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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Encyves Wiki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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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열녀서씨포죽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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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2:52: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抱竹圖)&lt;br /&gt;
&lt;br /&gt;
열녀서씨포죽도’는 세종실록, 속삼강행실도,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열녀 서씨에 관한 그림으로, 1759년 조선 정조 때 화가인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출생·사망연도 미상)의 작품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림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서씨의 남편 도운봉(都雲蜂)이 결혼 수년 만에 죽자 서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이 만들어 놓은 뒤뜰 대나무밭에 가서 17년간 이나 애절하게 울었는데, 어느 날 그곳의 대나무가 흰 대나무로 자랐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당시 경상감사가 이것을 상소로 올리자 이를 접한 세종대왕이 백죽도를 그려 올리라 명하고, 이어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고 홍문을 세우게 하고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세종대왕 당시에 어명으로 그린 그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나 규장각의 장서각 또는 외국에 유출되어 현존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50여년 이후 후손인 도필구가 장수도(영천 신령 지역) 찰방으로 와 있던 화산관에게 세종대왕이 하사한 시를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부탁하자, 이에 감복한 화산관이 그림과 함께 세종대왕의 시를 함께 써놓은 것이 ‘서씨열녀포죽도’다. 화산관은 정조의 어진을 그렸으며, 당시 김홍도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한 화가였다. 이 그림은 2012년 10월 21일 KBS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 지방출장감정에서 발견되어 본 방송으로 이송 방영 되었으며 감정가가 무려 10억이나 책정되어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어제시(御製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號天抱竹涕汍瀾 대를 잡고 울부짖어 눈물 쏟음에&lt;br /&gt;
&lt;br /&gt;
호천포죽체환란&lt;br /&gt;
&lt;br /&gt;
一夜新篁白數竿 어느 날 밤 흰 대나무 여러 포기 돋아 났네&lt;br /&gt;
&lt;br /&gt;
일야신황백수간&lt;br /&gt;
&lt;br /&gt;
高節凜然驚世俗 뛰어난 높은 절개 세상 사람 다 놀라니&lt;br /&gt;
&lt;br /&gt;
고절늠연경세속&lt;br /&gt;
&lt;br /&gt;
九重描上畵圖看 깊고 깊은 궁궐에서 백죽도를 보느니라.&lt;br /&gt;
&lt;br /&gt;
구중묘상화도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千古瀟湘怨不窮 그 옛날 소상강에 맺힌 한 다함이 없어&lt;br /&gt;
&lt;br /&gt;
천고소상원불궁&lt;br /&gt;
&lt;br /&gt;
年年竹上見斑紅 해마다 대 위에 붉은 무늬 모이구나&lt;br /&gt;
&lt;br /&gt;
연년죽상견반홍&lt;br /&gt;
&lt;br /&gt;
須知素節無今昔 고금에 변함없는 맑은 절개 알겠노니&lt;br /&gt;
&lt;br /&gt;
수지소절무금석&lt;br /&gt;
&lt;br /&gt;
白笋新生一兩叢 한 두 포기 흰 대나무 새로이 돋아났네&lt;br /&gt;
&lt;br /&gt;
백순신생일량총&lt;br /&gt;
&lt;br /&gt;
&lt;br /&gt;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수상)-[[서필]](徐弼 내의령 수상)-[[서희]](徐熙 내사령 수상)-[[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정 3품 장관급)- [[서면(고려)|서면]](徐冕 주부 -정 4품 차관보급 ) -[[서린(고려)|서린]](徐嶙) (판대부사 -정 2품 부수상) - [[서찬(고려6)|서찬]](徐瓚 (장령) -[[서인(고려)|서인]](徐諲 교수(학자)- [[서욱(고려)|서욱]](徐勖 승지) -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서진(고려2)|서진]](徐晋 감정)- [[서혼(조선)|서혼]](徐混 우승지) -[[서강(고려)|서강]](徐岡 대사성)-[[서산보]](徐山甫 장령) 으로 후손이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97%B4%EB%85%80%EC%9D%B4%EC%B2%9C%EC%84%9C%EC%94%A8%EB%B9%84&amp;diff=145756</id>
		<title>열녀이천서씨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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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2:51: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새 문서: 이천서씨열녀비(利川徐氏烈女碑)  이 비는 순조 32년에 이천서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박기수가 율세동에 세운 것인데 1983...&lt;/p&gt;
&lt;hr /&gt;
&lt;div&gt;이천서씨열녀비(利川徐氏烈女碑)&lt;br /&gt;
&lt;br /&gt;
이 비는 순조 32년에 이천서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박기수가 율세동에 세운 것인데 1983년에 성곡동으로 옮겼다. 비의 앞면에는 '열녀 향리 김창경의 처 이천써시의 정려'라고 쓰여있다.&lt;br /&gt;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lt;br /&gt;
&lt;br /&gt;
&lt;br /&gt;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수상)-[[서필]](徐弼 내의령 수상)-[[서희]](徐熙 내사령 수상)-[[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정 3품 장관급)- [[서면(고려)|서면]](徐冕 주부 -정 4품 차관보급 ) -[[서린(고려)|서린]](徐嶙) (판대부사 -정 2품 부수상) - [[서찬(고려6)|서찬]](徐瓚 (장령) -[[서인(고려)|서인]](徐諲 교수(학자)- [[서욱(고려)|서욱]](徐勖 승지) -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서진(고려2)|서진]](徐晋 감정)- [[서혼(조선)|서혼]](徐混 우승지) -[[서강(고려)|서강]](徐岡 대사성)-[[서산보]](徐山甫 장령) 으로 후손이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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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선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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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2:46: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서선달(徐先達)&lt;br /&gt;
&lt;br /&gt;
&lt;br /&gt;
덕필유린(德必有隣)&lt;br /&gt;
&lt;br /&gt;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lt;br /&gt;
&lt;br /&gt;
옛날 옛적, 조선 철종 때 경상북도 상주 땅에 서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그를 서선달이라 불렀다.&lt;br /&gt;
&lt;br /&gt;
본래 조선시대에 ‘선달’이란 과거시험에 급제하고도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서선달은 과거에 급제한 적이 없었다. 아니, 과거시험을 본 적조차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서선달이라 불렀다.&lt;br /&gt;
&lt;br /&gt;
그는 비록 집안이 오래전에 몰락하여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겨우 생계를 이어갔지만, 성품만큼은 누구보다 곧고 착했다. 자신의 형편이 어려워도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가장 먼저 달려갔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선달’이라 불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어느 해, 유난히 심한 흉년이 들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의 농사도 흉작을 면하지 못했다. 봄이 찾아왔지만 씨앗을 살 돈조차 없었다.&lt;br /&gt;
&lt;br /&gt;
‘이러다가는 올해 농사를 아예 지을 수 없겠구나.’&lt;br /&gt;
&lt;br /&gt;
궁리 끝에 서선달은 서울에서 쌀가게 일을 하며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다.&lt;br /&gt;
&lt;br /&gt;
효심 깊은 아들은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가슴 아파했다. 그는 주인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아직 받지 않은 몇 달 치 품삯을 미리 받아 아버지에게 건넸다.&lt;br /&gt;
&lt;br /&gt;
“아버지, 이것으로 종자를 마련하십시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lt;br /&gt;
&lt;br /&gt;
“고맙다. 올해 농사를 잘 지어 꼭 갚으마.”&lt;br /&gt;
&lt;br /&gt;
그렇게 아버지는 돈을 품에 넣고 고향 상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상주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서선달은 오백 리가 넘는 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문경새재의 높은 고개를 넘던 중, 그만 전대에 넣어두었던 돈을 길에 떨어뜨리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그것도 모르고 삼십 리나 더 걸었다.&lt;br /&gt;
&lt;br /&gt;
한참 뒤 허리춤이 허전한 것을 느낀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어허! 이게 어찌 된 일인가?”&lt;br /&gt;
&lt;br /&gt;
급히 몸을 더듬어 보니 돈이 들어 있던 전대가 사라지고 없었다.&lt;br /&gt;
&lt;br /&gt;
“아이고, 내 돈!”&lt;br /&gt;
&lt;br /&gt;
아들의 피땀 어린 품삯이었다.&lt;br /&gt;
&lt;br /&gt;
농사를 지을 종자를 마련할 유일한 돈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왔던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삼십 리를 다시 달려 높은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였다.&lt;br /&gt;
&lt;br /&gt;
숨이 턱까지 차오른 그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lt;br /&gt;
&lt;br /&gt;
“이 못난 놈아! 돈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그렇게 걸어왔단 말이냐!”&lt;br /&gt;
&lt;br /&gt;
그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치며 한탄했다.&lt;br /&gt;
&lt;br /&gt;
그때였다.&lt;br /&gt;
&lt;br /&gt;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lt;br /&gt;
&lt;br /&gt;
고개를 들어보니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서 있었다.&lt;br /&gt;
&lt;br /&gt;
“제가…… 돈을 잃어버렸습니다.”&lt;br /&gt;
&lt;br /&gt;
“돈이 얼마나 들어 있었나?”&lt;br /&gt;
&lt;br /&gt;
“백 냥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노인은 말없이 품속에서 전대 하나를 꺼내 들었다.&lt;br /&gt;
&lt;br /&gt;
“혹시 이것이 자네 것인가?”&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눈을 크게 떴다.&lt;br /&gt;
&lt;br /&gt;
“아니, 이게 어떻게……!”&lt;br /&gt;
&lt;br /&gt;
분명 자신의 전대였다.&lt;br /&gt;
&lt;br /&gt;
“제가 조금 전 이 고개를 넘다가 이것을 주웠네. 열어보니 백 냥이나 들어 있더군. 돈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갈까 싶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네.”&lt;br /&gt;
&lt;br /&gt;
노인은 돈을 발견한 뒤에도 욕심내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오히려 돈을 잃어버린 사람이 반드시 다시 찾으러 올 것이라 생각하고, 몇 시간이나 그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렸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lt;br /&gt;
&lt;br /&gt;
“어르신, 제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lt;br /&gt;
&lt;br /&gt;
“은혜랄 게 뭐가 있겠나. 잃은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lt;br /&gt;
&lt;br /&gt;
노인은 전대를 서선달에게 건네주고는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은 채 산 아래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lt;br /&gt;
&lt;br /&gt;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산신령이었을까?’&lt;br /&gt;
&lt;br /&gt;
그는 이상한 감동을 가슴에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얼마 후 서선달은 안동의 어느 나루터에 이르렀다.&lt;br /&gt;
&lt;br /&gt;
그때 어디선가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lt;br /&gt;
&lt;br /&gt;
“사람 살려주세요!”&lt;br /&gt;
&lt;br /&gt;
놀라 달려가 보니 한 젊은이가 거센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이 강가에 몰려 있었지만 아무도 선뜻 물에 뛰어들지 못했다.&lt;br /&gt;
&lt;br /&gt;
“물살이 너무 세오. 잘못 들어갔다가는 둘 다 죽을 수 있소!”&lt;br /&gt;
&lt;br /&gt;
서선달도 물을 바라보았다.&lt;br /&gt;
&lt;br /&gt;
자신은 평생 산골에서 살아 헤엄칠 줄 몰랐다.&lt;br /&gt;
&lt;br /&gt;
그렇다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lt;br /&gt;
&lt;br /&gt;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품에서 돈꾸러미를 꺼내 높이 들어 올렸다.&lt;br /&gt;
&lt;br /&gt;
“누구든 저 젊은이를 구해주는 사람에게 이 백 냥을 주겠소!”&lt;br /&gt;
&lt;br /&gt;
사람들이 술렁거렸다.&lt;br /&gt;
&lt;br /&gt;
“정말 백 냥을 준단 말이오?”&lt;br /&gt;
&lt;br /&gt;
“그렇소! 반드시 주겠소!”&lt;br /&gt;
&lt;br /&gt;
그러자 한 장정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lt;br /&gt;
&lt;br /&gt;
거센 물살을 헤치고 젊은이에게 다가간 장정은 마침내 그를 강가로 끌어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이 환호했다.&lt;br /&gt;
&lt;br /&gt;
젊은이는 물을 토하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lt;br /&gt;
&lt;br /&gt;
“선비님…… 정말 고맙습니다. 선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강에서 죽었을 것입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약속대로 장정에게 백 냥을 모두 건넸다.&lt;br /&gt;
&lt;br /&gt;
그 돈은 자신의 전 재산이었다.&lt;br /&gt;
&lt;br /&gt;
젊은이는 서선달의 손을 잡았다.&lt;br /&gt;
&lt;br /&gt;
“우리 집으로 함께 가시지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고개를 저었다.&lt;br /&gt;
&lt;br /&gt;
“아니오. 사람 목숨을 살리는 데 무슨 보답을 바라겠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젊은이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제 목숨을 살려주신 분을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lt;br /&gt;
&lt;br /&gt;
결국 서선달은 젊은이를 따라 안동으로 향했다.&lt;br /&gt;
&lt;br /&gt;
얼마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안동에서도 이름난 부자의 집이었다.&lt;br /&gt;
&lt;br /&gt;
높은 담장과 커다란 솟을대문, 수많은 행랑채가 이어진 대저택이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lt;br /&gt;
&lt;br /&gt;
‘이렇게 큰 집이 세상에 있었던가?’&lt;br /&gt;
&lt;br /&gt;
잠시 후 집 안에서 한 노인이 급히 달려 나왔다.&lt;br /&gt;
&lt;br /&gt;
“내 아들을 살려주신 분이 바로 귀인이십니까?”&lt;br /&gt;
&lt;br /&gt;
서선달은 고개를 숙였다.&lt;br /&gt;
&lt;br /&gt;
“별일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노인의 얼굴을 본 순간 서선달은 깜짝 놀랐다.&lt;br /&gt;
&lt;br /&gt;
“어르신은……?”&lt;br /&gt;
&lt;br /&gt;
노인 역시 서선달을 바라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lt;br /&gt;
&lt;br /&gt;
“아니, 자네는……?”&lt;br /&gt;
&lt;br /&gt;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lt;br /&gt;
&lt;br /&gt;
그 노인은 바로 얼마 전 문경새재에서 서선달의 돈을 찾아주었던 사람이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놀라 입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어르신께서 바로 제 돈을 찾아주신 분이셨군요!”&lt;br /&gt;
&lt;br /&gt;
노인은 그제야 모든 사정을 알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렇다면 자네가 내 아들을 살려주었다는 말인가?”&lt;br /&gt;
&lt;br /&gt;
“아닙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이 고개를 저었다.&lt;br /&gt;
&lt;br /&gt;
“제가 돈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돈으로 아드님을 살릴 수 있었겠습니까? 어르신께서 먼저 제 돈을 찾아주셨기에 제가 아드님을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lt;br /&gt;
&lt;br /&gt;
그 말을 들은 노인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lt;br /&gt;
&lt;br /&gt;
“이보게……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하구먼.”&lt;br /&gt;
&lt;br /&gt;
노인은 서선달의 손을 굳게 잡았다.&lt;br /&gt;
&lt;br /&gt;
“자네가 내 아들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잊겠는가.”&lt;br /&gt;
&lt;br /&gt;
노인은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서선달에게 큰돈과 재물을 내렸다. 훗날에는 상주에 있는 서선달의 고향까지 찾아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전답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서선달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말했다.&lt;br /&gt;
&lt;br /&gt;
“착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인연이 돌아오는 법이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 있다.&lt;br /&gt;
&lt;br /&gt;
덕필유린(德必有隣).&lt;br /&gt;
&lt;br /&gt;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돈을 잃어버렸을 때 욕심 없는 노인을 만났고, 자신은 다시 그 노인의 아들을 살렸다.&lt;br /&gt;
&lt;br /&gt;
선행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lt;br /&gt;
&lt;br /&gt;
누군가에게 베푼 작은 선의는 돌고 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왔다.&lt;br /&gt;
&lt;br /&gt;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져도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어리석은 일은 아니다.&lt;br /&gt;
&lt;br /&gt;
당장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의 마음속에 쌓인 덕과 신뢰는 언젠가 반드시 새로운 인연으로 돌아온다.&lt;br /&gt;
&lt;br /&gt;
어렵고 힘들어도 바르게 살자.&lt;br /&gt;
&lt;br /&gt;
남을 속이지 말고,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자.&lt;br /&gt;
&lt;br /&gt;
덕은 반드시 이웃을 만들고, 선행은 반드시 또 다른 선행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것이 바로 오래전 서선달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이다.&lt;br /&gt;
&lt;br /&gt;
德必有隣&lt;br /&gt;
&lt;br /&gt;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수상)-[[서필]](徐弼 내의령 수상)-[[서희]](徐熙 내사령 수상)-[[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정 3품 장관급)- [[서면(고려)|서면]](徐冕 주부 -정 4품 차관보급 ) -[[서린(고려)|서린]](徐嶙) (판대부사 -정 2품 부수상) - [[서찬(고려6)|서찬]](徐瓚 (장령) -[[서인(고려)|서인]](徐諲 교수(학자)- [[서욱(고려)|서욱]](徐勖 승지) -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서진(고려2)|서진]](徐晋 감정)- [[서혼(조선)|서혼]](徐混 우승지) -[[서강(고려)|서강]](徐岡 대사성)-[[서산보]](徐山甫 장령) 으로 후손이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97%B4%EB%85%80%EC%84%9C%EC%94%A8%ED%8F%AC%EC%A3%BD%EB%8F%84&amp;diff=145754</id>
		<title>열녀서씨포죽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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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2:45: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열녀서씨포죽도’는 세종실록, 속삼강행실도,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열녀 서씨에 관한 그림으로, 1759년 조선 정조 때 화가인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출생·사망연도 미상)의 작품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림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서씨의 남편 도운봉(都雲蜂)이 결혼 수년 만에 죽자 서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이 만들어 놓은 뒤뜰 대나무밭에 가서 17년간 이나 애절하게 울었는데, 어느 날 그곳의 대나무가 흰 대나무로 자랐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당시 경상감사가 이것을 상소로 올리자 이를 접한 세종대왕이 백죽도를 그려 올리라 명하고, 이어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고 홍문을 세우게 하고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세종대왕 당시에 어명으로 그린 그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나 규장각의 장서각 또는 외국에 유출되어 현존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50여년 이후 후손인 도필구가 장수도(영천 신령 지역) 찰방으로 와 있던 화산관에게 세종대왕이 하사한 시를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부탁하자, 이에 감복한 화산관이 그림과 함께 세종대왕의 시를 함께 써놓은 것이 ‘서씨열녀포죽도’다. 화산관은 정조의 어진을 그렸으며, 당시 김홍도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한 화가였다. 이 그림은 2012년 10월 21일 KBS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 지방출장감정에서 발견되어 본 방송으로 이송 방영 되었으며 감정가가 무려 10억이나 책정되어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어제시(御製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號天抱竹涕汍瀾 대를 잡고 울부짖어 눈물 쏟음에&lt;br /&gt;
&lt;br /&gt;
호천포죽체환란&lt;br /&gt;
&lt;br /&gt;
一夜新篁白數竿 어느 날 밤 흰 대나무 여러 포기 돋아 났네&lt;br /&gt;
&lt;br /&gt;
일야신황백수간&lt;br /&gt;
&lt;br /&gt;
高節凜然驚世俗 뛰어난 높은 절개 세상 사람 다 놀라니&lt;br /&gt;
&lt;br /&gt;
고절늠연경세속&lt;br /&gt;
&lt;br /&gt;
九重描上畵圖看 깊고 깊은 궁궐에서 백죽도를 보느니라.&lt;br /&gt;
&lt;br /&gt;
구중묘상화도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千古瀟湘怨不窮 그 옛날 소상강에 맺힌 한 다함이 없어&lt;br /&gt;
&lt;br /&gt;
천고소상원불궁&lt;br /&gt;
&lt;br /&gt;
年年竹上見斑紅 해마다 대 위에 붉은 무늬 모이구나&lt;br /&gt;
&lt;br /&gt;
연년죽상견반홍&lt;br /&gt;
&lt;br /&gt;
須知素節無今昔 고금에 변함없는 맑은 절개 알겠노니&lt;br /&gt;
&lt;br /&gt;
수지소절무금석&lt;br /&gt;
&lt;br /&gt;
白笋新生一兩叢 한 두 포기 흰 대나무 새로이 돋아났네&lt;br /&gt;
&lt;br /&gt;
백순신생일량총&lt;br /&gt;
&lt;br /&gt;
&lt;br /&gt;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수상)-[[서필]](徐弼 내의령 수상)-[[서희]](徐熙 내사령 수상)-[[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정 3품 장관급)- [[서면(고려)|서면]](徐冕 주부 -정 4품 차관보급 ) -[[서린(고려)|서린]](徐嶙) (판대부사 -정 2품 부수상) - [[서찬(고려6)|서찬]](徐瓚 (장령) -[[서인(고려)|서인]](徐諲 교수(학자)- [[서욱(고려)|서욱]](徐勖 승지) -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서진(고려2)|서진]](徐晋 감정)- [[서혼(조선)|서혼]](徐混 우승지) -[[서강(고려)|서강]](徐岡 대사성)-[[서산보]](徐山甫 장령) 으로 후손이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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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97%B4%EB%85%80%EC%84%9C%EC%94%A8%ED%8F%AC%EC%A3%BD%EB%8F%84&amp;diff=145753</id>
		<title>열녀서씨포죽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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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2:43: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새 문서: 열녀서씨포죽도’는 세종실록, 속삼강행실도,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열녀 서씨에 관한 그림으로, 1759년 조선 정조 때 화가인 화산관(華山...&lt;/p&gt;
&lt;hr /&gt;
&lt;div&gt;열녀서씨포죽도’는 세종실록, 속삼강행실도,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열녀 서씨에 관한 그림으로, 1759년 조선 정조 때 화가인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출생·사망연도 미상)의 작품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그림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서씨의 남편 도운봉(都雲蜂)이 결혼 수년 만에 죽자 서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이 만들어 놓은 뒤뜰 대나무밭에 가서 17년간 이나 애절하게 울었는데, 어느 날 그곳의 대나무가 흰 대나무로 자랐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당시 경상감사가 이것을 상소로 올리자 이를 접한 세종대왕이 백죽도를 그려 올리라 명하고, 이어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고 홍문을 세우게 하고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세종대왕 당시에 어명으로 그린 그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나 규장각의 장서각 또는 외국에 유출되어 현존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50여년 이후 후손인 도필구가 장수도(영천 신령 지역) 찰방으로 와 있던 화산관에게 세종대왕이 하사한 시를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부탁하자, 이에 감복한 화산관이 그림과 함께 세종대왕의 시를 함께 써놓은 것이 ‘서씨열녀포죽도’다. 화산관은 정조의 어진을 그렸으며, 당시 김홍도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한 화가였다. 이 그림은 2012년 10월 21일 KBS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 지방출장감정에서 발견되어 본 방송으로 이송 방영 되었으며 감정가가 무려 10억이나 책정되어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어제시(御製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號天抱竹涕汍瀾 대를 잡고 울부짖어 눈물 쏟음에&lt;br /&gt;
&lt;br /&gt;
호천포죽체환란&lt;br /&gt;
&lt;br /&gt;
一夜新篁白數竿 어느 날 밤 흰 대나무 여러 포기 돋아 났네&lt;br /&gt;
&lt;br /&gt;
일야신황백수간&lt;br /&gt;
&lt;br /&gt;
高節凜然驚世俗 뛰어난 높은 절개 세상 사람 다 놀라니&lt;br /&gt;
&lt;br /&gt;
고절늠연경세속&lt;br /&gt;
&lt;br /&gt;
九重描上畵圖看 깊고 깊은 궁궐에서 백죽도를 보느니라.&lt;br /&gt;
&lt;br /&gt;
구중묘상화도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千古瀟湘怨不窮 그 옛날 소상강에 맺힌 한 다함이 없어&lt;br /&gt;
&lt;br /&gt;
천고소상원불궁&lt;br /&gt;
&lt;br /&gt;
年年竹上見斑紅 해마다 대 위에 붉은 무늬 모이구나&lt;br /&gt;
&lt;br /&gt;
연년죽상견반홍&lt;br /&gt;
&lt;br /&gt;
須知素節無今昔 고금에 변함없는 맑은 절개 알겠노니&lt;br /&gt;
&lt;br /&gt;
수지소절무금석&lt;br /&gt;
&lt;br /&gt;
白笋新生一兩叢 한 두 포기 흰 대나무 새로이 돋아났네&lt;br /&gt;
&lt;br /&gt;
백순신생일량총&lt;br /&gt;
&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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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선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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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2:15: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서선달(徐先達)&lt;br /&gt;
&lt;br /&gt;
&lt;br /&gt;
덕필유린(德必有隣)&lt;br /&gt;
&lt;br /&gt;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lt;br /&gt;
&lt;br /&gt;
옛날 옛적, 조선 철종 때 경상북도 상주 땅에 서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그를 서선달이라 불렀다.&lt;br /&gt;
&lt;br /&gt;
본래 조선시대에 ‘선달’이란 과거시험에 급제하고도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서선달은 과거에 급제한 적이 없었다. 아니, 과거시험을 본 적조차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서선달이라 불렀다.&lt;br /&gt;
&lt;br /&gt;
그는 비록 집안이 오래전에 몰락하여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겨우 생계를 이어갔지만, 성품만큼은 누구보다 곧고 착했다. 자신의 형편이 어려워도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가장 먼저 달려갔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선달’이라 불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어느 해, 유난히 심한 흉년이 들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의 농사도 흉작을 면하지 못했다. 봄이 찾아왔지만 씨앗을 살 돈조차 없었다.&lt;br /&gt;
&lt;br /&gt;
‘이러다가는 올해 농사를 아예 지을 수 없겠구나.’&lt;br /&gt;
&lt;br /&gt;
궁리 끝에 서선달은 서울에서 쌀가게 일을 하며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다.&lt;br /&gt;
&lt;br /&gt;
효심 깊은 아들은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가슴 아파했다. 그는 주인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아직 받지 않은 몇 달 치 품삯을 미리 받아 아버지에게 건넸다.&lt;br /&gt;
&lt;br /&gt;
“아버지, 이것으로 종자를 마련하십시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lt;br /&gt;
&lt;br /&gt;
“고맙다. 올해 농사를 잘 지어 꼭 갚으마.”&lt;br /&gt;
&lt;br /&gt;
그렇게 아버지는 돈을 품에 넣고 고향 상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상주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서선달은 오백 리가 넘는 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문경새재의 높은 고개를 넘던 중, 그만 전대에 넣어두었던 돈을 길에 떨어뜨리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그것도 모르고 삼십 리나 더 걸었다.&lt;br /&gt;
&lt;br /&gt;
한참 뒤 허리춤이 허전한 것을 느낀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어허! 이게 어찌 된 일인가?”&lt;br /&gt;
&lt;br /&gt;
급히 몸을 더듬어 보니 돈이 들어 있던 전대가 사라지고 없었다.&lt;br /&gt;
&lt;br /&gt;
“아이고, 내 돈!”&lt;br /&gt;
&lt;br /&gt;
아들의 피땀 어린 품삯이었다.&lt;br /&gt;
&lt;br /&gt;
농사를 지을 종자를 마련할 유일한 돈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왔던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삼십 리를 다시 달려 높은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였다.&lt;br /&gt;
&lt;br /&gt;
숨이 턱까지 차오른 그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lt;br /&gt;
&lt;br /&gt;
“이 못난 놈아! 돈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그렇게 걸어왔단 말이냐!”&lt;br /&gt;
&lt;br /&gt;
그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치며 한탄했다.&lt;br /&gt;
&lt;br /&gt;
그때였다.&lt;br /&gt;
&lt;br /&gt;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lt;br /&gt;
&lt;br /&gt;
고개를 들어보니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서 있었다.&lt;br /&gt;
&lt;br /&gt;
“제가…… 돈을 잃어버렸습니다.”&lt;br /&gt;
&lt;br /&gt;
“돈이 얼마나 들어 있었나?”&lt;br /&gt;
&lt;br /&gt;
“백 냥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노인은 말없이 품속에서 전대 하나를 꺼내 들었다.&lt;br /&gt;
&lt;br /&gt;
“혹시 이것이 자네 것인가?”&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눈을 크게 떴다.&lt;br /&gt;
&lt;br /&gt;
“아니, 이게 어떻게……!”&lt;br /&gt;
&lt;br /&gt;
분명 자신의 전대였다.&lt;br /&gt;
&lt;br /&gt;
“제가 조금 전 이 고개를 넘다가 이것을 주웠네. 열어보니 백 냥이나 들어 있더군. 돈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갈까 싶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네.”&lt;br /&gt;
&lt;br /&gt;
노인은 돈을 발견한 뒤에도 욕심내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오히려 돈을 잃어버린 사람이 반드시 다시 찾으러 올 것이라 생각하고, 몇 시간이나 그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렸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lt;br /&gt;
&lt;br /&gt;
“어르신, 제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lt;br /&gt;
&lt;br /&gt;
“은혜랄 게 뭐가 있겠나. 잃은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lt;br /&gt;
&lt;br /&gt;
노인은 전대를 서선달에게 건네주고는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은 채 산 아래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lt;br /&gt;
&lt;br /&gt;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산신령이었을까?’&lt;br /&gt;
&lt;br /&gt;
그는 이상한 감동을 가슴에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얼마 후 서선달은 안동의 어느 나루터에 이르렀다.&lt;br /&gt;
&lt;br /&gt;
그때 어디선가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lt;br /&gt;
&lt;br /&gt;
“사람 살려주세요!”&lt;br /&gt;
&lt;br /&gt;
놀라 달려가 보니 한 젊은이가 거센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이 강가에 몰려 있었지만 아무도 선뜻 물에 뛰어들지 못했다.&lt;br /&gt;
&lt;br /&gt;
“물살이 너무 세오. 잘못 들어갔다가는 둘 다 죽을 수 있소!”&lt;br /&gt;
&lt;br /&gt;
서선달도 물을 바라보았다.&lt;br /&gt;
&lt;br /&gt;
자신은 평생 산골에서 살아 헤엄칠 줄 몰랐다.&lt;br /&gt;
&lt;br /&gt;
그렇다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lt;br /&gt;
&lt;br /&gt;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품에서 돈꾸러미를 꺼내 높이 들어 올렸다.&lt;br /&gt;
&lt;br /&gt;
“누구든 저 젊은이를 구해주는 사람에게 이 백 냥을 주겠소!”&lt;br /&gt;
&lt;br /&gt;
사람들이 술렁거렸다.&lt;br /&gt;
&lt;br /&gt;
“정말 백 냥을 준단 말이오?”&lt;br /&gt;
&lt;br /&gt;
“그렇소! 반드시 주겠소!”&lt;br /&gt;
&lt;br /&gt;
그러자 한 장정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lt;br /&gt;
&lt;br /&gt;
거센 물살을 헤치고 젊은이에게 다가간 장정은 마침내 그를 강가로 끌어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이 환호했다.&lt;br /&gt;
&lt;br /&gt;
젊은이는 물을 토하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lt;br /&gt;
&lt;br /&gt;
“선비님…… 정말 고맙습니다. 선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강에서 죽었을 것입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약속대로 장정에게 백 냥을 모두 건넸다.&lt;br /&gt;
&lt;br /&gt;
그 돈은 자신의 전 재산이었다.&lt;br /&gt;
&lt;br /&gt;
젊은이는 서선달의 손을 잡았다.&lt;br /&gt;
&lt;br /&gt;
“우리 집으로 함께 가시지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고개를 저었다.&lt;br /&gt;
&lt;br /&gt;
“아니오. 사람 목숨을 살리는 데 무슨 보답을 바라겠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젊은이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제 목숨을 살려주신 분을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lt;br /&gt;
&lt;br /&gt;
결국 서선달은 젊은이를 따라 안동으로 향했다.&lt;br /&gt;
&lt;br /&gt;
얼마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안동에서도 이름난 부자의 집이었다.&lt;br /&gt;
&lt;br /&gt;
높은 담장과 커다란 솟을대문, 수많은 행랑채가 이어진 대저택이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lt;br /&gt;
&lt;br /&gt;
‘이렇게 큰 집이 세상에 있었던가?’&lt;br /&gt;
&lt;br /&gt;
잠시 후 집 안에서 한 노인이 급히 달려 나왔다.&lt;br /&gt;
&lt;br /&gt;
“내 아들을 살려주신 분이 바로 귀인이십니까?”&lt;br /&gt;
&lt;br /&gt;
서선달은 고개를 숙였다.&lt;br /&gt;
&lt;br /&gt;
“별일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노인의 얼굴을 본 순간 서선달은 깜짝 놀랐다.&lt;br /&gt;
&lt;br /&gt;
“어르신은……?”&lt;br /&gt;
&lt;br /&gt;
노인 역시 서선달을 바라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lt;br /&gt;
&lt;br /&gt;
“아니, 자네는……?”&lt;br /&gt;
&lt;br /&gt;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lt;br /&gt;
&lt;br /&gt;
그 노인은 바로 얼마 전 문경새재에서 서선달의 돈을 찾아주었던 사람이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놀라 입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어르신께서 바로 제 돈을 찾아주신 분이셨군요!”&lt;br /&gt;
&lt;br /&gt;
노인은 그제야 모든 사정을 알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렇다면 자네가 내 아들을 살려주었다는 말인가?”&lt;br /&gt;
&lt;br /&gt;
“아닙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이 고개를 저었다.&lt;br /&gt;
&lt;br /&gt;
“제가 돈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돈으로 아드님을 살릴 수 있었겠습니까? 어르신께서 먼저 제 돈을 찾아주셨기에 제가 아드님을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lt;br /&gt;
&lt;br /&gt;
그 말을 들은 노인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lt;br /&gt;
&lt;br /&gt;
“이보게……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하구먼.”&lt;br /&gt;
&lt;br /&gt;
노인은 서선달의 손을 굳게 잡았다.&lt;br /&gt;
&lt;br /&gt;
“자네가 내 아들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잊겠는가.”&lt;br /&gt;
&lt;br /&gt;
노인은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서선달에게 큰돈과 재물을 내렸다. 훗날에는 상주에 있는 서선달의 고향까지 찾아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전답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서선달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말했다.&lt;br /&gt;
&lt;br /&gt;
“착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인연이 돌아오는 법이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 있다.&lt;br /&gt;
&lt;br /&gt;
덕필유린(德必有隣).&lt;br /&gt;
&lt;br /&gt;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돈을 잃어버렸을 때 욕심 없는 노인을 만났고, 자신은 다시 그 노인의 아들을 살렸다.&lt;br /&gt;
&lt;br /&gt;
선행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lt;br /&gt;
&lt;br /&gt;
누군가에게 베푼 작은 선의는 돌고 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왔다.&lt;br /&gt;
&lt;br /&gt;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져도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어리석은 일은 아니다.&lt;br /&gt;
&lt;br /&gt;
당장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의 마음속에 쌓인 덕과 신뢰는 언젠가 반드시 새로운 인연으로 돌아온다.&lt;br /&gt;
&lt;br /&gt;
어렵고 힘들어도 바르게 살자.&lt;br /&gt;
&lt;br /&gt;
남을 속이지 말고,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자.&lt;br /&gt;
&lt;br /&gt;
덕은 반드시 이웃을 만들고, 선행은 반드시 또 다른 선행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것이 바로 오래전 서선달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이다.&lt;br /&gt;
&lt;br /&gt;
德必有隣&lt;br /&gt;
&lt;br /&gt;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84%A0%EB%8B%AC&amp;diff=145751</id>
		<title>서선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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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2:11: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덕필유린(德必有隣)&lt;br /&gt;
&lt;br /&gt;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lt;br /&gt;
&lt;br /&gt;
옛날 옛적, 조선 철종 때 경상북도 상주 땅에 서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그를 서선달이라 불렀다.&lt;br /&gt;
&lt;br /&gt;
본래 조선시대에 ‘선달’이란 과거시험에 급제하고도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서선달은 과거에 급제한 적이 없었다. 아니, 과거시험을 본 적조차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서선달이라 불렀다.&lt;br /&gt;
&lt;br /&gt;
그는 비록 집안이 오래전에 몰락하여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겨우 생계를 이어갔지만, 성품만큼은 누구보다 곧고 착했다. 자신의 형편이 어려워도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가장 먼저 달려갔다.&lt;br /&gt;
&lt;br /&gt;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선달’이라 불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어느 해, 유난히 심한 흉년이 들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의 농사도 흉작을 면하지 못했다. 봄이 찾아왔지만 씨앗을 살 돈조차 없었다.&lt;br /&gt;
&lt;br /&gt;
‘이러다가는 올해 농사를 아예 지을 수 없겠구나.’&lt;br /&gt;
&lt;br /&gt;
궁리 끝에 서선달은 서울에서 쌀가게 일을 하며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다.&lt;br /&gt;
&lt;br /&gt;
효심 깊은 아들은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가슴 아파했다. 그는 주인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아직 받지 않은 몇 달 치 품삯을 미리 받아 아버지에게 건넸다.&lt;br /&gt;
&lt;br /&gt;
“아버지, 이것으로 종자를 마련하십시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lt;br /&gt;
&lt;br /&gt;
“고맙다. 올해 농사를 잘 지어 꼭 갚으마.”&lt;br /&gt;
&lt;br /&gt;
그렇게 아버지는 돈을 품에 넣고 고향 상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상주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서선달은 오백 리가 넘는 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문경새재의 높은 고개를 넘던 중, 그만 전대에 넣어두었던 돈을 길에 떨어뜨리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그것도 모르고 삼십 리나 더 걸었다.&lt;br /&gt;
&lt;br /&gt;
한참 뒤 허리춤이 허전한 것을 느낀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어허! 이게 어찌 된 일인가?”&lt;br /&gt;
&lt;br /&gt;
급히 몸을 더듬어 보니 돈이 들어 있던 전대가 사라지고 없었다.&lt;br /&gt;
&lt;br /&gt;
“아이고, 내 돈!”&lt;br /&gt;
&lt;br /&gt;
아들의 피땀 어린 품삯이었다.&lt;br /&gt;
&lt;br /&gt;
농사를 지을 종자를 마련할 유일한 돈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왔던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삼십 리를 다시 달려 높은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였다.&lt;br /&gt;
&lt;br /&gt;
숨이 턱까지 차오른 그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lt;br /&gt;
&lt;br /&gt;
“이 못난 놈아! 돈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그렇게 걸어왔단 말이냐!”&lt;br /&gt;
&lt;br /&gt;
그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치며 한탄했다.&lt;br /&gt;
&lt;br /&gt;
그때였다.&lt;br /&gt;
&lt;br /&gt;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lt;br /&gt;
&lt;br /&gt;
고개를 들어보니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서 있었다.&lt;br /&gt;
&lt;br /&gt;
“제가…… 돈을 잃어버렸습니다.”&lt;br /&gt;
&lt;br /&gt;
“돈이 얼마나 들어 있었나?”&lt;br /&gt;
&lt;br /&gt;
“백 냥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노인은 말없이 품속에서 전대 하나를 꺼내 들었다.&lt;br /&gt;
&lt;br /&gt;
“혹시 이것이 자네 것인가?”&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눈을 크게 떴다.&lt;br /&gt;
&lt;br /&gt;
“아니, 이게 어떻게……!”&lt;br /&gt;
&lt;br /&gt;
분명 자신의 전대였다.&lt;br /&gt;
&lt;br /&gt;
“제가 조금 전 이 고개를 넘다가 이것을 주웠네. 열어보니 백 냥이나 들어 있더군. 돈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갈까 싶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네.”&lt;br /&gt;
&lt;br /&gt;
노인은 돈을 발견한 뒤에도 욕심내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오히려 돈을 잃어버린 사람이 반드시 다시 찾으러 올 것이라 생각하고, 몇 시간이나 그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렸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lt;br /&gt;
&lt;br /&gt;
“어르신, 제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lt;br /&gt;
&lt;br /&gt;
“은혜랄 게 뭐가 있겠나. 잃은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lt;br /&gt;
&lt;br /&gt;
노인은 전대를 서선달에게 건네주고는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은 채 산 아래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lt;br /&gt;
&lt;br /&gt;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산신령이었을까?’&lt;br /&gt;
&lt;br /&gt;
그는 이상한 감동을 가슴에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얼마 후 서선달은 안동의 어느 나루터에 이르렀다.&lt;br /&gt;
&lt;br /&gt;
그때 어디선가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lt;br /&gt;
&lt;br /&gt;
“사람 살려주세요!”&lt;br /&gt;
&lt;br /&gt;
놀라 달려가 보니 한 젊은이가 거센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이 강가에 몰려 있었지만 아무도 선뜻 물에 뛰어들지 못했다.&lt;br /&gt;
&lt;br /&gt;
“물살이 너무 세오. 잘못 들어갔다가는 둘 다 죽을 수 있소!”&lt;br /&gt;
&lt;br /&gt;
서선달도 물을 바라보았다.&lt;br /&gt;
&lt;br /&gt;
자신은 평생 산골에서 살아 헤엄칠 줄 몰랐다.&lt;br /&gt;
&lt;br /&gt;
그렇다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lt;br /&gt;
&lt;br /&gt;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품에서 돈꾸러미를 꺼내 높이 들어 올렸다.&lt;br /&gt;
&lt;br /&gt;
“누구든 저 젊은이를 구해주는 사람에게 이 백 냥을 주겠소!”&lt;br /&gt;
&lt;br /&gt;
사람들이 술렁거렸다.&lt;br /&gt;
&lt;br /&gt;
“정말 백 냥을 준단 말이오?”&lt;br /&gt;
&lt;br /&gt;
“그렇소! 반드시 주겠소!”&lt;br /&gt;
&lt;br /&gt;
그러자 한 장정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lt;br /&gt;
&lt;br /&gt;
거센 물살을 헤치고 젊은이에게 다가간 장정은 마침내 그를 강가로 끌어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이 환호했다.&lt;br /&gt;
&lt;br /&gt;
젊은이는 물을 토하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lt;br /&gt;
&lt;br /&gt;
“선비님…… 정말 고맙습니다. 선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강에서 죽었을 것입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약속대로 장정에게 백 냥을 모두 건넸다.&lt;br /&gt;
&lt;br /&gt;
그 돈은 자신의 전 재산이었다.&lt;br /&gt;
&lt;br /&gt;
젊은이는 서선달의 손을 잡았다.&lt;br /&gt;
&lt;br /&gt;
“우리 집으로 함께 가시지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고개를 저었다.&lt;br /&gt;
&lt;br /&gt;
“아니오. 사람 목숨을 살리는 데 무슨 보답을 바라겠소.”&lt;br /&gt;
&lt;br /&gt;
그러나 젊은이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제 목숨을 살려주신 분을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lt;br /&gt;
&lt;br /&gt;
결국 서선달은 젊은이를 따라 안동으로 향했다.&lt;br /&gt;
&lt;br /&gt;
얼마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안동에서도 이름난 부자의 집이었다.&lt;br /&gt;
&lt;br /&gt;
높은 담장과 커다란 솟을대문, 수많은 행랑채가 이어진 대저택이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lt;br /&gt;
&lt;br /&gt;
‘이렇게 큰 집이 세상에 있었던가?’&lt;br /&gt;
&lt;br /&gt;
잠시 후 집 안에서 한 노인이 급히 달려 나왔다.&lt;br /&gt;
&lt;br /&gt;
“내 아들을 살려주신 분이 바로 귀인이십니까?”&lt;br /&gt;
&lt;br /&gt;
서선달은 고개를 숙였다.&lt;br /&gt;
&lt;br /&gt;
“별일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노인의 얼굴을 본 순간 서선달은 깜짝 놀랐다.&lt;br /&gt;
&lt;br /&gt;
“어르신은……?”&lt;br /&gt;
&lt;br /&gt;
노인 역시 서선달을 바라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lt;br /&gt;
&lt;br /&gt;
“아니, 자네는……?”&lt;br /&gt;
&lt;br /&gt;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lt;br /&gt;
&lt;br /&gt;
그 노인은 바로 얼마 전 문경새재에서 서선달의 돈을 찾아주었던 사람이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놀라 입을 열었다.&lt;br /&gt;
&lt;br /&gt;
“어르신께서 바로 제 돈을 찾아주신 분이셨군요!”&lt;br /&gt;
&lt;br /&gt;
노인은 그제야 모든 사정을 알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렇다면 자네가 내 아들을 살려주었다는 말인가?”&lt;br /&gt;
&lt;br /&gt;
“아닙니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이 고개를 저었다.&lt;br /&gt;
&lt;br /&gt;
“제가 돈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돈으로 아드님을 살릴 수 있었겠습니까? 어르신께서 먼저 제 돈을 찾아주셨기에 제가 아드님을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lt;br /&gt;
&lt;br /&gt;
그 말을 들은 노인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lt;br /&gt;
&lt;br /&gt;
“이보게……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하구먼.”&lt;br /&gt;
&lt;br /&gt;
노인은 서선달의 손을 굳게 잡았다.&lt;br /&gt;
&lt;br /&gt;
“자네가 내 아들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잊겠는가.”&lt;br /&gt;
&lt;br /&gt;
노인은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서선달에게 큰돈과 재물을 내렸다. 훗날에는 상주에 있는 서선달의 고향까지 찾아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전답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서선달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은 말했다.&lt;br /&gt;
&lt;br /&gt;
“착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인연이 돌아오는 법이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 있다.&lt;br /&gt;
&lt;br /&gt;
덕필유린(德必有隣).&lt;br /&gt;
&lt;br /&gt;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돈을 잃어버렸을 때 욕심 없는 노인을 만났고, 자신은 다시 그 노인의 아들을 살렸다.&lt;br /&gt;
&lt;br /&gt;
선행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lt;br /&gt;
&lt;br /&gt;
누군가에게 베푼 작은 선의는 돌고 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왔다.&lt;br /&gt;
&lt;br /&gt;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져도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어리석은 일은 아니다.&lt;br /&gt;
&lt;br /&gt;
당장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의 마음속에 쌓인 덕과 신뢰는 언젠가 반드시 새로운 인연으로 돌아온다.&lt;br /&gt;
&lt;br /&gt;
어렵고 힘들어도 바르게 살자.&lt;br /&gt;
&lt;br /&gt;
남을 속이지 말고,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자.&lt;br /&gt;
&lt;br /&gt;
덕은 반드시 이웃을 만들고, 선행은 반드시 또 다른 선행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것이 바로 오래전 서선달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이다.&lt;br /&gt;
&lt;br /&gt;
德必有隣&lt;br /&gt;
&lt;br /&gt;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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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선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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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2:09: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옛날 옛적 경상북도 상주 땅에 서씨성을 가진 양반 하나가 살고 있었다. 비록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집안은 오래전에 몰락하여 그저 작은 땅떼기에 농사를 지으며 입에 겨우 풀칠을 하고 사는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서선달이라고 불렀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선달은 과거 시험에 급제는 했으나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었다. 서선비는 학문이 얕아 과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lt;br /&gt;
&lt;br /&gt;
사실상 그는 선달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심성이 워낙 착하고 성실한 데다가 언제나 자기 사정은 뒷전으로 하고 발 벗고 나서서 다른 사람을 돕는 탓에 마을 사람들이 그를 높여 불러주었던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어느해 극심한 흉년이 들어 서선달은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이듬해 봄이 되자 종자를 살 돈마저 떨어져 발을 동동굴렀다. 생각도 못한 그는 돈을 빌리기 위해 멀리 부산에 사는 육촌 동생을 찾아갔다.&lt;br /&gt;
&lt;br /&gt;
상주에서 부산까지는 500리가 넘는 먼 길이었다. 산 넘고 물건너 6촌 동생을 찾아간 서선달은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amp;quot;내 올해 농사가 끝나고 나면 꼭 갚겠네. 100냥만 빌려주시게!&amp;quot;&lt;br /&gt;
&lt;br /&gt;
&amp;quot;형님도 아시다시피, 저희도 흉년이 들어서 사정이 녹록지 않습니다!&amp;quot; 동생은 난색을 표했다. 올해는 꼭 풍작을 이루어 자네 돈을 200냥으로 불려주겠네! &amp;quot;허허, 형님도 참!&amp;quot; 동생은 서선달의 어설픈 장담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lt;br /&gt;
&lt;br /&gt;
우여곡절 끝에 친척은 서선달에게 백냥을 내어주었고, 서선달은 연거푸 사례를 하며 집으로 향했다. 서선달은 친척에게 받은 돈 백냥 꾸러미를 전대에 넣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농사 지을 밑천이 생겼으니 마음은 한결 가벼웠고, 발걸음도 날아갈 듯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콧노래를 부르며 산마루를 넘던 도중 서선달은 허리 춤이 허전한 것을 느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급히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지만 전대는 사라지고 온데간데 없었다. 서선달이 집으로 급히 돌아가느라 서둘러 고개를 넘던 도중 자기도 모르게 전대를 흘려버린 것이 분명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서선달은 언제 어디서 전대를 흘렸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amp;quot;아이쿠야, 내 돈! 전 재산을 잃어버린 서선달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얼굴이 흙빛이 된 그는 왔던 길을 돌아서 뛰어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허겁 지겁 삼십리 먼 길을 길바닥만 바라보며 뛰어가던 서산달은 높은 고갯마루를 오르다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움직일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한탄했다. &amp;quot;이 멍청한 놈! 그 귀한 돈 사라진 줄도 모르고, 이 바보 같은 놈!&lt;br /&gt;
&lt;br /&gt;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흘러내린 땀이 눈속으로 들어가 눈을 뜰 수도 없었다. &amp;quot;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이젠 망했네. 그려!!&amp;quot; 바로 그때 누군가가 서선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lt;br /&gt;
&lt;br /&gt;
&amp;quot;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amp;quot; 고개를 들어보니 도포를 입은 웬 중노인 하나가 뒷짐을 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amp;quot;길을 서둘러 가다가 그만 전대가!...&lt;br /&gt;
&amp;quot;전대에는 얼마가 들어 있었나?&amp;quot;&lt;br /&gt;
&amp;quot;친척에게 빌린 백냥이 들어 있었지요!&amp;quot;&lt;br /&gt;
&lt;br /&gt;
서선달의 눈에서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lt;br /&gt;
물이 연신 흘러내렸다. 그러자 중노인은 뒷짐졌던 손에 들고 있던 서선달의 전대를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amp;quot;혹시 이 전대가 자네 것이 아닌가?&amp;quot; 서선달은 전대를 보니&lt;br /&gt;
정말로 자신의 것이었다. &amp;quot;맞습니다. 어찌 어르신이 이걸 가지고 계십니까?&amp;quot;&lt;br /&gt;
&lt;br /&gt;
&amp;quot;내가 두식경쯤 전 이 고개를 넘다가 전대를 하나 주었네. 전대를 열어보니 100냥이나 되는 큰 돈이 들어 있었어! 목숨같이 귀한 돈을 잃어버린 사람 속이 얼마나 탈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가던 길을 멈추고 여기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네!&amp;quot;&lt;br /&gt;
&lt;br /&gt;
그 노인은 누군가가 흘린 돈을 찾아주기 위해 한 시간이나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amp;quot;고맙습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 제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amp;quot; 서선달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노인에게 감사를 표했다.&lt;br /&gt;
&lt;br /&gt;
&amp;quot;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제가 어떻게 갚을수 있을지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amp;quot; 서선달은 진심으로 사죄를 하고 싶었지만, 노인은 손을 회회 저을 뿐이었다. &amp;quot;은혜랄 게 뭐가 있겠나! 나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 걸!&amp;quot; 말을 마친 노인은 지체 없이 돌아서서 산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lt;br /&gt;
&lt;br /&gt;
&amp;quot;사람이었을까? 산신령이었을까? 아니야. 분명 사람은 아니었을 거야. 사람이었다면 그 큰 돈을 찾아줬을리가 없지. 암! 길을 걷는 내내 서선달의 머릿속에는 산에서 만난 노인이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무사히 돈을 찾고 다시 길을 걸어 서선달은 안동의 어느 작은 나루터에 이르렀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어디선가 웬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amp;quot;사람 살려주세요!!&amp;quot; 놀라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 보니 그곳엔 위급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 여인이 발을 헛디뎠는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 하고 있지만 물살이 강해 도저히 그러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lt;br /&gt;
&lt;br /&gt;
&amp;quot;아이고~ 어떻게 좀 해봐요? 저러다 저 여자 죽겠어요!~&amp;quot; 그러자 누군가가 답했다. &amp;quot;이 강은 물살이 요상해서 섣불리 뛰어들었다가는 같이 죽을지도 몰라!&amp;quot;&lt;br /&gt;
&lt;br /&gt;
그렇게 구경꾼들은 많아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서선달은 자기라도 당장 뛰어들어 그녀를 구하고 싶었지만 평생을 산촌에서만 산터라 헤엄을 전혀 칠줄 몰랐다.&lt;br /&gt;
&lt;br /&gt;
이에 어찌해야 하나 발만 동동 구르는데 문득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에 그는 자신의 돈 꾸러미를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amp;quot;누구든~ 저 여인을 구해주는 사람에게 이 돈 백냥을 주겠소!&amp;quot;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amp;quot;백냥! 정말이요?&amp;quot;&lt;br /&gt;
&lt;br /&gt;
서선달은 돈꾸러미를 더욱 높이 들며 더 큰 소리를 냈다. &amp;quot;정말이오. 저 여인을 구해온다면 여기 내 손에 든 백냥을 바로 주겠소!&amp;quot; 그러자 어느 장정 하나가 강물에 첨벙 뛰어들어 여인을 강가로 구해냈다.&lt;br /&gt;
&lt;br /&gt;
&amp;quot;서선달은 약속한 대로 그 장정에게 자신의 전재산인 백냥을 내주었다.&amp;quot; 그러자 죽다가 살아난 여인이 서선달에게 말했다. &amp;quot;정말 고맙습니다. 선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쯤 물귀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와 함께 저희 집으로 가시죠. 아버님께 말씀드려 이 은혜를 꼭 갚고 싶습니다!&amp;quot;&lt;br /&gt;
&lt;br /&gt;
&amp;quot;아니요. 나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오!&amp;quot;&lt;br /&gt;
서선달은 고개를 저으며 가던 길을 가려 했다. 그러자 여인이 문득 무릎을 꿇으며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amp;quot;아니 되옵니다. 이렇게 그냥 가시게 할수는 없습니다!&amp;quot;&lt;br /&gt;
&lt;br /&gt;
여인의 간청에 서선달은 망설여졌다.&lt;br /&gt;
순간의 의협심에 전 재산을 걸고 여인을 살리기는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한편으론 막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amp;quot;알겠소. 내 잠시만 짬을 내지요!&amp;quot; 그렇게 서선달은 결국 여인을 따라 그녀의 집에 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얼마 후, 두 사람은 안동 읍내에 있는 여인의 집에 도착했다. &amp;quot;여기가 소녀가 사는 곳이지요!&amp;quot; 집을 본 서선달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의 집이 글쎄 99칸이나 되는 커다란 저택이었으니까. 알고 보니 여인은 안동에서도 가장 돈이 많다는 권부잣집 외동딸이었던 것이었다.&lt;br /&gt;
&lt;br /&gt;
&amp;quot;이리 고래등 같은 저택은 난생 처음 보는구려!&amp;quot; 서선달은 내심 크게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헛기침을 여러 번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여인의 부친 권부자가 버선발로 달려나왔다. 권부자는 서선달의 두 손을 덥석 잡고 말 했다. &amp;quot;귀인께서 내 딸의 목숨을 구해주셨다 들었습니다. 참으로 고맙소이다!&amp;quot;&lt;br /&gt;
&lt;br /&gt;
서선달은 권부자의 요란한 환대에 쑥스러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amp;quot;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르신!&amp;quot; &amp;quot;지나친 겸양의 말씀이시오.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amp;quot;&lt;br /&gt;
&lt;br /&gt;
권 부자는 다시 서선달의 손을 강하게 끌었다. 바로 그때 권 부자의 얼굴을 본 서선달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lt;br /&gt;
&amp;quot;아니 어르신은!...&amp;quot;, &amp;quot;아니 자네가!...&amp;quot; &lt;br /&gt;
&lt;br /&gt;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을까? 놀랍게도 여인의 부친 권부자는 다름 아닌 서선달의 돈을 찾아주었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lt;br /&gt;
&lt;br /&gt;
덕필유린(德必有隣)&lt;br /&gt;
    &lt;br /&gt;
조선 철종때 경상&lt;br /&gt;
도 상주땅에 서씨&lt;br /&gt;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사람들&lt;br /&gt;
