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대웅전
해남 대흥사 대웅전 (海南 大興寺 大雄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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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해남 대흥사 대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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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海南 大興寺 大雄殿 |
유형 | 유적 |
시대 | 고대, 삼국, 신라 |
지정번호 | 사적 제508호 |
지정일 | 2009년 12월 21일 |
관련인물 | 이광사, 김정희 |
목차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 위치한 해남 대흥사의 불전이다.
내용
해남 대흥사
대흥사(大興寺)는 514년(백제 무령왕 14)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대둔산(현 두륜산) 북쪽 기슭에 위치하여 '대둔사(大芚寺)' 또는 '한듬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가람은 금당천 개울을 경계로 크게 '북원'과 '남원'으로 나뉘는데, 북원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영역이고, 남원은 다시 천불전 일곽, 표충사(表忠寺), 대광명전 일곽의 세 영역으로 구획된다.[1]
대웅보전
승려 심수가 1665년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이광사(李匡師)가 쓴 것이며,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무연간에 조성된 후불탱화(後佛幀怜)를 비롯해서 감로탱화·삼장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금당천 가에 침계루(枕溪樓)가 있고, 좌우에는 승사인 백설당(白雪堂)·세심당(洗心堂)이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고 쓴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방으로 사용되고 있다.[2]
대웅전 현판에 얽힌 일화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중 대흥사에 들렀다. 당시 대흥사의 주지는 차의 선인이라 불리는 초의선사(1786~1866년)였다. 대웅전에 걸린 이광사의 글씨를 본 김정희는 그 자리에서 글씨를 써주며 자신이 쓴 현판을 걸게 하였다. 그로부터 9년 뒤, 유배가 풀려 돌아가던 김정희는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그는 예전의 일을 후회하며 자신의 현판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걸게 했다고 한다.[3]
지식 관계망
- 이광사-김정희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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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 해남 대흥사 대웅전 | A는 B가 있는 곳이다 | A dcterms:hasPart B |
해남 대흥사 대웅전 | 이광사 | A는 B가 편액을 썼다 | A dcterms:creator B |
해남 대흥사 | 해남 대흥사 백설당 | A는 B가 있는 곳이다 | A dcterms:hasPart B |
해남 대흥사 백설당 | 김정희 | A는 B가 편액을 썼다 | A dcterms:creator B |
이광사 | 김정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초의선사 | 해남 대흥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정희 | 초의선사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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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년 | 해남 대흥사가 창건되었다 |
1665년 | 심수에 의해 해남 대흥사 대웅전이 중건되었다 |
주석
- ↑ 김봉렬, 『한국 미의 재발견-불교건축』, 솔출판사, 2004. 온라인 참조:"해남 대흥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위석, "해남 대흥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추사 김정희가 떼라던 현판, 왜 다시 걸렸을까", 『오마이뉴스』, 작성일:2017년 05월13일.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 "추사 김정희가 떼라던 현판, 왜 다시 걸렸을까", 『오마이뉴스』, 작성일:2017년 05월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