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초상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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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신영상|노석 신영상(老石 辛永常, 1935년-)]]이 그렸고 1987년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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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영정의 제작 및 보관===
===표준영정 선정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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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상|노석 신영상(老石 辛永常, 1935년-)]]이 그렸고 1987년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br/>
[[최무선]]은 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조사 결과 선정된 109위의 선현 중 하나로서 [[표준영정]]으로 제작되었다. 그는 고려 말 화약을 비롯한 무기 연구 및 제조에 힘써 여러 번 왜구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우리나라 무기제조사와 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즉 [[최무선]]이 가진 이미지를 활용, 국민들에게 국가 안보 및 국력 증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109위의 선현 중 명장(名將)이 10명, 구국 및 순국선열이 31명, 기타 구국과 국방 관련 인물이 11인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ref>이영미,「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51-5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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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은 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조사 결과 선정된 109위의 선현 중 하나로서 [[표준영정]]으로 제작되었다. 그는 고려 말 화약을 비롯한 무기 연구 및 제조에 힘써 여러 번 왜구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우리나라 무기제조사와 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즉 [[최무선]]이 가진 이미지를 활용, 국민들에게 국가 안보 및 국력 증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109위의 선현 중 명장(名將)이 10명, 구국 및 순국선열이 31명, 기타 구국과 국방 관련 인물이 11인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ref>이영미,「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51-52쪽.</ref><br/>
===반신상===
 
 
[[설총 표준영정(1992)]], [[정도전 표준영정(1994)]] 등을 비롯한 14점의 [[표준영정]]을 그린 작가 권오창은 "최근의 표준 영정은 전신상이 원칙이기 때문에 반신상은 논의에서 배제돼야 한다"고 하였다.<ref>신화준,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426760,'동해왕 이사부' 표준 영정 포럼 "반신상 배제 전신상이 원칙"]",『강원도민일보』, 2009년 8월 10일.</ref> 그러나 [[최무선]] 표준영정의 경우 약 30년 전 제작, 지정되었기 때문에 반신상으로 그려져 있다.
 
[[설총 표준영정(1992)]], [[정도전 표준영정(1994)]] 등을 비롯한 14점의 [[표준영정]]을 그린 작가 권오창은 "최근의 표준 영정은 전신상이 원칙이기 때문에 반신상은 논의에서 배제돼야 한다"고 하였다.<ref>신화준,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426760,'동해왕 이사부' 표준 영정 포럼 "반신상 배제 전신상이 원칙"]",『강원도민일보』, 2009년 8월 10일.</ref> 그러나 [[최무선]] 표준영정의 경우 약 30년 전 제작, 지정되었기 때문에 반신상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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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영정에 묘사된 모습===
===관복 차림===
 
 
고려 시대 백관들이 입던 복식은 관(冠)의 하나인 복두(幞頭)에서부터 품대(品帶), 관복(官服)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소재나 문양에 따라서 세분화되었다.<br/>
 
고려 시대 백관들이 입던 복식은 관(冠)의 하나인 복두(幞頭)에서부터 품대(品帶), 관복(官服)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소재나 문양에 따라서 세분화되었다.<br/>
 
[[최무선]]은 초상화 속에서 끝이 둥글게 처리된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푸른 단령(團領)을 입은 상복(常服) 차림으로 묘사되었다.<br/>
 