은 그를 그냥 서선&lt;br /&gt;
달 이라고 불렀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원래 선달이란 과&lt;br /&gt;
거 시험에 급제는 했으나 아직 벼슬&lt;br /&gt;
을 받지 못한 사람&lt;br /&gt;
을 이르는 말이지&lt;br /&gt;
만&lt;br /&gt;
&lt;br /&gt;
이 사람은 무슨 급제와는 관련이 없었고 그냥 사람&lt;br /&gt;
이 심성이 착하고 무던해서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lt;br /&gt;
다고 합니다.&lt;br /&gt;
&lt;br /&gt;
서 선달은 남의 땅을 빌려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어느 해인&lt;br /&gt;
가는 봄이 왔어도&lt;br /&gt;
그해 농사를 지을 비용이 없을 정도&lt;br /&gt;
로 곤궁하였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생각다 못한 그는 서울 쌀가게에서 장부를 담당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lt;br /&gt;
습니다.&lt;br /&gt;
&lt;br /&gt;
효자 아들은 주인&lt;br /&gt;
께 통사정하여 6개&lt;br /&gt;
월 치 월급을 임시&lt;br /&gt;
로 먼저 받아 아버&lt;br /&gt;
지께 드렸습니다.&lt;br /&gt;
&lt;br /&gt;
서 선달은 50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문경&lt;br /&gt;
새재 고개를 넘던 중 그만  돈을 흘려&lt;br /&gt;
잃어버리고 말았&lt;br /&gt;
습니다.&lt;br /&gt;
&lt;br /&gt;
이때 반대쪽에서 고개를 넘어오던 한 노인이 이 돈 꾸러미를 발견했&lt;br /&gt;
는데 세어보니 백&lt;br /&gt;
냥이나 되는 큰돈&lt;br /&gt;
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한편 서 선달은 30&lt;br /&gt;
리를 더 와서야 돈&lt;br /&gt;
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는데  전 재산&lt;br /&gt;
을 잃어버렸으니&lt;br /&gt;
눈앞이 깜깜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다행히 돈&lt;br /&gt;
을 발견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횡재라고 좋아하는&lt;br /&gt;
하인에게 일러 말합니다.&lt;br /&gt;
&lt;br /&gt;
''잃은 사람은 반드&lt;br /&gt;
시 찾아온다.&lt;br /&gt;
목숨같이 귀한 돈&lt;br /&gt;
을 잃은 그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탈꼬!&amp;quot;&lt;br /&gt;
&lt;br /&gt;
그 노인은 가던 길&lt;br /&gt;
을 멈추고 몇 시간&lt;br /&gt;
이고 돈 주인이 나&lt;br /&gt;
타나기를 기다렸&lt;br /&gt;
습니다.&lt;br /&gt;
&lt;br /&gt;
과연 한참 후에&lt;br /&gt;
서 선달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나타&lt;br /&gt;
났습니다.&lt;br /&gt;
&lt;br /&gt;
주운 돈을 서선달&lt;br /&gt;
에게 돌려주자&lt;br /&gt;
&lt;br /&gt;
서 선달은 &amp;quot;어른께&lt;br /&gt;
서 제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amp;quot; 하며 돈을 찾아 준 은혜&lt;br /&gt;
를 갚겠다며 사례&lt;br /&gt;
를 하려 하는데&lt;br /&gt;
&lt;br /&gt;
그 노인은 은혜랄&lt;br /&gt;
게 있소 당연한 일&lt;br /&gt;
인데&amp;quot; 하고는 펄쩍 뛰며 사양을 했습&lt;br /&gt;
니다. 그는 주운 돈 100냥을 서선달에&lt;br /&gt;
게 전달을 하고 가&lt;br /&gt;
던 길을 갔습니다.&lt;br /&gt;
&lt;br /&gt;
서 선달도 다시 집&lt;br /&gt;
을 향해 갔고 이윽&lt;br /&gt;
고 문경 진남강가&lt;br /&gt;
에 이르렀습니다.&lt;br /&gt;
&lt;br /&gt;
그때 마침 한 청년&lt;br /&gt;
이 물에 빠졌는데&lt;br /&gt;
구경꾼은 많아도 누구 하나 뛰어들&lt;br /&gt;
어 구해 줄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lt;br /&gt;
다.&lt;br /&gt;
&lt;br /&gt;
그때,서 선달이 외쳤습니다.&lt;br /&gt;
&lt;br /&gt;
&amp;quot;누구든지 저 청년&lt;br /&gt;
을 구해내면 백냥&lt;br /&gt;
을 주겠소.&amp;quot;&lt;br /&gt;
&lt;br /&gt;
그러자 어느 장정&lt;br /&gt;
이 뛰어들어 청년&lt;br /&gt;
을 살려냈습니다.&lt;br /&gt;
&lt;br /&gt;
죽다 살아난 도령&lt;br /&gt;
이 서선달에게 말&lt;br /&gt;
하기를&lt;br /&gt;
&lt;br /&gt;
&amp;quot;정말 고맙습니다.&lt;br /&gt;
어른이 아니었으면&lt;br /&gt;
저는 수중 고혼이&lt;br /&gt;
되었을 것입니다.&lt;br /&gt;
우리 집은 안동에&lt;br /&gt;
서 제일 큰 부자인&lt;br /&gt;
데 함께 가시면 백냥을 갚아드리&lt;br /&gt;
겠습니다&amp;quot;&lt;br /&gt;
&lt;br /&gt;
서 선달 은 무슨 사례를 받고자 한&lt;br /&gt;
일은 아니었으나 자기의 사정도 있&lt;br /&gt;
는지라 같이 안동&lt;br /&gt;
까지 가게 되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안동의 청년의 집&lt;br /&gt;
은 과연 고래 등 같은 부잣집 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때 청년의 부친&lt;br /&gt;
이 득달같이 달려 나왔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그 부친이&lt;br /&gt;
란 사람은? 다름 아닌 서 선달의 돈을 찾아준 바로 그 노인 이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amp;quot;온 재산을 털어 제 아들을? 구해 주시&lt;br /&gt;
다니 당신은 진정 의인이요? 정말 고맙소이다.&amp;quot;&lt;br /&gt;
&lt;br /&gt;
아닙니다. 댁의 아드님은 어르신&lt;br /&gt;
께서 살려내신 것입니다&lt;br /&gt;
&lt;br /&gt;
제가 돈을 잃었다&lt;br /&gt;
면 무슨 수로 살렸겠습니까?&lt;br /&gt;
&lt;br /&gt;
겸손의 말씀 이십&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7대 독자 외아들을 살려주신 은혜&lt;br /&gt;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겠습니다.&lt;br /&gt;
&lt;br /&gt;
안동 권부자 노인&lt;br /&gt;
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살려준 보&lt;br /&gt;
답으로 돈 천냥을 나귀에 실어 서선달 에게 주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나중에 다&lt;br /&gt;
시 서선달이 사는 상주 이안 고을을 찾아와 백 섬 지기 전답까지 사주고 돌아 갔습니다.&lt;br /&gt;
&lt;br /&gt;
이 일은 후에 조정&lt;br /&gt;
에까지 알려져&lt;br /&gt;
안동과 상주 두 고을이 모두 조정&lt;br /&gt;
으로부터 후한 상&lt;br /&gt;
을 받았다고 합니다.&lt;br /&gt;
&lt;br /&gt;
요즈음 시대는 참 착하게 살기가 힘&lt;br /&gt;
든 시대입니다.&lt;br /&gt;
착한 것이 오히려 바보처럼 여겨지는&lt;br /&gt;
안타까운 시대입&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사기치는 세상입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덕필유린 입니다&lt;br /&gt;
&lt;br /&gt;
덕이 있고 심성이 착한 사람은 반드&lt;br /&gt;
시 주위에 돕는 손길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착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바보 같&lt;br /&gt;
아 보이지만 사람&lt;br /&gt;
답게 행복하게 사는 지름길임을 명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어렵고 힘들어도 정직하게 살면&lt;br /&gt;
하늘도 사람들도 반드시 돕습니다.&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84%A0%EB%8B%AC&amp;diff=145749</id>
		<title>서선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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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2:06: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덕필유린(德必有隣)&lt;br /&gt;
    &lt;br /&gt;
조선 철종때 경상&lt;br /&gt;
도 상주땅에 서씨&lt;br /&gt;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사람들&lt;br /&gt;
은 그를 그냥 서선&lt;br /&gt;
달 이라고 불렀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원래 선달이란 과&lt;br /&gt;
거 시험에 급제는 했으나 아직 벼슬&lt;br /&gt;
을 받지 못한 사람&lt;br /&gt;
을 이르는 말이지&lt;br /&gt;
만&lt;br /&gt;
&lt;br /&gt;
이 사람은 무슨 급제와는 관련이 없었고 그냥 사람&lt;br /&gt;
이 심성이 착하고 무던해서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lt;br /&gt;
다고 합니다.&lt;br /&gt;
&lt;br /&gt;
서 선달은 남의 땅을 빌려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어느 해인&lt;br /&gt;
가는 봄이 왔어도&lt;br /&gt;
그해 농사를 지을 비용이 없을 정도&lt;br /&gt;
로 곤궁하였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생각다 못한 그는 서울 쌀가게에서 장부를 담당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lt;br /&gt;
습니다.&lt;br /&gt;
&lt;br /&gt;
효자 아들은 주인&lt;br /&gt;
께 통사정하여 6개&lt;br /&gt;
월 치 월급을 임시&lt;br /&gt;
로 먼저 받아 아버&lt;br /&gt;
지께 드렸습니다.&lt;br /&gt;
&lt;br /&gt;
서 선달은 50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문경&lt;br /&gt;
새재 고개를 넘던 중 그만  돈을 흘려&lt;br /&gt;
잃어버리고 말았&lt;br /&gt;
습니다.&lt;br /&gt;
&lt;br /&gt;
이때 반대쪽에서 고개를 넘어오던 한 노인이 이 돈 꾸러미를 발견했&lt;br /&gt;
는데 세어보니 백&lt;br /&gt;
냥이나 되는 큰돈&lt;br /&gt;
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한편 서 선달은 30&lt;br /&gt;
리를 더 와서야 돈&lt;br /&gt;
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는데  전 재산&lt;br /&gt;
을 잃어버렸으니&lt;br /&gt;
눈앞이 깜깜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다행히 돈&lt;br /&gt;
을 발견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횡재라고 좋아하는&lt;br /&gt;
하인에게 일러 말합니다.&lt;br /&gt;
&lt;br /&gt;
''잃은 사람은 반드&lt;br /&gt;
시 찾아온다.&lt;br /&gt;
목숨같이 귀한 돈&lt;br /&gt;
을 잃은 그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탈꼬!&amp;quot;&lt;br /&gt;
&lt;br /&gt;
그 노인은 가던 길&lt;br /&gt;
을 멈추고 몇 시간&lt;br /&gt;
이고 돈 주인이 나&lt;br /&gt;
타나기를 기다렸&lt;br /&gt;
습니다.&lt;br /&gt;
&lt;br /&gt;
과연 한참 후에&lt;br /&gt;
서 선달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나타&lt;br /&gt;
났습니다.&lt;br /&gt;
&lt;br /&gt;
주운 돈을 서선달&lt;br /&gt;
에게 돌려주자&lt;br /&gt;
&lt;br /&gt;
서 선달은 &amp;quot;어른께&lt;br /&gt;
서 제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amp;quot; 하며 돈을 찾아 준 은혜&lt;br /&gt;
를 갚겠다며 사례&lt;br /&gt;
를 하려 하는데&lt;br /&gt;
&lt;br /&gt;
그 노인은 은혜랄&lt;br /&gt;
게 있소 당연한 일&lt;br /&gt;
인데&amp;quot; 하고는 펄쩍 뛰며 사양을 했습&lt;br /&gt;
니다. 그는 주운 돈 100냥을 서선달에&lt;br /&gt;
게 전달을 하고 가&lt;br /&gt;
던 길을 갔습니다.&lt;br /&gt;
&lt;br /&gt;
서 선달도 다시 집&lt;br /&gt;
을 향해 갔고 이윽&lt;br /&gt;
고 문경 진남강가&lt;br /&gt;
에 이르렀습니다.&lt;br /&gt;
&lt;br /&gt;
그때 마침 한 청년&lt;br /&gt;
이 물에 빠졌는데&lt;br /&gt;
구경꾼은 많아도 누구 하나 뛰어들&lt;br /&gt;
어 구해 줄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lt;br /&gt;
다.&lt;br /&gt;
&lt;br /&gt;
그때,서 선달이 외쳤습니다.&lt;br /&gt;
&lt;br /&gt;
&amp;quot;누구든지 저 청년&lt;br /&gt;
을 구해내면 백냥&lt;br /&gt;
을 주겠소.&amp;quot;&lt;br /&gt;
&lt;br /&gt;
그러자 어느 장정&lt;br /&gt;
이 뛰어들어 청년&lt;br /&gt;
을 살려냈습니다.&lt;br /&gt;
&lt;br /&gt;
죽다 살아난 도령&lt;br /&gt;
이 서선달에게 말&lt;br /&gt;
하기를&lt;br /&gt;
&lt;br /&gt;
&amp;quot;정말 고맙습니다.&lt;br /&gt;
어른이 아니었으면&lt;br /&gt;
저는 수중 고혼이&lt;br /&gt;
되었을 것입니다.&lt;br /&gt;
우리 집은 안동에&lt;br /&gt;
서 제일 큰 부자인&lt;br /&gt;
데 함께 가시면 백냥을 갚아드리&lt;br /&gt;
겠습니다&amp;quot;&lt;br /&gt;
&lt;br /&gt;
서 선달 은 무슨 사례를 받고자 한&lt;br /&gt;
일은 아니었으나 자기의 사정도 있&lt;br /&gt;
는지라 같이 안동&lt;br /&gt;
까지 가게 되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안동의 청년의 집&lt;br /&gt;
은 과연 고래 등 같은 부잣집 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때 청년의 부친&lt;br /&gt;
이 득달같이 달려 나왔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그 부친이&lt;br /&gt;
란 사람은? 다름 아닌 서 선달의 돈을 찾아준 바로 그 노인 이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amp;quot;온 재산을 털어 제 아들을? 구해 주시&lt;br /&gt;
다니 당신은 진정 의인이요? 정말 고맙소이다.&amp;quot;&lt;br /&gt;
&lt;br /&gt;
아닙니다. 댁의 아드님은 어르신&lt;br /&gt;
께서 살려내신 것입니다&lt;br /&gt;
&lt;br /&gt;
제가 돈을 잃었다&lt;br /&gt;
면 무슨 수로 살렸겠습니까?&lt;br /&gt;
&lt;br /&gt;
겸손의 말씀 이십&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7대 독자 외아들을 살려주신 은혜&lt;br /&gt;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겠습니다.&lt;br /&gt;
&lt;br /&gt;
안동 권부자 노인&lt;br /&gt;
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살려준 보&lt;br /&gt;
답으로 돈 천냥을 나귀에 실어 서선달 에게 주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나중에 다&lt;br /&gt;
시 서선달이 사는 상주 이안 고을을 찾아와 백 섬 지기 전답까지 사주고 돌아 갔습니다.&lt;br /&gt;
&lt;br /&gt;
이 일은 후에 조정&lt;br /&gt;
에까지 알려져&lt;br /&gt;
안동과 상주 두 고을이 모두 조정&lt;br /&gt;
으로부터 후한 상&lt;br /&gt;
을 받았다고 합니다.&lt;br /&gt;
&lt;br /&gt;
요즈음 시대는 참 착하게 살기가 힘&lt;br /&gt;
든 시대입니다.&lt;br /&gt;
착한 것이 오히려 바보처럼 여겨지는&lt;br /&gt;
안타까운 시대입&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사기치는 세상입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덕필유린 입니다&lt;br /&gt;
&lt;br /&gt;
덕이 있고 심성이 착한 사람은 반드&lt;br /&gt;
시 주위에 돕는 손길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착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바보 같&lt;br /&gt;
아 보이지만 사람&lt;br /&gt;
답게 행복하게 사는 지름길임을 명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어렵고 힘들어도 정직하게 살면&lt;br /&gt;
하늘도 사람들도 반드시 돕습니다.&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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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선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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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2:04: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새 문서: 덕필유린(德必有隣)      조선 철종때 경상 도 상주땅에 서씨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사람들 은 그를 그냥 서선 달 이라고 불렀습 니다....&lt;/p&gt;
&lt;hr /&gt;
&lt;div&gt;덕필유린(德必有隣)&lt;br /&gt;
    &lt;br /&gt;
조선 철종때 경상&lt;br /&gt;
도 상주땅에 서씨&lt;br /&gt;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사람들&lt;br /&gt;
은 그를 그냥 서선&lt;br /&gt;
달 이라고 불렀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원래 선달이란 과&lt;br /&gt;
거 시험에 급제는 했으나 아직 벼슬&lt;br /&gt;
을 받지 못한 사람&lt;br /&gt;
을 이르는 말이지&lt;br /&gt;
만&lt;br /&gt;
&lt;br /&gt;
이 사람은 무슨 급제와는 관련이 없었고 그냥 사람&lt;br /&gt;
이 심성이 착하고 무던해서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lt;br /&gt;
다고 합니다.&lt;br /&gt;
&lt;br /&gt;
서 선달은 남의 땅을 빌려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어느 해인&lt;br /&gt;
가는 봄이 왔어도&lt;br /&gt;
그해 농사를 지을 비용이 없을 정도&lt;br /&gt;
로 곤궁하였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생각다 못한 그는 서울 쌀가게에서 장부를 담당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lt;br /&gt;
습니다.&lt;br /&gt;
&lt;br /&gt;
효자 아들은 주인&lt;br /&gt;
께 통사정하여 6개&lt;br /&gt;
월 치 월급을 임시&lt;br /&gt;
로 먼저 받아 아버&lt;br /&gt;
지께 드렸습니다.&lt;br /&gt;
&lt;br /&gt;
서 선달은 50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문경&lt;br /&gt;
새재 고개를 넘던 중 그만  돈을 흘려&lt;br /&gt;
잃어버리고 말았&lt;br /&gt;
습니다.&lt;br /&gt;
&lt;br /&gt;
이때 반대쪽에서 고개를 넘어오던 한 노인이 이 돈 꾸러미를 발견했&lt;br /&gt;
는데 세어보니 백&lt;br /&gt;
냥이나 되는 큰돈&lt;br /&gt;
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한편 서 선달은 30&lt;br /&gt;
리를 더 와서야 돈&lt;br /&gt;
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는데  전 재산&lt;br /&gt;
을 잃어버렸으니&lt;br /&gt;
눈앞이 깜깜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다행히 돈&lt;br /&gt;
을 발견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횡재라고 좋아하는&lt;br /&gt;
하인에게 일러 말합니다.&lt;br /&gt;
&lt;br /&gt;
''잃은 사람은 반드&lt;br /&gt;
시 찾아온다.&lt;br /&gt;
목숨같이 귀한 돈&lt;br /&gt;
을 잃은 그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탈꼬!&amp;quot;&lt;br /&gt;
&lt;br /&gt;
그 노인은 가던 길&lt;br /&gt;
을 멈추고 몇 시간&lt;br /&gt;
이고 돈 주인이 나&lt;br /&gt;
타나기를 기다렸&lt;br /&gt;
습니다.&lt;br /&gt;
&lt;br /&gt;
과연 한참 후에&lt;br /&gt;
서 선달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나타&lt;br /&gt;
났습니다.&lt;br /&gt;
&lt;br /&gt;
주운 돈을 서선달&lt;br /&gt;
에게 돌려주자&lt;br /&gt;
&lt;br /&gt;
서 선달은 &amp;quot;어른께&lt;br /&gt;
서 제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amp;quot; 하며 돈을 찾아 준 은혜&lt;br /&gt;
를 갚겠다며 사례&lt;br /&gt;
를 하려 하는데&lt;br /&gt;
&lt;br /&gt;
그 노인은 은혜랄&lt;br /&gt;
게 있소 당연한 일&lt;br /&gt;
인데&amp;quot; 하고는 펄쩍 뛰며 사양을 했습&lt;br /&gt;
니다. 그는 주운 돈 100냥을 서선달에&lt;br /&gt;
게 전달을 하고 가&lt;br /&gt;
던 길을 갔습니다.&lt;br /&gt;
&lt;br /&gt;
서 선달도 다시 집&lt;br /&gt;
을 향해 갔고 이윽&lt;br /&gt;
고 문경 진남강가&lt;br /&gt;
에 이르렀습니다.&lt;br /&gt;
&lt;br /&gt;
그때 마침 한 청년&lt;br /&gt;
이 물에 빠졌는데&lt;br /&gt;
구경꾼은 많아도 누구 하나 뛰어들&lt;br /&gt;
어 구해 줄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lt;br /&gt;
다.&lt;br /&gt;
&lt;br /&gt;
그때,서 선달이 외쳤습니다.&lt;br /&gt;
&lt;br /&gt;
&amp;quot;누구든지 저 청년&lt;br /&gt;
을 구해내면 백냥&lt;br /&gt;
을 주겠소.&amp;quot;&lt;br /&gt;
&lt;br /&gt;
그러자 어느 장정&lt;br /&gt;
이 뛰어들어 청년&lt;br /&gt;
을 살려냈습니다.&lt;br /&gt;
&lt;br /&gt;
죽다 살아난 도령&lt;br /&gt;
이 서선달에게 말&lt;br /&gt;
하기를&lt;br /&gt;
&lt;br /&gt;
&amp;quot;정말 고맙습니다.&lt;br /&gt;
어른이 아니었으면&lt;br /&gt;
저는 수중 고혼이&lt;br /&gt;
되었을 것입니다.&lt;br /&gt;
우리 집은 안동에&lt;br /&gt;
서 제일 큰 부자인&lt;br /&gt;
데 함께 가시면 백냥을 갚아드리&lt;br /&gt;
겠습니다&amp;quot;&lt;br /&gt;
&lt;br /&gt;
서 선달 은 무슨 사례를 받고자 한&lt;br /&gt;
일은 아니었으나 자기의 사정도 있&lt;br /&gt;
는지라 같이 안동&lt;br /&gt;
까지 가게 되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안동의 청년의 집&lt;br /&gt;
은 과연 고래 등 같은 부잣집 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때 청년의 부친&lt;br /&gt;
이 득달같이 달려 나왔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그 부친이&lt;br /&gt;
란 사람은? 다름 아닌 서 선달의 돈을 찾아준 바로 그 노인 이었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amp;quot;온 재산을 털어 제 아들을? 구해 주시&lt;br /&gt;
다니 당신은 진정 의인이요? 정말 고맙소이다.&amp;quot;&lt;br /&gt;
&lt;br /&gt;
아닙니다. 댁의 아드님은 어르신&lt;br /&gt;
께서 살려내신 것입니다&lt;br /&gt;
&lt;br /&gt;
제가 돈을 잃었다&lt;br /&gt;
면 무슨 수로 살렸겠습니까?&lt;br /&gt;
&lt;br /&gt;
겸손의 말씀 이십&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7대 독자 외아들을 살려주신 은혜&lt;br /&gt;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겠습니다.&lt;br /&gt;
&lt;br /&gt;
안동 권부자 노인&lt;br /&gt;
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살려준 보&lt;br /&gt;
답으로 돈 천냥을 나귀에 실어 서선달 에게 주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나중에 다&lt;br /&gt;
시 서선달이 사는 상주 이안 고을을 찾아와 백 섬 지기 전답까지 사주고 돌아 갔습니다.&lt;br /&gt;
&lt;br /&gt;
이 일은 후에 조정&lt;br /&gt;
에까지 알려져&lt;br /&gt;
안동과 상주 두 고을이 모두 조정&lt;br /&gt;
으로부터 후한 상&lt;br /&gt;
을 받았다고 합니다.&lt;br /&gt;
&lt;br /&gt;
요즈음 시대는 참 착하게 살기가 힘&lt;br /&gt;
든 시대입니다.&lt;br /&gt;
착한 것이 오히려 바보처럼 여겨지는&lt;br /&gt;
안타까운 시대입&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사기치는 세상입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덕필유린 입니다&lt;br /&gt;
&lt;br /&gt;
덕이 있고 심성이 착한 사람은 반드&lt;br /&gt;
시 주위에 돕는 손길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착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바보 같&lt;br /&gt;
아 보이지만 사람&lt;br /&gt;
답게 행복하게 사는 지름길임을 명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lt;br /&gt;
니다.&lt;br /&gt;
&lt;br /&gt;
어렵고 힘들어도 정직하게 살면&lt;br /&gt;
하늘도 사람들도 반드시 돕습니다.&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B%9F%89%EC%A7%80(%EB%8C%80%EB%A7%8C)&amp;diff=145746</id>
		<title>서량지(대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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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3T23:33: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서량지(徐亮之) 교수&lt;br /&gt;
&lt;br /&gt;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amp;quot;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amp;quot;&lt;br /&gt;
&lt;br /&gt;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10월초판)에서 이렇게 썼다.“4천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quot;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amp;quot;&lt;br /&gt;
“중국의 책력법(冊曆法*달력)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lt;br /&gt;
&lt;br /&gt;
​&lt;br /&gt;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신농 등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 서씨 분파 ==&lt;br /&gt;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lt;br /&gt;
&lt;br /&gt;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市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A4%91%EA%B5%AD_%EC%84%9C%EC%94%A8&amp;diff=145745</id>
		<title>중국 서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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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2T20:59: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서예양(徐藝洋 Xu Yiyang) */&lt;/p&gt;
&lt;hr /&gt;
&lt;div&gt;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Xú Fú)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lt;br /&gt;
&lt;br /&gt;
[[서씨]](徐氏xúshì)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bóyì)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lt;br /&gt;
&lt;br /&gt;
&lt;br /&gt;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amp;lt;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amp;gt;.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amp;quot;&amp;gt;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lt;br /&gt;
&lt;br /&gt;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amp;quot;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amp;quot;(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lt;br /&gt;
&lt;br /&gt;
== [[기자조선]]의 후손설 ==&lt;br /&gt;
&lt;br /&gt;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lt;br /&gt;
&lt;br /&gt;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lt;br /&gt;
&lt;br /&gt;
기자조선의 영역&lt;br /&gt;
&lt;br /&gt;
&lt;br /&gt;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amp;lt;대업(大業) 혹 고요(皐陶)&amp;gt;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lt;br /&gt;
&lt;br /&gt;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lt;br /&gt;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lt;br /&gt;
&lt;br /&gt;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amp;lt;삼국사기&amp;gt;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amp;lt;삼국사기&amp;gt;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lt;br /&gt;
 &lt;br /&gt;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lt;br /&gt;
 &lt;br /&gt;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lt;br /&gt;
 &lt;br /&gt;
또한 &amp;lt;자치통감&amp;gt;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lt;br /&gt;
 &lt;br /&gt;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amp;lt;진서&amp;gt;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lt;br /&gt;
 &lt;br /&gt;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lt;br /&gt;
 &lt;br /&gt;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lt;br /&gt;
 &lt;br /&gt;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lt;br /&gt;
 &lt;br /&gt;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lt;br /&gt;
 &lt;br /&gt;
&lt;br /&gt;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lt;br /&gt;
 &lt;br /&gt;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amp;lt;삼국사기&amp;gt;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분파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흑치씨]](黑齒氏) - &amp;lt;[[흑치상지]] 묘지명&amp;gt;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amp;lt;동성왕조&amp;gt;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amp;gt; 백가 &amp;gt;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lt;br /&gt;
&lt;br /&gt;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lt;br /&gt;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lt;br /&gt;
&lt;br /&gt;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amp;lt;왕력편&amp;gt;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amp;quot;[[동성왕]]의 아들&amp;quot;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lt;br /&gt;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lt;br /&gt;
&lt;br /&gt;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lt;br /&gt;
&lt;br /&gt;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lt;br /&gt;
&lt;br /&gt;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lt;br /&gt;
&lt;br /&gt;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lt;br /&gt;
&lt;br /&gt;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lt;br /&gt;
&lt;br /&gt;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lt;br /&gt;
&lt;br /&gt;
== [[부여]]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lt;br /&gt;
&lt;br /&gt;
[[여현]]&lt;br /&gt;
&lt;br /&gt;
[[여울]]&lt;br /&gt;
&lt;br /&gt;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lt;br /&gt;
&lt;br /&gt;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lt;br /&gt;
&lt;br /&gt;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lt;br /&gt;
&lt;br /&gt;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lt;br /&gt;
&lt;br /&gt;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lt;br /&gt;
&lt;br /&gt;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lt;br /&gt;
&lt;br /&gt;
[[우복]](優福)&lt;br /&gt;
&lt;br /&gt;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lt;br /&gt;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lt;br /&gt;
&lt;br /&gt;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lt;br /&gt;
&lt;br /&gt;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lt;br /&gt;
&lt;br /&gt;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lt;br /&gt;
&lt;br /&gt;
[[부여기]]&lt;br /&gt;
&lt;br /&gt;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lt;br /&gt;
&lt;br /&gt;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lt;br /&gt;
&lt;br /&gt;
[[부여력]](夫餘歷)&lt;br /&gt;
&lt;br /&gt;
[[부여고]](夫餘固)&lt;br /&gt;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lt;br /&gt;
&lt;br /&gt;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lt;br /&gt;
&lt;br /&gt;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lt;br /&gt;
&lt;br /&gt;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lt;br /&gt;
&lt;br /&gt;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lt;br /&gt;
&lt;br /&gt;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lt;br /&gt;
&lt;br /&gt;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lt;br /&gt;
&lt;br /&gt;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lt;br /&gt;
&lt;br /&gt;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lt;br /&gt;
&lt;br /&gt;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lt;br /&gt;
&lt;br /&gt;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lt;br /&gt;
&lt;br /&gt;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lt;br /&gt;
&lt;br /&gt;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lt;br /&gt;
&lt;br /&gt;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lt;br /&gt;
&lt;br /&gt;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lt;br /&gt;
&lt;br /&gt;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lt;br /&gt;
&lt;br /&gt;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lt;br /&gt;
&lt;br /&gt;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lt;br /&gt;
&lt;br /&gt;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lt;br /&gt;
&lt;br /&gt;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lt;br /&gt;
&lt;br /&gt;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amp;quot;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amp;quot;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amp;quot;[[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amp;quot;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amp;quot;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amp;quot;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lt;br /&gt;
&lt;br /&gt;
== 서씨 분파 ==&lt;br /&gt;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lt;br /&gt;
&lt;br /&gt;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lt;br /&gt;
&lt;br /&gt;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lt;br /&gt;
&lt;br /&gt;
== [[서광(동진)|서광]](徐廣) ==&lt;br /&gt;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lt;br /&gt;
&lt;br /&gt;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lt;br /&gt;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lt;br /&gt;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lt;br /&gt;
&lt;br /&gt;
== [[서온(황제)|서온]](徐溫) ==&lt;br /&gt;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인물로, 양오의 권신이자 남당의 추존황제이다.&lt;br /&gt;
&lt;br /&gt;
== [[서현수(북제)|서현수]](徐顯秀)==&lt;br /&gt;
북제(北齊)는 북조(北朝) 시기의 한 국가로 북위(北魏) 선비족(鮮卑族) 탁발부(拓跋部) 정권의 연장이다. 선비족은 북방 유목민족으로 개혁을 통해 한(漢) 문화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였고, 민족융합이라는 특수한 문화 현상을 형성했다. 북위와 북제 두 국가가 세워졌던 산서(山西)지역에는 수많은 역사유적이 남아 있다. 북제 서현수(徐顯秀) 묘지는 그 대표적인 고고학 유적이다&lt;br /&gt;
&lt;br /&gt;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lt;br /&gt;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lt;br /&gt;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lt;br /&gt;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lt;br /&gt;
중국 송나라의 문신.&lt;br /&gt;
&lt;br /&gt;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lt;br /&gt;
&lt;br /&gt;
== [[서휘언]](徐徽言) ==&lt;br /&gt;
송나라 구주(衢州) 서안(西安) 사람. 자는 언유(彦猷)다. 휘종(徽宗) 대관(大觀) 2년(1108) 무거절륜(武擧絶倫)에 급제했다.&lt;br /&gt;
&lt;br /&gt;
== [[서수휘]](徐壽輝) ==&lt;br /&gt;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lt;br /&gt;
원나라 말기 기주(蘄州) 나전(羅田) 사람. 이름은 정일(貞一) 또는 진일(眞逸)로도 썼다. 호는 홍건(紅巾)이다. 면포판매업을 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1351) 요승(妖僧) 팽형옥(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홍건(紅巾)이라 부르면서 수령으로 추대되어 기주(蘄州)에 웅거하여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연호를 치평(治平)이라 했다.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세주(世主)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사를 보내 각지를 공략했다.&lt;br /&gt;
&lt;br /&gt;
세력이 한 때 형주(衡州)와 도주(道州), 항주(杭州)까지 이르렀고, 복건(福建)으로 들어갔다. 14년(1354) 호광(湖廣)과 강서(江西) 일대를 거의 점령했다. 2년 뒤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다. 태평(太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실권을 대장(大將) 예문준(倪文俊)에게 넘겼다. 다음 해 진우량(陳友諒)이 예문준을 살해하자 진유량의 보호를 받았다. 19년(1359) 강도(江都)로 천도했다. 다음 해 채석(采石)에서 진우량에게 살해당했다. 10년 동안 칭제했다.&lt;br /&gt;
&lt;br /&gt;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lt;br /&gt;
&lt;br /&gt;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lt;br /&gt;
&lt;br /&gt;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lt;br /&gt;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lt;br /&gt;
&lt;br /&gt;
== [[서특립]](徐特立)  ==&lt;br /&gt;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lt;br /&gt;
&lt;br /&gt;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lt;br /&gt;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lt;br /&gt;
&lt;br /&gt;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lt;br /&gt;
중화민국. 군벌&lt;br /&gt;
&lt;br /&gt;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lt;br /&gt;
중화민국 군벌&lt;br /&gt;
&lt;br /&gt;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lt;br /&gt;
중화민국 국방부장관&lt;br /&gt;
&lt;br /&gt;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lt;br /&gt;
청말민초의 정치인&lt;br /&gt;
&lt;br /&gt;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lt;br /&gt;
중국의 군인, 정치가.&lt;br /&gt;
&lt;br /&gt;
== [[서극(중국)|서극]](徐克) ==&lt;br /&gt;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lt;br /&gt;
&lt;br /&gt;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lt;br /&gt;
대만 배우&lt;br /&gt;
&lt;br /&gt;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lt;br /&gt;
대만 배우&lt;br /&gt;
&lt;br /&gt;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lt;br /&gt;
중국 가수&lt;br /&gt;
&lt;br /&gt;
== [[서량지(대만)|서량지]](徐亮之)  ==&lt;br /&gt;
대만 학자&lt;br /&gt;
&lt;br /&gt;
중화서씨 위인&lt;br /&gt;
&lt;br /&gt;
서가염(徐嘉炎)서가현처유씨(徐嘉賢妻劉氏)서각(徐恪)서간(徐幹)서감(徐感)서감(徐鑒)서개(徐盖)서개(徐鍇)서건(徐謇)서건인(徐建寅)서건학(徐乾學)서검(徐儉)서견(徐堅)서경(徐耕)서경성(徐敬成)서경손(徐經孫)서경업(徐敬業)서경장(徐慶璋)서경지(徐敬之)서계(徐階)서계여(徐繼畬)서곤(徐琨)서광(徐廣)서광계(徐光啓)서광진(徐廣縉)서교(徐嶠)서교(徐僑)서구(徐矩)서구(徐璆)서구사(徐九思)서국대장공주(徐國大長公主)서규(徐珪)서규(徐揆)서규지(徐逵之)서균(徐均)서기(徐杞)서기(徐起)서기(徐基)서기(徐琦)서기(徐麒)서녕(徐寧)서노두처악씨(徐猱頭妻岳氏)서단(徐端)서달(徐達)서담지(徐湛之)서대(徐岱)서대상(徐大相)서대예(徐大禮)서대중(徐大中)서대춘(徐大椿)서대화(徐大化)서도(徐度)서도륭(徐道隆)서도명(徐道明)서도흥(徐道興)서동(徐桐)서득지(徐得之)서등(徐登)서로(徐路)서록경(徐鹿卿)서릉(徐陵)서리(徐摛)서리(徐理)서린(徐驎)서림(徐霖)서막(徐邈)서면(徐勉)서명양(徐明楊)서명영처오씨(徐明英妻吳氏)서몽신(徐夢莘)서묘(徐苗)서문(徐文)서문(徐問)서문경빙처요씨(徐文經聘妻姚氏)서문백(徐文伯)서문부(徐文溥)서문성(徐文盛)서문원(徐文遠)서문정(徐文靖)서문화(徐文華)서발(徐勃)서방(徐防)서방(徐坊)서방(徐枋)서방(徐舫)서방경(徐方敬)서방도(徐邦道)서방성(徐芳聲)서방헌(徐邦憲)서백(徐伯)서백양(徐伯陽)서백진(徐伯珍)서백창(徐伯昌)서번(徐璠)서범(徐范)서법적(徐法績)서병의(徐秉義)서보재(徐甫宰)서보제(徐普濟)서본(徐本)서본고(徐本高)서봉개(徐鳳喈)서복(徐復)서부(徐俯)서박(徐溥)서부원(徐孚遠)서분(徐賁)서불보(徐佛保)서비(徐悱)서빈(徐份)서빈(徐彬)서사(徐嗣)서사림(徐士林)서사마(徐司馬)서사백(徐嗣伯)서사부(徐士溥)서사산(徐嗣産)서사종(徐嗣宗)서사종(徐士宗)서사증(徐嗣曾)서사휘(徐嗣徽)서상(徐詳)서상(徐商)서상(徐祥)서상경(徐尙卿)서생지(徐生之)서서(徐庶)서서수(徐書受)서석기(徐石麒)서석린(徐錫麟)서선(徐宣)서선술(徐善述)서선지(徐羨之)서설매(徐雪梅)서섬(徐暹)서성(徐盛)서세적(徐世勣)서세륭(徐世隆)서세보(徐世譜)서세순(徐世淳)서세휴(徐世休)서소익(徐昭益)서송(徐松)서수(徐壽)서수명(徐樹銘)서수붕(徐壽朋)서수인(徐守仁)서수질(徐守質)서수휘(徐壽輝)서숭(徐嵩)서승경(徐承慶)서승규(徐承珪)서승욱(徐承煜)서시(徐市)서식(徐栻)서신(徐申)서아장(徐亞長)서악(徐樂)서악(徐岳)서안정(徐安貞)서애(徐愛)서야(徐夜)서양정(徐養正)서언백(徐彦伯)서언약(徐彦若)서여가(徐如珂)서연(徐璉)서연욱(徐延旭)서염조(徐念祖)서영(徐榮)서영(徐瑛)서영수(徐榮叟)서영예처(徐靈禮妻)서영조(徐榮祖)&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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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토루]](土樓) ==&lt;br /&gt;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lt;br /&gt;
&lt;br /&gt;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lt;br /&gt;
&lt;br /&gt;
초계토루군 [[서씨]]의 집성촌으로 가장 먼저 알려진 토루군입니다.&lt;br /&gt;
&lt;br /&gt;
중국 푸젠성[福建省] 룽옌시[龙岩市]의 융딩[永定]에 위치한 [[토루]](土楼).&lt;br /&gt;
&lt;br /&gt;
쉬[徐][[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추시춘[初溪村]에 지어진 토루군(土楼群)이다. 융딩[永定]에 있는 위앤투러우[圆土楼] 중 가장 원시적인 곳이자 커자([[객가]])[客家]의 인문적 색채가 잘 드러난 곳이다. 추시춘[初溪村] 쉬[徐][[서씨]]의 3대조가 명대(明代, 1419)에 세운 지칭러우[集庆楼]가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lt;br /&gt;
&lt;br /&gt;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대요(大遼, 916년 ~ 1125년)]] ==&lt;br /&gt;
거란족이 중국 화북지역을 정복하고 세운 왕조이다. 생활은 주로 정주 농경과 목축을 하였다. 야율아보기가 거란족과 기타 이민족들을 모아 화북을 점령하고 칭제하였다. 916년 건국 당시에는 국호가 거란(契丹)이었는데, 947년에 대요로 바꾸고, 1125년에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보통 약칭 요(遼)라고 한다.&lt;br /&gt;
&lt;br /&gt;
== [[만주족(滿洲族,  ᠮᠠᠨᠵᡠ Manju Aiman) 또는 만족(满族,滿族,Mǎnzú)]] ==&lt;br /&gt;
만주에서 발상한 동아시아의 민족이다. 말갈족이였던 여진족의 후신으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계승하였고, 만주에 있던 여진족을 통합하여 만주지역에서 후금, 이후 이름이 바뀌길 청나라를 세웠다. 청나라 대에 만주족은 중국 전 영토를 통일하였으나 서양 학자들에 의하면 귀족들의 이기심 혹은 전근대적 한계로 인하여 구성원의 상당한 숫자가 한족에게 동화되어 만주어나 정체성을 거의 잊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여진(ᠵᡠᡧᡝᠨ Jušen, 녀진,  女眞, 女真, nǚzhēn)]] ==&lt;br /&gt;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과 한반도의 함경도, 러시아의 연해주, 하바롭스크 지방, 아무르주에서 거주했던 퉁구스계 민족이다.&lt;br /&gt;
&lt;br /&gt;
== [[대금(大金 1115년 1월 28일 ~ 1234년 2월 9일)]] ==&lt;br /&gt;
약칭 금(金)은 중세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한 왕조로 여진족 완안부의 아골타가 1115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수국(收國)으로 정하면서 건국됐다.&lt;br /&gt;
&lt;br /&gt;
== [[대청국(大淸國,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다이칭 구룬, 1636년 4월~ 1912년 2월 12일)]] ==&lt;br /&gt;
또는 대청제국(大淸帝國),청조(淸朝),대청(大淸), 약칭 청(淸)은 중국 역사상 최후의 통일 왕조이자, 근대 중국을 지배하였던 마지막 왕조이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lt;br /&gt;
&lt;br /&gt;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lt;br /&gt;
&lt;br /&gt;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lt;br /&gt;
&lt;br /&gt;
== 카톡방 가입방법[[https://open.kakao.com/o/gBQB1q6c]]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lt;br /&gt;
&lt;br /&gt;
﻿&lt;br /&gt;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lt;br /&gt;
&lt;br /&gt;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lt;br /&gt;
&lt;br /&gt;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헝가리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br /&gt;
&lt;br /&gt;
&lt;br /&gt;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B%9F%89%EC%A7%80(%EB%8C%80%EB%A7%8C)&amp;diff=145744</id>
		<title>서량지(대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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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2T20:58: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amp;quot;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amp;quot;&lt;br /&gt;
&lt;br /&gt;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10월초판)에서 이렇게 썼다.“4천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quot;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amp;quot;&lt;br /&gt;
“중국의 책력법(冊曆法*달력)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lt;br /&gt;
&lt;br /&gt;
​&lt;br /&gt;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신농 등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 서씨 분파 ==&lt;br /&gt;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lt;br /&gt;
&lt;br /&gt;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市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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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B%9F%89%EC%A7%80(%EB%8C%80%EB%A7%8C)&amp;diff=145743</id>
		<title>서량지(대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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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2T20:57: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새 문서: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lt;/p&gt;
&lt;hr /&gt;
&lt;div&gt;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lt;br /&gt;
&lt;br /&gt;
&amp;quot;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amp;quot;&lt;br /&gt;
&lt;br /&gt;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10월초판)에서 이렇게 썼다.“4천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amp;quot;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amp;quot;&lt;br /&gt;
“중국의 책력법(冊曆法*달력)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lt;br /&gt;
&lt;br /&gt;
​&lt;br /&gt;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신농 등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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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A4%91%ED%99%94_%EC%84%9C%EC%94%A8&amp;diff=145742</id>
		<title>중화 서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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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02T20:51: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서예양(徐藝洋 Xu Yiyang) */&lt;/p&gt;
&lt;hr /&gt;
&lt;div&gt;中華徐氏遠祖zhōnghuá xúshì([[중화 서씨]]원조)=中国徐氏遠祖zhōngguó xúshì([[중국 서씨]]원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徐[xú])는 중국의 성씨이다. 해당 성씨는 중국에서 《백가성(百家姓)》 제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51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lt;br /&gt;
&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lt;br /&gt;
&lt;br /&gt;
&lt;br /&gt;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amp;lt;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amp;gt;.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amp;quot;&amp;gt;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lt;br /&gt;
&lt;br /&gt;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amp;quot;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amp;quot;(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lt;br /&gt;
&lt;br /&gt;
== [[기자조선]]의 후손설 ==&lt;br /&gt;
&lt;br /&gt;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lt;br /&gt;
&lt;br /&gt;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lt;br /&gt;
&lt;br /&gt;
기자조선의 영역&lt;br /&gt;
&lt;br /&gt;
&lt;br /&gt;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amp;lt;대업(大業) 혹 고요(皐陶)&amp;gt;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lt;br /&gt;
&lt;br /&gt;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lt;br /&gt;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lt;br /&gt;
&lt;br /&gt;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amp;lt;삼국사기&amp;gt;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amp;lt;삼국사기&amp;gt;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lt;br /&gt;
 &lt;br /&gt;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lt;br /&gt;
 &lt;br /&gt;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lt;br /&gt;
 &lt;br /&gt;
또한 &amp;lt;자치통감&amp;gt;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lt;br /&gt;
 &lt;br /&gt;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amp;lt;진서&amp;gt;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lt;br /&gt;
 &lt;br /&gt;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lt;br /&gt;
 &lt;br /&gt;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lt;br /&gt;
 &lt;br /&gt;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lt;br /&gt;
 &lt;br /&gt;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lt;br /&gt;
 &lt;br /&gt;
&lt;br /&gt;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lt;br /&gt;
 &lt;br /&gt;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amp;lt;삼국사기&amp;gt;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분파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흑치씨]](黑齒氏) - &amp;lt;[[흑치상지]] 묘지명&amp;gt;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amp;lt;동성왕조&amp;gt;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amp;gt; 백가 &amp;gt;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lt;br /&gt;
&lt;br /&gt;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lt;br /&gt;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lt;br /&gt;
&lt;br /&gt;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amp;lt;왕력편&amp;gt;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amp;quot;[[동성왕]]의 아들&amp;quot;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lt;br /&gt;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lt;br /&gt;
&lt;br /&gt;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lt;br /&gt;
&lt;br /&gt;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lt;br /&gt;
&lt;br /&gt;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lt;br /&gt;
&lt;br /&gt;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lt;br /&gt;
&lt;br /&gt;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lt;br /&gt;
&lt;br /&gt;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lt;br /&gt;
&lt;br /&gt;
== [[부여]]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lt;br /&gt;
&lt;br /&gt;
[[여현]]&lt;br /&gt;
&lt;br /&gt;
[[여울]]&lt;br /&gt;
&lt;br /&gt;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lt;br /&gt;
&lt;br /&gt;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lt;br /&gt;
&lt;br /&gt;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lt;br /&gt;
&lt;br /&gt;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lt;br /&gt;
&lt;br /&gt;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lt;br /&gt;
&lt;br /&gt;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lt;br /&gt;
&lt;br /&gt;
[[우복]](優福)&lt;br /&gt;
&lt;br /&gt;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lt;br /&gt;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lt;br /&gt;
&lt;br /&gt;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lt;br /&gt;
&lt;br /&gt;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lt;br /&gt;
&lt;br /&gt;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lt;br /&gt;
&lt;br /&gt;
[[부여기]]&lt;br /&gt;
&lt;br /&gt;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lt;br /&gt;
&lt;br /&gt;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lt;br /&gt;
&lt;br /&gt;
[[부여력]](夫餘歷)&lt;br /&gt;
&lt;br /&gt;
[[부여고]](夫餘固)&lt;br /&gt;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lt;br /&gt;
&lt;br /&gt;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lt;br /&gt;
&lt;br /&gt;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lt;br /&gt;
&lt;br /&gt;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lt;br /&gt;
&lt;br /&gt;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lt;br /&gt;
&lt;br /&gt;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lt;br /&gt;
&lt;br /&gt;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lt;br /&gt;
&lt;br /&gt;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lt;br /&gt;
&lt;br /&gt;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lt;br /&gt;
&lt;br /&gt;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lt;br /&gt;
&lt;br /&gt;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lt;br /&gt;
&lt;br /&gt;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lt;br /&gt;
&lt;br /&gt;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lt;br /&gt;
&lt;br /&gt;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lt;br /&gt;
&lt;br /&gt;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lt;br /&gt;
&lt;br /&gt;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lt;br /&gt;
&lt;br /&gt;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lt;br /&gt;
&lt;br /&gt;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lt;br /&gt;
&lt;br /&gt;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lt;br /&gt;
&lt;br /&gt;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lt;br /&gt;
&lt;br /&gt;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amp;quot;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amp;quot;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amp;quot;[[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amp;quot;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amp;quot;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amp;quot;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lt;br /&gt;
&lt;br /&gt;
== 서씨 분파 ==&lt;br /&gt;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lt;br /&gt;
&lt;br /&gt;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서광(동진)|서광]](徐廣) ==&lt;br /&gt;
서광(徐廣, 352년 ~ 425년)은 중국 동진과 유송의 관료, 학자로 자는 야민(野民)이며 동완 고막(東莞 姑幕, 현재의 장쑤성 창저우 시) 출신이다.&lt;br /&gt;
&lt;br /&gt;
== [[이적(당나라)|이적]](李勣) ==&lt;br /&gt;
당나라 고조ㆍ태조 때의 무장.&lt;br /&gt;
본래 성은 서(徐).서적(徐勣)&lt;br /&gt;
&lt;br /&gt;
== [[서온(황제)|서온]](徐溫) ==&lt;br /&gt;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인물로, 양오의 권신이자 남당의 추존황제이다.&lt;br /&gt;
&lt;br /&gt;
== [[서현수(북제)|서현수]](徐顯秀)==&lt;br /&gt;
북제(北齊)는 북조(北朝) 시기의 한 국가로 북위(北魏) 선비족(鮮卑族) 탁발부(拓跋部) 정권의 연장이다. 선비족은 북방 유목민족으로 개혁을 통해 한(漢) 문화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였고, 민족융합이라는 특수한 문화 현상을 형성했다. 북위와 북제 두 국가가 세워졌던 산서(山西)지역에는 수많은 역사유적이 남아 있다. 북제 서현수(徐顯秀) 묘지는 그 대표적인 고고학 유적이다.&lt;br /&gt;
&lt;br /&gt;
==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 ==&lt;br /&gt;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lt;br /&gt;
5대10국일때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린 자는 모두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은 前蜀의 왕건의 숙비 서씨（淑妃徐氏, 883～926, 43세）이며 청두사람(成都人)이며 그녀의 언니도 왕건의 비(妃)인지라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했고 자매 두명은 모두 총애를 받았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회뢰를 하고 정치를 간섭했으며 그 후의 왕을 황음무도하게 이끈 탓에 왕과 함께 后唐의 庄宗에게 살해당한다.&lt;br /&gt;
두번째는 后蜀의 왕인 맹창(孟昶)의 비이며 역시 서씨(徐氏)였고 혜비(慧妃)에 봉해졌으며 스촨관현(四川灌县)사람이며 미모가 아름답기를 꽃술 같다고 하여 “화예부인서씨(花蕊夫人徐氏)”이라 불렀다. 맹창이 송(宋)에 투항한 후 어쩌면 송나라 궁전에 잡혀들어가 송태조의 총애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lt;br /&gt;
&lt;br /&gt;
== [[서긍(송나라)|서긍]](徐兢) ==&lt;br /&gt;
중국 송나라의 문신.&lt;br /&gt;
&lt;br /&gt;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lt;br /&gt;
&lt;br /&gt;
== [[서휘언]](徐徽言) ==&lt;br /&gt;
송나라 구주(衢州) 서안(西安) 사람. 자는 언유(彦猷)다. 휘종(徽宗) 대관(大觀) 2년(1108) 무거절륜(武擧絶倫)에 급제했다.&lt;br /&gt;
&lt;br /&gt;
== [[서달(명나라)|서달]](徐達) ==&lt;br /&gt;
&lt;br /&gt;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lt;br /&gt;
&lt;br /&gt;
== [[서수(청나라)|서수]](徐壽) ==&lt;br /&gt;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과학자이고 중국 근대 화학의 계몽가이자 중국 근대 조선공업의 선구자이다.&lt;br /&gt;
&lt;br /&gt;
== [[서특립]](徐特立)  ==&lt;br /&gt;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스승&lt;br /&gt;
&lt;br /&gt;
== [[유경(청나라)|유경]](裕庚 yù gēng) ==&lt;br /&gt;
한군(漢軍)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본래 성은 서(徐)&lt;br /&gt;
&lt;br /&gt;
== [[서세창(청나라)|서세창]](徐世昌) ==&lt;br /&gt;
중화민국. 군벌&lt;br /&gt;
&lt;br /&gt;
== [[서수쟁(청나라)|서수쟁]](徐樹錚) ==&lt;br /&gt;
중화민국 군벌&lt;br /&gt;
&lt;br /&gt;
== [[서영창(중화민국)|서영창]](徐永昌) ==&lt;br /&gt;
중화민국 국방부장관&lt;br /&gt;
&lt;br /&gt;
==  [[서겸(중화민국)|서겸]](徐謙)  ==&lt;br /&gt;
청말민초의 정치인&lt;br /&gt;
&lt;br /&gt;
== [[서향전(중국)|서향전]](徐向前) ==&lt;br /&gt;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lt;br /&gt;
&lt;br /&gt;
== [[서극(중국)|서극]](徐克) ==&lt;br /&gt;
[[서극(중국)|서극]](徐克, 쉬커, 1950년 2월 15일 ~ )은 중국 출신의 홍콩 영화 감독이다.&lt;br /&gt;
&lt;br /&gt;
==  [[서희원(대만)|서희원]](徐熙媛)  ==&lt;br /&gt;
대만 배우&lt;br /&gt;
&lt;br /&gt;
==  [[서약선(대만)|서약선]](徐若瑄) ==&lt;br /&gt;
대만 배우&lt;br /&gt;
&lt;br /&gt;
== [[서예양(중국)|서예양]](徐藝洋 Xu Yiyang) ==&lt;br /&gt;
중국 가수&lt;br /&gt;
&lt;br /&gt;
== [[서량지(대만)|서량지]](徐亮之)  ==&lt;br /&gt;
대만 학자&lt;br /&gt;
&lt;br /&gt;
중국서씨 위인&lt;br /&gt;
&lt;br /&gt;
