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신유박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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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신유박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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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박해 |
개관
천주교회는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등으로 순교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으로 1800년에는 교인 1만 명으로 교세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천주신앙의 전파에 대하여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세력에 의한 성토·상소·박해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적극적 박해를 회피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時派)의 실권자인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묵인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僻派)로 바뀌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대왕대비를 움직여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信西派)에 대하여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붙여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그의 배후 정치세력을 일소하고자 1801년 대왕대비 언교(諺敎)로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였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한 수색에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신유박해의 대표적 순교자로는 중국인 주문모와 초대 교회의 창설자인 지도적 평신도들이었다. 주문모는 한때 피신하였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타나 취조를 받은 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그리고 초기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최창현(崔昌顯)·강완숙(姜完淑)·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김건순(金健淳)·홍낙민(洪樂敏)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되었고, 왕족인 송씨(宋氏 : 정조의 庶弟인 恩彦君의 부인)와 신씨(申氏 : 恩彦君의 며느리)도 사사(賜死)되었다. 한편, 지방교회 지도자들도 다수 순교하였다.
내포교회(內浦敎會)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은 공주에서, 전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이던 유항검(柳恒儉)·유관검(柳觀儉) 형제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신유박해는 한국천주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은 위험을 피하여 경기도의 야산지대나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숨어, 천주신앙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하였다. 한편, 종래 지식인 중심의 조선천주교회가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된 점도 신유박해와 관계되는 천주교회 발전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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