[[최무선]]은 초상화 속에서 끝이 둥글게 처리된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푸른 단령(團領)을 입은 상복(常服) 차림으로 묘사되었다.<br/>
상복(常服)의 기본인 사모와 단령 착용은 고려 우왕13년(1387년) 사신으로 갔던 설장수가 명나라 왕이 하사한 사모와 단령을 입고 돌아오자 정몽주의 건의에 의해 시행된 것이다. 1품에서 9품까지 사모, 단령을 착용하였고 대로 품계의 상하를 구별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7408&cid=49283&categoryId=49283 고려시대 관복을 입은 관료_정몽주]", 문화원형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초상화 속 [[최무선]]은 금빛 품대(品帶)를 둘러 고위 관료임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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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常服)의 기본인 사모와 단령 착용은 고려 우왕13년(1387년) 사신으로 갔던 설장수가 명나라 왕이 하사한 사모와 단령을 입고 돌아오자 정몽주의 건의에 의해 시행된 것이다. 1품에서 9품까지 사모, 단령을 착용하였고 대로 품계의 상하를 구별하였다.<ref>"고려시대 관복을 입은 관료_정몽주",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고유복식)』, 한국콘텐츠진흥원.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7408&cid=49283&categoryId=49283 고려시대 관복을 입은 관료_정몽주]", 문화원형백과-한국의 고유복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초상화 속 [[최무선]]은 금빛 품대(品帶)를 둘러 고위 관료임을 나타내고 있다.  
===복색(服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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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색(服色)====
먼저 의종(1147-1170년) 대에 제정된 품계에 따른 복색을 살펴보면, 1~4품은 자(紫)색, 5~6품은 비(緋)색, 7~9품은 녹(綠)색의 관복을 입도록 하였다. 이러한 복색 제도는 고려와 동시대에 존재하였던 송, 금, 원나라에서도 큰 차이 없이 나타나며, 법흥뫙 7년(520)에 제정된 복색 제도와도 거의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확고하게 정착된 제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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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의종(1147-1170년) 대에 제정된 품계에 따른 복색을 살펴보면, 1~4품은 자(紫)색, 5~6품은 비(緋)색, 7~9품은 녹(綠)색의 관복을 입도록 하였다. 이러한 복색 제도는 고려와 동시대에 존재하였던 송, 금, 원나라에서도 큰 차이 없이 나타나며, 법흥뫙 7년(520)에 제정된 복색 제도와도 거의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확고하게 정착된 제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ref>이승혜,「고려시대 관복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그러나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려 시대 관복을 청색(靑色)으로 묘사한 것이 고증 오류라고 확단하기는 힘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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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 관련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려 시대 관복을 청색(靑色)으로 묘사한 것이 고증 오류라고 확단하기는 힘들다.<br/>
 
초상화에서 [[최무선]]을 청색 관복 차림으로 묘사한 것은, 조선 초기 제정된 관복 제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태조실록』 1392년 12월 12일자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초상화에서 [[최무선]]을 청색 관복 차림으로 묘사한 것은, 조선 초기 제정된 관복 제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태조실록』 1392년 12월 12일자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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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이영미,「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이영미,「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조은정, 「표준영정에 대한 연구」, 『로컬리티 인문학』 제15권,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조은정, 「표준영정에 대한 연구」, 『로컬리티 인문학』 제15권,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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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혜,「고려시대 관복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웹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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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자원
 
#*신화준,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426760,'동해왕 이사부' 표준 영정 포럼 "반신상 배제 전신상이 원칙"]",『강원도민일보』, 2009년 8월 10일.
 
#*신화준,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426760,'동해왕 이사부' 표준 영정 포럼 "반신상 배제 전신상이 원칙"]",『강원도민일보』, 2009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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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관복을 입은 관료_정몽주",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고유복식)』, 한국콘텐츠진흥원.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7408&cid=49283&categoryId=49283 고려시대 관복을 입은 관료_정몽주]", 문화원형백과-한국의 고유복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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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grpId=&itemId=JT&gubun=book&depth=5&cate1=&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JT_A0_A01_12A_12A_00020 태조 1년 임신(1392) 12월 12일(무오)]", 조선왕조실록,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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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초상화]][[분류:표준영정]]

2017년 11월 28일 (화) 13:29 기준 최신판


최무선 영정
"최무선",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한국문화정보원.
한자명칭 崔茂宣影幀
작가 신영상
제작시기 1987년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유형 표준영정
크기(세로×가로) 135×88㎝


정의

고려 말기의 발명가 최무선(崔茂宣, 1325년-1395년)표준영정.