서가염(徐嘉炎)서가현처유씨(徐嘉賢妻劉氏)서각(徐恪)서간(徐幹)서감(徐感)서감(徐鑒)서개(徐盖)서개(徐鍇)서건(徐謇)서건인(徐建寅)서건학(徐乾學)서검(徐儉)서견(徐堅)서경(徐耕)서경성(徐敬成)서경손(徐經孫)서경업(徐敬業)서경장(徐慶璋)서경지(徐敬之)서계(徐階)서계여(徐繼畬)서곤(徐琨)서광(徐廣)서광계(徐光啓)서광진(徐廣縉)서교(徐嶠)서교(徐僑)서구(徐矩)서구(徐璆)서구사(徐九思)서국대장공주(徐國大長公主)서규(徐珪)서규(徐揆)서규지(徐逵之)서균(徐均)서기(徐杞)서기(徐起)서기(徐基)서기(徐琦)서기(徐麒)서녕(徐寧)서노두처악씨(徐猱頭妻岳氏)서단(徐端)서달(徐達)서담지(徐湛之)서대(徐岱)서대상(徐大相)서대예(徐大禮)서대중(徐大中)서대춘(徐大椿)서대화(徐大化)서도(徐度)서도륭(徐道隆)서도명(徐道明)서도흥(徐道興)서동(徐桐)서득지(徐得之)서등(徐登)서로(徐路)서록경(徐鹿卿)서릉(徐陵)서리(徐摛)서리(徐理)서린(徐驎)서림(徐霖)서막(徐邈)서면(徐勉)서명양(徐明楊)서명영처오씨(徐明英妻吳氏)서몽신(徐夢莘)서묘(徐苗)서문(徐文)서문(徐問)서문경빙처요씨(徐文經聘妻姚氏)서문백(徐文伯)서문부(徐文溥)서문성(徐文盛)서문원(徐文遠)서문정(徐文靖)서문화(徐文華)서발(徐勃)서방(徐防)서방(徐坊)서방(徐枋)서방(徐舫)서방경(徐方敬)서방도(徐邦道)서방성(徐芳聲)서방헌(徐邦憲)서백(徐伯)서백양(徐伯陽)서백진(徐伯珍)서백창(徐伯昌)서번(徐璠)서범(徐范)서법적(徐法績)서병의(徐秉義)서보재(徐甫宰)서보제(徐普濟)서본(徐本)서본고(徐本高)서봉개(徐鳳喈)서복(徐復)서부(徐俯)서박(徐溥)서부원(徐孚遠)서분(徐賁)서불보(徐佛保)서비(徐悱)서빈(徐份)서빈(徐彬)서사(徐嗣)서사림(徐士林)서사마(徐司馬)서사백(徐嗣伯)서사부(徐士溥)서사산(徐嗣産)서사종(徐嗣宗)서사종(徐士宗)서사증(徐嗣曾)서사휘(徐嗣徽)서상(徐詳)서상(徐商)서상(徐祥)서상경(徐尙卿)서생지(徐生之)서서(徐庶)서서수(徐書受)서석기(徐石麒)서석린(徐錫麟)서선(徐宣)서선술(徐善述)서선지(徐羨之)서설매(徐雪梅)서섬(徐暹)서성(徐盛)서세적(徐世勣)서세륭(徐世隆)서세보(徐世譜)서세순(徐世淳)서세휴(徐世休)서소익(徐昭益)서송(徐松)서수(徐壽)서수명(徐樹銘)서수붕(徐壽朋)서수인(徐守仁)서수질(徐守質)서수휘(徐壽輝)서숭(徐嵩)서승경(徐承慶)서승규(徐承珪)서승욱(徐承煜)서시(徐市)서식(徐栻)서신(徐申)서아장(徐亞長)서악(徐樂)서악(徐岳)서안정(徐安貞)서애(徐愛)서야(徐夜)서양정(徐養正)서언백(徐彦伯)서언약(徐彦若)서여가(徐如珂)서연(徐璉)서연욱(徐延旭)서염조(徐念祖)서영(徐榮)서영(徐瑛)서영수(徐榮叟)서영예처(徐靈禮妻)서영조(徐榮祖)&lt;br /&gt;
서오(徐鏊)서옥(徐鈺)서용(徐勇)서용구(徐龍駒)서용석(徐用錫)서용의(徐用儀)서욱령(徐旭齡)서원(徐遠)서원(徐爰)서원걸(徐元傑)서원공(徐元珙)서원랑(徐圓朗)서원몽(徐元夢)서원문(徐元文)서원처허씨(徐元妻許氏)서원춘(徐元春)서월(徐樾)서위(徐渭)서유공(徐有功)서유보(徐遺寶)서유성(徐有聲)서유원처허씨(徐惟原妻許氏)서유임(徐有壬)서유정(徐有貞)서윤양(徐允讓)서응방(徐應芳)서응빙(徐應聘)서응서(徐膺緖)서응용(徐應龍)서응표(徐應鑣)서응풍(徐應豊)서의(徐儀)서의(徐誼)서의공(徐義恭)서인(徐仁)서인(徐夤)서인기(徐仁紀)서인주(徐仁疇)서일기(徐一夔)서일원(徐一源)서일태(徐日泰)서적(徐的)서적(徐勣)서적(徐績)서정(徐政)서정경(徐禎卿)서정명(徐貞明)서제담(徐齊聃)서조(徐潮)서조강(徐朝綱)서조량(徐肇梁)서존생(徐尊生)서종간(徐宗幹)서종실(徐宗實)서종인(徐宗仁)서종치(徐從治)서준명(徐遵明)서중행(徐中行)서증수(徐增壽)서증유(徐曾庾)서지(徐枳)서지범(徐之范)서지재(徐之才)서진(徐眞)서진(徐珍)서진(徐榛)서진방(徐縉芳)서처인(徐處仁)서척(徐陟)서천(徐踐)서천린(徐天麟)서청수(徐淸叟)서초(徐招)서축(徐蓄)서충(徐忠)서치(徐稚)서치도(徐治都)서치상(徐致祥)서치정(徐致靖)서칙(徐則)서탁(徐鐸)서태영(徐台英)서태현(徐太玄)서태화(徐太華)서택(徐澤)서파(徐波)서패지(徐佩之)서표(徐標)서풍옥(徐豊玉)서필달(徐必達)서학공(徐學功)서학모(徐學謨)서학시(徐學詩)서학안(徐學顔)서해(徐海)서헌충(徐獻忠)서혁(徐奕)서현(徐鉉)서형(徐亨)서호(徐浩)서홍유(徐鴻儒)서화봉(徐華封)서화장처주씨(徐華璋妻朱氏)서활(徐豁)서황(徐晃)서황(徐璜)서회(徐晦)서회옥(徐懷玉)서효극(徐孝克)서효봉(徐曉峰)서효사(徐孝嗣)서효숙(徐孝肅)서휘언(徐徽言)서휘조(徐輝祖)서휴부(徐休復)서흘(徐紇)서흥(徐興)서희(徐禧)서희수(徐希秀)&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토루]](土樓) ==&lt;br /&gt;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lt;br /&gt;
&lt;br /&gt;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lt;br /&gt;
&lt;br /&gt;
초계토루군 [[서씨]]의 집성촌으로 가장 먼저 알려진 토루군입니다.&lt;br /&gt;
&lt;br /&gt;
중국 푸젠성[福建省] 룽옌시[龙岩市]의 융딩[永定]에 위치한 [[토루]](土楼).&lt;br /&gt;
&lt;br /&gt;
쉬[徐][[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추시춘[初溪村]에 지어진 토루군(土楼群)이다. 융딩[永定]에 있는 위앤투러우[圆土楼] 중 가장 원시적인 곳이자 커자([[객가]])[客家]의 인문적 색채가 잘 드러난 곳이다. 추시춘[初溪村] 쉬[徐][[서씨]]의 3대조가 명대(明代, 1419)에 세운 지칭러우[集庆楼]가 대표적이다.&lt;br /&gt;
&lt;br /&gt;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lt;br /&gt;
&lt;br /&gt;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不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대요(大遼, 916년 ~ 1125년)]] ==&lt;br /&gt;
거란족이 중국 화북지역을 정복하고 세운 왕조이다. 생활은 주로 정주 농경과 목축을 하였다. 야율아보기가 거란족과 기타 이민족들을 모아 화북을 점령하고 칭제하였다. 916년 건국 당시에는 국호가 거란(契丹)이었는데, 947년에 대요로 바꾸고, 1125년에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보통 약칭 요(遼)라고 한다.&lt;br /&gt;
&lt;br /&gt;
== [[만주족(滿洲族,  ᠮᠠᠨᠵᡠ Manju Aiman) 또는 만족(满族,滿族,Mǎnzú)]] ==&lt;br /&gt;
만주에서 발상한 동아시아의 민족이다. 말갈족이였던 여진족의 후신으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계승하였고, 만주에 있던 여진족을 통합하여 만주지역에서 후금, 이후 이름이 바뀌길 청나라를 세웠다. 청나라 대에 만주족은 중국 전 영토를 통일하였으나 서양 학자들에 의하면 귀족들의 이기심 혹은 전근대적 한계로 인하여 구성원의 상당한 숫자가 한족에게 동화되어 만주어나 정체성을 거의 잊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여진(ᠵᡠᡧᡝᠨ Jušen, 녀진,  女眞, 女真, nǚzhēn)]] ==&lt;br /&gt;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과 한반도의 함경도, 러시아의 연해주, 하바롭스크 지방, 아무르주에서 거주했던 퉁구스계 민족이다.&lt;br /&gt;
&lt;br /&gt;
== [[대금(大金 1115년 1월 28일 ~ 1234년 2월 9일)]] ==&lt;br /&gt;
약칭 금(金)은 중세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한 왕조로 여진족 완안부의 아골타가 1115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수국(收國)으로 정하면서 건국됐다.&lt;br /&gt;
&lt;br /&gt;
== [[대청국(大淸國,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다이칭 구룬, 1636년 4월~ 1912년 2월 12일)]] ==&lt;br /&gt;
또는 대청제국(大淸帝國),청조(淸朝),대청(大淸), 약칭 청(淸)은 중국 역사상 최후의 통일 왕조이자, 근대 중국을 지배하였던 마지막 왕조이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lt;br /&gt;
&lt;br /&gt;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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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lt;br /&gt;
&lt;br /&gt;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lt;br /&gt;
&lt;br /&gt;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br /&gt;
&lt;br /&gt;
&lt;br /&gt;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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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지회장 서경숙(부산 선명라이온스클럽 회장)&lt;br /&gt;
&lt;br /&gt;
==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lt;br /&gt;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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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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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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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서씨연합회(全國徐氏聯合會),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천하서씨일가연합회(天下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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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지회장 서경숙&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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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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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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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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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전국서씨연합회(全國徐氏聯合會),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천하서씨일가연합회(天下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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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E%AC%EC%9B%90(%ED%98%84%EB%8C%80)&amp;diff=145681</id>
		<title>서재원(현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E%AC%EC%9B%90(%ED%98%84%EB%8C%80)&amp;diff=145681"/>
				<updated>2025-12-19T22:09: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희성당(希聖堂) */&lt;/p&gt;
&lt;hr /&gt;
&lt;div&gt;[[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lt;br /&gt;
&lt;br /&gt;
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발기인.&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lt;br /&gt;
&lt;br /&gt;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34세 후손.&lt;br /&gt;
&lt;br /&gt;
 &lt;br /&gt;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lt;br /&gt;
&lt;br /&gt;
5세 [[서정(고려)|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6세 [[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lt;br /&gt;
&lt;br /&gt;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lt;br /&gt;
&lt;br /&gt;
7세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lt;br /&gt;
&lt;br /&gt;
8세    실전&lt;br /&gt;
&lt;br /&gt;
9세    실전&lt;br /&gt;
&lt;br /&gt;
10세  실전&lt;br /&gt;
&lt;br /&gt;
11세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lt;br /&gt;
&lt;br /&gt;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lt;br /&gt;
&lt;br /&gt;
12세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lt;br /&gt;
&lt;br /&gt;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lt;br /&gt;
&lt;br /&gt;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lt;br /&gt;
&lt;br /&gt;
15세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lt;br /&gt;
&lt;br /&gt;
16세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lt;br /&gt;
&lt;br /&gt;
17세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lt;br /&gt;
&lt;br /&gt;
18세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lt;br /&gt;
&lt;br /&gt;
19세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lt;br /&gt;
&lt;br /&gt;
20세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lt;br /&gt;
&lt;br /&gt;
21세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lt;br /&gt;
&lt;br /&gt;
22세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lt;br /&gt;
&lt;br /&gt;
23세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4세 [[서명유(조선2)|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5세 [[서사준(조선)|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6세 [[서복문(조선)|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7세 [[서시영(조선)|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8세 [[서영효(조선)|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lt;br /&gt;
&lt;br /&gt;
29세 [[서온기(조선)|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lt;br /&gt;
&lt;br /&gt;
30세 [[서용호(현대)|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lt;br /&gt;
&lt;br /&gt;
31세 [[서권수(현대)|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lt;br /&gt;
&lt;br /&gt;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lt;br /&gt;
&lt;br /&gt;
32세 [[서종식(현대)|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lt;br /&gt;
&lt;br /&gt;
[[서준식(현대)|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lt;br /&gt;
&lt;br /&gt;
33세 [[서강수(현대)|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lt;br /&gt;
&lt;br /&gt;
[[서정순(현대)|서정순]](徐貞順)&lt;br /&gt;
&lt;br /&gt;
34세 [[서재원(현대)|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lt;br /&gt;
35세 [[서형정(현대)|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lt;br /&gt;
&lt;br /&gt;
[[서정민(현대)|서정민]](徐廷旼 대학생.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lt;br /&gt;
 &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lt;br /&gt;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lt;br /&gt;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lt;br /&gt;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lt;br /&gt;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lt;br /&gt;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lt;br /&gt;
******[[서균(고려)|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lt;br /&gt;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lt;br /&gt;
********실 전&lt;br /&gt;
*********실 전&lt;br /&gt;
**********실 전&lt;br /&gt;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lt;br /&gt;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lt;br /&gt;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lt;br /&gt;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lt;br /&gt;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lt;br /&gt;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lt;br /&gt;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lt;br /&gt;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lt;br /&gt;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lt;br /&gt;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lt;br /&gt;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lt;br /&gt;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lt;br /&gt;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lt;br /&gt;
************************[[서명유(조선2)|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lt;br /&gt;
*************************[[서사준(조선)|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lt;br /&gt;
**************************[[서복문(조선)|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lt;br /&gt;
***************************[[서시영(조선)|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lt;br /&gt;
****************************[[서영효(조선)|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lt;br /&gt;
*****************************[[서온기(조선)|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lt;br /&gt;
******************************[[서용호(현대)|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lt;br /&gt;
*******************************[[서권수(현대)|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lt;br /&gt;
********************************[[서종식(현대)|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lt;br /&gt;
********************************[[서준식(현대)|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lt;br /&gt;
*********************************[[서강수(현대)|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lt;br /&gt;
*********************************[[서정순(현대)|서정순]](徐貞順)&lt;br /&gt;
**********************************[[서재원(현대)|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서형정(현대)|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lt;br /&gt;
***********************************[[서정민(현대)|서정민]](徐廷旼 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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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의서재 #텐트아빠 #민어한점 #JaewonSeo #HwangjeSuhjae&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E%AC%EC%9B%90(%ED%98%84%EB%8C%80)&amp;diff=145680</id>
		<title>서재원(현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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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9T22:09: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희성당(希聖堂) */&lt;/p&gt;
&lt;hr /&gt;
&lt;div&gt;[[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lt;br /&gt;
&lt;br /&gt;
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발기인.&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lt;br /&gt;
&lt;br /&gt;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34세 후손.&lt;br /&gt;
&lt;br /&gt;
 &lt;br /&gt;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lt;br /&gt;
&lt;br /&gt;
5세 [[서정(고려)|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6세 [[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lt;br /&gt;
&lt;br /&gt;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lt;br /&gt;
&lt;br /&gt;
7세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lt;br /&gt;
&lt;br /&gt;
8세    실전&lt;br /&gt;
&lt;br /&gt;
9세    실전&lt;br /&gt;
&lt;br /&gt;
10세  실전&lt;br /&gt;
&lt;br /&gt;
11세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lt;br /&gt;
&lt;br /&gt;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lt;br /&gt;
&lt;br /&gt;
12세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lt;br /&gt;
&lt;br /&gt;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lt;br /&gt;
&lt;br /&gt;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lt;br /&gt;
&lt;br /&gt;
15세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lt;br /&gt;
&lt;br /&gt;
16세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lt;br /&gt;
&lt;br /&gt;
17세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lt;br /&gt;
&lt;br /&gt;
18세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lt;br /&gt;
&lt;br /&gt;
19세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lt;br /&gt;
&lt;br /&gt;
20세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lt;br /&gt;
&lt;br /&gt;
21세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lt;br /&gt;
&lt;br /&gt;
22세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lt;br /&gt;
&lt;br /&gt;
23세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4세 [[서명유(조선2)|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5세 [[서사준(조선)|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6세 [[서복문(조선)|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7세 [[서시영(조선)|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8세 [[서영효(조선)|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lt;br /&gt;
&lt;br /&gt;
29세 [[서온기(조선)|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lt;br /&gt;
&lt;br /&gt;
30세 [[서용호(현대)|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lt;br /&gt;
&lt;br /&gt;
31세 [[서권수(현대)|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lt;br /&gt;
&lt;br /&gt;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lt;br /&gt;
&lt;br /&gt;
32세 [[서종식(현대)|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lt;br /&gt;
&lt;br /&gt;
[[서준식(현대)|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lt;br /&gt;
&lt;br /&gt;
33세 [[서강수(현대)|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lt;br /&gt;
&lt;br /&gt;
[[서정순(현대)|서정순]](徐貞順)&lt;br /&gt;
&lt;br /&gt;
34세 [[서재원(현대)|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lt;br /&gt;
35세 [[서형정(현대)|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lt;br /&gt;
&lt;br /&gt;
[[서정민(현대)|서정민]](徐廷旼 대학생.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lt;br /&gt;
 &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lt;br /&gt;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lt;br /&gt;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lt;br /&gt;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lt;br /&gt;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lt;br /&gt;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lt;br /&gt;
******[[서균(고려)|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lt;br /&gt;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lt;br /&gt;
********실 전&lt;br /&gt;
*********실 전&lt;br /&gt;
**********실 전&lt;br /&gt;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lt;br /&gt;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lt;br /&gt;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lt;br /&gt;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lt;br /&gt;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lt;br /&gt;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lt;br /&gt;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lt;br /&gt;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lt;br /&gt;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lt;br /&gt;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lt;br /&gt;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lt;br /&gt;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lt;br /&gt;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lt;br /&gt;
************************[[서명유(조선2)|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lt;br /&gt;
*************************[[서사준(조선)|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lt;br /&gt;
**************************[[서복문(조선)|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lt;br /&gt;
***************************[[서시영(조선)|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lt;br /&gt;
****************************[[서영효(조선)|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lt;br /&gt;
*****************************[[서온기(조선)|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lt;br /&gt;
******************************[[서용호(현대)|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lt;br /&gt;
*******************************[[서권수(현대)|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lt;br /&gt;
********************************[[서종식(현대)|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lt;br /&gt;
********************************[[서준식(현대)|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lt;br /&gt;
*********************************[[서강수(현대)|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lt;br /&gt;
*********************************[[서정순(현대)|서정순]](徐貞順)&lt;br /&gt;
**********************************[[서재원(현대)|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서형정(현대)|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lt;br /&gt;
***********************************[[서정민(현대)|서정민]](徐廷旼 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황제의서재 공식 채널 목록&lt;br /&gt;
  &lt;br /&gt;
네이버 블로그 (본진)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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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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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황제의서재 #텐트아빠 #민어한점 #JaewonSeo #HwangjeSuhjae&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E%AC%EC%9B%90(%ED%98%84%EB%8C%80)&amp;diff=145679</id>
		<title>서재원(현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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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9T22:08: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희성당(希聖堂) */&lt;/p&gt;
&lt;hr /&gt;
&lt;div&gt;[[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lt;br /&gt;
&lt;br /&gt;
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발기인.&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lt;br /&gt;
&lt;br /&gt;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34세 후손.&lt;br /&gt;
&lt;br /&gt;
 &lt;br /&gt;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lt;br /&gt;
&lt;br /&gt;
5세 [[서정(고려)|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6세 [[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lt;br /&gt;
&lt;br /&gt;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lt;br /&gt;
&lt;br /&gt;
7세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lt;br /&gt;
&lt;br /&gt;
8세    실전&lt;br /&gt;
&lt;br /&gt;
9세    실전&lt;br /&gt;
&lt;br /&gt;
10세  실전&lt;br /&gt;
&lt;br /&gt;
11세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lt;br /&gt;
&lt;br /&gt;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lt;br /&gt;
&lt;br /&gt;
12세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lt;br /&gt;
&lt;br /&gt;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lt;br /&gt;
&lt;br /&gt;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lt;br /&gt;
&lt;br /&gt;
15세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lt;br /&gt;
&lt;br /&gt;
16세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lt;br /&gt;
&lt;br /&gt;
17세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lt;br /&gt;
&lt;br /&gt;
18세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lt;br /&gt;
&lt;br /&gt;
19세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lt;br /&gt;
&lt;br /&gt;
20세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lt;br /&gt;
&lt;br /&gt;
21세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lt;br /&gt;
&lt;br /&gt;
22세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lt;br /&gt;
&lt;br /&gt;
23세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4세 [[서명유(조선2)|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5세 [[서사준(조선)|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6세 [[서복문(조선)|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7세 [[서시영(조선)|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8세 [[서영효(조선)|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lt;br /&gt;
&lt;br /&gt;
29세 [[서온기(조선)|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lt;br /&gt;
&lt;br /&gt;
30세 [[서용호(현대)|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lt;br /&gt;
&lt;br /&gt;
31세 [[서권수(현대)|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lt;br /&gt;
&lt;br /&gt;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lt;br /&gt;
&lt;br /&gt;
32세 [[서종식(현대)|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lt;br /&gt;
&lt;br /&gt;
[[서준식(현대)|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lt;br /&gt;
&lt;br /&gt;
33세 [[서강수(현대)|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lt;br /&gt;
&lt;br /&gt;
[[서정순(현대)|서정순]](徐貞順)&lt;br /&gt;
&lt;br /&gt;
34세 [[서재원(현대)|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lt;br /&gt;
35세 [[서형정(현대)|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lt;br /&gt;
&lt;br /&gt;
[[서정민(현대)|서정민]](徐廷旼 대학생.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lt;br /&gt;
 &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lt;br /&gt;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lt;br /&gt;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lt;br /&gt;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lt;br /&gt;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lt;br /&gt;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lt;br /&gt;
******[[서균(고려)|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lt;br /&gt;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lt;br /&gt;
********실 전&lt;br /&gt;
*********실 전&lt;br /&gt;
**********실 전&lt;br /&gt;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lt;br /&gt;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lt;br /&gt;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lt;br /&gt;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lt;br /&gt;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lt;br /&gt;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lt;br /&gt;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lt;br /&gt;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lt;br /&gt;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lt;br /&gt;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lt;br /&gt;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lt;br /&gt;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lt;br /&gt;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lt;br /&gt;
************************[[서명유(조선2)|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lt;br /&gt;
*************************[[서사준(조선)|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lt;br /&gt;
**************************[[서복문(조선)|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lt;br /&gt;
***************************[[서시영(조선)|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lt;br /&gt;
****************************[[서영효(조선)|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lt;br /&gt;
*****************************[[서온기(조선)|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lt;br /&gt;
******************************[[서용호(현대)|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lt;br /&gt;
*******************************[[서권수(현대)|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lt;br /&gt;
********************************[[서종식(현대)|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lt;br /&gt;
********************************[[서준식(현대)|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lt;br /&gt;
*********************************[[서강수(현대)|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lt;br /&gt;
*********************************[[서정순(현대)|서정순]](徐貞順)&lt;br /&gt;
**********************************[[서재원(현대)|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서형정(현대)|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lt;br /&gt;
***********************************[[서정민(현대)|서정민]](徐廷旼 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황제의서재 공식 채널 목록&lt;br /&gt;
  &lt;br /&gt;
네이버 블로그 (본진)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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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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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황제의서재 #텐트아빠 #민어한점 #JaewonSeo #HwangjeSuhjae&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E%AC%EC%9B%90(%ED%98%84%EB%8C%80)&amp;diff=145678</id>
		<title>서재원(현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E%AC%EC%9B%90(%ED%98%84%EB%8C%80)&amp;diff=145678"/>
				<updated>2025-12-19T22:07: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희성당(希聖堂) */&lt;/p&gt;
&lt;hr /&gt;
&lt;div&gt;[[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lt;br /&gt;
&lt;br /&gt;
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발기인.&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lt;br /&gt;
&lt;br /&gt;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34세 후손.&lt;br /&gt;
&lt;br /&gt;
 &lt;br /&gt;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lt;br /&gt;
&lt;br /&gt;
5세 [[서정(고려)|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6세 [[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lt;br /&gt;
&lt;br /&gt;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lt;br /&gt;
&lt;br /&gt;
7세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lt;br /&gt;
&lt;br /&gt;
8세    실전&lt;br /&gt;
&lt;br /&gt;
9세    실전&lt;br /&gt;
&lt;br /&gt;
10세  실전&lt;br /&gt;
&lt;br /&gt;
11세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lt;br /&gt;
&lt;br /&gt;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lt;br /&gt;
&lt;br /&gt;
12세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lt;br /&gt;
&lt;br /&gt;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lt;br /&gt;
&lt;br /&gt;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lt;br /&gt;
&lt;br /&gt;
15세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lt;br /&gt;
&lt;br /&gt;
16세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lt;br /&gt;
&lt;br /&gt;
17세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lt;br /&gt;
&lt;br /&gt;
18세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lt;br /&gt;
&lt;br /&gt;
19세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lt;br /&gt;
&lt;br /&gt;
20세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lt;br /&gt;
&lt;br /&gt;
21세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lt;br /&gt;
&lt;br /&gt;
22세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lt;br /&gt;
&lt;br /&gt;
23세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4세 [[서명유(조선2)|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5세 [[서사준(조선)|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6세 [[서복문(조선)|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7세 [[서시영(조선)|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8세 [[서영효(조선)|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lt;br /&gt;
&lt;br /&gt;
29세 [[서온기(조선)|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lt;br /&gt;
&lt;br /&gt;
30세 [[서용호(현대)|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lt;br /&gt;
&lt;br /&gt;
31세 [[서권수(현대)|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lt;br /&gt;
&lt;br /&gt;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lt;br /&gt;
&lt;br /&gt;
32세 [[서종식(현대)|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lt;br /&gt;
&lt;br /&gt;
[[서준식(현대)|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lt;br /&gt;
&lt;br /&gt;
33세 [[서강수(현대)|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lt;br /&gt;
&lt;br /&gt;
[[서정순(현대)|서정순]](徐貞順)&lt;br /&gt;
&lt;br /&gt;
34세 [[서재원(현대)|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lt;br /&gt;
35세 [[서형정(현대)|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lt;br /&gt;
&lt;br /&gt;
[[서정민(현대)|서정민]](徐廷旼 대학생.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lt;br /&gt;
 &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lt;br /&gt;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lt;br /&gt;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lt;br /&gt;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lt;br /&gt;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lt;br /&gt;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lt;br /&gt;
******[[서균(고려)|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lt;br /&gt;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lt;br /&gt;
********실 전&lt;br /&gt;
*********실 전&lt;br /&gt;
**********실 전&lt;br /&gt;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lt;br /&gt;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lt;br /&gt;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lt;br /&gt;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lt;br /&gt;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lt;br /&gt;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lt;br /&gt;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lt;br /&gt;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lt;br /&gt;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lt;br /&gt;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lt;br /&gt;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lt;br /&gt;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lt;br /&gt;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lt;br /&gt;
************************[[서명유(조선2)|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lt;br /&gt;
*************************[[서사준(조선)|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lt;br /&gt;
**************************[[서복문(조선)|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lt;br /&gt;
***************************[[서시영(조선)|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lt;br /&gt;
****************************[[서영효(조선)|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lt;br /&gt;
*****************************[[서온기(조선)|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lt;br /&gt;
******************************[[서용호(현대)|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lt;br /&gt;
*******************************[[서권수(현대)|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lt;br /&gt;
********************************[[서종식(현대)|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lt;br /&gt;
********************************[[서준식(현대)|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lt;br /&gt;
*********************************[[서강수(현대)|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lt;br /&gt;
*********************************[[서정순(현대)|서정순]](徐貞順)&lt;br /&gt;
**********************************[[서재원(현대)|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서형정(현대)|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lt;br /&gt;
***********************************[[서정민(현대)|서정민]](徐廷旼 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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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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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E%AC%EC%9B%90(%ED%98%84%EB%8C%80)&amp;diff=145677</id>
		<title>서재원(현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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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9T22:05: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희성당(希聖堂) */&lt;/p&gt;
&lt;hr /&gt;
&lt;div&gt;[[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lt;br /&gt;
&lt;br /&gt;
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발기인.&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lt;br /&gt;
&lt;br /&gt;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34세 후손.&lt;br /&gt;
&lt;br /&gt;
 &lt;br /&gt;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lt;br /&gt;
&lt;br /&gt;
5세 [[서정(고려)|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6세 [[서균(고려)|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lt;br /&gt;
&lt;br /&gt;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lt;br /&gt;
&lt;br /&gt;
7세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lt;br /&gt;
&lt;br /&gt;
8세    실전&lt;br /&gt;
&lt;br /&gt;
9세    실전&lt;br /&gt;
&lt;br /&gt;
10세  실전&lt;br /&gt;
&lt;br /&gt;
11세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lt;br /&gt;
&lt;br /&gt;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lt;br /&gt;
&lt;br /&gt;
12세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lt;br /&gt;
&lt;br /&gt;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lt;br /&gt;
&lt;br /&gt;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lt;br /&gt;
&lt;br /&gt;
15세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lt;br /&gt;
&lt;br /&gt;
16세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lt;br /&gt;
&lt;br /&gt;
17세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lt;br /&gt;
&lt;br /&gt;
18세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lt;br /&gt;
&lt;br /&gt;
19세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lt;br /&gt;
&lt;br /&gt;
20세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lt;br /&gt;
&lt;br /&gt;
21세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lt;br /&gt;
&lt;br /&gt;
22세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lt;br /&gt;
&lt;br /&gt;
23세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4세 [[서명유(조선2)|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5세 [[서사준(조선)|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6세 [[서복문(조선)|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7세 [[서시영(조선)|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lt;br /&gt;
&lt;br /&gt;
28세 [[서영효(조선)|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lt;br /&gt;
&lt;br /&gt;
29세 [[서온기(조선)|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lt;br /&gt;
&lt;br /&gt;
30세 [[서용호(현대)|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lt;br /&gt;
&lt;br /&gt;
31세 [[서권수(현대)|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lt;br /&gt;
&lt;br /&gt;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lt;br /&gt;
&lt;br /&gt;
32세 [[서종식(현대)|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lt;br /&gt;
&lt;br /&gt;
[[서준식(현대)|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lt;br /&gt;
&lt;br /&gt;
33세 [[서강수(현대)|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lt;br /&gt;
&lt;br /&gt;
[[서정순(현대)|서정순]](徐貞順)&lt;br /&gt;
&lt;br /&gt;
34세 [[서재원(현대)|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lt;br /&gt;
35세 [[서형정(현대)|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lt;br /&gt;
&lt;br /&gt;
[[서정민(현대)|서정민]](徐廷旼 대학생.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lt;br /&gt;
 &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lt;br /&gt;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lt;br /&gt;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lt;br /&gt;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lt;br /&gt;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lt;br /&gt;
*****[[서정(고려)|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lt;br /&gt;
******[[서균(고려)|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lt;br /&gt;
*******[[서원(고려)|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lt;br /&gt;
********실 전&lt;br /&gt;
*********실 전&lt;br /&gt;
**********실 전&lt;br /&gt;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lt;br /&gt;
************[[서수(고려1)|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lt;br /&gt;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lt;br /&gt;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lt;br /&gt;
***************[[서호(조선)|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lt;br /&gt;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lt;br /&gt;
*****************[[서우(조선1)|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lt;br /&gt;
******************[[서연(조선)|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lt;br /&gt;
*******************[[서간(조선)|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lt;br /&gt;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lt;br /&gt;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lt;br /&gt;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lt;br /&gt;
***********************[[서징용]](徐徵龍 생원(生員)&lt;br /&gt;
************************[[서명유(조선2)|서명유]](徐命裕 생원生員)&lt;br /&gt;
*************************[[서사준(조선)|서사준]](徐士俊 생원生員)&lt;br /&gt;
**************************[[서복문(조선)|서복문]](徐福門 생원生員)&lt;br /&gt;
***************************[[서시영(조선)|서시영]](徐時永 생원生員)&lt;br /&gt;
****************************[[서영효(조선)|서영효]](徐榮孝 호조참판(戶曹參判).종 2품 .차관)&lt;br /&gt;
*****************************[[서온기(조선)|서온기]](徐溫基)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정 3품. 청와대비서실차장)&lt;br /&gt;
******************************[[서용호(현대)|서용호]](徐龍鎬 이조참판(吏曹參判).종 2품.차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베드로)&lt;br /&gt;
*******************************[[서권수(현대)|서권수]](徐權洙=서득중(徐得中) 상신기리(上新基里) 환학동(喚鶴洞) (목포 무안군 카톨릭 최초 신자-지방유지.카톨릭(천주교 세례명:발라바)&lt;br /&gt;
********************************[[서종식(현대)|서종식]](徐鍾植 민선 일로읍장.카톨릭(천주교) 세례명;마두)&lt;br /&gt;
********************************[[서준식(현대)|서준식]](徐俊植 정치대(국민대학교전신). 우국지사.카톨릭(천주교)세례명:비오) &lt;br /&gt;
*********************************[[서강수(현대)|서강수]](徐康壽 정통부(체신부) 국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바오로)&lt;br /&gt;
*********************************[[서정순(현대)|서정순]](徐貞順)&lt;br /&gt;
**********************************[[서재원(현대)|서재원]](徐載源 코스닥 상장사 본부장.카톨릭(천주교)세례명:아오스딩)&lt;br /&gt;
***********************************[[서형정(현대)|서형정]](徐亨姃 직장인.카톨릭(천주교)세례명:제노비아)&lt;br /&gt;
***********************************[[서정민(현대)|서정민]](徐廷旼 카톨릭(천주교)세례명:알렉산더)&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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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98%81%EC%84%B1&amp;diff=145676</id>
		<title>영성</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98%81%EC%84%B1&amp;diff=145676"/>
				<updated>2025-10-03T09:59: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영성(嬴姓)&lt;br /&gt;
&lt;br /&gt;
중국 상고 시대 8대 성씨 중 하나&lt;br /&gt;
&lt;br /&gt;
영성(嬴姓)은 중국 상고 시대 8대 성씨 중 하나입니다. 영성은 진나라(秦國) 및 조나라(趙國)의 국성(國姓)이었습니다. 영성은 14개 씨족(主要包括 현재의 廉、徐、江、秦、趙、黃、梁、馬、葛、谷、繆、鍾、費、翟 등 성씨)의 시초입니다.&lt;br /&gt;
&lt;br /&gt;
· 외국어 표기: YING&lt;br /&gt;
&lt;br /&gt;
· 병음: yíng xìng&lt;br /&gt;
&lt;br /&gt;
· 유명 인물: 영정(嬴政, 진시황)&lt;br /&gt;
&lt;br /&gt;
· 성씨 시조: 백익(伯益)&lt;br /&gt;
&lt;br /&gt;
· 의미: 상고 8대 성씨&lt;br /&gt;
&lt;br /&gt;
기록에 따르면, 백익(伯益)이 우(禹)를 도와 치수(治水)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순제(舜帝)가 백익에게 영(嬴) 성을 하사했다고 합니다.《사기·진본기(史記·秦本紀)》: “昔伯翳[yì]爲舜主畜，畜多息，故有土，賜姓嬴。今其后世亦爲朕息馬，朕其分土爲附庸。” 영성 씨족의 분포 지역은 매우 넓었습니다: 동쪽으로 산동, 강소 북부, 서쪽으로 섬서, 감숙, 북쪽으로 산서, 남쪽으로 회하 남안, 호북 북부의 곡성(谷城)까지였습니다. 그러나 주로 동쪽의 회수(淮水), 사수(泗水) 유역에 분포했습니다.&lt;br /&gt;
&lt;br /&gt;
2014년 보도에 따르면, 영성 사람들은 강소, 산동, 운남, 북경, 하북, 복건, 절강 등 19개 성(省份)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강소에 가장 많은 영성이 살지만 분포는 비교적 흩어져 있습니다; 사천, 귀주 두 성의 영성 인구 총수는 약 4000명이며, 산동 임시(臨沂市) 하동구(河東區)에는 수천 명의 영성이 살고 있고, 다른 지시(地市)를 합쳐도 약 천 명입니다; 다른 각 성의 영성 인구를 합치면 약 4000명입니다.&lt;br /&gt;
&lt;br /&gt;
영성의 유래&lt;br /&gt;
&lt;br /&gt;
&amp;quot;영(嬴)&amp;quot;은 요(堯), 순(舜) 시기에 시작된古老的한 성씨입니다.《사기》에는 “秦之先，帝颛[zhuān]顼[xū]之苗裔孫曰女修。女修織，玄鳥隕卵，女修吞之，生大業。大業娶少典之女，曰女華。女華生大費，與禹平水土”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익(伯益)은 “佐舜調馴鳥獸，鳥獸多馴服，舜賜姓嬴氏”였습니다. 백익은 성씨를 하사받은 후 중요한 관직을 맡아 순제의 중신이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단옥재(段玉裁) 등의 훈고학자들은 영성은 고요(皋陶)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선진 시대에 언(偃)과 영(嬴)은 같은 성씨). 백익은 고요의 장자여야 합니다. 진(秦)의 시조는 백익이며, 서주 초기 진공(秦公) 묘에서 출토된 석경(石磬)에 “高陽有靈，四方以鼐[nài]”라고 새겨져 있어 진 시조 백익이 명확히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의 후예임을 증명합니다. 또한《좌전(左傳)》에는 고요가 고양씨의 팔개(八愷) 중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한의《사기》에 실린 언성(偃姓) 관련 내용은 고립된 증거이며, 또한《사기》에 기록된 서주 말기 공화행정(共和行政) 조차도 허위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출토된 전국 시대의 청화간《계년(系年)》에 근거), 서주 초기 진공묘(秦公一號大墓)의 기록은 서한의《사기》보다 훨씬 신뢰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청화대학 출토문헌연구와보호중심의 청화간《후부(厚父)》편에 따르면, 백익과 고요는 연대상 중복이 있습니다. 따라서 고요와 백익은 부자 관계가 아닐 수 있으며, 서로 관련이 없을 수도 있어 고요가 영성이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청화간《후부》편에는 “啓惟後，帝亦弗恐啓之經德少，命咎繇下，爲之卿士”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화문 번역: “계(啓)가 왕위에 오르자, 상제는 계의 의덕(義德)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고, 고요(咎繇)를 다시 내려보내 계의 대신(大臣)이 되게 하였다.”&lt;br /&gt;
&lt;br /&gt;
순제가 우에게 선양한 후, 백익은 집정관으로 임명되어 조정의 정무를 총괄했습니다. 우는 만년에 요순의 선양 예를 따라 백익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백익은 사양하고 취하지 않으며 기산(箕山, 하남 등봉시 경내)에 은거했고, 이후 하계(夏啓) 6년에 병사했습니다. 우가 붕괴한 후 그의 아들 하계가 뒤를 이어 중국 최초의 세습 군주제 국가인 하왕조를 세웠습니다. 하왕조가 세워진 후, 하왕 계도 원로 백익을 박대하지 않고 그의 큰아들 대염(大廉)을 갈국(葛國) 군주에 봉했으며, 갈국은 하나라 말기까지 전해지다 상탕(商湯)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서주 초기에 다시 복국되었으나, 주나라 &amp;quot;삼각(三恪)&amp;quot; 중 하나인 송나라(宋國)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백익의 차자 약목(若木)은 하왕 계에 의해 서국(徐國) 군주에 봉해졌고, 도읍은 서성(徐城, 현재 강소성 숙천시 사홍현)이었으며, 40여 명의 군주를 거쳐 오나라(吳國)에 의해 멸망했습니다.&lt;br /&gt;
&lt;br /&gt;
전설에 따르면, 백익은 목축과 사냥에 능했으며, 샘 파는 기술(鑿井)을 발명했습니다. 순제 때부터 &amp;quot;우(虞)&amp;quot;의 직책을 맡아 산림 천택을 관리했습니다.《상서·순전(尚書·舜典)》에 따르면, 여러 신하들이 순제에게 익(益)을 &amp;quot;우(虞)&amp;quot;로 천거하여 &amp;quot;산림 초목과 새 짐승을 관리하게&amp;quot; 했다고 합니다.《봉주강감회찬·우기(鳳洲綱鑑會纂·虞紀)》에는 “益爲朕虞，治山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백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대염(大廉, 실질적으로는 조속씨鳥俗氏), 둘째는 약목(若木, 실질적으로는 비씨費氏)입니다. 자손들은 중원에 있기도 하고, 이적(夷狄) 지역에 있기도 했습니다. 백익의 현손 비창(費昌)은 하걸(夏桀) 때 하나라를 떠나 상나라에 귀순하여 탕(湯)의 마부가 되어 명조(鳴條)에서 걸을 패배시켰습니다.&lt;br /&gt;
&lt;br /&gt;
태무(太戌) 이후로는 대염의 현손 중연(中衍)의 후예가 대대로 공을 세워 은나라를 도왔기 때문에 영성은 많이 현달하여 제후가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비자(非子)에 이르러, 주 효왕(周孝王)으로부터 부용(附庸)으로 봉해져 영씨의 제사를 이어받았고, 진지(秦地)에 정착하여 역사상 영진(嬴秦)이라고 불렸습니다. 이후 비자의 6대손 영개(嬴開)가 주(周)를 구원한 공으로 주 평왕(周平王)으로부터 제후에 봉해졌으니, 이가 진 양공(秦襄公)으로 진국의 건국자입니다. 영진은 30여 대, 600여 년의 전승, 특히 진 목공(嬴任好, 양공의 7대손), 진 효공(嬴渠梁, 목공의 14대손), 진 소양왕(嬴則/稷, 효공의 손자) 등 명군들의 정진과 축적으로 세력이 날로 강대해졌습니다. 시황제 영정(嬴政)에 이르러 6국을 병합하고 천하를 통일하며 문자와 도량형, 화폐를 통일하고 교통과 법령을 규범화하며 민족 문화를 융합하여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중앙집권 봉건제 왕조를 세워 &amp;quot;千古一帝&amp;quot;로 불렸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사구지변(沙丘之變)으로 조고(趙高)가 조서를 위조하고 호해(胡亥)가 적자를 빼앗아 종친과 충량들을 살해하고 폭정을 행함으로써, 진승·오광의 봉기와 유방·항우의 반란으로 진나라는 멸망했습니다. 따라서 한나라 이후, 영성 후예들은 대부분 국성(國姓)인 진(秦)을 성씨로 하거나, &amp;quot;은(銀)&amp;quot;, &amp;quot;인(寅)&amp;quot; 등을 성씨로 삼았습니다. 명나라 말기 영계고(嬴啓高)가 영성을 회복하기까지 1800여 년이 걸렸습니다.&lt;br /&gt;
&lt;br /&gt;
영성과 진나라의 연원&lt;br /&gt;
&lt;br /&gt;
주나라 때, 대비(大費)의 14대손 비자(非子)가 구구(犬丘)에 살면서 &amp;quot;말과 가축을 좋아하고 잘 기르고 번식시켰습니다&amp;quot;. 구구 사람들이 주 효왕에게 아뢰자, 효왕은 그를 천수(千水)와 위수(渭水) 사이의 합류处(지금의 섬서 보계 일대)에서 말을 주관하게 했고, 말이 대량으로 번식했습니다. 이에 효왕이 말하기를 &amp;quot;昔日伯翳爲舜主畜，畜多息，故有土，賜姓嬴。今其后世亦爲朕息馬，朕其分土爲附庸&amp;quot;라고 했습니다.于是 그를 부용(附庸)으로 봉했습니다. 진지(秦地)에 성읍을 세우고 영씨의 제사를 이어받게 하였으며, 호를 진영(秦嬴)이라 했습니다. 이로써 &amp;quot;千渭之匯&amp;quot;는 영진이 정치적으로 발상한 곳이 되었으며, 영진의 채읍(采邑)이 진(天水의 清水 상류가 秦水임)에 있었기 때문에 진(秦)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所以 영성 후예들은 &amp;quot;秦人&amp;quot;, &amp;quot;秦族&amp;quot;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진시황&lt;br /&gt;
&lt;br /&gt;
주 선왕(周宣王) 때, 비자의 증손 진중(秦仲)의 정치적 지위가 더욱 높아져 대부(大夫)로 임용되었습니다. 진중이 즉위한 지 3년 되던 해, 주 여왕(周厲王)이 무도하여 제후들이 배반했습니다. 서융(西戎)이 왕실을 반叛하여 구구(犬丘)의 대락(大駱) 일족을 멸망시켰습니다. 주 선왕이 즉위한 후 여전히 진중을 대부로 삼아 서융을 토벌하게 했습니다. 그는 족중을 이끌고 서융과 23년 동안 싸우다가 전장에서 전사했습니다. 주 선왕은 장공(莊公, 진중의 장자, 이름은 영기嬴其) 형제 5명을 불러 7000명의 군사를 주어 서융을 계속 토벌하게 하여 마침내 격파했습니다. 주 선왕은 다시 상을 내리고 진의 영토를不断扩大했습니다. 그리고 장공을 서수대부(西垂大夫)로 임명했습니다. 장공이 죽자 그의 아들 양공 영개(嬴開)가 뒤를 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서주 때, 주 유왕(周幽王)이 제후들을 농락하자, 신후(申侯)가 증국(繒國), 구융(犬戎) 서이(西夷)와 연합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켜 호경(鎬京, 지금의 서안)을 함락시키고 유왕을 죽였습니다. 양공은 군사를率领하여 주(周)를 구원하고 왕실을 수호하며 태자 의구(宜臼)를 옹립하여 즉위시켰으니, 이가 주 평왕(周平王)입니다. 그리고 주 평왕을 호송하여 동쪽 낙읍(洛邑, 지금의 하남 낙양)으로 천도하는 것을 도와 평왕으로부터 제후에 봉해졌으며, 기산(岐山) 이서의 땅을 하사받아 진국의 건국자가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진 목공(嬴任好, 양공의 7대손) 때에 이르러, 그는 현재를 중용하여一个小国을 서융의 강국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 후, 진 효공(嬴渠梁, 목공의 14대손)은 상앙(商鞅)의 변법을 중용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농전(耕戰)을 장려하여 전국시대의 최강국이 되었습니다. 소양왕(嬴則/稷, 효공의 손자)은 주(周)를 멸망시키고 구정(九鼎) 보기를 취하는 데顺应하여 대진 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lt;br /&gt;
