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소는 1107년(예종 2) 3월 6일에 태어났다. 스님의 휘는 덕소(德素), 자는 혜약(慧約), 어릴 때 이름은 자미(子美)고 속성은 전씨(田氏)다. 어머니는 양씨다.
스님의 휘는 덕소(德素)요, 자는 혜약(慧約)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자미(子美)요, 속성은 전씨(田氏)이다. 담(潭) (결락) 아버지가 (결락) 주수(州守)로 있을 때인 정해년(丁亥年) 3월 6일 어머니 남원군부인(南原郡夫人) 양씨(梁氏)가 어느날 밤 경락(京洛)으로부터 주계(州界)에 이르기까지 헌개(軒盖)가 길에 가득히 이어져 있는 꿈을 꾸었는데, 스님은 그 날 밤에 태어났다. 부모가 그 귀(貴)함을 알고 자미(子美)라고 이름을 지었다.
9세 때 의천(義天)의 제자로 국청사(國淸寺)에 있었던 교웅(敎雄)에 의하여 득도했다. 교웅은 그의 자질을 인정하여 천태종을 융성하게 할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하루는 대장당(大藏堂)에 들어가 장경함을 열고 책을 보다가 문득 그 뜻을 통달했다고 한다.
어떤 스님이 이르기를 “저는 국청사(國淸寺) 정원(淨源)입니다”라 하므로, 스님은 기꺼이 그와 더불어 대화하니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아는 구면과 같았다. 드디어 따라가서 교웅대선사(敎雄大禪師)의 문하에 던져 9살 때 삭발하고 득도하였다. 웅공(雄公)이 항상 이르기를 “나의 종지(宗旨)를 중흥할 자는 반드시 이 사미(沙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락) 즉(則). 반드시 스님과 함께 유희하였는데, 어느날 함께 불전(佛殿)을 참관하다가 우연히 대장당(大藏堂)에 들어가 경함을 열고 책을 빼내어 스님에게 주므로 스님은 문득 그 책을 받아 곧 능통(能通)하였다.
덕소는 1132년(인조 10) 25세 때 국청사(國淸寺)에서 천태 교학을 수학하면서 그해 10월에 국청사(國淸寺)를 찾은 인종을 만났다.[1]인종도 그의 자질에 감탄하여 뒷날 반드시 대법사가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2]
인조 임금께서 찬탄하여 이르시기를, “이 스님이 훗날 반드시 큰 법사(法師)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신년(戊申年) (결락) 법계 고시장을 열고 대선(大選) 시험을 보기 전에 이미 자미(子美)가 당선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음날 과연 합격되었으니, 스님은 단지 일세(一世) 동안에만 불교에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라, 소시(少時)의 이름이 또한 숙세(夙世)의 이름이었다. 인종(仁宗)이 천조(踐祚)한지 11년째인 임자(壬子)에 인종 임금이 국청사(國淸寺)에 행행(幸行)하여 (결락)
1142년(인종 20) 울주(蔚州)에 있는 영축산(靈鷲山)에 머무르며 많은 학승들을 지도했다.[3] 덕소는 1153년(의종 8) 선사가 되었고, 1164년에는 문명궁에서 설경법회를 주관하고, 의종 말 대선사(大禪師)에 제수되었다. [4]
계해년(癸亥年) 봄에 스님께서 문도들을 흩어 보내고 제방(諸方)으로 유력(遊歷)하면서 심사방도(尋師訪道)하다가, 울주(蔚州) 영취산(靈鷲山)에 이르러 주석(住錫)하였다. 지자(智者)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들어 이보다 더할 것이 없었고, 사방의 학자(學者)들이 법을 청함이 날로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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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卽位)하여 국정에 임한지 8년째인 계유(癸酉)에 스님을 선사(禪師)로 진가(進加)하였으며, 을해년(乙亥年) 봄에는 마납법의(磨衲法衣)를 하사하였다. 갑신년(甲申年) 여름 날씨가 오랫동안 가물었므로 의종이 문명궁(文明宮)에서 설경법회(說經法會)를 열고 스님을 초빙하여 강주(講主)로 추대하였다.
1170년 왕사에 책봉되었고 그해 11월에는 백고좌회(百高座會), 금광명경법회(金光明經法會) 등 국가 불교의례를 주관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5]
갑인년(甲寅年)에 견(遣) (결락) 상(上) (결락) 등이 예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11월 갑술에 도속(道俗)과 군신(群臣)이 크게 모여 스님께 예배를 올리고, 이어 이 날에 백고좌회(百高座會)를 베풀어 행향(行香)하는 때에 이르러, 임금께서 먼저 스님 앞에 나아가 공손히 예배한 후 상전(上殿)하였다. 그 후 수창궁(壽昌宮) 화평전(和平殿)에서 금광명법회(金光明法會)를 베풀고, 스님을 청하여 회주(會主)로 추대하였다. (결락) 즉(則) 혹(或) (결락) 임금께서 보연(步輦)으로 행행(行幸)하시어 스님의 얼굴을 뵙고 문안하였으니, 그 공경함이 이와 같았다.
11월 계사(癸巳)에 미질(微疾)이 나타났으므로 임금께서 친히 병석(病席)에 왕림하여 손수 약물을 제공하였다. 또 우복사(右僕射) 박경서(朴景瑞)를 보내 약탕을 올렸으나, (결락) 스님께서 손을 들어 뿌리치고, 선좌(禪座)에 돌아가 가부(跏趺)를 틀고 앉았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것이 스님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마음자세”라고 찬탄하였다. 이 날 시봉(侍奉)인 승지선사(承智禪師)에 명(命)하여 모시고 의왕시(毉王寺)로 옮기게 하였는데, 하루를 지난 후,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합장(合掌)하고 엄연히 입적(入寂)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결락) 송악산(松岳山) 서쪽 기슭에서 다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