.[3]
사상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공은 사람됨이 호매(豪邁)하고 영리하며 강직하였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개하여 울적한 기운을 펼치지 못하고 시속(時俗)을 따로 넘지 못하여 드디어 물외(物外)에 방랑하였다. 국내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렀다. 고도(古都)에 유랑하여 머뭇거리며 슬피 노래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고 하여 김시습이 시대가 만든 불운의 지식인임을 언급하였다. 김시습은 유교·불교·도교에 두루 해박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그의 초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반 유학자들은 흔히 쓰지 않는 모자를 쓰고 흡사 염주와 같은 장식을 건 모습은 그가 기인(奇人)의 풍모를 지녔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또 『해동이적(海東異蹟)』과 같이 도가(道家)의 학맥(學脈)을 정리한 책에는 대부분 김시습이 조선시대 도가의 비조(鼻祖)로 기록되어 있다.[4] 이 때문에그는 후대에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李滉)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5]
김시습은 유 · 불 · 도 삼교를 회통(會通)하면서 「신귀설(神鬼說)」, 「태극설(太極說)」, 「귀신론」 등을 통하여 불교와 도교의 신비론(神祕論)을 부정하면서 적극적인 현실론을 폈다. 이는 유교의 속성인 현실을 중심으로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면과 맥이 닿고 있다. 잡저(雜著)의 대부분은 불교에 관한 글들인데, 그는 부처의 자비정신을 통해 한 나라의 군주가 그 백성을 사랑하여, 패려(悖戾) · 시역(弑逆)의 부도덕한 정치를 제거하도록 하는데 적용하였다. 이같이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은 그의 「애민의(愛民議)」에 가장 잘 반영되어 있고, 유교 · 불교 · 도교에 걸친 해박하고 심오한 사상을 잘 드러내 주는 저서로는 시문집인 『매월당집(梅月堂集)』이 있다. [6]
금오신화
김시습은 금오산(金鰲山)에서 칩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하였다. 금오신화는 전기체 소설의 효시로서 현재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5편이 남아 있는데, 현전하는 책의 구성으로 보아 이보다 더 많은 글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개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인물들로, 모두 현실 세상을 등지고 몽유적 세계 속에서 기이한 일을 겪는다. 이전의 한문 창작물들과는 달리 주인공은 우리나라 사람이며, 배경 또한 우리나라로 되어 있어서 한국적인 풍속과 사상, 감정이 잘 녹아 있다. 금오신화는 중국 명나라 때의 소설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을 일부 받았다고 추측되는데, 작품 속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에 반해 인간을 압박하는 것들에 대해 강력한 대항을 하고 있어 자유와 초월을 갈구하는 작가만의 개성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한문소설의 기준을 세웠고, 이를 시작으로 이후 많은 한문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7]
지식관계망
- 김시습과 성삼문과 박팽년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김시습 | 금오신화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김시습 | 매월당집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김시습 | 생육신 | A는 B와 관련이있다 | |
김시습 | 부여 무량사 | A는 B와 관련이있다 | |
연려실기술 | 김시습 | A는 B와 관련이있다 | |
김시습 초상 | 김시습 | A는 B를 묘사하였다 | |
조선 세종 | 김시습 | A는 B와 관련이있다 | |
조선 세조 | 김시습 | A는 B와 관련이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435년 | 김시습이 출생하였다 |
1455년 | 김시습이 계유정난을 계기로 승려가 되었다 |
1465년 | 김시습이 금오산에 입산하였다 |
1482년 | 김시습이 폐비윤씨사건을 계기로 다시 방랑에 나섰다 |
1493년 | 김시습이 부여 무량사에서 병사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NATV 국회방송, "NATV 국회방송 한국의 정신 절개와 지조의 천재 문인 김시습", YouTube, 게시일: 2015년 2월 8일.
주석
- ↑ 고경식, "김시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병주, 노대환,『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배게, 2013. 온라인참조: "절의와 광기의 지식인 김시습",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절개를 지킨 방랑시인 김시습", 한국의 위대한 인물, 국립중앙도서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병주, 노대환,『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배게, 2013. 온라인참조: "절의와 광기의 지식인 김시습",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절개를 지킨 방랑시인 김시습", 한국의 위대한 인물,
『국립중앙도서관』, online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절개를 지킨 방랑시인 김시습", 한국의 위대한 인물,
『국립중앙도서관』, online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정미, "김시습",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 고경식, "김시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신병주, 노대환,『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배게, 2013. 온라인참조: "절의와 광기의 지식인 김시습",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절개를 지킨 방랑시인 김시습", 한국의 위대한 인물,
『국립중앙도서관』, online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정미, "김시습",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