&lt;br /&gt;
진왕 정(秦王政, 즉 영정嬴政, 소양왕의 증손, 진 종실은 영성 조씨嬴姓趙氏이므로 조정趙政이라 칭함)이 6국을兼并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중앙집권제의 대진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분봉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며 문자, 도량형, 화폐를 통일하고 교통, 법령을 규범화하며 민족 문화를 융합하고 장성을 쌓아 외침을 막으며 흉노를 멀리 격퇴하여 &amp;quot;千古一帝&amp;quot;로 불렸습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사구지변(沙丘之變)으로 조고(趙高)가 조서를 위조하고 호해(胡亥)가 적자를 빼앗아 종친과 충량들을 도살하고 폭정을 행했습니다. 진승·오광이 봉기하고 유방·항羽가 반란을 일으켜 함양을 도살하고 자영(子嬰)을 죽여 진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따라서 한나라 이후, 영성 후예들은 대부분 국(秦)을 성씨로 삼거나 &amp;quot;은(銀)&amp;quot;, &amp;quot;인(寅)&amp;quot;을 성씨로 삼았습니다. 명나라 말기 영계고(嬴啓高)가 영성을 회복하기까지 1800여 년이 걸렸습니다.&lt;br /&gt;
&lt;br /&gt;
이주 간략사&lt;br /&gt;
&lt;br /&gt;
백익의 후예 영비자(嬴非子)는 원래 서구구(西犬丘)에 살았으며, 주 효왕 때 말을 번식시킨 공으로 &amp;quot;진(秦,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 청수현)&amp;quot;에 봉해졌습니다.&lt;br /&gt;
&lt;br /&gt;
주 평왕 때, 진 양공(秦襄公)이 나라를 구원한 공으로 군사를率领하여 주 평왕의 천도(洛邑)를 호송한 이후, 진국은 주의 제후국이 되었습니다. 이후 진의 도읍은 천수, 위수, 위하를 따라 동쪽으로 천도하며 서수(西垂), 진읍(秦邑), 건읍(汧邑), 건위지회(汧渭之會), 평양(平陽), 옹성(雍城), 경양(泾陽), 역양(栎陽), 함양(咸陽)을 차례로 도읍으로 삼았습니다. 현재西北各省의 秦川, 秦嶺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습니다.&lt;br /&gt;
&lt;br /&gt;
진시황&lt;br /&gt;
&lt;br /&gt;
천수군(天水郡)&lt;br /&gt;
&lt;br /&gt;
영성 14씨&lt;br /&gt;
&lt;br /&gt;
사마천(司馬遷)은《진본기(秦本紀)》에서 &amp;quot;邑之秦，使復續嬴姓祀，號曰秦嬴。&amp;quot; &amp;quot;秦之先爲嬴姓。其後分封，以國爲姓，有徐氏、郯氏、莒氏、鍾離氏、運奄氏、菟裘氏、將梁氏、黃氏、江氏、修魚氏、白冥氏、蜚廉氏、秦氏。然秦以其先造父封趙城，爲趙氏。&amp;quot;라고 서술했습니다. 또한 동한의 대학자 왕부(王符)는《잠부론·지씨성(潛夫論·志氏姓)》에서 명확히 &amp;quot;李、梁、葛、江、黃、阮、寥、諸葛、英、趙、秦、沈、徐，皆皋陶之後也。&amp;quot;라고 말했습니다. 고요의 후예 중 여덟 가지가 모두 백익의 영성 14씨에 속합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영성 14씨&lt;br /&gt;
&lt;br /&gt;
영성 14씨에는 현재의 염(廉), 서(徐), 강(江), 진(秦), 조(趙), 황(黃), 양(梁), 마(馬), 갈(葛), 곡(谷), 무(繆), 종(鍾), 비(費), 적(翟) 등 성씨의 한족이 포함되며, 이를 합쳐 영성 14씨라고 합니다. 이씨(李氏) 일파는 영성에서 나왔으며, 소호제 청양씨(少昊帝青陽氏)의 후예입니다. 요(堯) 때, 고요(皋陶)가 이리(大理, 형옥을掌管하는 관직)를担任한 적이 있으며, 그의 아들 백익(伯益)이 영(嬴) 성을 하사받아 관직을 씨(氏)로 삼아 이씨(理氏)라 칭했습니다. 이씨(理氏)가 이씨(李氏)로 바뀐 데 대한 설명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왕(紂王) 때, 고요의 후예 이징(理徵)이 주왕에게 직간하다가 처형당하자, 그의 아내 계화씨(契和氏)가 아들 이정(利貞)을 데리고 도망칠 때 오얏나무 열매(李자)로 배를 채워 목숨을 구했기 때문에 감히 이(理)라 칭하지 못하고 이(李) 성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씨 14성에는 이씨(李姓)가 없는데, 이는 영씨의 조상이 백익(伯益, 대비大費)이고, 고요(皋陶, 대업大業)는 백익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씨는 영성의 종족(宗族)이지만 영씨(嬴氏)는 아니기 때문입니다.&lt;br /&gt;
&lt;br /&gt;
고대 사료에 따르면, 이성(李姓)은 백익의 후예가 아니라 백익의 동생 중견(仲甄)의 후예입니다 (李, 阮, 甄). 이성은 고요를 조상으로 추앙합니다.&lt;br /&gt;
&lt;br /&gt;
인구 분포&lt;br /&gt;
&lt;br /&gt;
진나라가 망한 후, 6국 유민들은 모두 진나라를 증오했고, 진나라 영성 사람들은 사방으로 도망쳤습니다. 추적과 살해를 피하기 위해 영성 사람들이 타성으로 개성하여 은거하는 경우가 매우 보편적이었고, 기록도 드물었습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백익(伯益bóyì)&lt;br /&gt;
&lt;br /&gt;
백익 (伯益)&lt;br /&gt;
&lt;br /&gt;
오제(五帝) 말기 역사 인물&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lt;br /&gt;
· 별칭: 익(益), 백예(柏翳), 대비(大费), 후익(后益) 등&lt;br /&gt;
&lt;br /&gt;
· 민족: 화하족(华夏民族)&lt;br /&gt;
&lt;br /&gt;
· 출생지: 산동성 임沂&lt;br /&gt;
&lt;br /&gt;
· 사망: 약 기원전 1973년&lt;br /&gt;
&lt;br /&gt;
· 시대: 순제(舜帝) 시기&lt;br /&gt;
&lt;br /&gt;
· 대표 저작: 《산해경》(山海经)&lt;br /&gt;
&lt;br /&gt;
· 주요 업적: 우물 발명, 조류 훈련술, 짐승 훈련술, 치수술 등&lt;br /&gt;
&lt;br /&gt;
가족 관계&lt;br /&gt;
&lt;br /&gt;
· 아버지: 대업(大业) (일설에는 고요)&lt;br /&gt;
&lt;br /&gt;
· 어머니: 여화(女华)&lt;br /&gt;
&lt;br /&gt;
· 아내: 순제의 딸 요씨(姚氏)&lt;br /&gt;
&lt;br /&gt;
· 자녀: 대렴(大廉) 등&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 배경&lt;br /&gt;
&lt;br /&gt;
백익의 할머니는 전욱의 손녀인 여수로, 직조에 능했으며 대업을 낳았다. 대업은 소전의 딸 여화와 결혼하여 백익을 낳았다.&lt;br /&gt;
&lt;br /&gt;
순·우 보좌&lt;br /&gt;
&lt;br /&gt;
백익은 조류와 짐승을 조련하는 데 능해 순제에게 임명되어 산림을 관리하는 우관(虞官)이 되었다. 순제는 그에게 영씨(嬴氏) 성을 하사했으며, 자신의 딸 요씨와 결혼시켰다.&lt;br /&gt;
&lt;br /&gt;
백익은 우(禹)를 도와 치수 사업을 보좌했으며, 홍수를治理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토질에 따라 다른 농작물을 심는 방법을 가르쳤고, 농업과 축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삼묘(三苗)와의 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제위 계승과 죽음&lt;br /&gt;
&lt;br /&gt;
우는 나이가 들자 전통에 따라 백익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3년 상기를 마친 후, 백익은 우의 아인 계(启)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기산(箕山)으로 은거했다. 그러나 계가 제위를 찬탈한 후, 기원전 1973년에 백익은 계에게 살해당했다.&lt;br /&gt;
&lt;br /&gt;
주요 업적&lt;br /&gt;
&lt;br /&gt;
· 우를 도와 치수 사업 성공&lt;br /&gt;
&lt;br /&gt;
· 가축 사육과 농업 기술 발전에 기여&lt;br /&gt;
&lt;br /&gt;
· 다양한 동식물 연구 및 활용&lt;br /&gt;
&lt;br /&gt;
사상&lt;br /&gt;
&lt;br /&gt;
《상서·대우모》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백익은 덕치를 주장하고 요제와 같은 인덕을 강조했다. 그는 국가 통치에 있어 신중하게 직임을 다져야 하며, 원칙과 법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산해경》 저자 논란&lt;br /&gt;
&lt;br /&gt;
전통적으로 《산해경》은 우와 백익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대 학자들은 전국 시대 초기부터 한대 초기까지 초나라 지역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 맹자: 백익이 요 시대에 홍수를治理하는 데 기여해 중국인이 &amp;quot;먹을 수 있게&amp;quot; 했다고 평가.&lt;br /&gt;
&lt;br /&gt;
· 묵자: &amp;quot;우가 음방에서 백익을 등용해 정사를 맡기니 구주가 통일되었다&amp;quot;고 칭찬.&lt;br /&gt;
&lt;br /&gt;
일화&lt;br /&gt;
&lt;br /&gt;
· 백기 장군: 백익은 모든 생물의 습성을 잘 알고 백수를 길들일 수 있어 &amp;quot;백충 장군&amp;quot;이라는 별칭을 얻었다.&lt;br /&gt;
&lt;br /&gt;
· 백색 기 수여: 순제는 백익에게 상으로 흰색 기를 하사하며 &amp;quot;계속 노력하면 자손이 번성할 것&amp;quot;이라고 축복했다.&lt;br /&gt;
&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전승에 따르면 황제(黃帝) 헌원씨의 6세손으로 소호 금천씨, 또는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우임금과 같이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행하였고&lt;br /&gt;
그와함께 여러 공을 세웠으며《사기》에서는 우임금에게 천거를 받아 정사를 돌보았으며&lt;br /&gt;
우의 3년상이 끝나자 우의 아들 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기산(基山)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하고, 《죽서기년》에서는 우가 사망한 후 계의 자리를 탐내다 계에 의해 처단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98%81%EC%84%B1&amp;diff=145675</id>
		<title>영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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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54: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새 문서: 백익(伯益bóyì)  백익 (伯益)  오제(五帝) 말기 역사 인물  기본 정보  · 별칭: 익(益), 백예(柏翳), 대비(大费), 후익(后益) 등  · 민족: 화하...&lt;/p&gt;
&lt;hr /&gt;
&lt;div&gt;백익(伯益bóyì)&lt;br /&gt;
&lt;br /&gt;
백익 (伯益)&lt;br /&gt;
&lt;br /&gt;
오제(五帝) 말기 역사 인물&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lt;br /&gt;
· 별칭: 익(益), 백예(柏翳), 대비(大费), 후익(后益) 등&lt;br /&gt;
&lt;br /&gt;
· 민족: 화하족(华夏民族)&lt;br /&gt;
&lt;br /&gt;
· 출생지: 산동성 임沂&lt;br /&gt;
&lt;br /&gt;
· 사망: 약 기원전 1973년&lt;br /&gt;
&lt;br /&gt;
· 시대: 순제(舜帝) 시기&lt;br /&gt;
&lt;br /&gt;
· 대표 저작: 《산해경》(山海经)&lt;br /&gt;
&lt;br /&gt;
· 주요 업적: 우물 발명, 조류 훈련술, 짐승 훈련술, 치수술 등&lt;br /&gt;
&lt;br /&gt;
가족 관계&lt;br /&gt;
&lt;br /&gt;
· 아버지: 대업(大业) (일설에는 고요)&lt;br /&gt;
&lt;br /&gt;
· 어머니: 여화(女华)&lt;br /&gt;
&lt;br /&gt;
· 아내: 순제의 딸 요씨(姚氏)&lt;br /&gt;
&lt;br /&gt;
· 자녀: 대렴(大廉) 등&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 배경&lt;br /&gt;
&lt;br /&gt;
백익의 할머니는 전욱의 손녀인 여수로, 직조에 능했으며 대업을 낳았다. 대업은 소전의 딸 여화와 결혼하여 백익을 낳았다.&lt;br /&gt;
&lt;br /&gt;
순·우 보좌&lt;br /&gt;
&lt;br /&gt;
백익은 조류와 짐승을 조련하는 데 능해 순제에게 임명되어 산림을 관리하는 우관(虞官)이 되었다. 순제는 그에게 영씨(嬴氏) 성을 하사했으며, 자신의 딸 요씨와 결혼시켰다.&lt;br /&gt;
&lt;br /&gt;
백익은 우(禹)를 도와 치수 사업을 보좌했으며, 홍수를治理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토질에 따라 다른 농작물을 심는 방법을 가르쳤고, 농업과 축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삼묘(三苗)와의 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제위 계승과 죽음&lt;br /&gt;
&lt;br /&gt;
우는 나이가 들자 전통에 따라 백익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3년 상기를 마친 후, 백익은 우의 아인 계(启)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기산(箕山)으로 은거했다. 그러나 계가 제위를 찬탈한 후, 기원전 1973년에 백익은 계에게 살해당했다.&lt;br /&gt;
&lt;br /&gt;
주요 업적&lt;br /&gt;
&lt;br /&gt;
· 우를 도와 치수 사업 성공&lt;br /&gt;
&lt;br /&gt;
· 가축 사육과 농업 기술 발전에 기여&lt;br /&gt;
&lt;br /&gt;
· 다양한 동식물 연구 및 활용&lt;br /&gt;
&lt;br /&gt;
사상&lt;br /&gt;
&lt;br /&gt;
《상서·대우모》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백익은 덕치를 주장하고 요제와 같은 인덕을 강조했다. 그는 국가 통치에 있어 신중하게 직임을 다져야 하며, 원칙과 법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산해경》 저자 논란&lt;br /&gt;
&lt;br /&gt;
전통적으로 《산해경》은 우와 백익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대 학자들은 전국 시대 초기부터 한대 초기까지 초나라 지역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 맹자: 백익이 요 시대에 홍수를治理하는 데 기여해 중국인이 &amp;quot;먹을 수 있게&amp;quot; 했다고 평가.&lt;br /&gt;
&lt;br /&gt;
· 묵자: &amp;quot;우가 음방에서 백익을 등용해 정사를 맡기니 구주가 통일되었다&amp;quot;고 칭찬.&lt;br /&gt;
&lt;br /&gt;
일화&lt;br /&gt;
&lt;br /&gt;
· 백기 장군: 백익은 모든 생물의 습성을 잘 알고 백수를 길들일 수 있어 &amp;quot;백충 장군&amp;quot;이라는 별칭을 얻었다.&lt;br /&gt;
&lt;br /&gt;
· 백색 기 수여: 순제는 백익에게 상으로 흰색 기를 하사하며 &amp;quot;계속 노력하면 자손이 번성할 것&amp;quot;이라고 축복했다.&lt;br /&gt;
&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전승에 따르면 황제(黃帝) 헌원씨의 6세손으로 소호 금천씨, 또는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우임금과 같이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행하였고&lt;br /&gt;
그와함께 여러 공을 세웠으며《사기》에서는 우임금에게 천거를 받아 정사를 돌보았으며&lt;br /&gt;
우의 3년상이 끝나자 우의 아들 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기산(基山)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하고, 《죽서기년》에서는 우가 사망한 후 계의 자리를 탐내다 계에 의해 처단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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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부여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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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47: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동이(东夷)&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동방 부족에 대한 칭호&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lt;br /&gt;
· 별칭: 이(夷)&lt;br /&gt;
&lt;br /&gt;
· 소속 지역: 현재 중국 산동성 중남부&lt;br /&gt;
&lt;br /&gt;
· 기원: 노중(鲁中) 태沂(泰沂) 산구&lt;br /&gt;
&lt;br /&gt;
· 의미: 고대 중원(中原) 지역 사람들이 동방 각 부족을 통칭하던 말&lt;br /&gt;
&lt;br /&gt;
· 족속: 서씨족&lt;br /&gt;
&lt;br /&gt;
핵심 정보&lt;br /&gt;
&lt;br /&gt;
동이는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8300년경의 후리(后李) 문화부터 시작하여 북신(北辛) 문화, 대문구(大汶口) 문화, 용산(龙山) 문화, 악석(岳石) 문화를 이어온 집단을 가리킵니다.중국 고대 동방에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한 부족군으로, 동방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夷)'인이라 하여 동이(东夷)라고 불렸습니다. 동이는 처음에 하북성 역수(易水) 및 연산(燕山) 일대에 분포했으나, 이후 인구가 번성하고 씨족 조직이 분열되면서 동이족은 인이(人夷), 조이(鸟夷), 욱이(郁夷) 세 가지 큰 갈래로 나뉘었습니다.&lt;br /&gt;
&lt;br /&gt;
고대에는 동이에 아홉 종류가 있다고 했으며, 《논어·자한(论语·子罕)》에는 &amp;quot;공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하셨다(子欲居九夷)&amp;quot;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석에는 &amp;quot;동방에 아홉 종류의 이(夷)가 있다: 현도(玄菟), 낙랑(乐浪), 고려(高骊), 만식(满饰), 부경(凫更), 색가(索家), 동토(东屠), 왜인(倭人), 천비(天鄙)&amp;quot;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동이는 일반적으로 남만(南蛮), 서융(西戎), 북적(北狄)과 함께 병렬되어 언급됩니다. 《논어·자한》에도 구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amp;quot;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amp;quot;.&lt;br /&gt;
&lt;br /&gt;
종류&lt;br /&gt;
&lt;br /&gt;
고대에는 동이에 아홉 종류가 있다고 했으며, 《논어·자한》: &amp;quot;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amp;quot;. 주석: &amp;quot;동방에 아홉 종류의 이(夷)가 있다: 첫째 현도(玄菟), 둘째 낙랑(乐浪), 셋째 고려(高骊), 넷째 만식(满饰), 다섯째 부경(凫更), 여섯째 색가(索家), 일곱째 동토(东屠), 여덟째 왜인(倭人), 아홉째 천비(天鄙).&amp;quot;&lt;br /&gt;
&lt;br /&gt;
《후한서·동이전(后汉书·东夷传)》에는 &amp;quot;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黄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风夷), 양이(阳夷)라고 한다&amp;quot;고 기록되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왕제(王制)》에는 &amp;quot;동방을 이(夷)라고 한다&amp;quot;고 했습니다. 이(夷)는 근본(柢)이라는 뜻으로, 인자하고 생명을 좋아하여 만물이 땅에서 근본처럼 나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천성이 유순하여 도(道)로 다스리기 쉽고, 군자나 불사의 나라가 있을 정도입니다.&lt;br /&gt;
&lt;br /&gt;
《논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传)》, 《전국책(战国策)》 등에도 구이(九夷)가 언급됩니다. 여기서 '구(九)'는 구체적인 숫자가 아니라 많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이아·석지(尔雅·释地)》에는 &amp;quot;구이(九夷), 팔적(八狄), 칠융(七戎), 육만(六蛮)&amp;quo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곽박(郭璞)의 《이아주(尔雅注)》에는 &amp;quot;구이는 동방에 있다(九夷在东)&amp;quot;라고 하여, 중국 동부의 이인(夷人)을 통칭합니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발전&lt;br /&gt;
&lt;br /&gt;
선진(先秦) 시대의 동이&lt;br /&gt;
&lt;br /&gt;
· 하(夏), 상(商) 시대: 하 왕조 초기부터 동이와의 복잡한 관계와 갈등이 시작됨. 상(商) 왕조도 동이와 빈번한 전쟁을 벌임.&lt;br /&gt;
· 서주(西周) 시대: 서주 초기에는 동이, 특히 산동 반도의 얀(奄), 박고(薄姑) 등이 강력한 적으로 부상. 주 왕실과의 전쟁 후 세력이 약화됨. 제(齐)와 노(鲁) 두 제후국이 동이 지역에 봉해져 다른 동화 정책을 펼침.&lt;br /&gt;
· 춘추전국 시대: 산동 반도의 동이 세력은 점차 제(齐), 노(鲁) 등에 흡수 통합됨. 회수(淮水) 유역의 동이(예: 서(徐), 회이(淮夷) 등)는 초(楚), 오(吴), 월(越) 등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중원 문화와 융합됨. 전국 시대 말기에는 대부분 화하(华夏)에 통합됨.&lt;br /&gt;
&lt;br /&gt;
진한(秦汉) 이후 동이 개념의 변화&lt;br /&gt;
&lt;br /&gt;
· 진한 시대 이후 '동이'의 개념이 크게 변화. 선진 시대의 산동-회수 유역 부족을 지칭하던 의미에서, 중국 동북 지역, 한반도, 일본 열도 등의 민족과 국가(예: 부여(夫余), 읍루(挹娄), 고구려(高句麗), 옥저(沃沮), 예(濊), 삼한(三韓), 왜(倭))를 포괄하는 의미로 확대됨&lt;br /&gt;
&lt;br /&gt;
·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 '사이(四夷)' 설의 영향으로 동이는 비중원(非中原)의 동방 이족(夷族)을 가리키는 말이 됨.&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lt;br /&gt;
&lt;br /&gt;
· 동이족은 새(특히 봉황)를 숭상하는 민족으로, 봉황을 조상으로 여기고 풍(风) 성을 사용하며, 봉황을 토템으로 숭배했습니다. 많은 부족 이름이 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lt;br /&gt;
· 동이족이 창조한 동이 문화는 중화 문명의 중요한源头 중 하나이며, 중국 초기 문명을孕育했습니다.&lt;br /&gt;
&lt;br /&gt;
하(夏), 상(商)과의 전쟁&lt;br /&gt;
&lt;br /&gt;
· 하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동이와 장기간에 걸쳐 격렬한 갈등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예: 유궁씨 후예(有穷氏后羿)의 &amp;quot;하 정권 대체&amp;quot; 사건).&lt;br /&gt;
· 상 왕조도 동이와 빈번히 전쟁을 벌였으며, 특히 주(纣) 왕 시기 대규모 동이 원정은 국력을 소모하는 결과를 가져와 주(周) 무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amp;quot;주가 동이를 정복하고 자신은 죽임을 당함(纣克东夷而殒其身)&amp;quot;).&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 서적 기록&lt;br /&gt;
&lt;br /&gt;
· 《산해경·해외동경(山海经·海外东经)》: 동방의 지리, 부족, 신화 등을 상상력豊富하게 기록.&lt;br /&gt;
&lt;br /&gt;
· 《상서·우공(尚书·禹贡)》: 우(禹)가 구주(九州)를 나눈 기록에 동이 지역(예: 우이(嵎夷), 래이(莱夷))가 언급됨&lt;br /&gt;
&lt;br /&gt;
· 《논어(论语)》,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传)》, 《국어(国语)》 등에도 동이 관련 기록이 등장.&lt;br /&gt;
&lt;br /&gt;
기타 참고 사항&lt;br /&gt;
&lt;br /&gt;
· '이(夷)' 자에 대한 해석: 본래 &amp;quot;활을 든 사람&amp;quot;을 형상화했다는 설(《설문해자(说文解字)》)이 있으나, 갑골문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의 형상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고대 산동어에서 '이(夷)'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과 발음이 비슷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lt;br /&gt;
· 진한 이후 '동이' 개념이 확대되면서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국가들도 그 범주에 포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대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서 비롯된 인식입니다.&lt;br /&gt;
· 동이는 고고학적으로 황하 문명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권(후리-북신-대문구-용산-악석 문화 계열)을 형성했으며, 이 문화는 후기 중화 문명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lt;br /&gt;
&lt;br /&gt;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부여족]](扶餘族)&lt;br /&gt;
&lt;br /&gt;
[[써족]]([[서족]])([[여족]])(畬族)=[[서족(동이)|서족]](徐族)=[[여족(동이)|여족]](餘族)=[[여족(부여)|여족]](余族) =[[도족(부여)|도족]](涂族=凃族=塗族=途族)=[[사족]](佘族) 동이시조의 한집안 &lt;br /&gt;
&lt;br /&gt;
고구려 속의 부여씨&lt;br /&gt;
&lt;br /&gt;
부여 멸망(494) → 왕족과 귀족 상당수가 고구려로 피신.&lt;br /&gt;
고구려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여의 후계자”**라고 내세움.&lt;br /&gt;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는 본래 부여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음.&lt;br /&gt;
고구려 지배층 안에 부여씨 성을 가진 왕족/귀족이 편입됨.&lt;br /&gt;
&lt;br /&gt;
​백제 속의 부여씨&lt;br /&gt;
&lt;br /&gt;
백제는 건국 때부터 스스로를 “부여씨 왕조”라고 칭했음.&lt;br /&gt;
백제 왕들은 정식 칭호에 “부여 ○○왕”이라고 기록됨.&lt;br /&gt;
예: 부여 구태(온조왕), 부여 여왕, 부여 의자왕 등.&lt;br /&gt;
백제 왕실은 철저히 부여 혈통 계승을 강조 → 한반도 남부에서도 정통성 확보.&lt;br /&gt;
백제가 망할 때(660년)까지 왕들은 계속 “부여씨”라 불렸어요.&lt;br /&gt;
&lt;br /&gt;
발해 속의 부여씨&lt;br /&gt;
&lt;br /&gt;
고구려 멸망 후 세워진 발해(698~926) 역시, 스스로를 **“고구려-부여의 후계자”**라 주장.&lt;br /&gt;
발해 지배층 가운데서도 “부여씨”를 자처한 기록이 남음.&lt;br /&gt;
이는 중국 왕조와 외교할 때도 정통성 강조 카드로 사용.&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의 운명&lt;br /&gt;
&lt;br /&gt;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멸망하면서, 공식적으로 **“부여씨 왕조”**는 끊어짐.&lt;br /&gt;
고려 시대 기록에도 일부 가문이 부여씨 계통을 자처했다는 전승이 있어요.&lt;br /&gt;
일본 고대 문헌에도 백제 왕족 후손 중 “부여씨”가 건너가 귀족이 되었다는 기록 존재.&lt;br /&gt;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이름은 흐려졌지만 한반도와 일본 귀족 사회 속에 혈통 흔적이 남았다는 설이 유력합니다.&lt;br /&gt;
 &lt;br /&gt;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lt;br /&gt;
&lt;br /&gt;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lt;br /&gt;
&lt;br /&gt;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lt;br /&gt;
&lt;br /&gt;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lt;br /&gt;
&lt;br /&gt;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lt;br /&gt;
&lt;br /&gt;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amp;quot;(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amp;quot;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lt;br /&gt;
&lt;br /&gt;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lt;br /&gt;
&lt;br /&gt;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amp;quot;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lt;br /&gt;
&lt;br /&gt;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lt;br /&gt;
&lt;br /&gt;
[[서성현]](徐城縣)&lt;br /&gt;
&lt;br /&gt;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lt;br /&gt;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lt;br /&gt;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lt;br /&gt;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lt;br /&gt;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lt;br /&gt;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lt;br /&gt;
&lt;br /&gt;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lt;br /&gt;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lt;br /&gt;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lt;br /&gt;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lt;br /&gt;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lt;br /&gt;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lt;br /&gt;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lt;br /&gt;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lt;br /&gt;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lt;br /&gt;
生時正偃，故以爲名。&lt;br /&gt;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lt;br /&gt;
宮人聞之，更取養之。&lt;br /&gt;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lt;br /&gt;
及長，襲爲徐君。&lt;br /&gt;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lt;br /&gt;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lt;br /&gt;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변했다.&lt;br /&gt;
鵠蒼或名後蒼。」&lt;br /&gt;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lt;br /&gt;
&lt;br /&gt;
[[서국]]의 쇠퇴와 멸망&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lt;br /&gt;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lt;br /&gt;
&lt;br /&gt;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lt;br /&gt;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lt;br /&gt;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lt;br /&gt;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lt;br /&gt;
&lt;br /&gt;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lt;br /&gt;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lt;br /&gt;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lt;br /&gt;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lt;br /&gt;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lt;br /&gt;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서국)|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lt;br /&gt;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서&lt;br /&gt;
&lt;br /&gt;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lt;br /&gt;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lt;br /&gt;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서국)|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lt;br /&gt;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진나라)|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lt;br /&gt;
&lt;br /&gt;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진나라)|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서복(진나라)|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진나라)|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진나라)|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동양에서 용의 기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서이족]]의 토템신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서이족은 황하유역에서 뱀과 가까이 살면서 공포의 대상인 뱀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숭배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뱀은 자연계의 뱀의 형상이 아닌 용으로 신격화되었고 보족의 풍습, 금기들을 용으로 상징화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사공포설이나 사신신앙설도 용의 기원을 뱀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또한 뱀은 자연계에 실존하지만 용은 상상의 산물로서 상룡, 마룡, 어룡 등과 같이 실존하는 동물에 다른 속성이 첨가, 혼합, 왜곡되어 새로운 형태로 되었다고 하여 용충설, 용수설, 용어설, 용조설 등이 보여 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용이 번개, 무지개, 천둥, 구름 등 자연천상의 신격화의 결과로 생성되었다는 용위섬전설은 공중에 나타난 번개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기점으로 가늘고 긴 네발 달린 신비한 용을 상상해냈다는 설이다. 용권설에서는 바다에서 태풍이 불 때 바닷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올라가는 현상, 즉 기상상이 구체화 하여 용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용위섬전설과 용권설은 용의 기원을 뱀의 형태 발전에서 보다는 각 민족의 풍토 속에서 기상에 의한 자연적인 발생으로 본 견해라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용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중국 상나라 때 갑골문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갑골문자에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가 70여 자나 되어 적어도 상나라 때에는 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상나라 사람들은 용머리에 뿔을 달아 주었다. 이것은 상나라 사람들이 지닌 뿔 숭배의 원시 종교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뿔은 특별한 신성을 의미한다. 뿔이 없는 동물에도 뿔을 달아 주었는데 이는 신통한 동물에게 신성을 부가하여 천지를 교류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용은 모방된 자연 생물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환상과 창조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상나라 때의 용은 통일된 것이 아니라 유형별로 차이가 있으며 구조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복잡해지며 송나라 때에는 용의 모습이 구체화 된다.&lt;br /&gt;
&lt;br /&gt;
한마디로 상나라 때 용의 모습과 송나라 때 용의 모습은 큰 차이가 난다. 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금씩 용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러한 변화는 만일 상나라 이전에도 용이 있었다면 상나라 때와는 그 모습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lt;br /&gt;
&lt;br /&gt;
중국인들은 삼성타라촌에서 발견된 C자형 옥저룡, C자형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으로 최초의 ‘중화제일용’으로 생각한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뱀, 악어, 말, 소, 뱀 등 많은 동물이 있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이런 점은 홍산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용은 물을 뜻하고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lt;br /&gt;
&lt;br /&gt;
1971년 중국 내몽고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높이 26cm의 ‘C자형 옥저룡(玉猪龍)’이 발견됐다.&lt;br /&gt;
&lt;br /&gt;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은 묵록색을 띠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린다.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 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이 대형 옥룡은 하나의 옥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꼭 닫았고 두 눈은 돌출돼 마름쇠형을 띈다. 용체의 횡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이 있으며 부조(浮雕)와 전조(淺雕)수법의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잘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lt;br /&gt;
&lt;br /&gt;
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lt;br /&gt;
&lt;br /&gt;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 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됐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lt;br /&gt;
&lt;br /&gt;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lt;br /&gt;
&lt;br /&gt;
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 보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lt;br /&gt;
&lt;br /&gt;
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을 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이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돼 중원지역으로 전파돼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홍산의 용이 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년 하남성(河南省) 복양시(?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의 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문화]]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용’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용 발굴을 기념해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용향(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이 사해문화에서 발견됐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lt;br /&gt;
&lt;br /&gt;
&amp;lt;사해문화의 용무늬 토기&amp;gt;&lt;br /&gt;
&lt;br /&gt;
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됐음을 우대해 서수파의 방소룡을 ‘중화제일용’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로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lt;br /&gt;
&lt;br /&gt;
우리가 아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를 겪었다. 손 박사는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하며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lt;br /&gt;
&lt;br /&gt;
붉은색 산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 인근의 흥륭와촌에서 발견된 흥룡화문화는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방어 용도의 성과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가 출토됐다.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lt;br /&gt;
&lt;br /&gt;
흥륭와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나오는 ‘수암옥’이다. 이는 흥륭와문화 시대인 기원전 60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lt;br /&gt;
&lt;br /&gt;
이후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5200),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기원전5000년),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을 거쳐 국가단계로 진입했다고 보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가 꽃피게 된다.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모두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홍산문화를 석기와 청동기를 같이 사용하는 시대로 간주한다.&lt;br /&gt;
&lt;br /&gt;
[[홍산문화]]의 중심지였던 조양시는 요령의 서쪽에 위치한다. 1996년 새의 공룡진화설을 뒷받침하는 ‘공룡중화용조’(시노사우롭테릭스)가 발견돼 세계 최초의 새인 시조새가 날아오른 지역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후 계속하여 시조새 화석들이 발견되어 ‘세계고생물화석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홍산문화]]와 상문화 간의 시간적인 차이는 약 2천 년, 거기다 지역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손 박사는 시공차를 극복하기 위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무늬 도안을 용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이것이 이리두문화와 상문화로 전해졌다고 주장했다.&lt;br /&gt;
이 주장은 찬반 논란에 직면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의 얼굴 모습을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 현대의 용 뿐 아니라 원시용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얘기다.&lt;br /&gt;
&lt;br /&gt;
Human Genetics에 발표된 김욱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한족(베이징인)보다도, 더 남쪽의 운남인과 가깝고 심지어 베트남인과도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이동지도에 의하면, 중국인은 M175유형의 돌연변이형을 가지는데, 티벳고원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동남아를 거친 후 북상하여, 북중국지역에서는 다시 아형인 M122형 돌연변이를 가진다. 김욱교수가 북경인과 운남인을 분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언어가 같은 티벳-중국어족이라하더라도 영화의 자막 처리를 못하면 보지못할 정도로 언어가 매우 다르며 실제로 얼굴 모습도 중국내에서 남방계, 북방계를 나눌 정도로 꽤 다르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지역의 위치상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북방계 중국인과 더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김욱교수의 논문은 거꾸로 한국인의 유전자는 남방계 중국인과 가까움을 실증하고 있다. 즉 한국인에게는 M122형보다 오래된 M175유형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 증거를 굳이 들지않더라도 한국어의 한자발음이 표준 북경어보다 남부 지방의 광동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을 북경어로 하면 장제스가 되지만 광동어로 하면 장카이섹이 된다.&lt;br /&gt;
&lt;br /&gt;
최근 [[홍산문화]]나 앙소문화보다 오래된 선홍산문화유적인 발해만의 &amp;quot;사해문화유적&amp;quot;에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변형인 지자문토기가 발견되고, 특이할 만한 사실은 용에 대한 토템이 있다는 사실이며, 문화유적의 특징상 &amp;quot;모계사회&amp;quot;의 여군장 제도를 가진 사회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용 토템의 진실을 캐는데는 중국이 아니라 &amp;quot;베트남&amp;quot;신화가 더 도움이 된다.&lt;br /&gt;
&lt;br /&gt;
&amp;quot;神農氏의 三世孫 데 밍(帝明)이 데 응이(帝宜)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을 순방하던 중 응우 링(五嶺)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 띠엔(惨僊)의 딸과 결혼하여 록 뚝(綠續)을 낳았다. 록 뚝이 총명하기 그지없기에 데 밍은 몹시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록 뚝이 극구 사절하기에 데 밍은 하는 수 없이 長男 데 응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방을 다스리게 한 다음, 次男 록 뚝을 낑 즈엉 브엉(涇陽王)에 봉하여 씩 꾸이(赤鬼, 운남성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라고 하는 남방을 다스리도록 했다. 낑 즈엉 브엉은 동 딩 꾸언(洞庭君, 용왕)의 딸 턴 롱(神龍)과 혼인하여 락 롱 꾸언(怷龍君, 출룡군)을 낳았다. 어려서 숭 람이라고 불리웠던 락 롱 꾸언은 데 라이(북방을 다스린 데 응이의 후손 임금)의 딸 어우 꺼(垯姬, 달희)와 결혼하여 100개들이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百越族의 선조인 것이다. 어느날 왕이 어우 꺼에게 말하기를 &amp;quot;나는 용의 종족이요, 당신은 산의 종족인지라 水와 火는 서로 다른 까닭에 합하는게 실로 어렵지 않겠소&amp;quot;라고 하였다. 즉시 이들은 헤어졌는데 어우 꺼는 50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락 롱 꾸언은 나머지 50명을 데리고 남쪽 바다로 갔다. 이 때 이들은 장남을 훙 브엉(雄王)으로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일백명 아들 중 장남은 기원전 2879년 락비엣 족의 왕이 되는데 이 왕국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왕국으로 명명 된다. 이 반랑 왕국은 홍하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턴롱(天龍)의 후예로서 웅왕이라고 불리우는 역대왕이 통치하며 기원전 258년까지 2,6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 하지 않다.&lt;br /&gt;
&lt;br /&gt;
분명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난생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음이 좀 어렵지만, 티벳-중국어족인 베트남인은 &amp;quot;신농&amp;quot;씨와 관련이 있는 벼농사의 농경민임과 동시에, 바다의 &amp;quot;용궁&amp;quot;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amp;quot;용&amp;quot;토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혼혈인이다. 베트남 민족에 영향을 준 용토템의 바다로 부터 들어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은 거꾸로 &amp;quot;한반도&amp;quot;기원의 &amp;quot;해상 남방 이주경로&amp;quot;를 가진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lt;br /&gt;
&lt;br /&gt;
용은 가상의 동물이다. 어로민족 특히 남쪽으로 내려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경우에는 에스키모어족과는 달리 태풍, 회오리와도 같은 날씨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호 복희씨의 직책이 &amp;quot;우사&amp;quot;란 이야기 한마디가 어로민족의 &amp;quot;풍어기원&amp;quot;의 개념과 &amp;quot;벼농사의 기우제&amp;quot;의 개념이 복합된 &amp;quot;동해 용왕제&amp;quot;를 수행하는 북방 알타이계 &amp;quot;샤먼&amp;quot;이었다는 말로 통한다. 무엇보다 복희와 여왜가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amp;quot;팔괘와 태극&amp;quot;이라는 동양사상의 시조라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lt;br /&gt;
&lt;br /&gt;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약 1,000년 동안 북만주에서 [[부여국]]을 세워 활동한 [[예맥족]]의 종족. 철기를 사용하고 영고(迎鼓)라는 제천 의식을 행하였으며 순장과 일부다처제의 풍습이 있었다.&lt;br /&gt;
&lt;br /&gt;
[[부여]]: 동물의 토템인 말, 소, 개, 돼지라고도하고, 방위인 동, 서, 남, 북으로하여 행정체계로하여 관리를 파견하였다고한다. 이외에 대사와 사자라는 벼슬이 존재하였다. 아마 동물의 토템이면서 방위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마가, 우가, 구가, 저가중에 어디가 동, 서, 남, 북인지는 현재 알 수 없다. 성씨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lt;br /&gt;
&lt;br /&gt;
1. 마가: 말을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lt;br /&gt;
&lt;br /&gt;
2. 우가: 소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lt;br /&gt;
&lt;br /&gt;
3. 구가: 개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lt;br /&gt;
&lt;br /&gt;
4. 저가: 돼지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lt;br /&gt;
&lt;br /&gt;
​&lt;br /&gt;
백제: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서 백제에는 큰 성씨가 8개의 족속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각각 예족(濊族), [[부여족]](扶餘族), 고조선 유이민으로 추측이되는 한족(韓族)과 중국계 귀화 성씨가 전해진다.&lt;br /&gt;
&lt;br /&gt;
1. [[진씨]]: [[부여족]] 계열의 성씨가 아닌 한강 이북에 존재한 예족으로 추정된다. 13대 [[근초고왕]]대에 왕비족이 나오는 성씨이다.&lt;br /&gt;
&lt;br /&gt;
2. [[해씨]]: [[온조왕]]과 함께 고구려에서 내려와 백제를 세운 [[부여족]] 계열이다. 왕실의 성은 [[부여씨]]를 쓰고, &lt;br /&gt;
&lt;br /&gt;
함께 온 세력을 [[해씨]]로 사성하였으리라 본다 [[부여]]의 왕성과 고구려 초기 태조왕 이전의 왕성과 같은 성씨이다.&lt;br /&gt;
&lt;br /&gt;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amp;lt;삼국사기&amp;gt;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amp;lt;삼국사기&amp;gt;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lt;br /&gt;
 &lt;br /&gt;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lt;br /&gt;
 &lt;br /&gt;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lt;br /&gt;
 &lt;br /&gt;
또한 &amp;lt;자치통감&amp;gt;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lt;br /&gt;
 &lt;br /&gt;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amp;lt;진서&amp;gt;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lt;br /&gt;
 &lt;br /&gt;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lt;br /&gt;
 &lt;br /&gt;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lt;br /&gt;
 &lt;br /&gt;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lt;br /&gt;
 &lt;br /&gt;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lt;br /&gt;
 &lt;br /&gt;
&lt;br /&gt;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lt;br /&gt;
 &lt;br /&gt;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amp;lt;삼국사기&amp;gt;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분파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흑치씨]](黑齒氏) - &amp;lt;[[흑치상지]] 묘지명&amp;gt;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amp;lt;동성왕조&amp;gt;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amp;gt; 백가 &amp;gt;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lt;br /&gt;
&lt;br /&gt;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lt;br /&gt;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lt;br /&gt;
&lt;br /&gt;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amp;lt;왕력편&amp;gt;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amp;quot;[[동성왕]]의 아들&amp;quot;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lt;br /&gt;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lt;br /&gt;
&lt;br /&gt;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lt;br /&gt;
&lt;br /&gt;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lt;br /&gt;
&lt;br /&gt;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lt;br /&gt;
&lt;br /&gt;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lt;br /&gt;
&lt;br /&gt;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lt;br /&gt;
&lt;br /&gt;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lt;br /&gt;
&lt;br /&gt;
== [[부여]]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lt;br /&gt;
&lt;br /&gt;
[[여현]]&lt;br /&gt;
&lt;br /&gt;
[[여울]]&lt;br /&gt;
&lt;br /&gt;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lt;br /&gt;
&lt;br /&gt;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lt;br /&gt;
&lt;br /&gt;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lt;br /&gt;
&lt;br /&gt;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lt;br /&gt;
&lt;br /&gt;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lt;br /&gt;
&lt;br /&gt;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lt;br /&gt;
&lt;br /&gt;
[[우복]](優福)&lt;br /&gt;
&lt;br /&gt;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lt;br /&gt;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lt;br /&gt;
&lt;br /&gt;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lt;br /&gt;
&lt;br /&gt;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lt;br /&gt;
&lt;br /&gt;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lt;br /&gt;
&lt;br /&gt;
[[부여기]]&lt;br /&gt;
&lt;br /&gt;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lt;br /&gt;
&lt;br /&gt;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lt;br /&gt;
&lt;br /&gt;
[[부여력]](夫餘歷)&lt;br /&gt;
&lt;br /&gt;
[[부여고]](夫餘固)&lt;br /&gt;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lt;br /&gt;
&lt;br /&gt;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lt;br /&gt;
&lt;br /&gt;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lt;br /&gt;
&lt;br /&gt;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lt;br /&gt;
&lt;br /&gt;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lt;br /&gt;
&lt;br /&gt;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lt;br /&gt;
&lt;br /&gt;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lt;br /&gt;
&lt;br /&gt;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lt;br /&gt;
&lt;br /&gt;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lt;br /&gt;
&lt;br /&gt;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lt;br /&gt;
&lt;br /&gt;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lt;br /&gt;
&lt;br /&gt;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lt;br /&gt;
&lt;br /&gt;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lt;br /&gt;
&lt;br /&gt;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lt;br /&gt;
&lt;br /&gt;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lt;br /&gt;
&lt;br /&gt;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lt;br /&gt;
&lt;br /&gt;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lt;br /&gt;
&lt;br /&gt;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lt;br /&gt;
&lt;br /&gt;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lt;br /&gt;
&lt;br /&gt;
== [[일본의 백제계 성씨]] ==&lt;br /&gt;
&lt;br /&gt;
[[쿠다라]](百濟くだら)),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 [[토요타]](豊田とよた), [[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마쓰다]](松田まつだ), [[이시노]](石野いしの), [[스가노]](菅野すがの), [[오오카]](大丘おおか)), [[오카야]](岡屋おかや), [[하루노]](春野はるの),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나카노]](中野なかの), [[쿠니모토]](國本くにもと), [[나가다]](長田ながた) 등의 복성과, [[하야시]](林はやし), [[후미]](文ふみ)씨 등의 단성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lt;br /&gt;
&lt;br /&gt;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헝가리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D%B4%EC%A1%B1&amp;diff=145673</id>
		<title>서이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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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46: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동이(东夷)&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동방 부족에 대한 칭호&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lt;br /&gt;
· 별칭: 이(夷)&lt;br /&gt;
&lt;br /&gt;
· 소속 지역: 현재 중국 산동성 중남부&lt;br /&gt;
&lt;br /&gt;
· 기원: 노중(鲁中) 태沂(泰沂) 산구&lt;br /&gt;
&lt;br /&gt;
· 의미: 고대 중원(中原) 지역 사람들이 동방 각 부족을 통칭하던 말&lt;br /&gt;
&lt;br /&gt;
· 족속: 서씨족&lt;br /&gt;
&lt;br /&gt;
핵심 정보&lt;br /&gt;
&lt;br /&gt;
동이는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8300년경의 후리(后李) 문화부터 시작하여 북신(北辛) 문화, 대문구(大汶口) 문화, 용산(龙山) 문화, 악석(岳石) 문화를 이어온 집단을 가리킵니다.중국 고대 동방에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한 부족군으로, 동방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夷)'인이라 하여 동이(东夷)라고 불렸습니다. 동이는 처음에 하북성 역수(易水) 및 연산(燕山) 일대에 분포했으나, 이후 인구가 번성하고 씨족 조직이 분열되면서 동이족은 인이(人夷), 조이(鸟夷), 욱이(郁夷) 세 가지 큰 갈래로 나뉘었습니다.&lt;br /&gt;
&lt;br /&gt;
고대에는 동이에 아홉 종류가 있다고 했으며, 《논어·자한(论语·子罕)》에는 &amp;quot;공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하셨다(子欲居九夷)&amp;quot;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석에는 &amp;quot;동방에 아홉 종류의 이(夷)가 있다: 현도(玄菟), 낙랑(乐浪), 고려(高骊), 만식(满饰), 부경(凫更), 색가(索家), 동토(东屠), 왜인(倭人), 천비(天鄙)&amp;quot;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동이는 일반적으로 남만(南蛮), 서융(西戎), 북적(北狄)과 함께 병렬되어 언급됩니다. 《논어·자한》에도 구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amp;quot;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amp;quot;.&lt;br /&gt;
&lt;br /&gt;
종류&lt;br /&gt;
&lt;br /&gt;
고대에는 동이에 아홉 종류가 있다고 했으며, 《논어·자한》: &amp;quot;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amp;quot;. 주석: &amp;quot;동방에 아홉 종류의 이(夷)가 있다: 첫째 현도(玄菟), 둘째 낙랑(乐浪), 셋째 고려(高骊), 넷째 만식(满饰), 다섯째 부경(凫更), 여섯째 색가(索家), 일곱째 동토(东屠), 여덟째 왜인(倭人), 아홉째 천비(天鄙).&amp;quot;&lt;br /&gt;
&lt;br /&gt;
《후한서·동이전(后汉书·东夷传)》에는 &amp;quot;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黄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风夷), 양이(阳夷)라고 한다&amp;quot;고 기록되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왕제(王制)》에는 &amp;quot;동방을 이(夷)라고 한다&amp;quot;고 했습니다. 이(夷)는 근본(柢)이라는 뜻으로, 인자하고 생명을 좋아하여 만물이 땅에서 근본처럼 나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천성이 유순하여 도(道)로 다스리기 쉽고, 군자나 불사의 나라가 있을 정도입니다.&lt;br /&gt;
&lt;br /&gt;
《논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传)》, 《전국책(战国策)》 등에도 구이(九夷)가 언급됩니다. 여기서 '구(九)'는 구체적인 숫자가 아니라 많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이아·석지(尔雅·释地)》에는 &amp;quot;구이(九夷), 팔적(八狄), 칠융(七戎), 육만(六蛮)&amp;quo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곽박(郭璞)의 《이아주(尔雅注)》에는 &amp;quot;구이는 동방에 있다(九夷在东)&amp;quot;라고 하여, 중국 동부의 이인(夷人)을 통칭합니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발전&lt;br /&gt;
&lt;br /&gt;
선진(先秦) 시대의 동이&lt;br /&gt;
&lt;br /&gt;
· 하(夏), 상(商) 시대: 하 왕조 초기부터 동이와의 복잡한 관계와 갈등이 시작됨. 상(商) 왕조도 동이와 빈번한 전쟁을 벌임.&lt;br /&gt;
· 서주(西周) 시대: 서주 초기에는 동이, 특히 산동 반도의 얀(奄), 박고(薄姑) 등이 강력한 적으로 부상. 주 왕실과의 전쟁 후 세력이 약화됨. 제(齐)와 노(鲁) 두 제후국이 동이 지역에 봉해져 다른 동화 정책을 펼침.&lt;br /&gt;
· 춘추전국 시대: 산동 반도의 동이 세력은 점차 제(齐), 노(鲁) 등에 흡수 통합됨. 회수(淮水) 유역의 동이(예: 서(徐), 회이(淮夷) 등)는 초(楚), 오(吴), 월(越) 등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중원 문화와 융합됨. 전국 시대 말기에는 대부분 화하(华夏)에 통합됨.&lt;br /&gt;
&lt;br /&gt;
진한(秦汉) 이후 동이 개념의 변화&lt;br /&gt;
&lt;br /&gt;
· 진한 시대 이후 '동이'의 개념이 크게 변화. 선진 시대의 산동-회수 유역 부족을 지칭하던 의미에서, 중국 동북 지역, 한반도, 일본 열도 등의 민족과 국가(예: 부여(夫余), 읍루(挹娄), 고구려(高句麗), 옥저(沃沮), 예(濊), 삼한(三韓), 왜(倭))를 포괄하는 의미로 확대됨&lt;br /&gt;
&lt;br /&gt;
·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 '사이(四夷)' 설의 영향으로 동이는 비중원(非中原)의 동방 이족(夷族)을 가리키는 말이 됨.&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lt;br /&gt;
&lt;br /&gt;
· 동이족은 새(특히 봉황)를 숭상하는 민족으로, 봉황을 조상으로 여기고 풍(风) 성을 사용하며, 봉황을 토템으로 숭배했습니다. 많은 부족 이름이 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lt;br /&gt;
· 동이족이 창조한 동이 문화는 중화 문명의 중요한源头 중 하나이며, 중국 초기 문명을孕育했습니다.&lt;br /&gt;
&lt;br /&gt;
하(夏), 상(商)과의 전쟁&lt;br /&gt;
&lt;br /&gt;
· 하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동이와 장기간에 걸쳐 격렬한 갈등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예: 유궁씨 후예(有穷氏后羿)의 &amp;quot;하 정권 대체&amp;quot; 사건).&lt;br /&gt;
· 상 왕조도 동이와 빈번히 전쟁을 벌였으며, 특히 주(纣) 왕 시기 대규모 동이 원정은 국력을 소모하는 결과를 가져와 주(周) 무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amp;quot;주가 동이를 정복하고 자신은 죽임을 당함(纣克东夷而殒其身)&amp;quot;).&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 서적 기록&lt;br /&gt;
&lt;br /&gt;
· 《산해경·해외동경(山海经·海外东经)》: 동방의 지리, 부족, 신화 등을 상상력豊富하게 기록.&lt;br /&gt;
&lt;br /&gt;
· 《상서·우공(尚书·禹贡)》: 우(禹)가 구주(九州)를 나눈 기록에 동이 지역(예: 우이(嵎夷), 래이(莱夷))가 언급됨&lt;br /&gt;
&lt;br /&gt;
· 《논어(论语)》,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传)》, 《국어(国语)》 등에도 동이 관련 기록이 등장.&lt;br /&gt;
&lt;br /&gt;
기타 참고 사항&lt;br /&gt;
&lt;br /&gt;
· '이(夷)' 자에 대한 해석: 본래 &amp;quot;활을 든 사람&amp;quot;을 형상화했다는 설(《설문해자(说文解字)》)이 있으나, 갑골문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의 형상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고대 산동어에서 '이(夷)'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과 발음이 비슷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lt;br /&gt;
· 진한 이후 '동이' 개념이 확대되면서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국가들도 그 범주에 포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대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서 비롯된 인식입니다.&lt;br /&gt;
· 동이는 고고학적으로 황하 문명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권(후리-북신-대문구-용산-악석 문화 계열)을 형성했으며, 이 문화는 후기 중화 문명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부여족]](扶餘族)&lt;br /&gt;
&lt;br /&gt;
[[써족]]([[서족]])([[여족]])(畬族)=[[서족(동이)|서족]](徐族)=[[여족(동이)|여족]](餘族)=[[여족(부여)|여족]](余族) =[[도족(부여)|도족]](涂族=凃族=塗族=途族)=[[사족]](佘族) 동이시조의 한집안 &lt;br /&gt;
&lt;br /&gt;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lt;br /&gt;
&lt;br /&gt;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lt;br /&gt;
&lt;br /&gt;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lt;br /&gt;
&lt;br /&gt;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lt;br /&gt;
&lt;br /&gt;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lt;br /&gt;
&lt;br /&gt;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amp;quot;(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amp;quot;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lt;br /&gt;
&lt;br /&gt;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lt;br /&gt;
&lt;br /&gt;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amp;quot;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lt;br /&gt;
&lt;br /&gt;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lt;br /&gt;
&lt;br /&gt;
[[서성현]](徐城縣)&lt;br /&gt;
&lt;br /&gt;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lt;br /&gt;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lt;br /&gt;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lt;br /&gt;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lt;br /&gt;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lt;br /&gt;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lt;br /&gt;
&lt;br /&gt;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lt;br /&gt;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lt;br /&gt;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lt;br /&gt;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lt;br /&gt;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lt;br /&gt;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lt;br /&gt;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lt;br /&gt;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lt;br /&gt;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lt;br /&gt;
生時正偃，故以爲名。&lt;br /&gt;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lt;br /&gt;
宮人聞之，更取養之。&lt;br /&gt;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lt;br /&gt;
及長，襲爲徐君。&lt;br /&gt;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lt;br /&gt;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lt;br /&gt;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변했다.&lt;br /&gt;
