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묘청의 난(妙淸-亂) | |
대표명칭 | 묘청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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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妙淸-亂 |
시대 | 고려시대 |
날짜 | 1135년 1월-1136년 2월 |
관련인물 | 묘청(妙淸), 김부식(金富軾), 정지상(鄭知常), 윤언이(尹彦頤) |
관련장소 | 서경(西京) |
목차
정의
1135년(인종 13) 묘청(妙淸)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내용
서경 선진세력과 개경 문벌파의 대립
이자겸(李資謙)의 난 이후 개경의 문벌귀족 가운데 김부식(金富軾), 이공수(李公壽), 임원애(任元敳) 등이 크게 부상하였다. 이자겸 이래로 이들은 당시 새 강자로 등장한 금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는 등의 외교로 대외적인 안정을 꾀하며 정권을 주도했다.[1]
한편 척준경(拓俊京)을 탄핵하는 등 공로를 세운 정지상(鄭知常)과 그의 천거로 등장한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출신 신진관료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과 칭제건원(稱帝建元)·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 등을 내세우면서 서경천도운동을 벌여 개경에 기반을 둔 문벌귀족세력을 누르고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2]
좌절된 서경 천도
이러한 주장은 인종의 마음을 움직여 1128년(인종 6)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에 걸쳐 묘청의 주장대로 대화궁(大華宮)을 짓고, 이어서 1131년에는 그 궁성 안에 8성당(八聖堂)을 두는 등 설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문벌귀족의 반대로 천도운동이 난관에 부닥치자 1135년 정월에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趙匡), 분사병부상서 유참(柳旵), 분사사재소경 조창언(趙昌言)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3]
서경파 몰락
그들은 칭제건원을 주장했으나 국왕을 새로이 옹립하지도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가 국왕에게 거병소식을 알리는 등 왕권 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문벌귀족 타도에 목적을 두었다. 반란 소식을 접한 정부는 김부식을 총책임자로 하는 토벌군을 편성했으며, 김부식은 먼저 정지상 등을 서도(西都)의 모반에 관여했다는 명목으로 처단하였다. 천도를 주장하는 무리는 서경과 그 주변지역의 민중들의 호응을 받으며 결사적인 항쟁을 전개하였다.[4] 1136년 2월 정부군은 총공격을 감행, 서경성을 함락하였으며, 이에 조광 등 반란군의 지도자들이 자결함으로써 반란은 종결되었다.[5]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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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 | 묘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묘청의 난 | 김부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묘청의 난 | 정지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묘청의 난 | 윤언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묘청의 난",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묘청의 난",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묘청의 난",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묘청의 난",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하현강, "묘청의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더 읽을 거리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두산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