내용

표준영정의 제작 및 보관

노석 신영상(老石 辛永常, 1935년-)이 그렸고 1987년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무선은 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조사 결과 선정된 109위의 선현 중 하나로서 표준영정으로 제작되었다. 그는 고려 말 화약을 비롯한 무기 연구 및 제조에 힘써 여러 번 왜구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우리나라 무기제조사와 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즉 최무선이 가진 이미지를 활용, 국민들에게 국가 안보 및 국력 증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109위의 선현 중 명장(名將)이 10명, 구국 및 순국선열이 31명, 기타 구국과 국방 관련 인물이 11인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
설총 표준영정(1992), 정도전 표준영정(1994) 등을 비롯한 14점의 표준영정을 그린 작가 권오창은 "최근의 표준 영정은 전신상이 원칙이기 때문에 반신상은 논의에서 배제돼야 한다"고 하였다.[2] 그러나 최무선 표준영정의 경우 약 30년 전 제작, 지정되었기 때문에 반신상으로 그려져 있다.

표준영정에 묘사된 모습

고려 시대 백관들이 입던 복식은 관(冠)의 하나인 복두(幞頭)에서부터 품대(品帶), 관복(官服)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소재나 문양에 따라서 세분화되었다.
최무선은 초상화 속에서 끝이 둥글게 처리된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푸른 단령(團領)을 입은 상복(常服) 차림으로 묘사되었다.
상복(常服)의 기본인 사모와 단령 착용은 고려 우왕13년(1387년) 사신으로 갔던 설장수가 명나라 왕이 하사한 사모와 단령을 입고 돌아오자 정몽주의 건의에 의해 시행된 것이다. 1품에서 9품까지 사모, 단령을 착용하였고 대로 품계의 상하를 구별하였다.[3] 초상화 속 최무선은 금빛 품대(品帶)를 둘러 고위 관료임을 나타내고 있다.

복색(服色)

먼저 의종(1147-1170년) 대에 제정된 품계에 따른 복색을 살펴보면, 1~4품은 자(紫)색, 5~6품은 비(緋)색, 7~9품은 녹(綠)색의 관복을 입도록 하였다. 이러한 복색 제도는 고려와 동시대에 존재하였던 송, 금, 원나라에서도 큰 차이 없이 나타나며, 법흥뫙 7년(520)에 제정된 복색 제도와도 거의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확고하게 정착된 제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4]
그러나 아직 관련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려 시대 관복을 청색(靑色)으로 묘사한 것이 고증 오류라고 확단하기는 힘들다.
초상화에서 최무선을 청색 관복 차림으로 묘사한 것은, 조선 초기 제정된 관복 제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태조실록』 1392년 12월 12일자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Quote-left.png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명년 원정(元正)부터 비로소 [명의] 조정에서 제정한 관복(冠服)을 입게 하고 예조로 하여금 상심(詳審)하여 정하게 하니, 예조에서 보고하기를, '1품은 홍포(紅袍)ㆍ서대(犀帶)요, 2품에서 판각문(判閣門) 이상은 홍포(紅袍) 여지 금대(荔枝金帶)요, 3, 4품은 청포(靑袍)ㆍ흑각 혁대(黑角革帶)ㆍ상홀(象笏)이요, 5, 6품은 청포(靑袍)ㆍ흑각 혁대(黑角革帶)ㆍ목홀(木笏)이요, 7품 이하는 녹포(綠袍)요, 대(帶)와 홀(笏)은 5, 6품과 같고, 신[靴]은 모두 검은 빛깔로 사용하게 할 것입니다.'하였습니다."
Quote-right.png
출처: "태조 1년 임신(1392) 12월 12일(무오)",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최무선 표준영정 표준영정 A의 유형은 B이다 A dcterms:type B
최무선 표준영정 최무선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최무선 표준영정 국립현대미술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최무선 표준영정 신영상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87년 최무선 표준영정(1987)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이영미,「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51-52쪽.
  2. 신화준, "이사부' 표준 영정 포럼 "반신상 배제 전신상이 원칙"",『강원도민일보』, 2009년 8월 10일.
  3. "고려시대 관복을 입은 관료_정몽주",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고유복식)』, 한국콘텐츠진흥원. 온라인 참조: "고려시대 관복을 입은 관료_정몽주", 문화원형백과-한국의 고유복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이승혜,「고려시대 관복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134쪽.
  5. "최무선",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한국문화정보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논문
    • 이영미,「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 조은정, 「표준영정에 대한 연구」, 『로컬리티 인문학』 제15권,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 이승혜,「고려시대 관복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1.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