鵠蒼或名後蒼。」&lt;br /&gt;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lt;br /&gt;
&lt;br /&gt;
[[서국]]의 쇠퇴와 멸망&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lt;br /&gt;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lt;br /&gt;
&lt;br /&gt;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lt;br /&gt;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lt;br /&gt;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lt;br /&gt;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lt;br /&gt;
&lt;br /&gt;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lt;br /&gt;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lt;br /&gt;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lt;br /&gt;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lt;br /&gt;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lt;br /&gt;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서국)|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lt;br /&gt;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서&lt;br /&gt;
&lt;br /&gt;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lt;br /&gt;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lt;br /&gt;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서국)|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lt;br /&gt;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진나라)|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lt;br /&gt;
&lt;br /&gt;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진나라)|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서복(진나라)|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진나라)|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진나라)|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동양에서 용의 기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서이족]]의 토템신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서이족은 황하유역에서 뱀과 가까이 살면서 공포의 대상인 뱀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숭배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뱀은 자연계의 뱀의 형상이 아닌 용으로 신격화되었고 보족의 풍습, 금기들을 용으로 상징화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사공포설이나 사신신앙설도 용의 기원을 뱀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또한 뱀은 자연계에 실존하지만 용은 상상의 산물로서 상룡, 마룡, 어룡 등과 같이 실존하는 동물에 다른 속성이 첨가, 혼합, 왜곡되어 새로운 형태로 되었다고 하여 용충설, 용수설, 용어설, 용조설 등이 보여 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용이 번개, 무지개, 천둥, 구름 등 자연천상의 신격화의 결과로 생성되었다는 용위섬전설은 공중에 나타난 번개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기점으로 가늘고 긴 네발 달린 신비한 용을 상상해냈다는 설이다. 용권설에서는 바다에서 태풍이 불 때 바닷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올라가는 현상, 즉 기상상이 구체화 하여 용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용위섬전설과 용권설은 용의 기원을 뱀의 형태 발전에서 보다는 각 민족의 풍토 속에서 기상에 의한 자연적인 발생으로 본 견해라고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용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중국 상나라 때 갑골문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갑골문자에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가 70여 자나 되어 적어도 상나라 때에는 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lt;br /&gt;
&lt;br /&gt;
상나라 사람들은 용머리에 뿔을 달아 주었다. 이것은 상나라 사람들이 지닌 뿔 숭배의 원시 종교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뿔은 특별한 신성을 의미한다. 뿔이 없는 동물에도 뿔을 달아 주었는데 이는 신통한 동물에게 신성을 부가하여 천지를 교류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용은 모방된 자연 생물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환상과 창조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상나라 때의 용은 통일된 것이 아니라 유형별로 차이가 있으며 구조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복잡해지며 송나라 때에는 용의 모습이 구체화 된다.&lt;br /&gt;
&lt;br /&gt;
한마디로 상나라 때 용의 모습과 송나라 때 용의 모습은 큰 차이가 난다. 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금씩 용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러한 변화는 만일 상나라 이전에도 용이 있었다면 상나라 때와는 그 모습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lt;br /&gt;
&lt;br /&gt;
중국인들은 삼성타라촌에서 발견된 C자형 옥저룡, C자형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으로 최초의 ‘중화제일용’으로 생각한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뱀, 악어, 말, 소, 뱀 등 많은 동물이 있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이런 점은 홍산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용은 물을 뜻하고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lt;br /&gt;
&lt;br /&gt;
1971년 중국 내몽고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높이 26cm의 ‘C자형 옥저룡(玉猪龍)’이 발견됐다.&lt;br /&gt;
&lt;br /&gt;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은 묵록색을 띠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린다.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 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이 대형 옥룡은 하나의 옥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꼭 닫았고 두 눈은 돌출돼 마름쇠형을 띈다. 용체의 횡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이 있으며 부조(浮雕)와 전조(淺雕)수법의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잘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lt;br /&gt;
&lt;br /&gt;
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lt;br /&gt;
&lt;br /&gt;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 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됐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lt;br /&gt;
&lt;br /&gt;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lt;br /&gt;
&lt;br /&gt;
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 보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lt;br /&gt;
&lt;br /&gt;
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을 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이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돼 중원지역으로 전파돼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와 같이 홍산의 용이 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년 하남성(河南省) 복양시(?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의 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문화]]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용’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용 발굴을 기념해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용향(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이 사해문화에서 발견됐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lt;br /&gt;
&lt;br /&gt;
&amp;lt;사해문화의 용무늬 토기&amp;gt;&lt;br /&gt;
&lt;br /&gt;
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됐음을 우대해 서수파의 방소룡을 ‘중화제일용’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로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lt;br /&gt;
&lt;br /&gt;
우리가 아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를 겪었다. 손 박사는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하며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lt;br /&gt;
&lt;br /&gt;
붉은색 산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 인근의 흥륭와촌에서 발견된 흥룡화문화는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방어 용도의 성과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가 출토됐다.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lt;br /&gt;
&lt;br /&gt;
흥륭와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나오는 ‘수암옥’이다. 이는 흥륭와문화 시대인 기원전 60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lt;br /&gt;
&lt;br /&gt;
이후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5200),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기원전5000년),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을 거쳐 국가단계로 진입했다고 보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가 꽃피게 된다.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모두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홍산문화를 석기와 청동기를 같이 사용하는 시대로 간주한다.&lt;br /&gt;
&lt;br /&gt;
[[홍산문화]]의 중심지였던 조양시는 요령의 서쪽에 위치한다. 1996년 새의 공룡진화설을 뒷받침하는 ‘공룡중화용조’(시노사우롭테릭스)가 발견돼 세계 최초의 새인 시조새가 날아오른 지역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후 계속하여 시조새 화석들이 발견되어 ‘세계고생물화석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홍산문화]]와 상문화 간의 시간적인 차이는 약 2천 년, 거기다 지역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손 박사는 시공차를 극복하기 위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무늬 도안을 용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이것이 이리두문화와 상문화로 전해졌다고 주장했다.&lt;br /&gt;
이 주장은 찬반 논란에 직면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의 얼굴 모습을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 현대의 용 뿐 아니라 원시용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얘기다.&lt;br /&gt;
&lt;br /&gt;
Human Genetics에 발표된 김욱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한족(베이징인)보다도, 더 남쪽의 운남인과 가깝고 심지어 베트남인과도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이동지도에 의하면, 중국인은 M175유형의 돌연변이형을 가지는데, 티벳고원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동남아를 거친 후 북상하여, 북중국지역에서는 다시 아형인 M122형 돌연변이를 가진다. 김욱교수가 북경인과 운남인을 분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언어가 같은 티벳-중국어족이라하더라도 영화의 자막 처리를 못하면 보지못할 정도로 언어가 매우 다르며 실제로 얼굴 모습도 중국내에서 남방계, 북방계를 나눌 정도로 꽤 다르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지역의 위치상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북방계 중국인과 더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김욱교수의 논문은 거꾸로 한국인의 유전자는 남방계 중국인과 가까움을 실증하고 있다. 즉 한국인에게는 M122형보다 오래된 M175유형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 증거를 굳이 들지않더라도 한국어의 한자발음이 표준 북경어보다 남부 지방의 광동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을 북경어로 하면 장제스가 되지만 광동어로 하면 장카이섹이 된다.&lt;br /&gt;
&lt;br /&gt;
최근 [[홍산문화]]나 앙소문화보다 오래된 선홍산문화유적인 발해만의 &amp;quot;사해문화유적&amp;quot;에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변형인 지자문토기가 발견되고, 특이할 만한 사실은 용에 대한 토템이 있다는 사실이며, 문화유적의 특징상 &amp;quot;모계사회&amp;quot;의 여군장 제도를 가진 사회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용 토템의 진실을 캐는데는 중국이 아니라 &amp;quot;베트남&amp;quot;신화가 더 도움이 된다.&lt;br /&gt;
&lt;br /&gt;
&amp;quot;神農氏의 三世孫 데 밍(帝明)이 데 응이(帝宜)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을 순방하던 중 응우 링(五嶺)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 띠엔(惨僊)의 딸과 결혼하여 록 뚝(綠續)을 낳았다. 록 뚝이 총명하기 그지없기에 데 밍은 몹시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록 뚝이 극구 사절하기에 데 밍은 하는 수 없이 長男 데 응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방을 다스리게 한 다음, 次男 록 뚝을 낑 즈엉 브엉(涇陽王)에 봉하여 씩 꾸이(赤鬼, 운남성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라고 하는 남방을 다스리도록 했다. 낑 즈엉 브엉은 동 딩 꾸언(洞庭君, 용왕)의 딸 턴 롱(神龍)과 혼인하여 락 롱 꾸언(怷龍君, 출룡군)을 낳았다. 어려서 숭 람이라고 불리웠던 락 롱 꾸언은 데 라이(북방을 다스린 데 응이의 후손 임금)의 딸 어우 꺼(垯姬, 달희)와 결혼하여 100개들이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百越族의 선조인 것이다. 어느날 왕이 어우 꺼에게 말하기를 &amp;quot;나는 용의 종족이요, 당신은 산의 종족인지라 水와 火는 서로 다른 까닭에 합하는게 실로 어렵지 않겠소&amp;quot;라고 하였다. 즉시 이들은 헤어졌는데 어우 꺼는 50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락 롱 꾸언은 나머지 50명을 데리고 남쪽 바다로 갔다. 이 때 이들은 장남을 훙 브엉(雄王)으로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일백명 아들 중 장남은 기원전 2879년 락비엣 족의 왕이 되는데 이 왕국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왕국으로 명명 된다. 이 반랑 왕국은 홍하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턴롱(天龍)의 후예로서 웅왕이라고 불리우는 역대왕이 통치하며 기원전 258년까지 2,6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 하지 않다.&lt;br /&gt;
&lt;br /&gt;
분명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난생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음이 좀 어렵지만, 티벳-중국어족인 베트남인은 &amp;quot;신농&amp;quot;씨와 관련이 있는 벼농사의 농경민임과 동시에, 바다의 &amp;quot;용궁&amp;quot;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amp;quot;용&amp;quot;토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혼혈인이다. 베트남 민족에 영향을 준 용토템의 바다로 부터 들어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은 거꾸로 &amp;quot;한반도&amp;quot;기원의 &amp;quot;해상 남방 이주경로&amp;quot;를 가진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lt;br /&gt;
&lt;br /&gt;
용은 가상의 동물이다. 어로민족 특히 남쪽으로 내려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경우에는 에스키모어족과는 달리 태풍, 회오리와도 같은 날씨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호 복희씨의 직책이 &amp;quot;우사&amp;quot;란 이야기 한마디가 어로민족의 &amp;quot;풍어기원&amp;quot;의 개념과 &amp;quot;벼농사의 기우제&amp;quot;의 개념이 복합된 &amp;quot;동해 용왕제&amp;quot;를 수행하는 북방 알타이계 &amp;quot;샤먼&amp;quot;이었다는 말로 통한다. 무엇보다 복희와 여왜가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amp;quot;팔괘와 태극&amp;quot;이라는 동양사상의 시조라는 사실이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lt;br /&gt;
&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부여족]](扶餘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서씨족]](徐氏族)=[[부여족]](扶餘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주나라 성왕은 四夷(동이)에 선린융화 정책을 실시하였고, 강왕 때 주(周)의 정책이 강성(强性)을 띠므로 숙신은 주(周)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국]](徐國)과 친선을 도모하여 동쪽(동이) 서언(徐偃)에게 왕을 호칭하게 하여 [[서언왕]]이라 하였다.&lt;br /&gt;
[[서언왕]]은 동이의 세력을 규합하고 주(周)에 대한 총력전을 실시하여 종주(장안과 낙양)까지 공략하여 주(周)의 세력을 쇠약하게 하고 주나라 소왕을 물에 빠져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lt;br /&gt;
주나라 목왕때 숙신은 [[서언왕]]을 회대 지역에서 이족(동이)의 대표로 하여 주(周)를 견제하고 주(周)에 대항하니 주나라 목왕은 동방의 동이 세력이 막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서언왕]]에게 백(伯)의 직위를 주어 주(周)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정책을 폈다.&lt;br /&gt;
주나라 목왕은 초나라를 이용하여 [[서언왕]]을 제압하고 중원의 패자가 된 후 견융을 정벌코자 하나 실패하고 제후국들 사이도 나빠졌다.&lt;br /&gt;
BC.512년 [[서국]](徐國)은 오나라에게 멸망하고 서자 후대에 [[서씨]](徐氏)라 하여 명성있는 세가대족(世家大族)으로 산동 연주 동해에 거처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amp;lt;삼국사기&amp;gt;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amp;lt;삼국사기&amp;gt;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lt;br /&gt;
 &lt;br /&gt;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lt;br /&gt;
 &lt;br /&gt;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lt;br /&gt;
 &lt;br /&gt;
또한 &amp;lt;자치통감&amp;gt;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lt;br /&gt;
 &lt;br /&gt;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amp;lt;진서&amp;gt;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lt;br /&gt;
 &lt;br /&gt;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lt;br /&gt;
 &lt;br /&gt;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lt;br /&gt;
 &lt;br /&gt;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lt;br /&gt;
 &lt;br /&gt;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lt;br /&gt;
 &lt;br /&gt;
&lt;br /&gt;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lt;br /&gt;
 &lt;br /&gt;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amp;lt;삼국사기&amp;gt;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분파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흑치씨]](黑齒氏) - &amp;lt;[[흑치상지]] 묘지명&amp;gt;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amp;lt;동성왕조&amp;gt;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amp;gt; 백가 &amp;gt;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lt;br /&gt;
&lt;br /&gt;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lt;br /&gt;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lt;br /&gt;
&lt;br /&gt;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amp;lt;왕력편&amp;gt;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amp;quot;[[동성왕]]의 아들&amp;quot;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lt;br /&gt;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lt;br /&gt;
&lt;br /&gt;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lt;br /&gt;
&lt;br /&gt;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lt;br /&gt;
&lt;br /&gt;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lt;br /&gt;
&lt;br /&gt;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lt;br /&gt;
&lt;br /&gt;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lt;br /&gt;
&lt;br /&gt;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lt;br /&gt;
&lt;br /&gt;
== [[부여]]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lt;br /&gt;
&lt;br /&gt;
[[여현]]&lt;br /&gt;
&lt;br /&gt;
[[여울]]&lt;br /&gt;
&lt;br /&gt;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lt;br /&gt;
&lt;br /&gt;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lt;br /&gt;
&lt;br /&gt;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lt;br /&gt;
&lt;br /&gt;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lt;br /&gt;
&lt;br /&gt;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lt;br /&gt;
&lt;br /&gt;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lt;br /&gt;
&lt;br /&gt;
[[우복]](優福)&lt;br /&gt;
&lt;br /&gt;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lt;br /&gt;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lt;br /&gt;
&lt;br /&gt;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lt;br /&gt;
&lt;br /&gt;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lt;br /&gt;
&lt;br /&gt;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lt;br /&gt;
&lt;br /&gt;
[[부여기]]&lt;br /&gt;
&lt;br /&gt;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lt;br /&gt;
&lt;br /&gt;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lt;br /&gt;
&lt;br /&gt;
[[부여력]](夫餘歷)&lt;br /&gt;
&lt;br /&gt;
[[부여고]](夫餘固)&lt;br /&gt;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lt;br /&gt;
&lt;br /&gt;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lt;br /&gt;
&lt;br /&gt;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lt;br /&gt;
&lt;br /&gt;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lt;br /&gt;
&lt;br /&gt;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lt;br /&gt;
&lt;br /&gt;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lt;br /&gt;
&lt;br /&gt;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lt;br /&gt;
&lt;br /&gt;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lt;br /&gt;
&lt;br /&gt;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lt;br /&gt;
&lt;br /&gt;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lt;br /&gt;
&lt;br /&gt;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lt;br /&gt;
&lt;br /&gt;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lt;br /&gt;
&lt;br /&gt;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lt;br /&gt;
&lt;br /&gt;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lt;br /&gt;
&lt;br /&gt;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lt;br /&gt;
&lt;br /&gt;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lt;br /&gt;
&lt;br /&gt;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lt;br /&gt;
&lt;br /&gt;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lt;br /&gt;
&lt;br /&gt;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lt;br /&gt;
&lt;br /&gt;
== [[일본의 백제계 성씨]] ==&lt;br /&gt;
&lt;br /&gt;
[[쿠다라]](百濟くだら)),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 [[토요타]](豊田とよた), [[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마쓰다]](松田まつだ), [[이시노]](石野いしの), [[스가노]](菅野すがの), [[오오카]](大丘おおか)), [[오카야]](岡屋おかや), [[하루노]](春野はるの),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나카노]](中野なかの), [[쿠니모토]](國本くにもと), [[나가다]](長田ながた) 등의 복성과, [[하야시]](林はやし), [[후미]](文ふみ)씨 등의 단성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lt;br /&gt;
&lt;br /&gt;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헝가리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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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동이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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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45: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동이(东夷)&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동방 부족에 대한 칭호&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lt;br /&gt;
· 별칭: 이(夷)&lt;br /&gt;
&lt;br /&gt;
· 소속 지역: 현재 중국 산동성 중남부&lt;br /&gt;
&lt;br /&gt;
· 기원: 노중(鲁中) 태沂(泰沂) 산구&lt;br /&gt;
&lt;br /&gt;
· 의미: 고대 중원(中原) 지역 사람들이 동방 각 부족을 통칭하던 말&lt;br /&gt;
&lt;br /&gt;
· 족속: 서씨족&lt;br /&gt;
&lt;br /&gt;
핵심 정보&lt;br /&gt;
&lt;br /&gt;
동이는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8300년경의 후리(后李) 문화부터 시작하여 북신(北辛) 문화, 대문구(大汶口) 문화, 용산(龙山) 문화, 악석(岳石) 문화를 이어온 집단을 가리킵니다.중국 고대 동방에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한 부족군으로, 동방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夷)'인이라 하여 동이(东夷)라고 불렸습니다. 동이는 처음에 하북성 역수(易水) 및 연산(燕山) 일대에 분포했으나, 이후 인구가 번성하고 씨족 조직이 분열되면서 동이족은 인이(人夷), 조이(鸟夷), 욱이(郁夷) 세 가지 큰 갈래로 나뉘었습니다.&lt;br /&gt;
&lt;br /&gt;
고대에는 동이에 아홉 종류가 있다고 했으며, 《논어·자한(论语·子罕)》에는 &amp;quot;공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하셨다(子欲居九夷)&amp;quot;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석에는 &amp;quot;동방에 아홉 종류의 이(夷)가 있다: 현도(玄菟), 낙랑(乐浪), 고려(高骊), 만식(满饰), 부경(凫更), 색가(索家), 동토(东屠), 왜인(倭人), 천비(天鄙)&amp;quot;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동이는 일반적으로 남만(南蛮), 서융(西戎), 북적(北狄)과 함께 병렬되어 언급됩니다. 《논어·자한》에도 구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amp;quot;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amp;quot;.&lt;br /&gt;
&lt;br /&gt;
종류&lt;br /&gt;
&lt;br /&gt;
고대에는 동이에 아홉 종류가 있다고 했으며, 《논어·자한》: &amp;quot;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amp;quot;. 주석: &amp;quot;동방에 아홉 종류의 이(夷)가 있다: 첫째 현도(玄菟), 둘째 낙랑(乐浪), 셋째 고려(高骊), 넷째 만식(满饰), 다섯째 부경(凫更), 여섯째 색가(索家), 일곱째 동토(东屠), 여덟째 왜인(倭人), 아홉째 천비(天鄙).&amp;quot;&lt;br /&gt;
&lt;br /&gt;
《후한서·동이전(后汉书·东夷传)》에는 &amp;quot;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黄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风夷), 양이(阳夷)라고 한다&amp;quot;고 기록되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왕제(王制)》에는 &amp;quot;동방을 이(夷)라고 한다&amp;quot;고 했습니다. 이(夷)는 근본(柢)이라는 뜻으로, 인자하고 생명을 좋아하여 만물이 땅에서 근본처럼 나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천성이 유순하여 도(道)로 다스리기 쉽고, 군자나 불사의 나라가 있을 정도입니다.&lt;br /&gt;
&lt;br /&gt;
《논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传)》, 《전국책(战国策)》 등에도 구이(九夷)가 언급됩니다. 여기서 '구(九)'는 구체적인 숫자가 아니라 많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이아·석지(尔雅·释地)》에는 &amp;quot;구이(九夷), 팔적(八狄), 칠융(七戎), 육만(六蛮)&amp;quo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곽박(郭璞)의 《이아주(尔雅注)》에는 &amp;quot;구이는 동방에 있다(九夷在东)&amp;quot;라고 하여, 중국 동부의 이인(夷人)을 통칭합니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발전&lt;br /&gt;
&lt;br /&gt;
선진(先秦) 시대의 동이&lt;br /&gt;
&lt;br /&gt;
· 하(夏), 상(商) 시대: 하 왕조 초기부터 동이와의 복잡한 관계와 갈등이 시작됨. 상(商) 왕조도 동이와 빈번한 전쟁을 벌임.&lt;br /&gt;
· 서주(西周) 시대: 서주 초기에는 동이, 특히 산동 반도의 얀(奄), 박고(薄姑) 등이 강력한 적으로 부상. 주 왕실과의 전쟁 후 세력이 약화됨. 제(齐)와 노(鲁) 두 제후국이 동이 지역에 봉해져 다른 동화 정책을 펼침.&lt;br /&gt;
· 춘추전국 시대: 산동 반도의 동이 세력은 점차 제(齐), 노(鲁) 등에 흡수 통합됨. 회수(淮水) 유역의 동이(예: 서(徐), 회이(淮夷) 등)는 초(楚), 오(吴), 월(越) 등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중원 문화와 융합됨. 전국 시대 말기에는 대부분 화하(华夏)에 통합됨.&lt;br /&gt;
&lt;br /&gt;
진한(秦汉) 이후 동이 개념의 변화&lt;br /&gt;
&lt;br /&gt;
· 진한 시대 이후 '동이'의 개념이 크게 변화. 선진 시대의 산동-회수 유역 부족을 지칭하던 의미에서, 중국 동북 지역, 한반도, 일본 열도 등의 민족과 국가(예: 부여(夫余), 읍루(挹娄), 고구려(高句麗), 옥저(沃沮), 예(濊), 삼한(三韓), 왜(倭))를 포괄하는 의미로 확대됨&lt;br /&gt;
&lt;br /&gt;
·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 '사이(四夷)' 설의 영향으로 동이는 비중원(非中原)의 동방 이족(夷族)을 가리키는 말이 됨.&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lt;br /&gt;
&lt;br /&gt;
· 동이족은 새(특히 봉황)를 숭상하는 민족으로, 봉황을 조상으로 여기고 풍(风) 성을 사용하며, 봉황을 토템으로 숭배했습니다. 많은 부족 이름이 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lt;br /&gt;
· 동이족이 창조한 동이 문화는 중화 문명의 중요한源头 중 하나이며, 중국 초기 문명을孕育했습니다.&lt;br /&gt;
&lt;br /&gt;
하(夏), 상(商)과의 전쟁&lt;br /&gt;
&lt;br /&gt;
· 하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동이와 장기간에 걸쳐 격렬한 갈등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예: 유궁씨 후예(有穷氏后羿)의 &amp;quot;하 정권 대체&amp;quot; 사건).&lt;br /&gt;
· 상 왕조도 동이와 빈번히 전쟁을 벌였으며, 특히 주(纣) 왕 시기 대규모 동이 원정은 국력을 소모하는 결과를 가져와 주(周) 무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amp;quot;주가 동이를 정복하고 자신은 죽임을 당함(纣克东夷而殒其身)&amp;quot;).&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 서적 기록&lt;br /&gt;
&lt;br /&gt;
· 《산해경·해외동경(山海经·海外东经)》: 동방의 지리, 부족, 신화 등을 상상력豊富하게 기록.&lt;br /&gt;
&lt;br /&gt;
· 《상서·우공(尚书·禹贡)》: 우(禹)가 구주(九州)를 나눈 기록에 동이 지역(예: 우이(嵎夷), 래이(莱夷))가 언급됨&lt;br /&gt;
&lt;br /&gt;
· 《논어(论语)》,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传)》, 《국어(国语)》 등에도 동이 관련 기록이 등장.&lt;br /&gt;
&lt;br /&gt;
기타 참고 사항&lt;br /&gt;
&lt;br /&gt;
· '이(夷)' 자에 대한 해석: 본래 &amp;quot;활을 든 사람&amp;quot;을 형상화했다는 설(《설문해자(说文解字)》)이 있으나, 갑골문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의 형상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고대 산동어에서 '이(夷)'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과 발음이 비슷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lt;br /&gt;
· 진한 이후 '동이' 개념이 확대되면서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국가들도 그 범주에 포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대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서 비롯된 인식입니다.&lt;br /&gt;
· 동이는 고고학적으로 황하 문명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권(후리-북신-대문구-용산-악석 문화 계열)을 형성했으며, 이 문화는 후기 중화 문명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이족]](東夷族)=[[서이족]](徐夷族)=[[부여족]](扶餘族)&lt;br /&gt;
&lt;br /&gt;
이(夷)는, 어질어 산숨(生命)을 좋아하니 잘몬(萬物)이 땅에 밑뿌리 터 나는 것이요. 그것은 크니, 하늘이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큰 것이며, 그래서 사람이 본받은 땅, 땅이 본받은 하늘, 하늘이 본받은 길,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이다. &lt;br /&gt;
&lt;br /&gt;
이(夷)는 동이(東夷)다. 노자 늙은이가 ‘참알줄’(道德經)을 세상에 드러낸 때를 기원전 6세기쯤으로 보면, 당시 [[동이족]](東夷族)이 살던 땅과 [[고조선]]의 영토가 맞물린다. 동이족은 지금의 강소성, 산동성,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한반도에 흩어져 살았다. 특히 산동성과 하북성 일대는 오래전부터 하(夏)․은(殷)․주(周)의 땅이었다. 그들도 동이였다. 그들의 후예는 고구려로 이어진다. 놀랍게도 노자 늙은이는 산동성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그도 [[동이족]]의 후예?&lt;br /&gt;
&lt;br /&gt;
‘동이열전(東夷列傳)’: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驪)’: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 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방 2천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習俗)에 음식을 아낀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동이들이 서로 전하여 오기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많이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 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치듯 빨리 간다.&lt;br /&gt;
&lt;br /&gt;
또 후한(後漢) 시대의 허신(許愼, 58년 무렵~147년 무렵)이 편찬한 &amp;lt;설문해자(說文解字)&amp;gt;에 이(夷)는 “평야. 종대종궁. 동방지인야.(平也. 从大从弓. 東方之人也.)”로 적었다. 이때 평(平)은 ‘고름’(平平)보다는 ‘바로잡음’(平定)의 뜻에 가깝다. 풀면 “어지러움을 바로잡는다. 큼을 따르고 활을 따른다. 동쪽의 사람이다.” 그런 뜻이다. 바로 이어서 주(注)를 달았다. 주의 앞부분이다.&lt;br /&gt;
&lt;br /&gt;
“무릇 사람은 그가 사는 땅의 성질을 닮는다. 오직 동이만이 큼을 따랐으니 큰사람(大人)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이가 오래 살며,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다.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 큰 그림은 사람의 꼴을 본 땄다. 이(夷)의 옛 글씨는 대(大)와 같다. 즉 하(夏)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다.”(葢在坤地頗有順理之性. 惟東夷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 大象人形而夷篆從大. 則與夏不殊. 夏者，中國之人也.)&lt;br /&gt;
&lt;br /&gt;
여기서 중국은 황하 유역을 가리킬 뿐 나라이름이 아니다. “중국, 경사야(中國, 京師也)”라 했듯이 수도를 말하기도 하고, 또 중원을 차지한 나라를 뜻하기도 했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라는 뜻은 하나라가 중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 주(周)나라부터는 황하(黃河)에서 ‘하’, 낙양(洛陽)에서 ‘낙’을 딴 ‘하락’(河洛) 지역을 중원의 중심으로 보았다. 신해혁명 이후 1912년에 한, 만, 몽, 장, 회족의 다섯 민족을 하나로 묶어 ‘중화’(中華)라 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은 처음으로 나라이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사마천[司馬遷, BC.145년(혹은 BC.135년)~BC.87년(추정)]이 쓴 &amp;lt;사기(史記)&amp;gt;에 노자 늙은이를 “초(楚)나라 사람으로 주(周)나라에서 도서관장을 지냈다”고 적고 있으나, 초와 주의 영토는 동이족의 영토와도 겹치니 &amp;lt;설문해자&amp;gt;의 내용을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 밝힌 동이는 ‘참알줄’(道德經)의 사상과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노자 늙은이가 [[동이족]]이었거나, 아니라면 동이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게 확실하다.&lt;br /&gt;
&lt;br /&gt;
동이열전에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하였고, 설문해자주에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고 하였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설명에는 군자가 동이사람과 같고, 그는 바르고 떳떳하며, 온씨알(百姓)을 불쌍히 여겨 늘 고민하는 걸로 나온다. 노자 늙은이 25월에 “그러므로 길이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임금 또한 크다.”는 내용이 있다. 그로부터 사람이 본받은 땅이요, 땅이 본받은 하늘이요, 하늘이 본받은 길이요,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를 갈무리해 낸다. 말과 뜻과 사상이 같지 않은가!&lt;br /&gt;
&lt;br /&gt;
조금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꺼내 보자. 이번엔 꿍꿍이다. 이(夷)는 큰 활이니 그로부터 궁궁을을(弓弓乙乙)이 비롯한 게 아닐까? 이(夷)에서 궁궁을을이요, 궁궁을을에서 약(弱)이 아닐까? 노자 늙은이는 36월에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긴다”(柔弱勝剛强)고 했잖은가. 수운은 또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 “송송가가(松松家家) 알았으되 이재궁궁(利在弓弓) 어찌알꼬 천운이 둘렀으니 근심말고 돌아가서 윤회시운(輪廻時運)구경하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 했고, 소태산은 “궁궁은 무극(無極) 곧 일원(一圓)이 되고, 을을(乙乙)은 태극(太極)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것이니라.”고 했다.&lt;br /&gt;
&lt;br /&gt;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lt;br /&gt;
&lt;br /&gt;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lt;br /&gt;
&lt;br /&gt;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lt;br /&gt;
&lt;br /&gt;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lt;br /&gt;
&lt;br /&gt;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lt;br /&gt;
&lt;br /&gt;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amp;quot;(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amp;quot;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lt;br /&gt;
&lt;br /&gt;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lt;br /&gt;
&lt;br /&gt;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amp;quot;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lt;br /&gt;
&lt;br /&gt;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lt;br /&gt;
&lt;br /&gt;
[[서성현]](徐城縣)&lt;br /&gt;
&lt;br /&gt;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lt;br /&gt;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lt;br /&gt;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lt;br /&gt;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lt;br /&gt;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lt;br /&gt;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lt;br /&gt;
&lt;br /&gt;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lt;br /&gt;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lt;br /&gt;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lt;br /&gt;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lt;br /&gt;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lt;br /&gt;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lt;br /&gt;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lt;br /&gt;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lt;br /&gt;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lt;br /&gt;
生時正偃，故以爲名。&lt;br /&gt;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lt;br /&gt;
宮人聞之，更取養之。&lt;br /&gt;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lt;br /&gt;
及長，襲爲徐君。&lt;br /&gt;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lt;br /&gt;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lt;br /&gt;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변했다.&lt;br /&gt;
鵠蒼或名後蒼。」&lt;br /&gt;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서국]]의 쇠퇴와 멸망&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lt;br /&gt;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lt;br /&gt;
&lt;br /&gt;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lt;br /&gt;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lt;br /&gt;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lt;br /&gt;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lt;br /&gt;
&lt;br /&gt;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lt;br /&gt;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lt;br /&gt;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lt;br /&gt;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lt;br /&gt;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lt;br /&gt;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서국)|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lt;br /&gt;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서&lt;br /&gt;
&lt;br /&gt;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lt;br /&gt;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lt;br /&gt;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서국)|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lt;br /&gt;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진나라)|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lt;br /&gt;
&lt;br /&gt;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진나라)|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서복(진나라)|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진나라)|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진나라)|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市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B%8F%99%EC%9D%B4&amp;diff=145671</id>
		<title>동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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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44: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동이(东夷)&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동방 부족에 대한 칭호&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lt;br /&gt;
· 별칭: 이(夷)&lt;br /&gt;
&lt;br /&gt;
· 소속 지역: 현재 중국 산동성 중남부&lt;br /&gt;
&lt;br /&gt;
· 기원: 노중(鲁中) 태沂(泰沂) 산구&lt;br /&gt;
&lt;br /&gt;
· 의미: 고대 중원(中原) 지역 사람들이 동방 각 부족을 통칭하던 말&lt;br /&gt;
&lt;br /&gt;
· 족속: 서씨족&lt;br /&gt;
&lt;br /&gt;
핵심 정보&lt;br /&gt;
&lt;br /&gt;
동이는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8300년경의 후리(后李) 문화부터 시작하여 북신(北辛) 문화, 대문구(大汶口) 문화, 용산(龙山) 문화, 악석(岳石) 문화를 이어온 집단을 가리킵니다.중국 고대 동방에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한 부족군으로, 동방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夷)'인이라 하여 동이(东夷)라고 불렸습니다. 동이는 처음에 하북성 역수(易水) 및 연산(燕山) 일대에 분포했으나, 이후 인구가 번성하고 씨족 조직이 분열되면서 동이족은 인이(人夷), 조이(鸟夷), 욱이(郁夷) 세 가지 큰 갈래로 나뉘었습니다.&lt;br /&gt;
&lt;br /&gt;
고대에는 동이에 아홉 종류가 있다고 했으며, 《논어·자한(论语·子罕)》에는 &amp;quot;공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하셨다(子欲居九夷)&amp;quot;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석에는 &amp;quot;동방에 아홉 종류의 이(夷)가 있다: 현도(玄菟), 낙랑(乐浪), 고려(高骊), 만식(满饰), 부경(凫更), 색가(索家), 동토(东屠), 왜인(倭人), 천비(天鄙)&amp;quot;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동이는 일반적으로 남만(南蛮), 서융(西戎), 북적(北狄)과 함께 병렬되어 언급됩니다. 《논어·자한》에도 구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amp;quot;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amp;quot;.&lt;br /&gt;
&lt;br /&gt;
종류&lt;br /&gt;
&lt;br /&gt;
고대에는 동이에 아홉 종류가 있다고 했으며, 《논어·자한》: &amp;quot;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amp;quot;. 주석: &amp;quot;동방에 아홉 종류의 이(夷)가 있다: 첫째 현도(玄菟), 둘째 낙랑(乐浪), 셋째 고려(高骊), 넷째 만식(满饰), 다섯째 부경(凫更), 여섯째 색가(索家), 일곱째 동토(东屠), 여덟째 왜인(倭人), 아홉째 천비(天鄙).&amp;quot;&lt;br /&gt;
&lt;br /&gt;
《후한서·동이전(后汉书·东夷传)》에는 &amp;quot;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黄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风夷), 양이(阳夷)라고 한다&amp;quot;고 기록되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왕제(王制)》에는 &amp;quot;동방을 이(夷)라고 한다&amp;quot;고 했습니다. 이(夷)는 근본(柢)이라는 뜻으로, 인자하고 생명을 좋아하여 만물이 땅에서 근본처럼 나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천성이 유순하여 도(道)로 다스리기 쉽고, 군자나 불사의 나라가 있을 정도입니다.&lt;br /&gt;
&lt;br /&gt;
《논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传)》, 《전국책(战国策)》 등에도 구이(九夷)가 언급됩니다. 여기서 '구(九)'는 구체적인 숫자가 아니라 많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이아·석지(尔雅·释地)》에는 &amp;quot;구이(九夷), 팔적(八狄), 칠융(七戎), 육만(六蛮)&amp;quo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곽박(郭璞)의 《이아주(尔雅注)》에는 &amp;quot;구이는 동방에 있다(九夷在东)&amp;quot;라고 하여, 중국 동부의 이인(夷人)을 통칭합니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발전&lt;br /&gt;
&lt;br /&gt;
선진(先秦) 시대의 동이&lt;br /&gt;
&lt;br /&gt;
· 하(夏), 상(商) 시대: 하 왕조 초기부터 동이와의 복잡한 관계와 갈등이 시작됨. 상(商) 왕조도 동이와 빈번한 전쟁을 벌임.&lt;br /&gt;
· 서주(西周) 시대: 서주 초기에는 동이, 특히 산동 반도의 얀(奄), 박고(薄姑) 등이 강력한 적으로 부상. 주 왕실과의 전쟁 후 세력이 약화됨. 제(齐)와 노(鲁) 두 제후국이 동이 지역에 봉해져 다른 동화 정책을 펼침.&lt;br /&gt;
· 춘추전국 시대: 산동 반도의 동이 세력은 점차 제(齐), 노(鲁) 등에 흡수 통합됨. 회수(淮水) 유역의 동이(예: 서(徐), 회이(淮夷) 등)는 초(楚), 오(吴), 월(越) 등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중원 문화와 융합됨. 전국 시대 말기에는 대부분 화하(华夏)에 통합됨.&lt;br /&gt;
&lt;br /&gt;
진한(秦汉) 이후 동이 개념의 변화&lt;br /&gt;
&lt;br /&gt;
· 진한 시대 이후 '동이'의 개념이 크게 변화. 선진 시대의 산동-회수 유역 부족을 지칭하던 의미에서, 중국 동북 지역, 한반도, 일본 열도 등의 민족과 국가(예: 부여(夫余), 읍루(挹娄), 고구려(高句麗), 옥저(沃沮), 예(濊), 삼한(三韓), 왜(倭))를 포괄하는 의미로 확대됨&lt;br /&gt;
&lt;br /&gt;
·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 '사이(四夷)' 설의 영향으로 동이는 비중원(非中原)의 동방 이족(夷族)을 가리키는 말이 됨.&lt;br /&gt;
&lt;br /&gt;
&lt;br /&gt;
문화&lt;br /&gt;
&lt;br /&gt;
· 동이족은 새(특히 봉황)를 숭상하는 민족으로, 봉황을 조상으로 여기고 풍(风) 성을 사용하며, 봉황을 토템으로 숭배했습니다. 많은 부족 이름이 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lt;br /&gt;
· 동이족이 창조한 동이 문화는 중화 문명의 중요한源头 중 하나이며, 중국 초기 문명을孕育했습니다.&lt;br /&gt;
&lt;br /&gt;
하(夏), 상(商)과의 전쟁&lt;br /&gt;
&lt;br /&gt;
· 하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동이와 장기간에 걸쳐 격렬한 갈등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예: 유궁씨 후예(有穷氏后羿)의 &amp;quot;하 정권 대체&amp;quot; 사건).&lt;br /&gt;
· 상 왕조도 동이와 빈번히 전쟁을 벌였으며, 특히 주(纣) 왕 시기 대규모 동이 원정은 국력을 소모하는 결과를 가져와 주(周) 무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amp;quot;주가 동이를 정복하고 자신은 죽임을 당함(纣克东夷而殒其身)&amp;quot;).&lt;br /&gt;
&lt;br /&gt;
&lt;br /&gt;
관련 서적 기록&lt;br /&gt;
&lt;br /&gt;
· 《산해경·해외동경(山海经·海外东经)》: 동방의 지리, 부족, 신화 등을 상상력豊富하게 기록.&lt;br /&gt;
&lt;br /&gt;
· 《상서·우공(尚书·禹贡)》: 우(禹)가 구주(九州)를 나눈 기록에 동이 지역(예: 우이(嵎夷), 래이(莱夷))가 언급됨&lt;br /&gt;
&lt;br /&gt;
· 《논어(论语)》,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传)》, 《국어(国语)》 등에도 동이 관련 기록이 등장.&lt;br /&gt;
&lt;br /&gt;
기타 참고 사항&lt;br /&gt;
&lt;br /&gt;
· '이(夷)' 자에 대한 해석: 본래 &amp;quot;활을 든 사람&amp;quot;을 형상화했다는 설(《설문해자(说文解字)》)이 있으나, 갑골문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의 형상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고대 산동어에서 '이(夷)'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과 발음이 비슷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lt;br /&gt;
· 진한 이후 '동이' 개념이 확대되면서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국가들도 그 범주에 포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대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서 비롯된 인식입니다.&lt;br /&gt;
· 동이는 고고학적으로 황하 문명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권(후리-북신-대문구-용산-악석 문화 계열)을 형성했으며, 이 문화는 후기 중화 문명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이족]](東夷族)=[[서이족]](徐夷族)=[[부여족]](扶餘族)&lt;br /&gt;
&lt;br /&gt;
이(夷)는, 어질어 산숨(生命)을 좋아하니 잘몬(萬物)이 땅에 밑뿌리 터 나는 것이요. 그것은 크니, 하늘이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큰 것이며, 그래서 사람이 본받은 땅, 땅이 본받은 하늘, 하늘이 본받은 길,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이다. &lt;br /&gt;
&lt;br /&gt;
이(夷)는 동이(東夷)다. 노자 늙은이가 ‘참알줄’(道德經)을 세상에 드러낸 때를 기원전 6세기쯤으로 보면, 당시 [[동이족]](東夷族)이 살던 땅과 [[고조선]]의 영토가 맞물린다. 동이족은 지금의 강소성, 산동성,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한반도에 흩어져 살았다. 특히 산동성과 하북성 일대는 오래전부터 하(夏)․은(殷)․주(周)의 땅이었다. 그들도 동이였다. 그들의 후예는 고구려로 이어진다. 놀랍게도 노자 늙은이는 산동성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그도 [[동이족]]의 후예?&lt;br /&gt;
&lt;br /&gt;
‘동이열전(東夷列傳)’: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驪)’: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 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방 2천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習俗)에 음식을 아낀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동이들이 서로 전하여 오기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많이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 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치듯 빨리 간다.&lt;br /&gt;
&lt;br /&gt;
또 후한(後漢) 시대의 허신(許愼, 58년 무렵~147년 무렵)이 편찬한 &amp;lt;설문해자(說文解字)&amp;gt;에 이(夷)는 “평야. 종대종궁. 동방지인야.(平也. 从大从弓. 東方之人也.)”로 적었다. 이때 평(平)은 ‘고름’(平平)보다는 ‘바로잡음’(平定)의 뜻에 가깝다. 풀면 “어지러움을 바로잡는다. 큼을 따르고 활을 따른다. 동쪽의 사람이다.” 그런 뜻이다. 바로 이어서 주(注)를 달았다. 주의 앞부분이다.&lt;br /&gt;
&lt;br /&gt;
“무릇 사람은 그가 사는 땅의 성질을 닮는다. 오직 동이만이 큼을 따랐으니 큰사람(大人)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이가 오래 살며,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다.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 큰 그림은 사람의 꼴을 본 땄다. 이(夷)의 옛 글씨는 대(大)와 같다. 즉 하(夏)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다.”(葢在坤地頗有順理之性. 惟東夷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 大象人形而夷篆從大. 則與夏不殊. 夏者，中國之人也.)&lt;br /&gt;
&lt;br /&gt;
여기서 중국은 황하 유역을 가리킬 뿐 나라이름이 아니다. “중국, 경사야(中國, 京師也)”라 했듯이 수도를 말하기도 하고, 또 중원을 차지한 나라를 뜻하기도 했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라는 뜻은 하나라가 중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 주(周)나라부터는 황하(黃河)에서 ‘하’, 낙양(洛陽)에서 ‘낙’을 딴 ‘하락’(河洛) 지역을 중원의 중심으로 보았다. 신해혁명 이후 1912년에 한, 만, 몽, 장, 회족의 다섯 민족을 하나로 묶어 ‘중화’(中華)라 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은 처음으로 나라이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사마천[司馬遷, BC.145년(혹은 BC.135년)~BC.87년(추정)]이 쓴 &amp;lt;사기(史記)&amp;gt;에 노자 늙은이를 “초(楚)나라 사람으로 주(周)나라에서 도서관장을 지냈다”고 적고 있으나, 초와 주의 영토는 동이족의 영토와도 겹치니 &amp;lt;설문해자&amp;gt;의 내용을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 밝힌 동이는 ‘참알줄’(道德經)의 사상과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노자 늙은이가 [[동이족]]이었거나, 아니라면 동이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게 확실하다.&lt;br /&gt;
&lt;br /&gt;
동이열전에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하였고, 설문해자주에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고 하였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설명에는 군자가 동이사람과 같고, 그는 바르고 떳떳하며, 온씨알(百姓)을 불쌍히 여겨 늘 고민하는 걸로 나온다. 노자 늙은이 25월에 “그러므로 길이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임금 또한 크다.”는 내용이 있다. 그로부터 사람이 본받은 땅이요, 땅이 본받은 하늘이요, 하늘이 본받은 길이요,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를 갈무리해 낸다. 말과 뜻과 사상이 같지 않은가!&lt;br /&gt;
&lt;br /&gt;
조금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꺼내 보자. 이번엔 꿍꿍이다. 이(夷)는 큰 활이니 그로부터 궁궁을을(弓弓乙乙)이 비롯한 게 아닐까? 이(夷)에서 궁궁을을이요, 궁궁을을에서 약(弱)이 아닐까? 노자 늙은이는 36월에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긴다”(柔弱勝剛强)고 했잖은가. 수운은 또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 “송송가가(松松家家) 알았으되 이재궁궁(利在弓弓) 어찌알꼬 천운이 둘렀으니 근심말고 돌아가서 윤회시운(輪廻時運)구경하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 했고, 소태산은 “궁궁은 무극(無極) 곧 일원(一圓)이 되고, 을을(乙乙)은 태극(太極)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것이니라.”고 했다.&lt;br /&gt;
&lt;br /&gt;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lt;br /&gt;
&lt;br /&gt;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lt;br /&gt;
&lt;br /&gt;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lt;br /&gt;
&lt;br /&gt;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lt;br /&gt;
&lt;br /&gt;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lt;br /&gt;
&lt;br /&gt;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amp;quot;(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amp;quot;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lt;br /&gt;
&lt;br /&gt;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lt;br /&gt;
&lt;br /&gt;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amp;quot;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lt;br /&gt;
&lt;br /&gt;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lt;br /&gt;
&lt;br /&gt;
[[서성현]](徐城縣)&lt;br /&gt;
&lt;br /&gt;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lt;br /&gt;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lt;br /&gt;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lt;br /&gt;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lt;br /&gt;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lt;br /&gt;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lt;br /&gt;
&lt;br /&gt;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lt;br /&gt;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lt;br /&gt;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lt;br /&gt;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lt;br /&gt;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lt;br /&gt;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lt;br /&gt;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lt;br /&gt;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lt;br /&gt;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lt;br /&gt;
生時正偃，故以爲名。&lt;br /&gt;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lt;br /&gt;
宮人聞之，更取養之。&lt;br /&gt;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lt;br /&gt;
及長，襲爲徐君。&lt;br /&gt;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lt;br /&gt;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lt;br /&gt;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변했다.&lt;br /&gt;
鵠蒼或名後蒼。」&lt;br /&gt;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서국]]의 쇠퇴와 멸망&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lt;br /&gt;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lt;br /&gt;
&lt;br /&gt;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lt;br /&gt;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lt;br /&gt;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lt;br /&gt;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lt;br /&gt;
&lt;br /&gt;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lt;br /&gt;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lt;br /&gt;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lt;br /&gt;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lt;br /&gt;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lt;br /&gt;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서국)|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lt;br /&gt;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서&lt;br /&gt;
&lt;br /&gt;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lt;br /&gt;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lt;br /&gt;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서국)|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lt;br /&gt;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진나라)|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lt;br /&gt;
&lt;br /&gt;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진나라)|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서복(진나라)|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진나라)|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진나라)|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市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B%8F%99%EC%9D%B4&amp;diff=145670</id>
		<title>동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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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41: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새 문서: 동이족(東夷族)=서이족(徐夷族)=부여족(扶餘族)  이(夷)는, 어질어 산숨(生命)을 좋아하니 잘몬(萬物)이 땅에 밑뿌리 터 나는 것이...&lt;/p&gt;
&lt;hr /&gt;
&lt;div&gt;[[동이족]](東夷族)=[[서이족]](徐夷族)=[[부여족]](扶餘族)&lt;br /&gt;
&lt;br /&gt;
이(夷)는, 어질어 산숨(生命)을 좋아하니 잘몬(萬物)이 땅에 밑뿌리 터 나는 것이요. 그것은 크니, 하늘이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큰 것이며, 그래서 사람이 본받은 땅, 땅이 본받은 하늘, 하늘이 본받은 길,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이다. &lt;br /&gt;
&lt;br /&gt;
이(夷)는 동이(東夷)다. 노자 늙은이가 ‘참알줄’(道德經)을 세상에 드러낸 때를 기원전 6세기쯤으로 보면, 당시 [[동이족]](東夷族)이 살던 땅과 [[고조선]]의 영토가 맞물린다. 동이족은 지금의 강소성, 산동성,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한반도에 흩어져 살았다. 특히 산동성과 하북성 일대는 오래전부터 하(夏)․은(殷)․주(周)의 땅이었다. 그들도 동이였다. 그들의 후예는 고구려로 이어진다. 놀랍게도 노자 늙은이는 산동성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그도 [[동이족]]의 후예?&lt;br /&gt;
&lt;br /&gt;
‘동이열전(東夷列傳)’: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驪)’: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 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방 2천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習俗)에 음식을 아낀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동이들이 서로 전하여 오기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많이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 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치듯 빨리 간다.&lt;br /&gt;
&lt;br /&gt;
또 후한(後漢) 시대의 허신(許愼, 58년 무렵~147년 무렵)이 편찬한 &amp;lt;설문해자(說文解字)&amp;gt;에 이(夷)는 “평야. 종대종궁. 동방지인야.(平也. 从大从弓. 東方之人也.)”로 적었다. 이때 평(平)은 ‘고름’(平平)보다는 ‘바로잡음’(平定)의 뜻에 가깝다. 풀면 “어지러움을 바로잡는다. 큼을 따르고 활을 따른다. 동쪽의 사람이다.” 그런 뜻이다. 바로 이어서 주(注)를 달았다. 주의 앞부분이다.&lt;br /&gt;
&lt;br /&gt;
“무릇 사람은 그가 사는 땅의 성질을 닮는다. 오직 동이만이 큼을 따랐으니 큰사람(大人)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이가 오래 살며,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다.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 큰 그림은 사람의 꼴을 본 땄다. 이(夷)의 옛 글씨는 대(大)와 같다. 즉 하(夏)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다.”(葢在坤地頗有順理之性. 惟東夷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 大象人形而夷篆從大. 則與夏不殊. 夏者，中國之人也.)&lt;br /&gt;
&lt;br /&gt;
여기서 중국은 황하 유역을 가리킬 뿐 나라이름이 아니다. “중국, 경사야(中國, 京師也)”라 했듯이 수도를 말하기도 하고, 또 중원을 차지한 나라를 뜻하기도 했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라는 뜻은 하나라가 중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 주(周)나라부터는 황하(黃河)에서 ‘하’, 낙양(洛陽)에서 ‘낙’을 딴 ‘하락’(河洛) 지역을 중원의 중심으로 보았다. 신해혁명 이후 1912년에 한, 만, 몽, 장, 회족의 다섯 민족을 하나로 묶어 ‘중화’(中華)라 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은 처음으로 나라이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사마천[司馬遷, BC.145년(혹은 BC.135년)~BC.87년(추정)]이 쓴 &amp;lt;사기(史記)&amp;gt;에 노자 늙은이를 “초(楚)나라 사람으로 주(周)나라에서 도서관장을 지냈다”고 적고 있으나, 초와 주의 영토는 동이족의 영토와도 겹치니 &amp;lt;설문해자&amp;gt;의 내용을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 밝힌 동이는 ‘참알줄’(道德經)의 사상과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노자 늙은이가 [[동이족]]이었거나, 아니라면 동이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게 확실하다.&lt;br /&gt;
&lt;br /&gt;
동이열전에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하였고, 설문해자주에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고 하였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설명에는 군자가 동이사람과 같고, 그는 바르고 떳떳하며, 온씨알(百姓)을 불쌍히 여겨 늘 고민하는 걸로 나온다. 노자 늙은이 25월에 “그러므로 길이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임금 또한 크다.”는 내용이 있다. 그로부터 사람이 본받은 땅이요, 땅이 본받은 하늘이요, 하늘이 본받은 길이요,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를 갈무리해 낸다. 말과 뜻과 사상이 같지 않은가!&lt;br /&gt;
&lt;br /&gt;
조금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꺼내 보자. 이번엔 꿍꿍이다. 이(夷)는 큰 활이니 그로부터 궁궁을을(弓弓乙乙)이 비롯한 게 아닐까? 이(夷)에서 궁궁을을이요, 궁궁을을에서 약(弱)이 아닐까? 노자 늙은이는 36월에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긴다”(柔弱勝剛强)고 했잖은가. 수운은 또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 “송송가가(松松家家) 알았으되 이재궁궁(利在弓弓) 어찌알꼬 천운이 둘렀으니 근심말고 돌아가서 윤회시운(輪廻時運)구경하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 했고, 소태산은 “궁궁은 무극(無極) 곧 일원(一圓)이 되고, 을을(乙乙)은 태극(太極)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것이니라.”고 했다.&lt;br /&gt;
&lt;br /&gt;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lt;br /&gt;
&lt;br /&gt;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lt;br /&gt;
&lt;br /&gt;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lt;br /&gt;
&lt;br /&gt;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lt;br /&gt;
&lt;br /&gt;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lt;br /&gt;
&lt;br /&gt;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amp;quot;(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amp;quot;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lt;br /&gt;
&lt;br /&gt;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lt;br /&gt;
&lt;br /&gt;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amp;quot;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lt;br /&gt;
&lt;br /&gt;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lt;br /&gt;
&lt;br /&gt;
[[서성현]](徐城縣)&lt;br /&gt;
&lt;br /&gt;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lt;br /&gt;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lt;br /&gt;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lt;br /&gt;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lt;br /&gt;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lt;br /&gt;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lt;br /&gt;
&lt;br /&gt;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lt;br /&gt;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lt;br /&gt;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lt;br /&gt;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lt;br /&gt;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lt;br /&gt;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lt;br /&gt;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lt;br /&gt;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lt;br /&gt;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lt;br /&gt;
生時正偃，故以爲名。&lt;br /&gt;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lt;br /&gt;
宮人聞之，更取養之。&lt;br /&gt;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lt;br /&gt;
及長，襲爲徐君。&lt;br /&gt;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lt;br /&gt;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lt;br /&gt;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변했다.&lt;br /&gt;
鵠蒼或名後蒼。」&lt;br /&gt;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서국]]의 쇠퇴와 멸망&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lt;br /&gt;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lt;br /&gt;
&lt;br /&gt;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lt;br /&gt;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lt;br /&gt;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lt;br /&gt;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lt;br /&gt;
&lt;br /&gt;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lt;br /&gt;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lt;br /&gt;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lt;br /&gt;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lt;br /&gt;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lt;br /&gt;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서국)|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lt;br /&gt;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서&lt;br /&gt;
&lt;br /&gt;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lt;br /&gt;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lt;br /&gt;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서국)|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lt;br /&gt;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진나라)|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lt;br /&gt;
&lt;br /&gt;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진나라)|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서복(진나라)|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진나라)|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진나라)|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市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A%B3%A0%EC%9A%94&amp;diff=145669</id>
		<title>고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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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40: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고요 (皋陶)&lt;br /&gt;
&lt;br /&gt;
상고 시대 동이 부족의 수령&lt;br /&gt;
&lt;br /&gt;
고요(皋陶, gāo yáo, 생몰년 미상)는 또 다른 이름으로 구도(咎陶), 고도(皐陶), 영유(嬴繇), 고유(皐繇), 구유(咎繇) 등으로 불리며, 언성(偃姓, 일설에는 영성嬴姓)에, 자는 정견(庭堅)입니다. 고요는 상고 시대 중요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이자 동이 부족의 수령으로, 요(堯), 순(舜), 우(禹)와 함께 &amp;quot;상고四圣&amp;quot;으로 불립니다. 고요는 요, 순, 우 삼대를 걸쳐 활동했으며, 특히 요 임금을 섬긴 기간이 가장 길었습니다. 그는 사법관(士)을 역임하며 오형(五刑)과 오교(五教)를推行하고,《옥전》(獄典)을 제정했습니다. 또한 오례(五禮)를 정하고, 구덕(九德)을 세우며, 구족(九族)을 친히 하여 &amp;quot;법치&amp;quot;(法治)와 &amp;quot;덕정&amp;quot;(德政)의 결합을 강조했습니다.&lt;br /&gt;
&lt;br /&gt;
· 외국어 표기: Gao Yao&lt;br /&gt;
&lt;br /&gt;
· 국적: 고대 중국&lt;br /&gt;
&lt;br /&gt;
· 민족: 서이족&lt;br /&gt;
&lt;br /&gt;
· 사망 연도: 기원전 2113년&lt;br /&gt;
&lt;br /&gt;
· 출생지: 산서성 (洪洞县) 또는 안휘성 (六安) 설 존재&lt;br /&gt;
&lt;br /&gt;
· 묘소: 고요묘 (皋陶墓, 현재 안휘성 육안시)&lt;br /&gt;
&lt;br /&gt;
· 직업: 사상가, 교육가, 정치가&lt;br /&gt;
&lt;br /&gt;
&lt;br /&gt;
고요는 요, 순, 우와 함께 &amp;quot;상고四圣&amp;quot;으로 불립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산서성 홍동현(洪洞縣)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현재의 안휘성 육안(六安) 지역에서 태어났다고도 합니다.《사해》(辭海)에 따르면, 고요는 전욱제(颛顼帝)의 일곱 번째 아들이며, 우(禹)의 아버지 곤(鯤)과는 형제 관계입니다. 따라서 우는 전욱제의 손자이자 고요의 조카가 됩니다.&lt;br /&gt;
&lt;br /&gt;
고요는 요임금 시대부터 등용되었으나 구체적인 직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순임금이 즉위한 후 내우외환에 직면하자, 고요를 형옥을掌管하는 사법관(士)으로 임명했습니다. 재임期间 그는 형벌을 공정하게 적용하고 시비를 명확히 가렸습니다. 순제 3년에는 명을 받아 형법을 제정하고 &amp;quot;오형&amp;quot;(五刑)과 &amp;quot;오교&amp;quot;(五教)를推行했습니다.이후 《옥전》(獄典)을 제정하고, 독각수 해태(獬豸)를 이용해 옥사를 처리하는 방법을 도입하며 &amp;quot;법치&amp;quot;와 &amp;quot;덕정&amp;quot;의 결합을提倡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가 조화롭고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고 합니다.&lt;br /&gt;
&lt;br /&gt;
고요는 요, 순, 우 삼대를 걸쳐 공로가 높고 덕이 두터웠습니다. 순임금이 우에게 양위하려 하자, 우는 자신의 덕이 부족하다며 고요를 천거했습니다. 고요는 형법을掌管하는 관직에 기용된 후, 우를 보좌하여 지도부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우가 즉위한 후에는 고요를 자신의 후계자로 추천했으나, 고요는 과로로 병들어 세상을 떠나 결국 즉위하지 못했습니다. 고요가 사망한 후, 우는 그의 후예들을 영(英), 육(六) 일대 (현재의 안휘성 육안시)에 봉했으며, 고요를 육안국(蓼國)과 언국(偃國)의 시조로 추존했습니다.&lt;br /&gt;
&lt;br /&gt;
주요 업적&lt;br /&gt;
&lt;br /&gt;
1. 법치&lt;br /&gt;
&lt;br /&gt;
· 오형(五刑) 창제: 고요는 &amp;quot;天讨有罪，五刑五用哉&amp;quot;라는 관점을 제시하며, 관습법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죄를 범한 자를 징계하기 위해 &amp;quot;오형&amp;quot;을 제정했습니다. 그가 제정한 법은 매우 논리적이었으며 (예: &amp;quot;五典五惇&amp;quot;, &amp;quot;五刑五用&amp;quot;, &amp;quot;五刑有服、五服三就、五流有度、五度三居&amp;quot; 등), 간결명료했습니다 (예: &amp;quot;昏、墨、賊，殺&amp;quot;). 원시 사회 후기 부족 내부에는 이미 관습법이 보편화되어 있었는데, 고요가 이를 바탕으로 &amp;quot;오형&amp;quot;을 통합한 것은 중국 역사상 형법의 시작으로, 고요는 이로 인해 '사법의 조상'으로 존경받습니다.&lt;br /&gt;
· &amp;quot;명형비교&amp;quot;(明刑弼教): 고요 법치 사상의 덕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생각은 《대우모》(大禹謨)의 &amp;quot;明于五刑，以弼五教&amp;quot; (五教: 부의父義, 모자母慈, 우형友兄, 공제恭弟, 효자孝子) 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를 &amp;quot;명형비교&amp;quot;라고 합니다. 순제는 고요를 칭찬하며 그가 오형의 사용을 통해 백성의 교화를 보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요는 오형이 보조적 위치에 있어야 하며, 과격한 행동을 하거나 죄를 범한 자에게는 먼저 이유를 깨닫게 하고, 교화를听从하지 않을 때 비로소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요는 형벌로 교화를 돕고,人民으로 하여금 위엄을 두려워하여 범죄를 멀리하게 하며 선(善)으로 이끌고자 했습니다.&lt;br /&gt;
· 《옥전》(獄典): 고요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엄밀하게 검증된 법률 조문을 《옥전》으로归纳하여 나무 껍질에 새겨 우임금에게 제출해 심람을 받았습니다. 우는 이를 매우 훌륭하게 여겨 고요로 하여금 시행하게 했습니다. 《옥전》은 화하(华夏) 고대 최초의 법전으로被誉为됩니다.&lt;br /&gt;
· 해태(獬豸)로 옥사 판단: 고요는 다음과 같은 재판 방법을 발명했습니다: 그는大堂에 독각수 해태 한 마리를 모시고, 만약 누구에게나 죄가 있음이 발견되면 해태가 뿔로 그 사람을 받아 매우 영험했다고 합니다. 《논형·시응편》(論衡·是應篇)에서는 해태를 '뿔 하나 달린 양'(一角之羊)이라고 칭했습니다.&lt;br /&gt;
&lt;br /&gt;
2. 문화&lt;br /&gt;
&lt;br /&gt;
· 오교(五教) 흥기: 오교는 &amp;quot;父子有亲，君臣有义，夫妇有别，长幼有序，朋友有信&amp;quot;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고, 군신간에는 의리가 있으며, 부부(남녀)간에는 구별이 있고, 장유간에는 차례가 있으며,朋友간에는 신의가 있다)입니다. 고요가 살았던 시대는 원시 사회에서 문명 사회로 전환하는 과도기였으며, 당시 각 부족과 지역 간 풍속이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이 다섯 가지 사회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문명 사회로 진입하는 데有利했습니다.&lt;br /&gt;
· 오례(五禮) 제정: 오례는 &amp;quot;吉、凶、宾、军、嘉&amp;quot;입니다. &amp;quot;吉&amp;quot;은 신祗와 조상을 제사하는 예식, &amp;quot;凶&amp;quot;은 죽은 자를 매장하고 추모하는 상장례, &amp;quot;军&amp;quot;은 고대 대규모 정벌 활동을举行하기前에 众人을 모아 군대를 이루는 예식, &amp;quot;嘉&amp;quot;는 성년이 된 때의 관례(冠礼), 계례(笄礼)以及 혼인 예식, 음식 예식 등을 포함합니다.&lt;br /&gt;
· 구덕(九德) 수립: 《사기·하본기》(史記•夏本紀)에는 고요가 말하기를 &amp;quot;亦行有九德，亦言其有德。始事事，宽而栗，柔而立，愿而共，治而敬，扰而毅，直而温，简而廉，刚而实，强而义，章其有常，吉哉&amp;quot;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요가 제안한 구덕에는品德, 재간, 능력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공직자를 선발하고 고찰하기 위해 제정한 아홉 가지 기준이었습니다. 이를 다시 &amp;quot;三德&amp;quot;, &amp;quot;六德&amp;quot;, &amp;quot;九德&amp;quot;으로 나누어 관직을 구분했으며, 이는 중국 역사상 공직자를 고찰하고 선발한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lt;br /&gt;
· 구족(九族) 친화: &amp;quot;九族&amp;quot;은 하나의 부족 연맹을 핵심으로 한 친속 부족들을 가리킵니다. 원시 사회 말기의 부족 연맹은 조직적 기강이 없었는데, &amp;quot;돈서구족&amp;quot;(敦序九族)은 각 친속 부족들을 단단히 단결시켜 강한 응집력을 발생시켜 부족 연맹의 조화와 통일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amp;quot;돈서구족&amp;quot;은 당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전략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3. 덕정(德政)&lt;br /&gt;
&lt;br /&gt;
고요는 덕정을 주장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amp;quot;신기신수&amp;quot;(慎其身修) , 즉 덕정을 실시하려면 시정자 자신이 반드시 덕행과 수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amp;quot;구덕&amp;quot;을 제시했습니다. 둘째, &amp;quot;재지인&amp;quot;(在知人), 즉 국군은 신하를 이해하고 현능한 이를 선발해야 합니다. 셋째, &amp;quot;재안민&amp;quot;(在安民), 즉 관리된百姓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실질적인 일을 해야 하며, 민심이 안정되어야 국가가 안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 평가&lt;br /&gt;
&lt;br /&gt;
· 고요는 상고四圣이자 '옥의 신'(狱神)으로被誉为되며, 중국 노예제 형법의奠基人이자 사학계가 공인하는 &amp;quot;사법의鼻祖&amp;quot;입니다.&lt;br /&gt;
· 우(禹): &amp;quot;고요가 몸소 실천하여 덕을 사회에 두루 베풀자, 백성들이 덕 있는 행실을 감격스럽게 여기고, 고요는人民의 지지를 받았다.&amp;quot;&lt;br /&gt;
· 《맹자·등문공장구상》(孟子·滕文公章句上): &amp;quot;요는 순과 같은 이를 얻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았고, 순은 우, 고요와 같은 이를 얻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았다.&amp;quot;&lt;br /&gt;
· 《논형·강서편》(論衡·講瑞篇): &amp;quot;五帝, 三王, 고요, 공자는 사람 중의 성인(圣)이다.&amp;quot;&lt;br /&gt;
· 명대 육안 주지사 왕원형(王元衡): &amp;quot;고요의 공훈은 우임금에 못지 않다.&amp;quot;&lt;br /&gt;
&lt;br /&gt;
&lt;br /&gt;
사적 기록&lt;br /&gt;
&lt;br /&gt;
· 《상서·우서·요전》(尚書·虞書·堯典) &lt;br /&gt;
· 《상서·우서·순전》(尚書·虞書·舜典) &lt;br /&gt;
· 《상서·우서·대우모》(尚書·虞書·大禹謨) &lt;br /&gt;
· 《상서·우서·고요모》(尚書·虞書·皋陶謨) &lt;br /&gt;
· 《사기·오제본기》(史記·五帝本紀) &lt;br /&gt;
· 《사기·하본기》(史記·夏本紀) &lt;br /&gt;
· 《회남자·주술훈》(淮南子·主術訓) &lt;br /&gt;
· 《회남자·수무》(淮南子·修務) &lt;br /&gt;
· 《논형·골상편》(論衡•骨相篇) &lt;br /&gt;
· 《논형·강서편》(論衡·講瑞篇) &lt;br /&gt;
· 《논형·시응편》(論衡•是應篇) &lt;br /&gt;
· 《순자·비상》(荀子•非相) &lt;br /&gt;
&lt;br /&gt;
&lt;br /&gt;
후세의 기념&lt;br /&gt;
&lt;br /&gt;
고요묘(皋陶墓)는 현재의 안휘성 육안시 경제기술개발구 완서대도(皖西大道) 북측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요묘는 원형 봉토분(土冢)으로 둘레 97미터, 높이 6.2미터이며, 봉분頂上 평면 직경 4미터입니다. 위에는 황련나무 한 그루가 있어 마치 화관(华盖)과 같으며, 봉분 앞에는 청 동치 8년(1869년) 안휘 포정사(布政使) 오곤수(吳坤修)가 직접 쓴 &amp;quot;고고요묘&amp;quot;(古皋陶墓) 비석 한 개가 있습니다. 비석 높이는 1.82미터, 너비는 0.92미터입니다. 1989년 고요묘는 성급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후손&lt;br /&gt;
&lt;br /&gt;
당(唐) 임보(林宝)의 《원화성찬》(元和姓纂)에 따르면: &amp;quot;제전욱고양지예. 전욱생대업. 대업생여신, 여신생구유(즉 고요), 요리관, 자손인성리씨운운. 예손리징득죄어주. 기자이정도난이후지墟, 식목자득전, 인변성리씨. 이정십일대노군, 명이, 자백양, 거고현뇌향곡인리. 증손담, 생이자: 숭, 기. 숭자손거롱서, 기자손거조군. 숭오대손중상, 생백고. 백고생상. 상생이광야. 광이후생당고조이연.&amp;quot; 따라서 당 현종은 고요를 &amp;quot;덕명황제&amp;quot;(德明皇帝)로 추존했습니다. (즉, 고요는 당 왕실 이씨(李氏)의 원조로 여겨짐)&lt;br /&gt;
&lt;br /&gt;
관련 논쟁&lt;br /&gt;
&lt;br /&gt;
1. 고향&lt;br /&gt;
&lt;br /&gt;
고요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현재의 안휘성 육안 지역이라는 설과 산서성 홍동현(洪洞縣)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사기·하본기》에 &amp;quot;제우립이거고요천지, 차수정焉, 이고요졸. 봉고요지후于英, 六&amp;quot;이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고요가 사망한 후 그의 후예를 영(英), 육(六)에 봉했다고 합니다.이로 인해 고요는 고대 육안국의 시조가 되었으며, 안휘성 육안(고성)은 현재 고요의 고향으로被称为됩니다.&lt;br /&gt;
&lt;br /&gt;
민국 《홍동현지》(洪洞縣志)에는 &amp;quot;고요고리재현남십오리고요촌… 고요지후시봉료六不应先葬于其地也&amp;quot;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지에 따르면, 홍동의 사사촌(士師村)은 또 다른 이름으로 고요촌이며, 여기에서는 고요의 후인이 요(蓼), 육(六)에 봉해졌지만 고요 자신은 그곳에 묻히지 않았다고 봅니다. 또한, 현지에는 고요묘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amp;quot;우사고요묘재현남십삼리, 고요촌동남, 총고5척, 주위10보, 비고1장, 문박락불가독, 석기尚存, 사주유垣今圮.&amp;quot;&lt;br /&gt;
&lt;br /&gt;
2. 대업(大业)과 고요&lt;br /&gt;
&lt;br /&gt;
한대(漢代) 이후 일부 사서 작품 (예: 유향의 《열녀전》, 장수절의 《사기정의》, 정현의 《시보》, 고유의 《여씨춘추·당염》 주, 당대 공영달의 《상서정의·순전소》 등)에서 대업(大業)과 고요를 동일인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백익(伯益)이 고요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고요와 백익이 활동한 시대, 거주지 및 그 후예의 분포 상황으로 볼 때 두 사람은 부자 관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대업과 고요는 동일인이 아닙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전승에 따르면 황제(黃帝) 헌원씨의 6세손으로 소호 금천씨, 또는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우임금과 같이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행하였고&lt;br /&gt;
그와함께 여러 공을 세웠으며《사기》에서는 우임금에게 천거를 받아 정사를 돌보았으며&lt;br /&gt;
우의 3년상이 끝나자 우의 아들 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기산(基山)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하고, 《죽서기년》에서는 우가 사망한 후 계의 자리를 탐내다 계에 의해 처단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A%B3%A0%EC%9A%94&amp;diff=145668</id>
		<title>고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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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36: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고요 (皋陶)&lt;br /&gt;
&lt;br /&gt;
상고 시대 동이 부족의 수령&lt;br /&gt;
&lt;br /&gt;
고요(皋陶, gāo yáo, 생몰년 미상)는 또 다른 이름으로 구도(咎陶), 고도(皐陶), 영유(嬴繇), 고유(皐繇), 구유(咎繇) 등으로 불리며, 언성(偃姓, 일설에는 영성嬴姓)에, 자는 정견(庭堅)입니다. 고요는 상고 시대 중요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이자 동이 부족의 수령으로, 요(堯), 순(舜), 우(禹)와 함께 &amp;quot;상고四圣&amp;quot;으로 불립니다. 고요는 요, 순, 우 삼대를 걸쳐 활동했으며, 특히 요 임금을 섬긴 기간이 가장 길었습니다. 그는 사법관(士)을 역임하며 오형(五刑)과 오교(五教)를推行하고,《옥전》(獄典)을 제정했습니다. 또한 오례(五禮)를 정하고, 구덕(九德)을 세우며, 구족(九族)을 친히 하여 &amp;quot;법치&amp;quot;(法治)와 &amp;quot;덕정&amp;quot;(德政)의 결합을 강조했습니다.&lt;br /&gt;
&lt;br /&gt;
· 외국어 표기: Gao Yao&lt;br /&gt;
&lt;br /&gt;
· 국적: 고대 중국&lt;br /&gt;
&lt;br /&gt;
· 민족: 한족&lt;br /&gt;
&lt;br /&gt;
· 사망 연도: 기원전 2113년&lt;br /&gt;
&lt;br /&gt;
· 출생지: 산서성 (洪洞县) 또는 안휘성 (六安) 설 존재&lt;br /&gt;
&lt;br /&gt;
· 묘소: 고요묘 (皋陶墓, 현재 안휘성 육안시)&lt;br /&gt;
&lt;br /&gt;
· 직업: 사상가, 교육가, 정치가&lt;br /&gt;
&lt;br /&gt;
&lt;br /&gt;
고요는 요, 순, 우와 함께 &amp;quot;상고四圣&amp;quot;으로 불립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산서성 홍동현(洪洞縣)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현재의 안휘성 육안(六安) 지역에서 태어났다고도 합니다.《사해》(辭海)에 따르면, 고요는 전욱제(颛顼帝)의 일곱 번째 아들이며, 우(禹)의 아버지 곤(鯤)과는 형제 관계입니다. 따라서 우는 전욱제의 손자이자 고요의 조카가 됩니다.&lt;br /&gt;
&lt;br /&gt;
고요는 요임금 시대부터 등용되었으나 구체적인 직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순임금이 즉위한 후 내우외환에 직면하자, 고요를 형옥을掌管하는 사법관(士)으로 임명했습니다. 재임期间 그는 형벌을 공정하게 적용하고 시비를 명확히 가렸습니다. 순제 3년에는 명을 받아 형법을 제정하고 &amp;quot;오형&amp;quot;(五刑)과 &amp;quot;오교&amp;quot;(五教)를推行했습니다.이후 《옥전》(獄典)을 제정하고, 독각수 해태(獬豸)를 이용해 옥사를 처리하는 방법을 도입하며 &amp;quot;법치&amp;quot;와 &amp;quot;덕정&amp;quot;의 결합을提倡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가 조화롭고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고 합니다.&lt;br /&gt;
&lt;br /&gt;
고요는 요, 순, 우 삼대를 걸쳐 공로가 높고 덕이 두터웠습니다. 순임금이 우에게 양위하려 하자, 우는 자신의 덕이 부족하다며 고요를 천거했습니다. 고요는 형법을掌管하는 관직에 기용된 후, 우를 보좌하여 지도부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우가 즉위한 후에는 고요를 자신의 후계자로 추천했으나, 고요는 과로로 병들어 세상을 떠나 결국 즉위하지 못했습니다. 고요가 사망한 후, 우는 그의 후예들을 영(英), 육(六) 일대 (현재의 안휘성 육안시)에 봉했으며, 고요를 육안국(蓼國)과 언국(偃國)의 시조로 추존했습니다.&lt;br /&gt;
&lt;br /&gt;
주요 업적&lt;br /&gt;
&lt;br /&gt;
1. 법치&lt;br /&gt;
&lt;br /&gt;
· 오형(五刑) 창제: 고요는 &amp;quot;天讨有罪，五刑五用哉&amp;quot;라는 관점을 제시하며, 관습법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죄를 범한 자를 징계하기 위해 &amp;quot;오형&amp;quot;을 제정했습니다. 그가 제정한 법은 매우 논리적이었으며 (예: &amp;quot;五典五惇&amp;quot;, &amp;quot;五刑五用&amp;quot;, &amp;quot;五刑有服、五服三就、五流有度、五度三居&amp;quot; 등), 간결명료했습니다 (예: &amp;quot;昏、墨、賊，殺&amp;quot;). 원시 사회 후기 부족 내부에는 이미 관습법이 보편화되어 있었는데, 고요가 이를 바탕으로 &amp;quot;오형&amp;quot;을 통합한 것은 중국 역사상 형법의 시작으로, 고요는 이로 인해 '사법의 조상'으로 존경받습니다.&lt;br /&gt;
· &amp;quot;명형비교&amp;quot;(明刑弼教): 고요 법치 사상의 덕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생각은 《대우모》(大禹謨)의 &amp;quot;明于五刑，以弼五教&amp;quot; (五教: 부의父義, 모자母慈, 우형友兄, 공제恭弟, 효자孝子) 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를 &amp;quot;명형비교&amp;quot;라고 합니다. 순제는 고요를 칭찬하며 그가 오형의 사용을 통해 백성의 교화를 보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요는 오형이 보조적 위치에 있어야 하며, 과격한 행동을 하거나 죄를 범한 자에게는 먼저 이유를 깨닫게 하고, 교화를听从하지 않을 때 비로소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요는 형벌로 교화를 돕고,人民으로 하여금 위엄을 두려워하여 범죄를 멀리하게 하며 선(善)으로 이끌고자 했습니다.&lt;br /&gt;
· 《옥전》(獄典): 고요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엄밀하게 검증된 법률 조문을 《옥전》으로归纳하여 나무 껍질에 새겨 우임금에게 제출해 심람을 받았습니다. 우는 이를 매우 훌륭하게 여겨 고요로 하여금 시행하게 했습니다. 《옥전》은 화하(华夏) 고대 최초의 법전으로被誉为됩니다.&lt;br /&gt;
· 해태(獬豸)로 옥사 판단: 고요는 다음과 같은 재판 방법을 발명했습니다: 그는大堂에 독각수 해태 한 마리를 모시고, 만약 누구에게나 죄가 있음이 발견되면 해태가 뿔로 그 사람을 받아 매우 영험했다고 합니다. 《논형·시응편》(論衡·是應篇)에서는 해태를 '뿔 하나 달린 양'(一角之羊)이라고 칭했습니다.&lt;br /&gt;
&lt;br /&gt;
2. 문화&lt;br /&gt;
&lt;br /&gt;
· 오교(五教) 흥기: 오교는 &amp;quot;父子有亲，君臣有义，夫妇有别，长幼有序，朋友有信&amp;quot;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고, 군신간에는 의리가 있으며, 부부(남녀)간에는 구별이 있고, 장유간에는 차례가 있으며,朋友간에는 신의가 있다)입니다. 고요가 살았던 시대는 원시 사회에서 문명 사회로 전환하는 과도기였으며, 당시 각 부족과 지역 간 풍속이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이 다섯 가지 사회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문명 사회로 진입하는 데有利했습니다.&lt;br /&gt;
· 오례(五禮) 제정: 오례는 &amp;quot;吉、凶、宾、军、嘉&amp;quot;입니다. &amp;quot;吉&amp;quot;은 신祗와 조상을 제사하는 예식, &amp;quot;凶&amp;quot;은 죽은 자를 매장하고 추모하는 상장례, &amp;quot;军&amp;quot;은 고대 대규모 정벌 활동을举行하기前에 众人을 모아 군대를 이루는 예식, &amp;quot;嘉&amp;quot;는 성년이 된 때의 관례(冠礼), 계례(笄礼)以及 혼인 예식, 음식 예식 등을 포함합니다.&lt;br /&gt;
· 구덕(九德) 수립: 《사기·하본기》(史記•夏本紀)에는 고요가 말하기를 &amp;quot;亦行有九德，亦言其有德。始事事，宽而栗，柔而立，愿而共，治而敬，扰而毅，直而温，简而廉，刚而实，强而义，章其有常，吉哉&amp;quot;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요가 제안한 구덕에는品德, 재간, 능력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공직자를 선발하고 고찰하기 위해 제정한 아홉 가지 기준이었습니다. 이를 다시 &amp;quot;三德&amp;quot;, &amp;quot;六德&amp;quot;, &amp;quot;九德&amp;quot;으로 나누어 관직을 구분했으며, 이는 중국 역사상 공직자를 고찰하고 선발한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lt;br /&gt;
· 구족(九族) 친화: &amp;quot;九族&amp;quot;은 하나의 부족 연맹을 핵심으로 한 친속 부족들을 가리킵니다. 원시 사회 말기의 부족 연맹은 조직적 기강이 없었는데, &amp;quot;돈서구족&amp;quot;(敦序九族)은 각 친속 부족들을 단단히 단결시켜 강한 응집력을 발생시켜 부족 연맹의 조화와 통일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amp;quot;돈서구족&amp;quot;은 당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전략이었습니다.&lt;br /&gt;
&lt;br /&gt;
3. 덕정(德政)&lt;br /&gt;
&lt;br /&gt;
고요는 덕정을 주장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amp;quot;신기신수&amp;quot;(慎其身修) , 즉 덕정을 실시하려면 시정자 자신이 반드시 덕행과 수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amp;quot;구덕&amp;quot;을 제시했습니다. 둘째, &amp;quot;재지인&amp;quot;(在知人), 즉 국군은 신하를 이해하고 현능한 이를 선발해야 합니다. 셋째, &amp;quot;재안민&amp;quot;(在安民), 즉 관리된百姓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실질적인 일을 해야 하며, 민심이 안정되어야 국가가 안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 평가&lt;br /&gt;
&lt;br /&gt;
· 고요는 상고四圣이자 '옥의 신'(狱神)으로被誉为되며, 중국 노예제 형법의奠基人이자 사학계가 공인하는 &amp;quot;사법의鼻祖&amp;quot;입니다.&lt;br /&gt;
· 우(禹): &amp;quot;고요가 몸소 실천하여 덕을 사회에 두루 베풀자, 백성들이 덕 있는 행실을 감격스럽게 여기고, 고요는人民의 지지를 받았다.&amp;quot;&lt;br /&gt;
· 《맹자·등문공장구상》(孟子·滕文公章句上): &amp;quot;요는 순과 같은 이를 얻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았고, 순은 우, 고요와 같은 이를 얻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았다.&amp;quot;&lt;br /&gt;
· 《논형·강서편》(論衡·講瑞篇): &amp;quot;五帝, 三王, 고요, 공자는 사람 중의 성인(圣)이다.&amp;quot;&lt;br /&gt;
· 명대 육안 주지사 왕원형(王元衡): &amp;quot;고요의 공훈은 우임금에 못지 않다.&amp;quot;&lt;br /&gt;
&lt;br /&gt;
&lt;br /&gt;
사적 기록&lt;br /&gt;
&lt;br /&gt;
· 《상서·우서·요전》(尚書·虞書·堯典) &lt;br /&gt;
· 《상서·우서·순전》(尚書·虞書·舜典) &lt;br /&gt;
· 《상서·우서·대우모》(尚書·虞書·大禹謨) &lt;br /&gt;
· 《상서·우서·고요모》(尚書·虞書·皋陶謨) &lt;br /&gt;
· 《사기·오제본기》(史記·五帝本紀) &lt;br /&gt;
· 《사기·하본기》(史記·夏本紀) &lt;br /&gt;
· 《회남자·주술훈》(淮南子·主術訓) &lt;br /&gt;
· 《회남자·수무》(淮南子·修務) &lt;br /&gt;
· 《논형·골상편》(論衡•骨相篇) &lt;br /&gt;
· 《논형·강서편》(論衡·講瑞篇) &lt;br /&gt;
· 《논형·시응편》(論衡•是應篇) &lt;br /&gt;
· 《순자·비상》(荀子•非相) &lt;br /&gt;
&lt;br /&gt;
&lt;br /&gt;
후세의 기념&lt;br /&gt;
&lt;br /&gt;
고요묘(皋陶墓)는 현재의 안휘성 육안시 경제기술개발구 완서대도(皖西大道) 북측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요묘는 원형 봉토분(土冢)으로 둘레 97미터, 높이 6.2미터이며, 봉분頂上 평면 직경 4미터입니다. 위에는 황련나무 한 그루가 있어 마치 화관(华盖)과 같으며, 봉분 앞에는 청 동치 8년(1869년) 안휘 포정사(布政使) 오곤수(吳坤修)가 직접 쓴 &amp;quot;고고요묘&amp;quot;(古皋陶墓) 비석 한 개가 있습니다. 비석 높이는 1.82미터, 너비는 0.92미터입니다. 1989년 고요묘는 성급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후손&lt;br /&gt;
&lt;br /&gt;
당(唐) 임보(林宝)의 《원화성찬》(元和姓纂)에 따르면: &amp;quot;제전욱고양지예. 전욱생대업. 대업생여신, 여신생구유(즉 고요), 요리관, 자손인성리씨운운. 예손리징득죄어주. 기자이정도난이후지墟, 식목자득전, 인변성리씨. 이정십일대노군, 명이, 자백양, 거고현뇌향곡인리. 증손담, 생이자: 숭, 기. 숭자손거롱서, 기자손거조군. 숭오대손중상, 생백고. 백고생상. 상생이광야. 광이후생당고조이연.&amp;quot; 따라서 당 현종은 고요를 &amp;quot;덕명황제&amp;quot;(德明皇帝)로 추존했습니다. (즉, 고요는 당 왕실 이씨(李氏)의 원조로 여겨짐)&lt;br /&gt;
&lt;br /&gt;
관련 논쟁&lt;br /&gt;
&lt;br /&gt;
1. 고향&lt;br /&gt;
&lt;br /&gt;
고요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현재의 안휘성 육안 지역이라는 설과 산서성 홍동현(洪洞縣)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사기·하본기》에 &amp;quot;제우립이거고요천지, 차수정焉, 이고요졸. 봉고요지후于英, 六&amp;quot;이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고요가 사망한 후 그의 후예를 영(英), 육(六)에 봉했다고 합니다.이로 인해 고요는 고대 육안국의 시조가 되었으며, 안휘성 육안(고성)은 현재 고요의 고향으로被称为됩니다.&lt;br /&gt;
&lt;br /&gt;
민국 《홍동현지》(洪洞縣志)에는 &amp;quot;고요고리재현남십오리고요촌… 고요지후시봉료六不应先葬于其地也&amp;quot;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지에 따르면, 홍동의 사사촌(士師村)은 또 다른 이름으로 고요촌이며, 여기에서는 고요의 후인이 요(蓼), 육(六)에 봉해졌지만 고요 자신은 그곳에 묻히지 않았다고 봅니다. 또한, 현지에는 고요묘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amp;quot;우사고요묘재현남십삼리, 고요촌동남, 총고5척, 주위10보, 비고1장, 문박락불가독, 석기尚存, 사주유垣今圮.&amp;quot;&lt;br /&gt;
&lt;br /&gt;
2. 대업(大业)과 고요&lt;br /&gt;
&lt;br /&gt;
한대(漢代) 이후 일부 사서 작품 (예: 유향의 《열녀전》, 장수절의 《사기정의》, 정현의 《시보》, 고유의 《여씨춘추·당염》 주, 당대 공영달의 《상서정의·순전소》 등)에서 대업(大業)과 고요를 동일인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백익(伯益)이 고요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고요와 백익이 활동한 시대, 거주지 및 그 후예의 분포 상황으로 볼 때 두 사람은 부자 관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대업과 고요는 동일인이 아닙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전승에 따르면 황제(黃帝) 헌원씨의 6세손으로 소호 금천씨, 또는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우임금과 같이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행하였고&lt;br /&gt;
그와함께 여러 공을 세웠으며《사기》에서는 우임금에게 천거를 받아 정사를 돌보았으며&lt;br /&gt;
우의 3년상이 끝나자 우의 아들 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기산(基山)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하고, 《죽서기년》에서는 우가 사망한 후 계의 자리를 탐내다 계에 의해 처단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A%B3%A0%EC%9A%94&amp;diff=145667</id>
		<title>고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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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30: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새 문서:  서씨는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lt;/p&gt;
&lt;hr /&gt;
&lt;div&gt;&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전승에 따르면 황제(黃帝) 헌원씨의 6세손으로 소호 금천씨, 또는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우임금과 같이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행하였고&lt;br /&gt;
그와함께 여러 공을 세웠으며《사기》에서는 우임금에게 천거를 받아 정사를 돌보았으며&lt;br /&gt;
우의 3년상이 끝나자 우의 아들 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기산(基山)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하고, 《죽서기년》에서는 우가 사망한 후 계의 자리를 탐내다 계에 의해 처단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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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백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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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27: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백익(伯益bóyì)&lt;br /&gt;
&lt;br /&gt;
백익 (伯益)&lt;br /&gt;
&lt;br /&gt;
오제(五帝) 말기 역사 인물&lt;br /&gt;
&lt;br /&gt;
기본 정보&lt;br /&gt;
&lt;br /&gt;
· 별칭: 익(益), 백예(柏翳), 대비(大费), 후익(后益) 등&lt;br /&gt;
&lt;br /&gt;
· 민족: 화하족(华夏民族)&lt;br /&gt;
&lt;br /&gt;
· 출생지: 산동성 임沂&lt;br /&gt;
&lt;br /&gt;
· 사망: 약 기원전 1973년&lt;br /&gt;
&lt;br /&gt;
· 시대: 순제(舜帝) 시기&lt;br /&gt;
&lt;br /&gt;
· 대표 저작: 《산해경》(山海经)&lt;br /&gt;
&lt;br /&gt;
· 주요 업적: 우물 발명, 조류 훈련술, 짐승 훈련술, 치수술 등&lt;br /&gt;
&lt;br /&gt;
가족 관계&lt;br /&gt;
&lt;br /&gt;
· 아버지: 대업(大业) (일설에는 고요)&lt;br /&gt;
&lt;br /&gt;
· 어머니: 여화(女华)&lt;br /&gt;
&lt;br /&gt;
· 아내: 순제의 딸 요씨(姚氏)&lt;br /&gt;
&lt;br /&gt;
· 자녀: 대렴(大廉) 등&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가족 배경&lt;br /&gt;
&lt;br /&gt;
백익의 할머니는 전욱의 손녀인 여수로, 직조에 능했으며 대업을 낳았다. 대업은 소전의 딸 여화와 결혼하여 백익을 낳았다.&lt;br /&gt;
&lt;br /&gt;
순·우 보좌&lt;br /&gt;
&lt;br /&gt;
백익은 조류와 짐승을 조련하는 데 능해 순제에게 임명되어 산림을 관리하는 우관(虞官)이 되었다. 순제는 그에게 영씨(嬴氏) 성을 하사했으며, 자신의 딸 요씨와 결혼시켰다.&lt;br /&gt;
&lt;br /&gt;
백익은 우(禹)를 도와 치수 사업을 보좌했으며, 홍수를治理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토질에 따라 다른 농작물을 심는 방법을 가르쳤고, 농업과 축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삼묘(三苗)와의 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lt;br /&gt;
&lt;br /&gt;
제위 계승과 죽음&lt;br /&gt;
&lt;br /&gt;
우는 나이가 들자 전통에 따라 백익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3년 상기를 마친 후, 백익은 우의 아인 계(启)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기산(箕山)으로 은거했다. 그러나 계가 제위를 찬탈한 후, 기원전 1973년에 백익은 계에게 살해당했다.&lt;br /&gt;
&lt;br /&gt;
주요 업적&lt;br /&gt;
&lt;br /&gt;
· 우를 도와 치수 사업 성공&lt;br /&gt;
&lt;br /&gt;
· 가축 사육과 농업 기술 발전에 기여&lt;br /&gt;
&lt;br /&gt;
· 다양한 동식물 연구 및 활용&lt;br /&gt;
&lt;br /&gt;
사상&lt;br /&gt;
&lt;br /&gt;
《상서·대우모》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백익은 덕치를 주장하고 요제와 같은 인덕을 강조했다. 그는 국가 통치에 있어 신중하게 직임을 다져야 하며, 원칙과 법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산해경》 저자 논란&lt;br /&gt;
&lt;br /&gt;
전통적으로 《산해경》은 우와 백익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대 학자들은 전국 시대 초기부터 한대 초기까지 초나라 지역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lt;br /&gt;
&lt;br /&gt;
평가&lt;br /&gt;
&lt;br /&gt;
· 맹자: 백익이 요 시대에 홍수를治理하는 데 기여해 중국인이 &amp;quot;먹을 수 있게&amp;quot; 했다고 평가.&lt;br /&gt;
&lt;br /&gt;
· 묵자: &amp;quot;우가 음방에서 백익을 등용해 정사를 맡기니 구주가 통일되었다&amp;quot;고 칭찬.&lt;br /&gt;
&lt;br /&gt;
일화&lt;br /&gt;
&lt;br /&gt;
· 백기 장군: 백익은 모든 생물의 습성을 잘 알고 백수를 길들일 수 있어 &amp;quot;백충 장군&amp;quot;이라는 별칭을 얻었다.&lt;br /&gt;
&lt;br /&gt;
· 백색 기 수여: 순제는 백익에게 상으로 흰색 기를 하사하며 &amp;quot;계속 노력하면 자손이 번성할 것&amp;quot;이라고 축복했다.&lt;br /&gt;
&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전승에 따르면 황제(黃帝) 헌원씨의 6세손으로 소호 금천씨, 또는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우임금과 같이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행하였고&lt;br /&gt;
그와함께 여러 공을 세웠으며《사기》에서는 우임금에게 천거를 받아 정사를 돌보았으며&lt;br /&gt;
우의 3년상이 끝나자 우의 아들 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기산(基山)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하고, 《죽서기년》에서는 우가 사망한 후 계의 자리를 탐내다 계에 의해 처단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95%BD%EB%AA%A9&amp;diff=145665</id>
		<title>약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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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24: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약목(若木 ruò mù)&lt;br /&gt;
&lt;br /&gt;
서약목 (徐若木)&lt;br /&gt;
&lt;br /&gt;
하조 초기 역사 인물&lt;br /&gt;
&lt;br /&gt;
· 본명: 영약목 (嬴若木)&lt;br /&gt;
&lt;br /&gt;
· 별칭: 약목 (若木)&lt;br /&gt;
&lt;br /&gt;
· 자: 자구 (子久)&lt;br /&gt;
&lt;br /&gt;
· 시대: 하조 (夏朝) 초기&lt;br /&gt;
&lt;br /&gt;
· 민족: 동이인 (화하족)&lt;br /&gt;
&lt;br /&gt;
· 소속 정권: 서국 (徐国)&lt;br /&gt;
&lt;br /&gt;
· 부친: 백익 (伯益)&lt;br /&gt;
&lt;br /&gt;
&lt;br /&gt;
백익은 우(禹)를 도와 홍수를 다스리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공을 논할 때, 백익의 아들 서약목은 서(徐) 땅에 봉해져 서국을 건국했습니다. 서약목이 서국에 처음 봉해졌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국명을 따서 성을 서(徐)씨라 칭하게 되었으며, 서약목은 서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는 산동성 담성현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집니다.&lt;br /&gt;
&lt;br /&gt;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서약목은 아내 진봉씨(陳鋒氏)와의 사이에 4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합니다.&lt;br /&gt;
&lt;br /&gt;
인물 관계&lt;br /&gt;
&lt;br /&gt;
· 부친: 백익 (伯益)&lt;br /&gt;
&lt;br /&gt;
· 형제: 대렴 (大廉) (형)&lt;br /&gt;
&lt;br /&gt;
· 조부: 대업 (大業) (할아버지)&lt;br /&gt;
&lt;br /&gt;
· 조모: 여화 (女華) (할머니)&lt;br /&gt;
&lt;br /&gt;
· 증조모: 여수 (女修) (증조할머니)&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하조가 건립되기 전, 서약목의 아버지 백익은 이미 우를 도와 홍수를 다스렸습니다. 하조가 건립된 후, 서약목 또한 하조의 군주를 도와 수해를治理(치리)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이에 대한 공로로 서약목은 &amp;quot;서&amp;quot;(徐, 현재의 산동성 담성현 북부) 땅에 봉해져 서국을 건국하였고, 후세에서는 그를 서약목이라 부릅니다. 그의 후손들은 국명을 따서 서씨(徐氏)라 칭하게 되었으며, 서약목은 서씨의 득성 시조(得姓始祖)가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문헌 기록&lt;br /&gt;
&lt;br /&gt;
· 《사기》(史記)&lt;br /&gt;
&lt;br /&gt;
· 《서언왕지》(徐偃王志)&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lt;br /&gt;
&lt;br /&gt;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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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약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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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22: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서약목 (徐若木)&lt;br /&gt;
&lt;br /&gt;
하조 초기 역사 인물&lt;br /&gt;
&lt;br /&gt;
· 본명: 영약목 (嬴若木)&lt;br /&gt;
&lt;br /&gt;
· 별칭: 약목 (若木)&lt;br /&gt;
&lt;br /&gt;
· 자: 자구 (子久)&lt;br /&gt;
&lt;br /&gt;
· 시대: 하조 (夏朝) 초기&lt;br /&gt;
&lt;br /&gt;
· 민족: 동이인 (화하족)&lt;br /&gt;
&lt;br /&gt;
· 소속 정권: 서국 (徐国)&lt;br /&gt;
&lt;br /&gt;
· 부친: 백익 (伯益)&lt;br /&gt;
&lt;br /&gt;
&lt;br /&gt;
백익은 우(禹)를 도와 홍수를 다스리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공을 논할 때, 백익의 아들 서약목은 서(徐) 땅에 봉해져 서국을 건국했습니다. 서약목이 서국에 처음 봉해졌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국명을 따서 성을 서(徐)씨라 칭하게 되었으며, 서약목은 서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는 산동성 담성현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집니다.&lt;br /&gt;
&lt;br /&gt;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서약목은 아내 진봉씨(陳鋒氏)와의 사이에 4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합니다.&lt;br /&gt;
&lt;br /&gt;
인물 관계&lt;br /&gt;
&lt;br /&gt;
· 부친: 백익 (伯益)&lt;br /&gt;
&lt;br /&gt;
· 형제: 대렴 (大廉) (형)&lt;br /&gt;
&lt;br /&gt;
· 조부: 대업 (大業) (할아버지)&lt;br /&gt;
&lt;br /&gt;
· 조모: 여화 (女華) (할머니)&lt;br /&gt;
&lt;br /&gt;
· 증조모: 여수 (女修) (증조할머니)&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하조가 건립되기 전, 서약목의 아버지 백익은 이미 우를 도와 홍수를 다스렸습니다. 하조가 건립된 후, 서약목 또한 하조의 군주를 도와 수해를治理(치리)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이에 대한 공로로 서약목은 &amp;quot;서&amp;quot;(徐, 현재의 산동성 담성현 북부) 땅에 봉해져 서국을 건국하였고, 후세에서는 그를 서약목이라 부릅니다. 그의 후손들은 국명을 따서 서씨(徐氏)라 칭하게 되었으며, 서약목은 서씨의 득성 시조(得姓始祖)가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문헌 기록&lt;br /&gt;
&lt;br /&gt;
· 《사기》(史記)&lt;br /&gt;
&lt;br /&gt;
· 《서언왕지》(徐偃王志)&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lt;br /&gt;
&lt;br /&gt;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lt;br /&gt;
&lt;br /&gt;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lt;br /&gt;
&lt;br /&gt;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lt;br /&gt;
&lt;br /&gt;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amp;quot;(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amp;quot;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lt;br /&gt;
&lt;br /&gt;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lt;br /&gt;
&lt;br /&gt;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amp;quot;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lt;br /&gt;
&lt;br /&gt;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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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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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lt;br /&gt;
&lt;br /&gt;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5%BD%EB%AA%A9&amp;diff=145663</id>
		<title>서약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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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19: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새 문서: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lt;/p&gt;
&lt;hr /&gt;
&lt;div&gt;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lt;br /&gt;
&lt;br /&gt;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lt;br /&gt;
&lt;br /&gt;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lt;br /&gt;
&lt;br /&gt;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lt;br /&gt;
&lt;br /&gt;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amp;quot;(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amp;quot;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lt;br /&gt;
&lt;br /&gt;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lt;br /&gt;
&lt;br /&gt;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amp;quot;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lt;br /&gt;
&lt;br /&gt;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lt;br /&gt;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lt;br /&gt;
&lt;br /&gt;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A%B5%AC%EC%99%95&amp;diff=145662</id>
		<title>서구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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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3T09:18: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서구왕(駒王=徐駒王 xú jū wáng)&lt;br /&gt;
&lt;br /&gt;
&lt;br /&gt;
서구왕(徐驹王)&lt;br /&gt;
&lt;br /&gt;
서주 초기 제후국 서국의 군주&lt;br /&gt;
&lt;br /&gt;
서구왕은 중국 역사상 서주 초기 제후국 서국(徐国)의 군주로, 서언왕(徐偃王)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서국을 통치하는 동안 국가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서구왕의 성별은 남성이며, 국적은 중국입니다.&lt;br /&gt;
&lt;br /&gt;
외국어 이름: Từ Câu vương (베트남어)&lt;br /&gt;
&lt;br /&gt;
국적:중국&lt;br /&gt;
&lt;br /&gt;
민족:화하족(华夏民族)&lt;br /&gt;
&lt;br /&gt;
부모: 약목(若木, 아버지)&lt;br /&gt;
&lt;br /&gt;
자녀:서언왕(徐偃王, 아들)&lt;br /&gt;
&lt;br /&gt;
서구왕은 중국 역사상 서주 초기 제후국 서국의 군주입니다. 서언왕의 아버지로, 주공 단(周公旦) 시기부터 주성왕(周成王), 주강왕(周康王) 시기까지 서주와 서국 사이에는 매우 빈번한 전쟁이 있었습니다. 주성왕 원년(기원전 1042년)에 서국은 무경(武庚)을 수반으로 한 상나라 잔류 귀족들이 주나라를 대상으로 일으킨 반란인 무경의 난(武庚叛乱)에 참여했습니다. 서자(徐子)가 스스로 서구왕이라 칭하며 주공의 동정(东征)에 저항했습니다. 서구왕은 군사를 일으켜 직접 주나라를 공격하여 황하 강가까지 진격했습니다. 《예기·단궁(礼记·檀弓)》 편에는 서국 대부 용거(容居)의 회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amp;quot;예전에 우리의 선군(先君) 구왕이 서쪽으로 토벌하여 황하를 건넜다.(昔我先君驹王，西讨，济于河)&amp;quot;&lt;br /&gt;
&lt;br /&gt;
주공 단 시기부터 주성왕, 주강왕 시기까지 서주와 서국 사이에는 매우 빈번한 전쟁이 있었습니다. 주성왕 원년(기원전 1042년)에 서국은 무경을 수반으로 한 상나라 잔류 귀족들이 주나라를 대상으로 일으킨 반란인 무경의 난에 참여했으며, 서자가 스스로 서구왕이라 칭하며 주공의 동정에 저항했습니다. 서구왕은 군사를 일으켜 직접 주나라를 공격하여 황하 강가까지 진격했습니다. 서국 사람들은 선군 구왕이 서쪽으로 토벌하여 황하를 건넜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lt;br /&gt;
&lt;br /&gt;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lt;br /&gt;
&lt;br /&gt;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lt;br /&gt;
&lt;br /&gt;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lt;br /&gt;
&lt;br /&gt;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lt;br /&gt;
&lt;br /&gt;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amp;quot;(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amp;quot;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lt;br /&gt;
&lt;br /&gt;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lt;br /&gt;
&lt;br /&gt;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amp;quot;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lt;br /&gt;
&lt;br /&gt;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lt;br /&gt;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lt;br /&gt;
&lt;br /&gt;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巿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B9%98%EC%9A%B0%EC%B2%9C%EC%99%95&amp;diff=145661</id>
		<title>치우천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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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9T15:41: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치우(蚩尤)는 중국의 여러 기록과 전설에서 헌원과 함께 탁록(涿鹿)의 전투에서 싸웠다고 전해지는 전쟁의 신 또는 옛 부족(구려)의 지도자로, 현재의 묘족의 조상신이자 복희, 소호금천과 함께 동이(東夷)의 선조이다.&lt;br /&gt;
&lt;br /&gt;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오제본기〉를 비롯한 중국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치우는 신농의 후예로 황제 헌원과 탁록지전 등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다. 신농의 치세 말기에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세상을 안정시켰는데, 이때 치우가 가장 포악하여 염제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제후들을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였을 때 치우가 다시 난을 일으키자 헌원은 군대를 일으켜 치우를 탁록(涿鹿)에서 잡아 죽였다고 한다.중국의 일부 신화에는 치우에게 81명(또는 72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 소의 뿔과 발굽이 있고 머리는 구리와 쇠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창과 방패 등의 무기를 사용하였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치우의 부족은 일부가 헌원에 협조했고, 일부는 여족(黎族), 일부는 요족(瑤族)이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치우와 헌원이 전쟁을 벌였던 사실은 흔히 '황제 신화'라고 부르며 이러한 신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의견이 존재하였다. 치우가 이끌었던 구려족(九黎族)은 먀오족의 조상이라고 하며 장강(양쯔강) 유역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치우로 상징되는 양쯔강 유역의 남방 부족과 황제로 상징되는 황하 유역의 한족이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는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베트남, 태국 등에 흩어져 사는 묘족, 흐몽족 등은 구려족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우를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한다.한국의 일부 야사에서는 치우씨(蚩尤氏), 치우천왕(蚩尤天王) 등으로 부르며 치우 또는 그 부족이 한민족에 속했다고 주장한다.&lt;br /&gt;
&lt;br /&gt;
[[동이족]](東夷族)=[[서이족]](徐夷族)=[[부여족]](扶餘族)&lt;br /&gt;
&lt;br /&gt;
이(夷)는, 어질어 산숨(生命)을 좋아하니 잘몬(萬物)이 땅에 밑뿌리 터 나는 것이요. 그것은 크니, 하늘이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큰 것이며, 그래서 사람이 본받은 땅, 땅이 본받은 하늘, 하늘이 본받은 길,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이다. &lt;br /&gt;
&lt;br /&gt;
이(夷)는 동이(東夷)다. 노자 늙은이가 ‘참알줄’(道德經)을 세상에 드러낸 때를 기원전 6세기쯤으로 보면, 당시 [[동이족]](東夷族)이 살던 땅과 [[고조선]]의 영토가 맞물린다. 동이족은 지금의 강소성, 산동성,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한반도에 흩어져 살았다. 특히 산동성과 하북성 일대는 오래전부터 하(夏)․은(殷)․주(周)의 땅이었다. 그들도 동이였다. 그들의 후예는 고구려로 이어진다. 놀랍게도 노자 늙은이는 산동성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그도 [[동이족]]의 후예?&lt;br /&gt;
&lt;br /&gt;
‘동이열전(東夷列傳)’: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lt;br /&gt;
&lt;br /&gt;
‘고구려(高句驪)’: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 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방 2천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習俗)에 음식을 아낀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동이들이 서로 전하여 오기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많이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 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치듯 빨리 간다.&lt;br /&gt;
&lt;br /&gt;
또 후한(後漢) 시대의 허신(許愼, 58년 무렵~147년 무렵)이 편찬한 &amp;lt;설문해자(說文解字)&amp;gt;에 이(夷)는 “평야. 종대종궁. 동방지인야.(平也. 从大从弓. 東方之人也.)”로 적었다. 이때 평(平)은 ‘고름’(平平)보다는 ‘바로잡음’(平定)의 뜻에 가깝다. 풀면 “어지러움을 바로잡는다. 큼을 따르고 활을 따른다. 동쪽의 사람이다.” 그런 뜻이다. 바로 이어서 주(注)를 달았다. 주의 앞부분이다.&lt;br /&gt;
&lt;br /&gt;
“무릇 사람은 그가 사는 땅의 성질을 닮는다. 오직 동이만이 큼을 따랐으니 큰사람(大人)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이가 오래 살며,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다.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 큰 그림은 사람의 꼴을 본 땄다. 이(夷)의 옛 글씨는 대(大)와 같다. 즉 하(夏)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다.”(葢在坤地頗有順理之性. 惟東夷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 大象人形而夷篆從大. 則與夏不殊. 夏者，中國之人也.)&lt;br /&gt;
&lt;br /&gt;
여기서 중국은 황하 유역을 가리킬 뿐 나라이름이 아니다. “중국, 경사야(中國, 京師也)”라 했듯이 수도를 말하기도 하고, 또 중원을 차지한 나라를 뜻하기도 했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라는 뜻은 하나라가 중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 주(周)나라부터는 황하(黃河)에서 ‘하’, 낙양(洛陽)에서 ‘낙’을 딴 ‘하락’(河洛) 지역을 중원의 중심으로 보았다. 신해혁명 이후 1912년에 한, 만, 몽, 장, 회족의 다섯 민족을 하나로 묶어 ‘중화’(中華)라 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은 처음으로 나라이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사마천[司馬遷, BC.145년(혹은 BC.135년)~BC.87년(추정)]이 쓴 &amp;lt;사기(史記)&amp;gt;에 노자 늙은이를 “초(楚)나라 사람으로 주(周)나라에서 도서관장을 지냈다”고 적고 있으나, 초와 주의 영토는 동이족의 영토와도 겹치니 &amp;lt;설문해자&amp;gt;의 내용을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 밝힌 동이는 ‘참알줄’(道德經)의 사상과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노자 늙은이가 [[동이족]]이었거나, 아니라면 동이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게 확실하다.&lt;br /&gt;
&lt;br /&gt;
동이열전에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하였고, 설문해자주에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고 하였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설명에는 군자가 동이사람과 같고, 그는 바르고 떳떳하며, 온씨알(百姓)을 불쌍히 여겨 늘 고민하는 걸로 나온다. 노자 늙은이 25월에 “그러므로 길이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임금 또한 크다.”는 내용이 있다. 그로부터 사람이 본받은 땅이요, 땅이 본받은 하늘이요, 하늘이 본받은 길이요,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를 갈무리해 낸다. 말과 뜻과 사상이 같지 않은가!&lt;br /&gt;
&lt;br /&gt;
조금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꺼내 보자. 이번엔 꿍꿍이다. 이(夷)는 큰 활이니 그로부터 궁궁을을(弓弓乙乙)이 비롯한 게 아닐까? 이(夷)에서 궁궁을을이요, 궁궁을을에서 약(弱)이 아닐까? 노자 늙은이는 36월에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긴다”(柔弱勝剛强)고 했잖은가. 수운은 또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 “송송가가(松松家家) 알았으되 이재궁궁(利在弓弓) 어찌알꼬 천운이 둘렀으니 근심말고 돌아가서 윤회시운(輪廻時運)구경하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 했고, 소태산은 “궁궁은 무극(無極) 곧 일원(一圓)이 되고, 을을(乙乙)은 태극(太極)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것이니라.”고 했다.&lt;br /&gt;
&lt;br /&gt;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lt;br /&gt;
&lt;br /&gt;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lt;br /&gt;
&lt;br /&gt;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lt;br /&gt;
&lt;br /&gt;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lt;br /&gt;
&lt;br /&gt;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lt;br /&gt;
&lt;br /&gt;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lt;br /&gt;
&lt;br /&gt;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lt;br /&gt;
&lt;br /&gt;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amp;quot;(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lt;br /&gt;
&lt;br /&gt;
&amp;quot;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lt;br /&gt;
&lt;br /&gt;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lt;br /&gt;
&lt;br /&gt;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amp;quot;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amp;quot;&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lt;br /&gt;
&lt;br /&gt;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lt;br /&gt;
&lt;br /&gt;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lt;br /&gt;
&lt;br /&gt;
[[서성현]](徐城縣)&lt;br /&gt;
&lt;br /&gt;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lt;br /&gt;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lt;br /&gt;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lt;br /&gt;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lt;br /&gt;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lt;br /&gt;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lt;br /&gt;
&lt;br /&gt;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lt;br /&gt;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lt;br /&gt;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lt;br /&gt;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lt;br /&gt;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lt;br /&gt;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lt;br /&gt;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lt;br /&gt;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lt;br /&gt;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lt;br /&gt;
生時正偃，故以爲名。&lt;br /&gt;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lt;br /&gt;
宮人聞之，更取養之。&lt;br /&gt;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lt;br /&gt;
及長，襲爲徐君。&lt;br /&gt;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lt;br /&gt;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lt;br /&gt;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변했다.&lt;br /&gt;
鵠蒼或名後蒼。」&lt;br /&gt;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서국]]의 쇠퇴와 멸망&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lt;br /&gt;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lt;br /&gt;
&lt;br /&gt;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lt;br /&gt;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lt;br /&gt;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lt;br /&gt;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lt;br /&gt;
&lt;br /&gt;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lt;br /&gt;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lt;br /&gt;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lt;br /&gt;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lt;br /&gt;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lt;br /&gt;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lt;br /&gt;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서국)|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lt;br /&gt;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lt;br /&gt;
&lt;br /&gt;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중국기록에서&lt;br /&gt;
&lt;br /&gt;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amp;lt;후한서 동이열전&amp;gt;”라고 기록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lt;br /&gt;
&lt;br /&gt;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lt;br /&gt;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lt;br /&gt;
&lt;br /&gt;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lt;br /&gt;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서국)|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lt;br /&gt;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진나라)|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lt;br /&gt;
&lt;br /&gt;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진나라)|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서복(진나라)|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진나라)|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lt;br /&gt;
&lt;br /&gt;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진나라)|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lt;br /&gt;
황룡(黃龍)&lt;br /&gt;
&lt;br /&gt;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lt;br /&gt;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lt;br /&gt;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lt;br /&gt;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lt;br /&gt;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lt;br /&gt;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lt;br /&gt;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lt;br /&gt;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lt;br /&gt;
&lt;br /&gt;
== [[곡창]](鹄蒼) ==&lt;br /&gt;
곡창(鹄蒼)&lt;br /&gt;
&lt;br /&gt;
세계 최초 개이름.&lt;br /&gt;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lt;br /&gt;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lt;br /&gt;
&lt;br /&gt;
== 泰山(태산)=[[서산]](徐山) ==&lt;br /&gt;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lt;br /&gt;
&lt;br /&gt;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lt;br /&gt;
&lt;br /&gt;
&lt;br /&gt;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lt;br /&gt;
&lt;br /&gt;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lt;br /&gt;
&lt;br /&gt;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lt;br /&gt;
&lt;br /&gt;
== [[월병]](月餠) ==&lt;br /&gt;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lt;br /&gt;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lt;br /&gt;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lt;br /&gt;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lt;br /&gt;
&amp;quot;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amp;quot;&lt;br /&gt;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lt;br /&gt;
&lt;br /&gt;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lt;br /&gt;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이 &amp;quot;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amp;quot;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amp;quot;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amp;quot; 라고 아뢰었다.&lt;br /&gt;
&lt;br /&gt;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lt;br /&gt;
&lt;br /&gt;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lt;br /&gt;
&lt;br /&gt;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lt;br /&gt;
&lt;br /&gt;
== [[고려도경]](高麗圖經) ==&lt;br /&gt;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lt;br /&gt;
&lt;br /&gt;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lt;br /&gt;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lt;br /&gt;
&lt;br /&gt;
== [[고군산군도]] ==&lt;br /&gt;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lt;br /&gt;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lt;br /&gt;
&lt;br /&gt;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lt;br /&gt;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lt;br /&gt;
&lt;br /&gt;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lt;br /&gt;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amp;lt;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amp;gt;을 지난 12월 출간했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lt;br /&gt;
&lt;br /&gt;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lt;br /&gt;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lt;br /&gt;
&lt;br /&gt;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lt;br /&gt;
&lt;br /&gt;
== [[서불과차]](徐市過此) ==&lt;br /&gt;
&lt;br /&gt;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lt;br /&gt;
&lt;br /&gt;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lt;br /&gt;
&lt;br /&gt;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lt;br /&gt;
&lt;br /&gt;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lt;br /&gt;
&lt;br /&gt;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lt;br /&gt;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lt;br /&gt;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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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치우천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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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9T15:40: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새 문서: 치우(蚩尤)는 중국의 여러 기록과 전설에서 헌원과 함께 탁록(涿鹿)의 전투에서 싸웠다고 전해지는 전쟁의 신 또는 옛 부족(구려)의 지도...&lt;/p&gt;
&lt;hr /&gt;
&lt;div&gt;치우(蚩尤)는 중국의 여러 기록과 전설에서 헌원과 함께 탁록(涿鹿)의 전투에서 싸웠다고 전해지는 전쟁의 신 또는 옛 부족(구려)의 지도자로, 현재의 묘족의 조상신이자 복희, 소호금천과 함께 동이(東夷)의 선조이다.&lt;br /&gt;
&lt;br /&gt;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오제본기〉를 비롯한 중국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치우는 신농의 후예로 황제 헌원과 탁록지전 등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다. 신농의 치세 말기에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세상을 안정시켰는데, 이때 치우가 가장 포악하여 염제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제후들을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였을 때 치우가 다시 난을 일으키자 헌원은 군대를 일으켜 치우를 탁록(涿鹿)에서 잡아 죽였다고 한다.중국의 일부 신화에는 치우에게 81명(또는 72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 소의 뿔과 발굽이 있고 머리는 구리와 쇠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창과 방패 등의 무기를 사용하였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치우의 부족은 일부가 헌원에 협조했고, 일부는 여족(黎族), 일부는 요족(瑤族)이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치우와 헌원이 전쟁을 벌였던 사실은 흔히 '황제 신화'라고 부르며 이러한 신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의견이 존재하였다. 치우가 이끌었던 구려족(九黎族)은 먀오족의 조상이라고 하며 장강(양쯔강) 유역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치우로 상징되는 양쯔강 유역의 남방 부족과 황제로 상징되는 황하 유역의 한족이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는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베트남, 태국 등에 흩어져 사는 묘족, 흐몽족 등은 구려족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우를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한다.한국의 일부 야사에서는 치우씨(蚩尤氏), 치우천왕(蚩尤天王) 등으로 부르며 치우 또는 그 부족이 한민족에 속했다고 주장한다.&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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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재필기념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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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8T10:33: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p&gt;
&lt;hr /&gt;
&lt;div&gt;[[서재필]]의 미국시민으로서의 모범은 미국정부 등으로부터 인정받게 돼 1945년 1월에는 미 의회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미디어시는 1975년 [[서재필기념비]] 건립을 위해 로즈트리 파크 부지 일부를 무상으로 내놓았고, 2008년에는 워싱턴D.C.에 한국인 최초로 [[서재필 동상]]이 세워졌다. 2021년 5월에는 미국성서공회가 성경을 중심으로 미국의 자유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미국인 22명을 전시하기 위해 개관한 ‘페이스 앤 리버티 디스커버리 박물관(Faith and Liberty Discovery Center)’에 서재필 박사가 포함돼 그의 기록들이 전시되고 있다. 한국정부는 1977년 [[서재필]] 박사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고, 1994년 4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lt;br /&gt;
&lt;br /&gt;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고려)|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 개설 ==&lt;br /&gt;
&lt;br /&gt;
본관은 대구(大丘).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제이슨(Jaishon, P.). 전라남도 보성 출신. [[서광효]](徐光孝)의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에게 입양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lt;br /&gt;
&lt;br /&gt;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조선)|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우(조선)|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원리]](徐元履 함경도 감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문중(조선)|서문중]](徐文重 영의정 정1품)&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수(조선)|서경수]](徐景需 전첨.증 이조판서 정2품) &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형리]](徐亨履)&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할아버지: [[서문도]](徐文道 사평(司評))&lt;br /&gt;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종제]](徐宗悌 영조의 국구.달성부원군)&lt;br /&gt;
****** 고모고고고할머니: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lt;br /&gt;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명백(조선)|서명백]](徐命伯 증 이조판서)&lt;br /&gt;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덕수(조선)|서덕수]](徐德修 증 이조참판)&lt;br /&gt;
******** 고고조할아버지: [[서유호]](徐有浩 군수)&lt;br /&gt;
********* 고조할아버지: [[서일보]](徐日輔 도정)&lt;br /&gt;
********** 증조할아버지: [[서진순(조선)|서진순]](徐震淳 진사)&lt;br /&gt;
*********** 할아버지: [[서상기]](徐相夔 생원)&lt;br /&gt;
************ 친아버지(양아버지[[서광하]](徐光夏)): [[서광효]](徐光孝)&lt;br /&gt;
************* 본인:[[서재필]](徐載弼 독립운동가)&lt;br /&gt;
&lt;br /&gt;
== 생애 및 활동사항 ==&lt;br /&gt;
&lt;br /&gt;
일곱살 때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2년 3월에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번째로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lt;br /&gt;
&lt;br /&gt;
이 무렵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 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유학하였다.&lt;br /&gt;
&lt;br /&gt;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 군사 훈련을 교육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하여, 국왕으로부터의 승낙을 받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어 사관장이 되었다.&lt;br /&gt;
&lt;br /&gt;
1884년 12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에 의해 성립된 신정부의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後營領官)에 임명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도착한 지 4개월 뒤인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 서재필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 자살하고, 동생 [[서재창]](徐載昌)은 참형되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lt;br /&gt;
&lt;br /&gt;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1886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힐맨고등학교(Harry Hilman Academy)에 입학했는데, 1889년 6월 졸업 당시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자가 될 정도로 성적이 특출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서재필이 학교에 입학할 때, 미국 국적을 가지고 제이슨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었고, 가족들 모두가 희생되어 본국에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생활을 위해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고등학교 졸업 후, 1889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튼시에 있는 라파예트(Lafayette)대학에 진학했으나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워싱턴시로 가서 낮에는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아의과대학야간부(Columbia Medical College: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3년 6월 2등으로 졸업한 뒤,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다음해 6월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Amstrong, G. B.)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무렵 학생들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행위가 심하자, 이에 분개하여 모교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해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lt;br /&gt;
&lt;br /&gt;
한편, 1894년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으로 대개혁이 단행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들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그리고 1895년 5월 박정양내각(朴定陽內閣)은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갑자기 귀국할 수 없었다.&lt;br /&gt;
&lt;br /&gt;
그 뒤 김홍집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던 박영효가 고종 폐위 음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미국에 들려 또다시 귀국을 종용하자, 사업을 정리하고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1896년 1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lt;br /&gt;
&lt;br /&gt;
귀국 후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국민의 계몽이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고 신문 발간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로부터 4,400원의 재정 지원을 받고,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데 성공하였다.&lt;br /&gt;
&lt;br /&gt;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으로 순 한글로 간행되어 폐간될 때까지 국민을 계몽하고 우리나라의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성공하자 뒤를 이어 개화독립세력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독립협회는 창립 후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소임을 다 하였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국민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속에 1897년 11월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이 건립되었다.&lt;br /&gt;
&lt;br /&gt;
또한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lt;br /&gt;
&lt;br /&gt;
또한,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리는 한편, 민족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수구파 정부를 비판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자, 이를 꺼려한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합의해 다시 미국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3·1운동 봉기 때까지 다시 병원을 개업, 의료사업에 종사해야만 했다.&lt;br /&gt;
&lt;br /&gt;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전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해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전세계에 규탄하였다.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해 재미교포들을 결속시키고 미국인친우들을 모아서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lt;br /&gt;
&lt;br /&gt;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간행하여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과 외교 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lt;br /&gt;
&lt;br /&gt;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개최되자 우리나라의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일본대표의 갖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며, 독립운동에의 지원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lt;br /&gt;
&lt;br /&gt;
이렇듯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가재(家財)가 완전히 파산되어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나가는 한편, 여러 병원의 고용 의사로 종사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장관 하지(Hodge, G. 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이 선포되고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상훈과 추모&lt;br /&gt;
&lt;br /&gt;
1977년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갑신정변]](甲申政變) ===&lt;br /&gt;
1884년 말 [[서광범]]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겨우 3일만에 실패했고 [[서광범]]은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와 변복하고 [[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lt;br /&gt;
&lt;br /&gt;
당연하게도 시대의 한계상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굶어 죽었고 아내 역시 10년 간 투옥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 역시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박영효([[반남 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 이건 근거없는 [[풍문]]으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약 60년 전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박미(朴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lt;br /&gt;
&lt;br /&gt;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서광범]]을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낀 [[서광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lt;br /&gt;
&lt;br /&gt;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안전]]했는데 뉴욕, [[뉴저지]] 주 및 [[워싱턴 D.C.]] 등을 전전해 주로 미국 동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서재필]]도 비슷한 시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 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 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해 발표하였다.&lt;br /&gt;
&lt;br /&gt;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 협회|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lt;br /&gt;
&lt;br /&gt;
== [[서울독립문]](─獨立門) ==&lt;br /&gt;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문(門). 석조문. 사적.&lt;br /&gt;
&lt;br /&gt;
== [[독립신문]] ==&lt;br /&gt;
1896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지이다.&lt;br /&gt;
&lt;br /&gt;
== [[독립협회]]  ==&lt;br /&gt;
1896년(조선 고종 33) 서울에서 조직된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lt;br /&gt;
&lt;br /&gt;
==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lt;br /&gt;
보성군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활동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송재 문화제'를 개최했다.&lt;br /&gt;
&lt;br /&gt;
== [[서재필기념공원]](徐載弼記念公園) ==&lt;br /&gt;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강건한 삶을 살았던 독립투사 송재 [[서재필]] 선생의 유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18세 나이로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은 그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신문을 제작하고 독립문을 만들었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다. 그가 태어난 문덕면 생가 앞에는 기념공원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그의 정신이 살아있는 독립문을 재현하고 유품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 지역은 보성군의 북부 지역으로 천년고찰의 대원사와 향토작가 전시관인 백민 미술관 그리고 주암호반, 승주 고인돌공원과 연계되어 교육문화관광코스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lt;br /&gt;
&lt;br /&gt;
== [[서재필의학상]] ==&lt;br /&gt;
의사이며 언론인으로서 일생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몸 바치신 민족의 선각자 [[서재필]](徐載弼)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에서는 애국애족의 정신을 바탕으로 의학의 교육, 진료, 연구 또는 봉사를 통하여 국내외에 큰 업적을 남기고 이 나라 의학계에 [[서재필]](徐載弼) 정신을 빛내준 의료인에게 매년 [[서재필의학상]]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lt;br /&gt;
&lt;br /&gt;
== [[서재필언론문화상]] ==&lt;br /&gt;
서재필언론문화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 [[서재필]](徐載弼)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11년 4월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에 의해 제정,수여되는 상입니다.  한국신문협회·한국방송협회·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후원하며 신문의 날(4월7일)을 전후하여 정해진 신문주간에 맞추어 시상되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 [[서재필기념회]](서재필기념재단) ==&lt;br /&gt;
위치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8가길 56 동숭빌딩 301호&lt;br /&gt;
&lt;br /&gt;
[[서재필기념회]]는 민족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송재 [[서재필]] 관련 각종 문화사업을 통해 그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재단법인이다. [[서재필의학상]] 수여, [[서재필언론문화상]] 수여, 올해의 민족언론인 선정, 헌창사업, 독립신문 연구지원, [[서재필]]에 관한 학술연구 지원 및 출판, [[서재필]] 관련 자료수집 및 연구지원, 기타 [[서재필]]의 사상과 겨레사랑을 기리는 민족선양사업을 수행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서재필박사 본가지]] == &lt;br /&gt;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다. 2007년 12월 18일 논산시의 향토문화유산 제36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서재필 진료가운]](徐載弼診療-) ==&lt;br /&gt;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 독립 기념관에 소장된 [[서재필]]이 미국에서 진료할 때 입은 진료가운.&lt;br /&gt;
&lt;br /&gt;
== [[필라델피아한인회]](필라델피아韓人會) ==&lt;br /&gt;
1970년 10월 3일 필라델피아지역에 창립된 한인봉사단체.&lt;br /&gt;
필라델피아는 [[서재필]](徐載弼)박사가 살면서 활동했던 도시이다. 필라델피아한인회는 이민 1세대를 중심으로 미주이민사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기리는 문화행사와 후속세대를 위한 장학사업 그리고 청소년 리더십 배양을 위한 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lt;br /&gt;
&lt;br /&gt;
== [[한글 타자기]] ==&lt;br /&gt;
1908년 미국 뉴욕 시러큐스 지역에서 1903년에 Wilbert Smith 형제가 LC Smith &amp;amp; Brothers Typewriter Co.설립하여 Smith Premier No 10 - 10B, 84key 모델로 만든 언문타자기로 현재 ONONDA 역사 협회 타자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언문타자기의 자판 배열 방식이 주시경 선생님의 저서중 &amp;lt;국문초학&amp;gt;에 나오는 첫째공파 모음에 나오는 배열과 동일하며 &amp;lt;국문초학&amp;gt;도 언문타자기와 같은 1908년도에 저서되었다,따라서 보통 이원익이 개발한 타자기로 알려져 있는 이원익 타자기는 여러 자료들을 살펴볼 때, 서제필박사의 영향과 &amp;lt;독립신문&amp;gt; 보정을 맏아보며 한글체계를 주도하고 연구하던 주시경 선생님에 의해 언문타자기의 활자와 자판 배열방식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인다, 또한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국민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발간된 &amp;lt;독립신문&amp;gt; 의 계승 차원에서 [[서재필]] 박사와 같은 크리스천으로 하와이에서 계몽운동을 이어가던 이원익이란 분에 의해 언문타자기로 소개가 되었을 소지가 높다, 따라서 언문타자기는 최초의 한글타자기로 보고됨이 마땅한 최초의 타자기이다.&lt;br /&gt;
&lt;br /&gt;
== [[한국 사이클 역사]]([[한국 자전거 역사]]) ==&lt;br /&gt;
우리나라에서 자전거가 언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는 상태이다. 다만 20세기를 전후한 개화 시대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서양의 선교사나 개화파 인사들이 처음 들여왔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이와는 별도로 1896년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공사 현장에 갈 때 처음으로 탔다는 설도 있고, 같은 해 고희성이 자전거를 탄 것이 처음이라 하기도 한다. 그 후 1898년 윤치호 선생이 하와이로부터 통타이어를 사용한 자전거를 도입해 왔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자전거가 생산되어 점차적으로 늘어난 자전거는 1960-1970년 사이에는 실용적인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는 경기 및 레저용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lt;br /&gt;
&lt;br /&gt;
== [[천봉산]](天鳳山) ==&lt;br /&gt;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에 있는 산.&lt;br /&gt;
높이 608m이다. 보성군 북부 산지를 대표하며 산세가 깊고 대원사 계곡을 비롯하여 계곡이 많다. 여수·순천사건 이후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특히 대원사 계곡은 전남도당이 무장부대를 최초로 편성했던 곳으로 대원사가 불에 타는 피해를 보았다. 대원사 계곡 입구에 보성군립 백민미술관이 있고, 주변에 [[서재필]]박사 [[서재필기념공원]]과 고인돌공원·삼림욕장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대한노인회 논산시지회]](大韓老人會論山市支會) ==&lt;br /&gt;
충청남도 논산시 반월동에 있는 대한노인회 소속 지회.&lt;br /&gt;
&lt;br /&gt;
대한노인회 논산시지회는 논산 지역 노인들의 권리 보장과 복지 증진을 위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회원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B2%AD%EB%8F%84_%EB%8B%AC%EC%84%B1%EC%84%9C%EC%94%A8(%E9%81%94%E5%9F%8E%E5%BE%90%E6%B0%8F)&amp;diff=145658</id>
		<title>청도 달성서씨(達城徐氏)</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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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5T22:10: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p&gt;
&lt;hr /&gt;
&lt;div&gt;[[청도 달성서씨(達城徐氏)]]&lt;br /&gt;
&lt;br /&gt;
[[서진(고려)|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대건(徐大建)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청도군의 세거 성씨. [[달성서씨]](達城徐氏) 시조 [[서진(고려)|서진]]은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 판서(判圖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고 달성[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시조 [[서진(고려)|서진]]의 아들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서영(고려)|서영]](徐穎)까지 삼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고 하며, 이에 후손들이 달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달성 서씨는 현감공파(縣監公派)·학유공파(學諭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등 9파로 나뉘어졌다.&lt;br /&gt;
&lt;br /&gt;
18세기 중엽 대구 원대에 살던 서대건은 가문에 우환이 많고 부모가 돌아가시자, 산수(山水)가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한 곳을 찾다가 청도군 각남면 신당리에 입향하였다. 이후 ‘신당 절목 십 개조(新塘節目十個條)’를 정하고 대구 감영의 허가를 얻어 마을 교화에 힘썼다고 한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청도군 내에 349가구 9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달성 서씨]] 집성촌인 각남면 신당리는 2000년대까지 50여 가구가 살던 종족 마을이었지만, 2012년 현재는 약 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 후기 문신.奉翊大夫(봉익대부)版圖判書(판도판서). 達城君(달성군) 봉작.&lt;br /&gt;
&lt;br /&gt;
[[이천서씨]](利川 徐氏)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의 8세손이다.&lt;br /&gt;
&lt;br /&gt;
본관은 [[달성서씨]].&lt;br /&gt;
&lt;br /&gt;
[[달성서씨]] 시조 [[서진(고려)|서진]] 시제는 한식일(4월5일) 대구광역시 동구 용천로30길 54-7.(지번)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329에서 거행된다. &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lt;br /&gt;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lt;br /&gt;
* 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lt;br /&gt;
** 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lt;br /&gt;
*** 큰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lt;br /&gt;
*** 큰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lt;br /&gt;
*** 큰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lt;br /&gt;
*** 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lt;br /&gt;
**** 증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lt;br /&gt;
***** 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lt;br /&gt;
****** 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lt;br /&gt;
******* 본인: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lt;br /&gt;
******** 아들: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손자: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증손자: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lt;br /&gt;
*********** 고손자: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lt;br /&gt;
************ 고고손자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lt;br /&gt;
************* 고고고손자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lt;br /&gt;
************* 고고고손자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lt;br /&gt;
************** 고고고고손자: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lt;br /&gt;
*************** 고고고고고손자:  [[서윤(조선)|서윤]](徐尹 참봉(參奉))&lt;br /&gt;
*************** 고고고고고손자: [[서괄]](徐适 훈도(訓導))&lt;br /&gt;
*************** 고고고고고손자: [[서세]](徐洗찰방(察訪))&lt;br /&gt;
*************** 고고고고고손자: [[서부(조선)|서부]](徐浮 목사(牧使))&lt;br /&gt;
************** 고고고고손자: [[서인원(조선)|서인원]](徐仁元 목사) &lt;br /&gt;
************** 고고고고손자: [[서용원(조선)|서용원]](徐勇元 생원)&lt;br /&gt;
************** 고고고고손자: [[서숙원]](徐叔元 생원)&lt;br /&gt;
************* 고고고손자 : [[서섭(조선)|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lt;br /&gt;
************ 고고손자 : [[서문간]](徐文幹 현감)&lt;br /&gt;
************* 고고고손자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lt;br /&gt;
************ 고고손자 :[[서문덕]](徐文德 현감)&lt;br /&gt;
*********** 고손자 : [[서습]](徐漝 생원)&lt;br /&gt;
*********** 고손자 : [[서환]](徐渙 생원)&lt;br /&gt;
******** 아들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lt;br /&gt;
******** 아들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lt;br /&gt;
********** 증손자: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lt;br /&gt;
*********** 고손자: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lt;br /&gt;
************ 고고손자:[[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lt;br /&gt;
************* 고고고손자: [[서거광]] (徐居廣 언양현감)&lt;br /&gt;
************* 고고고손자: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lt;br /&gt;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서용관 회장 [[서씨]] 시조 [[서신일]] 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ikWW2s6gf9g]]&lt;br /&gt;
달성서씨 [[서진(고려)|서진]]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mpAFlHvrcG0]]&lt;br /&gt;
대구서씨 [[서한(고려)|서한]]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jha5bGTbwHk]]&lt;br /&gt;
연산서씨시조 [[서준영(고려)|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uEEKPu0-mBI]]&lt;br /&gt;
&lt;br /&gt;
== 서씨 분파 ==&lt;br /&gt;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lt;br /&gt;
&lt;br /&gt;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lt;br /&gt;
&lt;br /&gt;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lt;br /&gt;
&lt;br /&gt;
==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lt;br /&gt;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lt;br /&gt;
&lt;br /&gt;
== [[서문시장]](西門市場) ==&lt;br /&gt;
서문시장(西門市場)은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재래시장으로, 대구 최대의 재래시장이다. 칠성시장과 함께 대구의 2대 장터를 이루고 있으며, 대구장이라고 불리던 조선 시대부터 서울 시전, 평양장과 더불어 3대 시장으로 발전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주로 섬유와 직물 품목을 취급하고 있으며, 대구권의 중심 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6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고 지구 내에 4천 여개의 점포가 입주해 있으며, 주위에도 다양한 상권이 발달(동산상가, 건해산물 등)했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평당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미국서씨]]&lt;br /&gt;
* [[아메리카서씨]]&lt;br /&gt;
* [[중앙아메리카서씨]]&lt;br /&gt;
* [[남아메리카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B0%BD(%EC%A1%B0%EC%84%A0)&amp;diff=145657</id>
		<title>서창(조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B0%BD(%EC%A1%B0%EC%84%A0)&amp;diff=145657"/>
				<updated>2025-09-15T22:09: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p&gt;
&lt;hr /&gt;
&lt;div&gt;서창(徐昌)&lt;br /&gt;
&lt;br /&gt;
덕양재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 학유공파(學諭公派)의 9대손인 청송 입향조 [[서윤(조선)|서윤]](徐尹)과 그의 손자 [[서창(조선)|서창]](徐昌), 그리고 [[서창(조선)|서창]]의 손자 [[서봉(조선)|서봉]](徐琒) 3인을 봉정(奉呈)하기 위하여 1800년 무렵 세운 건물로 추정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lt;br /&gt;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lt;br /&gt;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lt;br /&gt;
*********** 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lt;br /&gt;
************ 증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lt;br /&gt;
************* 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lt;br /&gt;
************* 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lt;br /&gt;
************** 아버지: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lt;br /&gt;
*************** 본인: [[서윤(조선)|서윤]](徐尹 참봉(參奉))&lt;br /&gt;
*************** 동생: [[서괄]](徐适 훈도(訓導))&lt;br /&gt;
*************** 동생: [[서세]](徐洗찰방(察訪))&lt;br /&gt;
*************** 동생: [[서부(조선)|서부(徐浮 목사]](牧使))&lt;br /&gt;
************** 작은아버지: [[서인원(조선)|서인원]](徐仁元 목사) &lt;br /&gt;
************** 작은아버지: [[서용원(조선)|서용원]](徐勇元 생원)&lt;br /&gt;
************** 작은아버지: [[서숙원]](徐叔元 생원)&lt;br /&gt;
************* 작은할아버지 : [[서섭(조선)|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lt;br /&gt;
************ 작은증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lt;br /&gt;
************* 작은할아버지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lt;br /&gt;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lt;br /&gt;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생원)&lt;br /&gt;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생원)&lt;br /&gt;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lt;br /&gt;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lt;br /&gt;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lt;br /&gt;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lt;br /&gt;
************ 작은증조할아버지:[[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lt;br /&gt;
************* 작은할아버지: [[서거광]] (徐居廣 언양현감)&lt;br /&gt;
************* 작은할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덕양재]](德陽齋) ==&lt;br /&gt;
&lt;br /&gt;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현 주왕산면] 상평리에 위치한 [[덕양재]](德陽齋)에 [[서창(조선)|서창]](徐昌)·[[서봉(조선)|서봉]](徐琫)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덕양재는 원래 덕양사(德陽祠)였으나, 사당은 훼철되고 현재 재사(齋舍)와 부속 건물 일부가 남아 있다.&lt;br /&gt;
덕양재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 학유공파(學諭公派)의 9대손인 청송 입향조 [[서윤(조선)|서윤]](徐尹)과 그의 손자 [[서창(조선)|서창]](徐昌), 그리고 [[서창(조선)|서창]]의 손자 [[서봉(조선)|서봉]](徐琒) 3인을 봉정(奉呈)하기 위하여 1800년 무렵 세운 건물로 추정한다.&lt;br /&gt;
&lt;br /&gt;
[[서윤(조선)|서윤]](徐尹)은 중종 때 정5품 문관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이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간신과 척신들을 등지고 이곳으로 들어 왔다고 하며,덕양(德陽)이란 빛의 덕으로 은혜로운 양지를 뜻할진대, 이곳 서씨 자손들에게 덕양이란 곧 [[서윤(조선)|서윤]](徐尹) 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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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봉(조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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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5T22:08: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p&gt;
&lt;hr /&gt;
&lt;div&gt;[[서봉(조선)|서봉]](徐琒)&lt;br /&gt;
&lt;br /&gt;
덕양재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 학유공파(學諭公派)의 9대손인 청송 입향조 [[서윤(조선)|서윤]](徐尹)과 그의 손자 [[서창(조선)|서창]](徐昌), 그리고 [[서창(조선)|서창]]의 손자 [[서봉(조선)|서봉]](徐琒) 3인을 봉정(奉呈)하기 위하여 1800년 무렵 세운 건물로 추정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lt;br /&gt;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lt;br /&gt;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lt;br /&gt;
*********** 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lt;br /&gt;
************ 증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lt;br /&gt;
************* 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lt;br /&gt;
************* 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lt;br /&gt;
************** 아버지: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lt;br /&gt;
*************** 본인: [[서윤(조선)|서윤]](徐尹 참봉(參奉))&lt;br /&gt;
*************** 동생: [[서괄]](徐适 훈도(訓導))&lt;br /&gt;
*************** 동생: [[서세]](徐洗찰방(察訪))&lt;br /&gt;
*************** 동생: [[서부(조선)|서부(徐浮 목사]](牧使))&lt;br /&gt;
************** 작은아버지: [[서인원(조선)|서인원]](徐仁元 목사) &lt;br /&gt;
************** 작은아버지: [[서용원(조선)|서용원]](徐勇元 생원)&lt;br /&gt;
************** 작은아버지: [[서숙원]](徐叔元 생원)&lt;br /&gt;
************* 작은할아버지 : [[서섭(조선)|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lt;br /&gt;
************ 작은증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lt;br /&gt;
************* 작은할아버지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lt;br /&gt;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lt;br /&gt;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생원)&lt;br /&gt;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생원)&lt;br /&gt;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lt;br /&gt;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lt;br /&gt;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lt;br /&gt;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lt;br /&gt;
************ 작은증조할아버지:[[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lt;br /&gt;
************* 작은할아버지: [[서거광]] (徐居廣 언양현감)&lt;br /&gt;
************* 작은할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덕양재]](德陽齋) ==&lt;br /&gt;
&lt;br /&gt;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현 주왕산면] 상평리에 위치한 [[덕양재]](德陽齋)에 [[서창(조선)|서창]](徐昌)·[[서봉(조선)|서봉]](徐琫)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덕양재는 원래 덕양사(德陽祠)였으나, 사당은 훼철되고 현재 재사(齋舍)와 부속 건물 일부가 남아 있다.&lt;br /&gt;
덕양재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 학유공파(學諭公派)의 9대손인 청송 입향조 [[서윤(조선)|서윤]](徐尹)과 그의 손자 [[서창(조선)|서창]](徐昌), 그리고 [[서창(조선)|서창]]의 손자 [[서봉(조선)|서봉]](徐琒) 3인을 봉정(奉呈)하기 위하여 1800년 무렵 세운 건물로 추정한다.&lt;br /&gt;
&lt;br /&gt;
[[서윤(조선)|서윤]](徐尹)은 중종 때 정5품 문관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이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간신과 척신들을 등지고 이곳으로 들어 왔다고 하며,덕양(德陽)이란 빛의 덕으로 은혜로운 양지를 뜻할진대, 이곳 서씨 자손들에게 덕양이란 곧 [[서윤(조선)|서윤]](徐尹) 입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C%A0%EC%9B%90(%EC%A1%B0%EC%84%A0)&amp;diff=145655</id>
		<title>서유원(조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C%9C%A0%EC%9B%90(%EC%A1%B0%EC%84%A0)&amp;diff=145655"/>
				<updated>2025-09-12T14:19: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동산재(東山齋) */&lt;/p&gt;
&lt;hr /&gt;
&lt;div&gt;서유원(徐惟遠)&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동산재]](東山齋) ==&lt;br /&gt;
&lt;br /&gt;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방산리 12번지&lt;br /&gt;
&lt;br /&gt;
[[서방경]](徐方慶), [[서극인]](徐克仁), [[서유원(조선)|서유원]](徐惟遠) 세분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향림과 후손이 건립하였다.&lt;br /&gt;
[[서방경]]의 자(字)는 군길(君吉), 호(號)는 직재(直齋), 본관은 달성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고려)|서진]](徐晉)의 후손으로 귀계공(龜溪公) [[서침]](徐沈)의 7세손이다. 종질(從姪) [[서극인]], 죽계(竹溪) 이대임(李大任)과 임진왜란때 곽재우 휘하의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워 경주판관(慶州判官), 해주판관(海州判官)을 제수받고 세상을 떠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받았다. [[서극인]]은 봉사(奉事)를 제수받았다.&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lt;br /&gt;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lt;br /&gt;
************ 큰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lt;br /&gt;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lt;br /&gt;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lt;br /&gt;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lt;br /&gt;
*************** 큰증조할아버지: [[서윤(조선)|서윤]](徐尹 참봉(參奉))&lt;br /&gt;
*************** 큰증조할아버지: [[서괄]](徐适 훈도(訓導))&lt;br /&gt;
*************** 큰증조할아버지: [[서세]](徐洗찰방(察訪))&lt;br /&gt;
*************** 큰증조할아버지: [[서부(조선)|서부]](徐浮 목사(牧使))&lt;br /&gt;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인원(조선)|서인원]](徐仁元 목사) &lt;br /&gt;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용원(조선)|서용원]](徐勇元 생원)&lt;br /&gt;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숙원]](徐叔元 생원)&lt;br /&gt;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섭(조선)|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lt;br /&gt;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lt;br /&gt;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lt;br /&gt;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진손]](徐震孫 직장)&lt;br /&gt;
*************** 큰고조할아버지 : [[서미수(조선)|서미수]](徐眉壽 생원)&lt;br /&gt;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태손]](徐兌孫 처사)&lt;br /&gt;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중손]](徐仲孫 생원)&lt;br /&gt;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건손]](徐乾孫 주부)&lt;br /&gt;
************** 고고조할아버지 : [[서의손]](徐義孫 감찰)&lt;br /&gt;
*************** 고조할아버지 : [[서구(조선1)|서구]](徐矩 판관)&lt;br /&gt;
**************** 큰증조할아버지 : [[서진(조선2)|서진]](徐津 습독(習讀))&lt;br /&gt;
**************** 큰증조할아버지 : [[서우(조선2)|서우]](徐遇 사직(司直))&lt;br /&gt;
***************** 큰할아버지 : [[서덕겸]](徐德謙 직장)&lt;br /&gt;
***************** 큰할아버지 : [[서극겸]](徐克謙 처사)&lt;br /&gt;
***************** 큰할아버지 : [[서득겸]](徐得謙 의병장)&lt;br /&gt;
***************** 큰할아버지 : [[서재겸]](徐再謙 죽계공(竹溪公).의병장)&lt;br /&gt;
**************** 증조할아버지 : [[서규(조선)|서규]] (徐規 증공조정랑(贈工曹正郎) &lt;br /&gt;
***************** 할아버지 : [[서희(조선)|서희]]((徐熙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lt;br /&gt;
****************** 큰아버지 : [[서인충]](徐仁忠 의병장 망조당공(望潮堂公))&lt;br /&gt;
****************** 아버지 : [[서인봉]](徐仁鳳 감찰)&lt;br /&gt;
******************* 형 : [[서경원]](徐景遠 처사)&lt;br /&gt;
******************* 형 : [[서종원]](徐宗遠 처사)&lt;br /&gt;
******************* 본인 : [[서유원(조선1)|서유원]](徐惟遠 만각제공(晩覺齊公))&lt;br /&gt;
******************* 동생 : [[서관(조선1)|서관]](徐寬 중추부사(中樞府使))&lt;br /&gt;
******************** 조카: [[서시립]](徐時立 의병장 전귀당(全歸堂))&lt;br /&gt;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lt;br /&gt;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생원)&lt;br /&gt;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생원)&lt;br /&gt;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lt;br /&gt;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lt;br /&gt;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lt;br /&gt;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덕서)&lt;br /&gt;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lt;br /&gt;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서거광]] (徐居廣 언양현감)&lt;br /&gt;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lt;br /&gt;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lt;br /&gt;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lt;br /&gt;
&lt;br /&gt;
== [[서문시장]](西門市場) ==&lt;br /&gt;
서문시장(西門市場)은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재래시장으로, 대구 최대의 재래시장이다. 칠성시장과 함께 대구의 2대 장터를 이루고 있으며, 대구장이라고 불리던 조선 시대부터 서울 시전, 평양장과 더불어 3대 시장으로 발전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주로 섬유와 직물 품목을 취급하고 있으며, 대구권의 중심 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6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고 지구 내에 4천 여개의 점포가 입주해 있으며, 주위에도 다양한 상권이 발달(동산상가, 건해산물 등)했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D%98%B8(%EC%A1%B0%EC%84%A01)&amp;diff=145654</id>
		<title>서호(조선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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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2T14:17: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p&gt;
&lt;hr /&gt;
&lt;div&gt;생원&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lt;br /&gt;
&lt;br /&gt;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lt;br /&gt;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lt;br /&gt;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lt;br /&gt;
********** 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lt;br /&gt;
*********** 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lt;br /&gt;
************ 증조할아버지 : [[서맹원(조선)|서맹원]](徐孟源 충순위)&lt;br /&gt;
************* 할아버지 : [[서필(조선)|서필]](徐弼 예빈시 직장)&lt;br /&gt;
************** 아버지 : [[서응기]](徐應期 생원)&lt;br /&gt;
*************** 형 : [[서형]](徐泂 진사)&lt;br /&gt;
**************** 조카(양자.[[서흡]]의 자):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 학자)&lt;br /&gt;
**************** 형 :[[서흡]](徐洽 전교)&lt;br /&gt;
**************** 형 : [[서식(조선)|서식]](徐湜 의병장)&lt;br /&gt;
**************** 형 : [[서함]](徐涵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lt;br /&gt;
***************** 조카: [[서사건]](徐思建 증 장악원 정(贈 掌樂院正) &lt;br /&gt;
****************** 손조카: [[서변]](徐忭 학자)&lt;br /&gt;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lt;br /&gt;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lt;br /&gt;
****************  본인 :  [[서호(조선1)|서호]](徐灝 생원)&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4%9C%ED%98%B8(%EC%A1%B0%EC%84%A01)&amp;diff=145653</id>
		<title>서호(조선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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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2T14:1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p&gt;
&lt;hr /&gt;
&lt;div&gt;생원&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 가족 ==&lt;br /&gt;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lt;br /&gt;
&lt;br /&gt;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lt;br /&gt;
&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lt;br /&gt;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lt;br /&gt;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lt;br /&gt;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lt;br /&gt;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lt;br /&gt;
********** 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lt;br /&gt;
*********** 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lt;br /&gt;
************ 증조할아버지 : [[서맹원(조선)|서맹원]](徐孟源 충순위)&lt;br /&gt;
************* 할아버지 : [[서필(조선)|서필]](徐弼 예빈시 직장)&lt;br /&gt;
************** 아버지 : [[서응기]](徐應期 생원)&lt;br /&gt;
*************** 형 : [[서형]](徐泂 진사)&lt;br /&gt;
**************** 조카(양자.[[서흡]]의 자):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 학자)&lt;br /&gt;
**************** 형 :[[서흡]](徐洽 전교)&lt;br /&gt;
**************** 형 : [[서식(조선)|서식]](徐湜 의병장)&lt;br /&gt;
**************** 형 : [[서함]](徐涵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lt;br /&gt;
***************** 조카: [[서사건]](徐思建 증 장악원 정(贈 掌樂院正) &lt;br /&gt;
****************** 손조카: [[서변]](徐忭 학자)&lt;br /&gt;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lt;br /&gt;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lt;br /&gt;
****************  본인 :  [[서호(조선1)|서호]](徐灝 생원)&lt;br /&gt;
&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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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B%AC%B8%ED%95%99%EC%82%B0%EC%97%90%EC%84%9C_%EA%B1%B4%EA%B5%AD%ED%95%9C_%EB%B9%84%EB%A5%98_%EB%B0%B1%EC%A0%9C&amp;diff=145652</id>
		<title>문학산에서 건국한 비류 백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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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2T14:09: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p&gt;
&lt;hr /&gt;
&lt;div&gt;[[문학산에서 건국한 비류 백제]](文鶴山-建國-沸流百濟)&lt;br /&gt;
&lt;br /&gt;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전해지는 백제 건국 신화에 대한 설화. [[비류]]와 [[온조왕]]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하지만 [[비류]]가 도읍을 정한 [[미추홀]]은 비류는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말라 살기에 적당치 않았다. [[비류]]는 [[비류국]]을 세웠으나 13년 만에 멸망하여 십제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1999년 8월에 인하 대학교 국문학과 설화 채집반이 문학산 일대의 전설과 민담의 수집을 했다. 당시 지도 교수인 최인학과 대학원생 염희경, 심명숙, 신세윤 등 네 명이 답사하여 채록했다. &lt;br /&gt;
[[비류]]와 [[온조]]([[온조왕]])은 삼각산에 올라가 서로 살 곳을 정하기로 했다. 형인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했으므로 [[미추홀]]의 문학산에 성을 쌓고 살게 되었고, 동생인 [[온조왕]]는 한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십제를 세웠다. 그런데 비류가 세운 곳은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르며, 물이 짜서 사람 살기에 적당치 않았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 어느 날 [[비류]]는 동생 [[온조]]가 세운 십제에 가 보았다. 그곳은 땅이 기름지고 넓어 사람들이 잘 살고 나라의 기틀이 잡혀 있었다. 이에 [[비류]]는 의기소침하여 미추홀에 돌아와서 그만 죽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비류의 능을 에분(恚墳)[분해서 죽은 사람의 무덤]이라 불렀다. 비류의 능이 문학산 정상에 있을 것이라고 하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lt;br /&gt;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 의하면, [[비류]]와 그의 동생 [[온조]]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에 봉해지자 위협을 느껴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새 국가 건설을 위해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비류]]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아우인 [[온조]]와 결별한다. 이 과정에서 [[비류]]는 고구려에서 함께 남하한 신하들의 간언을 물리침으로써 이들과도 갈라서게 된다. [[비류]]를 따르는 신하가 없었다는 것은 장차 [[미추홀]]에서의 국가 경영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추홀로 옮겨가 자리를 잡는다. 비류가 문학산 주변을 근거지로 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은 [[미추홀]]이 한 나라의 도읍지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은 지리적 여건상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르며 물이 짜서 사람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미추홀]]이 백성들이 살기에 부적합한 지역으로 묘사된 것은 온전한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으로, [[비류]]가 국가의 경영에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비류]]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결하며, 그의 백성은 [[온조]]의 십제에 흡수된다. [[비류]]의 자결과 백성들의 귀의는 [[온조]]의 십제가 [[비류]]의 [[미추홀]]을 흡수·병합하는 과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비류(沸流)&lt;br /&gt;
&lt;br /&gt;
삼국시대 백제의 미추홀에서 일어난 왕족의 건국 시조.&lt;br /&gt;
&lt;br /&gt;
&lt;br /&gt;
백제 미추홀(彌鄒忽 :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의 인천부근으로 추정됨)에서 일어난 왕족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溫祚)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와 함께 [[비류]]가 시조라는 이설도 실려 있다.&lt;br /&gt;
&lt;br /&gt;
이러한 두가지 시조설화가 남게 된 것은 처음 [[비류]]는 미추홀에서, [[온조왕]]는 지금의 서울 한강유역에서 따로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여 두 집단이 각기 자기 시조를 내세운 결과로 이해된다.&lt;br /&gt;
&lt;br /&gt;
한편 ≪삼국사기≫ 등에는 비류집단의 계보는 전하지 않으며, 백제왕들은 모두 온조계보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비류계 설화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이 백제 후기까지 계속 존재하였던 때문으로 여겨진다.&lt;br /&gt;
&lt;br /&gt;
‘비류’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고구려 송양국(松讓國)을 비류국이라고도 하고 강(江)의 이름도 비류수라 하고 있으며, 또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에서는 [[비류]]를 ‘[[피류]](避流)’로, [[온조왕]]를 ‘[[은조]](殷祚)’로 표기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lt;br /&gt;
&lt;br /&gt;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lt;br /&gt;
&lt;br /&gt;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lt;br /&gt;
&lt;br /&gt;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lt;br /&gt;
&lt;br /&gt;
&lt;br /&gt;
== [[문학산에서 건국한 비류 백제]](文鶴山-建國-沸流百濟) ==&lt;br /&gt;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전해지는 백제 건국 신화에 대한 설화. [[비류]]와 [[온조왕]]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하지만 [[비류]]가 도읍을 정한 [[미추홀]]은 비류는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말라 살기에 적당치 않았다. [[비류]]는 [[비류국]]을 세웠으나 13년 만에 멸망하여 십제에 병합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lt;br /&gt;
&lt;br /&gt;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lt;br /&gt;
&lt;br /&gt;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lt;br /&gt;
&lt;br /&gt;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lt;br /&gt;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숭렬전]](崇烈殿) ==&lt;br /&gt;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온조왕묘]](溫祚王廟) ==&lt;br /&gt;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lt;br /&gt;
&lt;br /&gt;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lt;br /&gt;
&lt;br /&gt;
==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lt;br /&gt;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amp;gt;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lt;br /&gt;
&lt;br /&gt;
== [[삼충제]](三忠祭) ==&lt;br /&gt;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lt;br /&gt;
&lt;br /&gt;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lt;br /&gt;
&lt;br /&gt;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lt;br /&gt;
&lt;br /&gt;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lt;br /&gt;
&lt;br /&gt;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lt;br /&gt;
&lt;br /&gt;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 &lt;br /&gt;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B%A0%EC%A7%84%EC%82%AC%EB%8C%80%EB%B6%80(%EA%B3%A0%EB%A0%A4)&amp;diff=145651</id>
		<title>신진사대부(고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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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1T10:47: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는 고려말 조선초 성리학(性理學) 중심의 개혁을 추구하였던 정치세력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누적된 사회경제적 모순을 제거하고 비정상적인 정치제도와 운영을 정상화시키는 한편, 성리학적 예제를 통해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지향했던 세력이었다.&lt;br /&gt;
&lt;br /&gt;
신진사대부는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이라 할 수 있다. 신진사대부는 원(元)의 관학(官學)인 성리학을 수용하고 이를 심화시키는 한편, 내재화하여 사회사상으로 보급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하고, 가족윤리 중심의 윤리의식과 인의(仁義)를 중심으로 하는 군신관계를 지향함으로써 종래의 군주권이 아닌 신권 중심의 정치질서를 추구하였다.&lt;br /&gt;
&lt;br /&gt;
신진사대부는 정치적으로 권문세족의 대척점(對蹠點)에 위치한 신진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무신정권기와 원간섭기를 거치며 기형적 형태로 변화해온 정치체제와 정치운영을 정상화하고,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수조권 분급제 역시 정상적인 형태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이들의 개혁론은 유자(儒子)로서 정치참여를 통해 왕도를 실현하려는 방안이었다.&lt;br /&gt;
&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lt;br /&gt;
&lt;br /&gt;
&lt;br /&gt;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amp;lt;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amp;gt;.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amp;quot;&amp;gt;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lt;br /&gt;
&lt;br /&gt;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amp;quot;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amp;quot;(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lt;br /&gt;
&lt;br /&gt;
== [[기자조선]]의 후손설 ==&lt;br /&gt;
&lt;br /&gt;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lt;br /&gt;
&lt;br /&gt;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lt;br /&gt;
&lt;br /&gt;
기자조선의 영역&lt;br /&gt;
&lt;br /&gt;
&lt;br /&gt;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amp;lt;대업(大業) 혹 고요(皐陶)&amp;gt;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lt;br /&gt;
&lt;br /&gt;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lt;br /&gt;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lt;br /&gt;
&lt;br /&gt;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amp;lt;삼국사기&amp;gt;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amp;lt;삼국사기&amp;gt;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lt;br /&gt;
 &lt;br /&gt;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lt;br /&gt;
 &lt;br /&gt;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lt;br /&gt;
 &lt;br /&gt;
또한 &amp;lt;자치통감&amp;gt;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lt;br /&gt;
 &lt;br /&gt;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amp;lt;진서&amp;gt;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lt;br /&gt;
 &lt;br /&gt;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lt;br /&gt;
 &lt;br /&gt;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lt;br /&gt;
 &lt;br /&gt;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lt;br /&gt;
 &lt;br /&gt;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lt;br /&gt;
 &lt;br /&gt;
&lt;br /&gt;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lt;br /&gt;
 &lt;br /&gt;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amp;lt;삼국사기&amp;gt;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분파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흑치씨]](黑齒氏) - &amp;lt;[[흑치상지]] 묘지명&amp;gt;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amp;lt;동성왕조&amp;gt;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amp;gt; 백가 &amp;gt;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lt;br /&gt;
&lt;br /&gt;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lt;br /&gt;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lt;br /&gt;
&lt;br /&gt;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amp;lt;왕력편&amp;gt;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amp;quot;[[동성왕]]의 아들&amp;quot;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lt;br /&gt;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lt;br /&gt;
&lt;br /&gt;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lt;br /&gt;
&lt;br /&gt;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lt;br /&gt;
&lt;br /&gt;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lt;br /&gt;
&lt;br /&gt;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lt;br /&gt;
&lt;br /&gt;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lt;br /&gt;
&lt;br /&gt;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lt;br /&gt;
&lt;br /&gt;
== [[부여]]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lt;br /&gt;
&lt;br /&gt;
[[여현]]&lt;br /&gt;
&lt;br /&gt;
[[여울]]&lt;br /&gt;
&lt;br /&gt;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lt;br /&gt;
&lt;br /&gt;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lt;br /&gt;
&lt;br /&gt;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lt;br /&gt;
&lt;br /&gt;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lt;br /&gt;
&lt;br /&gt;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lt;br /&gt;
&lt;br /&gt;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lt;br /&gt;
&lt;br /&gt;
[[우복]](優福)&lt;br /&gt;
&lt;br /&gt;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lt;br /&gt;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lt;br /&gt;
&lt;br /&gt;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lt;br /&gt;
&lt;br /&gt;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lt;br /&gt;
&lt;br /&gt;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lt;br /&gt;
&lt;br /&gt;
[[부여기]]&lt;br /&gt;
&lt;br /&gt;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lt;br /&gt;
&lt;br /&gt;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lt;br /&gt;
&lt;br /&gt;
[[부여력]](夫餘歷)&lt;br /&gt;
&lt;br /&gt;
[[부여고]](夫餘固)&lt;br /&gt;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lt;br /&gt;
&lt;br /&gt;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lt;br /&gt;
&lt;br /&gt;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lt;br /&gt;
&lt;br /&gt;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lt;br /&gt;
&lt;br /&gt;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lt;br /&gt;
&lt;br /&gt;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lt;br /&gt;
&lt;br /&gt;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lt;br /&gt;
&lt;br /&gt;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lt;br /&gt;
&lt;br /&gt;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lt;br /&gt;
&lt;br /&gt;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lt;br /&gt;
&lt;br /&gt;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lt;br /&gt;
&lt;br /&gt;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lt;br /&gt;
&lt;br /&gt;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lt;br /&gt;
&lt;br /&gt;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lt;br /&gt;
&lt;br /&gt;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lt;br /&gt;
&lt;br /&gt;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lt;br /&gt;
&lt;br /&gt;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lt;br /&gt;
&lt;br /&gt;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lt;br /&gt;
&lt;br /&gt;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lt;br /&gt;
&lt;br /&gt;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lt;br /&gt;
&lt;br /&gt;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amp;quot;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amp;quot;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amp;quot;[[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amp;quot;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amp;quot;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amp;quot;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lt;br /&gt;
&lt;br /&gt;
== 서씨 분파 ==&lt;br /&gt;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lt;br /&gt;
&lt;br /&gt;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lt;br /&gt;
== [[타타르인(타타르어: татарлар / tatarlar 타타를라르,татары)]] ==&lt;br /&gt;
유라시아에 걸쳐 거주하는 여러 튀르크계 민족을 가리키는 포괄적 명칭이다. 오늘날에는 타타르인이라 하면 특히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타타르어를 사용하는 최대 집단인 볼가 타타르인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나, 역사적으로 구분되는 크림 타타르인, 시베리아 타타르인 등 다른 집단들도 현존한다. 이들 모두 궁극적으로는 킵차크 칸국(금장한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슬람교를 믿고 킵차크어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lt;br /&gt;
&lt;br /&gt;
== [[볼가 타타르인 또는 간단히 타타르인(татарлар, tatarlar)]] ==&lt;br /&gt;
러시아의 이델-우랄 지역에서 유래한 타타르인의 일파로, 타타르인 집단 중 가장 규모가 커서 단순히 &amp;quot;타타르인&amp;quot;이라 하면 이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러시아 연방에서 인구는 약 530만 명으로 러시아인 다음으로 수가 많은 민족 집단이며, 특히 타타르스탄 공화국과 바슈코르토스탄 공화국에 많은 인구가 거주한다. 튀르크어족 킵차크어파에 속하는 타타르어를 사용하며 주로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으나 간혹 러시아 정교회 신자도 있다.&lt;br /&gt;
&lt;br /&gt;
== [[칭기즈 칸( 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 Činggis Qan, Чингис хаан, 成吉思汗 성길사한)]] ==&lt;br /&gt;
칭기스 한,  Genghis Khan, 1162년 11월 12일 ~ 1227년 8월 25일)&lt;br /&gt;
&lt;br /&gt;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카안이다. 중국식 별칭은 칭기스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聖運武皇帝)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lt;br /&gt;
ᠲᠡᠮᠦᠵᠢᠨ, 한국 한자: 孛兒只斤鐵木眞 패아지근철목진)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나라 때는 특목진(特穆津)으로 지칭되다가 청나라 멸망 후 테무진으로 복구되었다.&lt;br /&gt;
&lt;br /&gt;
== [[암바가이 칸(俺巴孩, ᠠᠮᠪᠠᠭᠠᠢ ᠬᠠᠨ Ambaγai Qan,Амбагай хан]] ==&lt;br /&gt;
(1091년? ~ 1156년)은 암바카이 칸(몽골어: ᠠᠮᠪᠠᠬᠠᠢ ᠬᠠᠨ Ambaqai Qan)&lt;br /&gt;
원사에는 함바카이 칸(咸補海汗) 또는 함바카이(咸補海), 한포하이(罕布海) 등으로도 나타난다. 보르지긴 오복의 타이치우트 집단의 추장이자 몽골의 제2대 칸이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스 칸의 증조부 카불 칸의 사촌 동생이자 계승자였다. 예수게이의 재종조부가 된다. 손자로는 타르구타이가 있다.&lt;br /&gt;
&lt;br /&gt;
== [[대몽골국(大蒙古國,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예케 몽골 울루스,Их Монгол улс 이흐 몽골 올스), 통칭 몽골 제국(蒙古帝國,Mongol Empire)]] == &lt;br /&gt;
13~14세기 사이에 존속한 유목 제국이자 역사상 가장 큰 육상 제국이었다. 오늘날의 몽골 초원 일대에서 발흥한 몽골 제국은 남북으로 베트남~북인도 일부에서부터 동유럽을 넘어 북극 일부까지,동서로는 동해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레반트와 카르파티아 산맥까지의 영역을 아울렀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lt;br /&gt;
&lt;br /&gt;
== 밴드 가입방법[[https://band.us/@seosarang]]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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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lt;br /&gt;
&lt;br /&gt;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lt;br /&gt;
&lt;br /&gt;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 [[이천 서씨]] &lt;br /&gt;
*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헝가리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C%8B%A0%EC%A7%84%EC%82%AC%EB%8C%80%EB%B6%80(%EA%B3%A0%EB%A0%A4)&amp;diff=145650</id>
		<title>신진사대부(고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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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1T10:44: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새 문서: 서씨는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lt;/p&gt;
&lt;hr /&gt;
&lt;div&gt;[[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lt;br /&gt;
&lt;br /&gt;
&lt;br /&gt;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amp;lt;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amp;gt;.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amp;quot;&amp;gt;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lt;br /&gt;
&lt;br /&gt;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amp;quot;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amp;quot;(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lt;br /&gt;
&lt;br /&gt;
== [[기자조선]]의 후손설 ==&lt;br /&gt;
&lt;br /&gt;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lt;br /&gt;
&lt;br /&gt;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lt;br /&gt;
&lt;br /&gt;
기자조선의 영역&lt;br /&gt;
&lt;br /&gt;
&lt;br /&gt;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amp;lt;대업(大業) 혹 고요(皐陶)&amp;gt;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lt;br /&gt;
&lt;br /&gt;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lt;br /&gt;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lt;br /&gt;
&lt;br /&gt;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amp;lt;삼국사기&amp;gt;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amp;lt;삼국사기&amp;gt;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lt;br /&gt;
 &lt;br /&gt;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lt;br /&gt;
 &lt;br /&gt;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lt;br /&gt;
 &lt;br /&gt;
또한 &amp;lt;자치통감&amp;gt;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lt;br /&gt;
 &lt;br /&gt;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amp;lt;진서&amp;gt;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lt;br /&gt;
 &lt;br /&gt;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lt;br /&gt;
 &lt;br /&gt;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lt;br /&gt;
 &lt;br /&gt;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lt;br /&gt;
 &lt;br /&gt;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lt;br /&gt;
 &lt;br /&gt;
&lt;br /&gt;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lt;br /&gt;
 &lt;br /&gt;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amp;lt;삼국사기&amp;gt;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분파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흑치씨]](黑齒氏) - &amp;lt;[[흑치상지]] 묘지명&amp;gt;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amp;lt;동성왕조&amp;gt;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amp;gt; 백가 &amp;gt;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lt;br /&gt;
&lt;br /&gt;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lt;br /&gt;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lt;br /&gt;
&lt;br /&gt;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amp;lt;왕력편&amp;gt;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amp;quot;[[동성왕]]의 아들&amp;quot;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lt;br /&gt;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lt;br /&gt;
&lt;br /&gt;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lt;br /&gt;
&lt;br /&gt;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lt;br /&gt;
&lt;br /&gt;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lt;br /&gt;
&lt;br /&gt;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lt;br /&gt;
&lt;br /&gt;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lt;br /&gt;
&lt;br /&gt;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lt;br /&gt;
&lt;br /&gt;
== [[부여]]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lt;br /&gt;
&lt;br /&gt;
[[여현]]&lt;br /&gt;
&lt;br /&gt;
[[여울]]&lt;br /&gt;
&lt;br /&gt;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lt;br /&gt;
&lt;br /&gt;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lt;br /&gt;
&lt;br /&gt;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lt;br /&gt;
&lt;br /&gt;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lt;br /&gt;
&lt;br /&gt;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lt;br /&gt;
&lt;br /&gt;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lt;br /&gt;
&lt;br /&gt;
[[우복]](優福)&lt;br /&gt;
&lt;br /&gt;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lt;br /&gt;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lt;br /&gt;
&lt;br /&gt;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lt;br /&gt;
&lt;br /&gt;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lt;br /&gt;
&lt;br /&gt;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lt;br /&gt;
&lt;br /&gt;
[[부여기]]&lt;br /&gt;
&lt;br /&gt;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lt;br /&gt;
&lt;br /&gt;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lt;br /&gt;
&lt;br /&gt;
[[부여력]](夫餘歷)&lt;br /&gt;
&lt;br /&gt;
[[부여고]](夫餘固)&lt;br /&gt;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lt;br /&gt;
&lt;br /&gt;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lt;br /&gt;
&lt;br /&gt;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lt;br /&gt;
&lt;br /&gt;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lt;br /&gt;
&lt;br /&gt;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lt;br /&gt;
&lt;br /&gt;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lt;br /&gt;
&lt;br /&gt;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lt;br /&gt;
&lt;br /&gt;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lt;br /&gt;
&lt;br /&gt;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lt;br /&gt;
&lt;br /&gt;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lt;br /&gt;
&lt;br /&gt;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lt;br /&gt;
&lt;br /&gt;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lt;br /&gt;
&lt;br /&gt;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lt;br /&gt;
&lt;br /&gt;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lt;br /&gt;
&lt;br /&gt;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lt;br /&gt;
&lt;br /&gt;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lt;br /&gt;
&lt;br /&gt;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lt;br /&gt;
&lt;br /&gt;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lt;br /&gt;
&lt;br /&gt;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lt;br /&gt;
&lt;br /&gt;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lt;br /&gt;
&lt;br /&gt;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amp;quot;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amp;quot;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amp;quot;[[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amp;quot;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amp;quot;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amp;quot;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lt;br /&gt;
&lt;br /&gt;
== 서씨 분파 ==&lt;br /&gt;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lt;br /&gt;
&lt;br /&gt;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lt;br /&gt;
== [[타타르인(타타르어: татарлар / tatarlar 타타를라르,татары)]] ==&lt;br /&gt;
유라시아에 걸쳐 거주하는 여러 튀르크계 민족을 가리키는 포괄적 명칭이다. 오늘날에는 타타르인이라 하면 특히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타타르어를 사용하는 최대 집단인 볼가 타타르인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나, 역사적으로 구분되는 크림 타타르인, 시베리아 타타르인 등 다른 집단들도 현존한다. 이들 모두 궁극적으로는 킵차크 칸국(금장한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슬람교를 믿고 킵차크어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lt;br /&gt;
&lt;br /&gt;
== [[볼가 타타르인 또는 간단히 타타르인(татарлар, tatarlar)]] ==&lt;br /&gt;
러시아의 이델-우랄 지역에서 유래한 타타르인의 일파로, 타타르인 집단 중 가장 규모가 커서 단순히 &amp;quot;타타르인&amp;quot;이라 하면 이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러시아 연방에서 인구는 약 530만 명으로 러시아인 다음으로 수가 많은 민족 집단이며, 특히 타타르스탄 공화국과 바슈코르토스탄 공화국에 많은 인구가 거주한다. 튀르크어족 킵차크어파에 속하는 타타르어를 사용하며 주로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으나 간혹 러시아 정교회 신자도 있다.&lt;br /&gt;
&lt;br /&gt;
== [[칭기즈 칸( 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 Činggis Qan, Чингис хаан, 成吉思汗 성길사한)]] ==&lt;br /&gt;
칭기스 한,  Genghis Khan, 1162년 11월 12일 ~ 1227년 8월 25일)&lt;br /&gt;
&lt;br /&gt;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카안이다. 중국식 별칭은 칭기스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聖運武皇帝)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lt;br /&gt;
ᠲᠡᠮᠦᠵᠢᠨ, 한국 한자: 孛兒只斤鐵木眞 패아지근철목진)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나라 때는 특목진(特穆津)으로 지칭되다가 청나라 멸망 후 테무진으로 복구되었다.&lt;br /&gt;
&lt;br /&gt;
== [[암바가이 칸(俺巴孩, ᠠᠮᠪᠠᠭᠠᠢ ᠬᠠᠨ Ambaγai Qan,Амбагай хан]] ==&lt;br /&gt;
(1091년? ~ 1156년)은 암바카이 칸(몽골어: ᠠᠮᠪᠠᠬᠠᠢ ᠬᠠᠨ Ambaqai Qan)&lt;br /&gt;
원사에는 함바카이 칸(咸補海汗) 또는 함바카이(咸補海), 한포하이(罕布海) 등으로도 나타난다. 보르지긴 오복의 타이치우트 집단의 추장이자 몽골의 제2대 칸이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스 칸의 증조부 카불 칸의 사촌 동생이자 계승자였다. 예수게이의 재종조부가 된다. 손자로는 타르구타이가 있다.&lt;br /&gt;
&lt;br /&gt;
== [[대몽골국(大蒙古國,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예케 몽골 울루스,Их Монгол улс 이흐 몽골 올스), 통칭 몽골 제국(蒙古帝國,Mongol Empire)]] == &lt;br /&gt;
13~14세기 사이에 존속한 유목 제국이자 역사상 가장 큰 육상 제국이었다. 오늘날의 몽골 초원 일대에서 발흥한 몽골 제국은 남북으로 베트남~북인도 일부에서부터 동유럽을 넘어 북극 일부까지,동서로는 동해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레반트와 카르파티아 산맥까지의 영역을 아울렀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lt;br /&gt;
==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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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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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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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lt;br /&gt;
&lt;br /&gt;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lt;br /&gt;
&lt;br /&gt;
== 같이 보기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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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서씨]]&lt;br /&gt;
* [[달성 서씨]]&lt;br /&gt;
* [[부여 서씨]]&lt;br /&gt;
* [[연산 서씨]]&lt;br /&gt;
* [[남양 서씨]]&lt;br /&gt;
* [[당성 서씨]]&lt;br /&gt;
* [[봉성 서씨]]&lt;br /&gt;
* [[절강 서씨]]&lt;br /&gt;
* [[중국 서씨]]&lt;br /&gt;
* [[일본 서씨]]&lt;br /&gt;
* [[몽고서씨]]&lt;br /&gt;
* [[러시아서씨]]&lt;br /&gt;
* [[튀르키예서씨]]&lt;br /&gt;
* [[멕시코서씨]]&lt;br /&gt;
* [[불가리아서씨]]&lt;br /&gt;
* [[헝가리서씨]]&lt;br /&gt;
* [[중앙아시아서씨]]&lt;br /&gt;
* [[카자흐스탄서씨]]&lt;br /&gt;
* [[우즈베키스탄서씨]]&lt;/div&gt;</summary>
		<author><name>Jwseo21</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title=%EA%B6%8C%EB%AC%B8%EC%84%B8%EC%A1%B1&amp;diff=145649</id>
		<title>권문세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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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9-11T10:43: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Jwseo21: &lt;/p&gt;
&lt;hr /&gt;
&lt;div&gt;권문세족(權門勢族) 또는 권문세가(權門勢家)는 고려 후기의 지배 계층으로 1270년 음력 5월부터 1388년 음력 6월 3일까지 주도권을 잡았던 친원 세력을 뜻한다.&lt;br /&gt;
&lt;br /&gt;
13 ~ 14세기 고려 원 간섭기 시기의 지배층을 말한다. 고려인 지배층으로 고려 무신정권이 사라지고 나서 고려 왕의 세력인 측근 세력이나 이전부터 권세를 누려왔던 고려인 문무 관리들을 가리킨다. 고려 전기부터 있던 문벌귀족 일부와 고려 무신정권 때 성장한 고려인 무인 가문들 그리고 고려 왕의 측근들의 세력을 지칭한다.&lt;br /&gt;
&lt;br /&gt;
고려의 지배층은 모두가 고려인으로서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간섭이 있었지만 매우 제한적이었고 고려의 관리들은 원칙적으로 모두 고려인이 임명되었으며 몽고인의 권문세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중국에는 몽골인만이 관리하는 행성들이 설치된 것과 다르게 고려에는 북방 지역의 다루가치도 고려대 등용되었다. 이는 심양왕과 같이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 동맹에 의한 특별 관계에서 나타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의 성립 시기는 원나라와 30년간의 전쟁을 끝내고 대원(對元) 관계가 안정되는 원종대(재위 1259년 ~ 1274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구체적으로는 1308년에 충선왕이 복위하여 발표한 교서에서 ‘재상지종(宰相之宗)’이라 하여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을 나열한 데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이란 당시 고려의 최고 가문을 뜻하므로 그것은 곧 당시 지배세력의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상지종’으로 언급된 가문은&lt;br /&gt;
&lt;br /&gt;
또한 소수의 권문세족의 하위층에는 고려인 환관들도 있는데 원나라에 파견된 고려인 환관이 원나라의 신뢰를 받고 다시 고려로 파견되어 고려왕실의 세력에 간섭하며 나라를 어지럽히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고려의 무신인 최영으로 대표되는 권문세족은 우왕 때부터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위화도 회군 이후 반원 성격인 신진사대부에게 주도권을 빼앗겼고, 1389년 음력 11월 15일 창왕이 폐위되자 소멸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서씨]]는&lt;br /&gt;
&lt;br /&gt;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amp;quot;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amp;quot;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lt;br /&gt;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lt;br /&gt;
&lt;br /&gt;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lt;br /&gt;
&lt;br /&gt;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lt;br /&gt;
&lt;br /&gt;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lt;br /&gt;
&lt;br /&gt;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lt;br /&gt;
&lt;br /&gt;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lt;br /&gt;
&lt;br /&gt;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명나라)|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조선)|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lt;br /&gt;
&lt;br /&gt;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lt;br /&gt;
&lt;br /&gt;
&lt;br /&gt;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amp;lt;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amp;gt;.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amp;quot;&amp;gt;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lt;br /&gt;
&lt;br /&gt;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amp;quot;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amp;quot;(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lt;br /&gt;
&lt;br /&gt;
[[서복(진나라)|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lt;br /&gt;
&lt;br /&gt;
== [[기자조선]]의 후손설 ==&lt;br /&gt;
&lt;br /&gt;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lt;br /&gt;
&lt;br /&gt;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lt;br /&gt;
&lt;br /&gt;
기자조선의 영역&lt;br /&gt;
&lt;br /&gt;
&lt;br /&gt;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amp;lt;대업(大業) 혹 고요(皐陶)&amp;gt;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lt;br /&gt;
&lt;br /&gt;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lt;br /&gt;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lt;br /&gt;
&lt;br /&gt;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서씨)|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amp;lt;삼국사기&amp;gt;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amp;lt;삼국사기&amp;gt;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lt;br /&gt;
 &lt;br /&gt;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lt;br /&gt;
 &lt;br /&gt;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lt;br /&gt;
 &lt;br /&gt;
또한 &amp;lt;자치통감&amp;gt;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lt;br /&gt;
 &lt;br /&gt;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amp;lt;진서&amp;gt;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lt;br /&gt;
 &lt;br /&gt;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lt;br /&gt;
 &lt;br /&gt;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lt;br /&gt;
 &lt;br /&gt;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여숭)|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부여)|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amp;lt;자치통감&amp;gt;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lt;br /&gt;
 &lt;br /&gt;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lt;br /&gt;
 &lt;br /&gt;
&lt;br /&gt;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lt;br /&gt;
 &lt;br /&gt;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amp;lt;삼국사기&amp;gt;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분파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lt;br /&gt;
&lt;br /&gt;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흑치씨]](黑齒氏) - &amp;lt;[[흑치상지]] 묘지명&amp;gt;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amp;lt;동성왕조&amp;gt;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amp;gt; 백가 &amp;gt;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lt;br /&gt;
&lt;br /&gt;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lt;br /&gt;
&lt;br /&gt;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lt;br /&gt;
&lt;br /&gt;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lt;br /&gt;
&lt;br /&gt;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lt;br /&gt;
&lt;br /&gt;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amp;lt;왕력편&amp;gt;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amp;quot;[[동성왕]]의 아들&amp;quot;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lt;br /&gt;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lt;br /&gt;
&lt;br /&gt;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lt;br /&gt;
&lt;br /&gt;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lt;br /&gt;
&lt;br /&gt;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lt;br /&gt;
&lt;br /&gt;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lt;br /&gt;
&lt;br /&gt;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lt;br /&gt;
&lt;br /&gt;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lt;br /&gt;
&lt;br /&gt;
== [[부여]]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lt;br /&gt;
&lt;br /&gt;
[[여현]]&lt;br /&gt;
&lt;br /&gt;
[[여울]]&lt;br /&gt;
&lt;br /&gt;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lt;br /&gt;
&lt;br /&gt;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lt;br /&gt;
&lt;br /&gt;
[[여숭(여숭)|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여숭)|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lt;br /&gt;
&lt;br /&gt;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lt;br /&gt;
&lt;br /&gt;
[[여울(부여)|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lt;br /&gt;
&lt;br /&gt;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lt;br /&gt;
&lt;br /&gt;
== 백제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lt;br /&gt;
&lt;br /&gt;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lt;br /&gt;
&lt;br /&gt;
[[우복]](優福)&lt;br /&gt;
&lt;br /&gt;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부여씨)|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lt;br /&gt;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lt;br /&gt;
&lt;br /&gt;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lt;br /&gt;
&lt;br /&gt;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lt;br /&gt;
&lt;br /&gt;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lt;br /&gt;
&lt;br /&gt;
[[부여기]]&lt;br /&gt;
&lt;br /&gt;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lt;br /&gt;
&lt;br /&gt;
[[부여고(부여고)|부여고]](夫餘古)&lt;br /&gt;
&lt;br /&gt;
[[부여력]](夫餘歷)&lt;br /&gt;
&lt;br /&gt;
[[부여고]](夫餘固)&lt;br /&gt;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lt;br /&gt;
&lt;br /&gt;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lt;br /&gt;
&lt;br /&gt;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lt;br /&gt;
&lt;br /&gt;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lt;br /&gt;
&lt;br /&gt;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lt;br /&gt;
&lt;br /&gt;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lt;br /&gt;
&lt;br /&gt;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lt;br /&gt;
&lt;br /&gt;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lt;br /&gt;
&lt;br /&gt;
[[부여교기]] - 30대 [[무왕(백제)|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lt;br /&gt;
&lt;br /&gt;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lt;br /&gt;
&lt;br /&gt;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lt;br /&gt;
&lt;br /&gt;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lt;br /&gt;
&lt;br /&gt;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lt;br /&gt;
&lt;br /&gt;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lt;br /&gt;
&lt;br /&gt;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lt;br /&gt;
&lt;br /&gt;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lt;br /&gt;
&lt;br /&gt;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lt;br /&gt;
&lt;br /&gt;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lt;br /&gt;
&lt;br /&gt;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lt;br /&gt;
&lt;br /&gt;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lt;br /&gt;
&lt;br /&gt;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lt;br /&gt;
&lt;br /&gt;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lt;br /&gt;
&lt;br /&gt;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lt;br /&gt;
&lt;br /&gt;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lt;br /&gt;
&lt;br /&gt;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lt;br /&gt;
&lt;br /&gt;
==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lt;br /&gt;
&lt;br /&gt;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lt;br /&gt;
&lt;br /&gt;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lt;br /&gt;
&lt;br /&gt;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lt;br /&gt;
&lt;br /&gt;
== 역대 [[서국]](徐國) 국왕 ==&lt;br /&gt;
*[[약목]](若木)&lt;br /&gt;
**[[서구왕]](徐駒王)&lt;br /&gt;
***[[서구군]](徐句君)&lt;br /&gt;
****[[서왕 차우]](徐王次又)&lt;br /&gt;
*****[[서언왕]](徐偃王)&lt;br /&gt;
******[[서왕 자우]](徐王𠂔又)&lt;br /&gt;
*******[[서왕 자선]](徐王子旋)&lt;br /&gt;
********[[서왕 지후]](徐王旨後)&lt;br /&gt;
*********[[서왕 계량]](徐王季糧)&lt;br /&gt;
**********[[서왕 경]](徐王庚)&lt;br /&gt;
***********[[서왕 의초]](徐王義楚)&lt;br /&gt;
************[[서왕 장우]](徐王章禹)&lt;br /&gt;
&lt;br /&gt;
== 부여왕 계보 ==&lt;br /&gt;
*[[동명왕]](東明王)&lt;br /&gt;
**[[해모수왕]](解慕漱王)&lt;br /&gt;
***[[부루왕]](解夫婁王)&lt;br /&gt;
****[[금와왕]](解金蛙王)&lt;br /&gt;
*****[[대소왕]](解帶素王)&lt;br /&gt;
******[[갈사왕]](解曷思王)&lt;br /&gt;
*******[[시왕]](解始王)&lt;br /&gt;
********[[부태왕]](解夫台王)&lt;br /&gt;
*********[[우태]](解尉仇台王)&lt;br /&gt;
**********[[간위거왕]](解簡位居王)&lt;br /&gt;
***********[[마여왕]](解麻余王)&lt;br /&gt;
************[[의려왕]](解依慮王)&lt;br /&gt;
*************[[의라왕]](解依羅王)&lt;br /&gt;
**************[[현왕]](玄王)&lt;br /&gt;
***************[[여울]](扶餘蔚王)&lt;br /&gt;
****************[[잔왕]](孱王)&lt;br /&gt;
&lt;br /&gt;
== 백제왕 계보 ==&lt;br /&gt;
*[[온조왕]](溫祚王)&lt;br /&gt;
**[[다루왕]](多婁王)&lt;br /&gt;
***[[기루왕]](己婁王)&lt;br /&gt;
****[[개루왕]](蓋婁王)&lt;br /&gt;
*****[[초고왕]](肖古王)&lt;br /&gt;
******[[구수왕]](仇首王)&lt;br /&gt;
*******[[사반왕]](沙伴王)&lt;br /&gt;
********[[고이왕]](古爾王)&lt;br /&gt;
*********[[책계왕]](責稽王)&lt;br /&gt;
**********[[분서왕]](汾西王)&lt;br /&gt;
***********[[비류왕]](比流王)&lt;br /&gt;
************[[계왕]](契王)&lt;br /&gt;
*************[[근초고왕]](近肖古王)&lt;br /&gt;
**************[[근구수왕]](近仇首王)&lt;br /&gt;
***************[[침류왕]](枕流王)&lt;br /&gt;
****************[[진사왕]](辰斯王)&lt;br /&gt;
*****************[[아신왕]](阿莘王)&lt;br /&gt;
******************[[전지왕]](腆支王)&lt;br /&gt;
*******************[[구이신왕]](久爾辛王)&lt;br /&gt;
********************[[비유왕]](毗有王)&lt;br /&gt;
*********************[[개로왕]](蓋鹵王)&lt;br /&gt;
**********************[[문주왕]](文周王)&lt;br /&gt;
***********************[[삼근왕]](三斤王)&lt;br /&gt;
************************[[동성왕]](東城王)&lt;br /&gt;
*************************[[무령왕]](武寧王)&lt;br /&gt;
**************************[[성왕]](聖王)&lt;br /&gt;
***************************[[위덕왕]](威德王)&lt;br /&gt;
****************************[[혜왕]](惠王)&lt;br /&gt;
*****************************[[법왕]](法王)&lt;br /&gt;
******************************[[무왕(백제)|무왕]](武王)&lt;br /&gt;
*******************************[[의자왕]](義慈王)&lt;br /&gt;
********************************[[부여융]](扶餘隆)&lt;br /&gt;
*********************************원손[[서신일]](徐神逸)&lt;br /&gt;
**********************************[[서필]](徐弼)&lt;br /&gt;
***********************************[[서희]](徐熙)&lt;br /&gt;
************************************[[서유걸]](徐惟傑)&lt;br /&gt;
*************************************[[서존]]서존(徐存)&lt;br /&gt;
&lt;br /&gt;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lt;br /&gt;
&lt;br /&gt;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조선)|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lt;br /&gt;
&lt;br /&gt;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amp;quot;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amp;quot;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amp;quot;[[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amp;quot;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amp;quot;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amp;quot;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lt;br /&gt;
&lt;br /&gt;
== 서씨 분파 ==&lt;br /&gt;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고려)|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고려)|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고려1)|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lt;br /&gt;
&lt;br /&gt;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고려)|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lt;br /&gt;
&lt;br /&gt;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lt;br /&gt;
[[https://open.kakao.com/o/gBQB1q6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lt;br /&gt;
&lt;br /&gt;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lt;br /&gt;
&lt;br /&gt;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lt;br /&gt;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lt;br /&gt;
&lt;br /&gt;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lt;br /&gt;
&lt;br /&gt;
&lt;br /&gt;
== [[타타르인(타타르어: татарлар / tatarlar 타타를라르,татары)]] ==&lt;br /&gt;
유라시아에 걸쳐 거주하는 여러 튀르크계 민족을 가리키는 포괄적 명칭이다. 오늘날에는 타타르인이라 하면 특히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타타르어를 사용하는 최대 집단인 볼가 타타르인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나, 역사적으로 구분되는 크림 타타르인, 시베리아 타타르인 등 다른 집단들도 현존한다. 이들 모두 궁극적으로는 킵차크 칸국(금장한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슬람교를 믿고 킵차크어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lt;br /&gt;
&lt;br /&gt;
== [[볼가 타타르인 또는 간단히 타타르인(татарлар, tatarlar)]] ==&lt;br /&gt;
러시아의 이델-우랄 지역에서 유래한 타타르인의 일파로, 타타르인 집단 중 가장 규모가 커서 단순히 &amp;quot;타타르인&amp;quot;이라 하면 이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러시아 연방에서 인구는 약 530만 명으로 러시아인 다음으로 수가 많은 민족 집단이며, 특히 타타르스탄 공화국과 바슈코르토스탄 공화국에 많은 인구가 거주한다. 튀르크어족 킵차크어파에 속하는 타타르어를 사용하며 주로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으나 간혹 러시아 정교회 신자도 있다.&lt;br /&gt;
&lt;br /&gt;
== [[칭기즈 칸( 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 Činggis Qan, Чингис хаан, 成吉思汗 성길사한)]] ==&lt;br /&gt;
칭기스 한,  Genghis Khan, 1162년 11월 12일 ~ 1227년 8월 25일)&lt;br /&gt;
&lt;br /&gt;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카안이다. 중국식 별칭은 칭기스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聖運武皇帝)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lt;br /&gt;
ᠲᠡᠮᠦᠵᠢᠨ, 한국 한자: 孛兒只斤鐵木眞 패아지근철목진)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나라 때는 특목진(特穆津)으로 지칭되다가 청나라 멸망 후 테무진으로 복구되었다.&lt;br /&gt;
&lt;br /&gt;
== [[암바가이 칸(俺巴孩, ᠠᠮᠪᠠᠭᠠᠢ ᠬᠠᠨ Ambaγai Qan,Амбагай хан]] ==&lt;br /&gt;
(1091년? ~ 1156년)은 암바카이 칸(몽골어: ᠠᠮᠪᠠᠬᠠᠢ ᠬᠠᠨ Ambaqai Qan)&lt;br /&gt;
원사에는 함바카이 칸(咸補海汗) 또는 함바카이(咸補海), 한포하이(罕布海) 등으로도 나타난다. 보르지긴 오복의 타이치우트 집단의 추장이자 몽골의 제2대 칸이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스 칸의 증조부 카불 칸의 사촌 동생이자 계승자였다. 예수게이의 재종조부가 된다. 손자로는 타르구타이가 있다.&lt;br /&gt;
&lt;br /&gt;
== [[대몽골국(大蒙古國,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ᠤᠯᠤᠰ 예케 몽골 울루스,Их Монгол улс 이흐 몽골 올스), 통칭 몽골 제국(蒙古帝國,Mongol Empire)]] == &lt;br /&gt;
13~14세기 사이에 존속한 유목 제국이자 역사상 가장 큰 육상 제국이었다. 오늘날의 몽골 초원 일대에서 발흥한 몽골 제국은 남북으로 베트남~북인도 일부에서부터 동유럽을 넘어 북극 일부까지,동서로는 동해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레반트와 카르파티아 산맥까지의 영역을 아울렀다.&lt;br /&gt;
&lt;br /&gt;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lt;br /&gt;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lt;br /&gt;
&lt;br /&gt;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lt;br /&gt;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lt;br /&gt;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lt;br /&gt;
&lt;br /&gt;
== [[이섭대천]](利涉大川) ==&lt;br /&gt;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lt;br /&gt;
&lt;br /&gt;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lt;br /&gt;
&lt;br /&gt;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lt;br /&gt;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lt;br /&gt;
&lt;br /&gt;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lt;br /&gt;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lt;br /&gt;
&lt;br /&gt;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lt;br /&gt;
&lt;br /&gt;
== [[효양산 은선사]] ==&lt;br /&gt;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lt;br /&gt;
&lt;br /&gt;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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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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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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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성당]](希聖堂) ==&lt;br /&gt;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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