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징

DH 교육용 위키
Hufs이채영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24일 (월) 14:24 판

(비교) ← 이전 판 | 최신판 (비교) | 다음 판 → (비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의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내용

인물정보[1]

  • 한징은 한글학자이다. 호는 효창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 1922년부터 10년간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였다.
  • 1930년 이윤재와 조선어학회 사전을 편찬하는 데 힘썼으며 이어 표준말 사정위원이 되었다.
  •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1944년 함흥 감옥에서 사망했다.
  •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참여한 단체[2]

1921년 박승빈, 최남선이 중심이 되어 계명구락부를 조직하였는데, 1927년 이 단체 안에 조선어사전 편집부를 두게 된다. 조선광문회에 남겨진 말모이 원고를 가지고 있던 최남선이 계명구락부에서 사전 편찬 작업을 이끌어나갔고 사전 집필에는 최남선 외에 정인보, 임규, 변영로, 양건식, 이윤재, 한징이 참여하였다. 최남선이 전문 어휘를, 정인보가 한문 어휘를, 임규가 용언 어휘를, 변영로가 외래어 어휘를, 양건식이 신어 어휘를, 이윤재가 고어 어휘 및 주해를, 한징이 주해를 맡았다.

그러나 1929년 들어 철자법의 불통일과 경비 부족 등으로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 작업은 중단되었다. 이에 한징도 이윤재와 함께 계명구락부의 사전편찬부를 탈퇴하고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합류하였다.

한징은 1931년 조선어학회가 조직된 뒤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의 제정과 우리말사전의 편찬에 헌신한다.

먼저 한징은 조선어학회가 1934년에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에서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까지 한국 민족의 말과 문자에 표준어가 정해져 있지 않아 각 도의 사투리가 난무하고 있었다. 합리적인 언어생활을 위해서는 표준어를 정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표준어의 제정은 언어의 합리적인 생활뿐 아니라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데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과제였다. 이런 대의 아래,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표준어 사정 작업에 그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그는 표준말 사정에 참여하면서, 몇 편의 글을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에 기고하여 우리말의 연구에 참여하였다. 『한글』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어학회가 일제강점기 동안 발행한 기관지였다. 1932년 5월에 『한글』 창간호를 냈고, 1942년 5월까지 93호를 발행하였다.

한징은 「양문대신의 언문 시」(『한글』48, 1937. 9.)라는 글에서, 조선후기 대신이었던 이서구가 지은 언문 시를 소개하기도 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우리말 땅이름을 연구하여 「조선말 지명」(『한글』48, 1937, 9.)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군수의 꿈」(『한글』66, 1939.4.)이라는 작품을 지어 백성의 재산을 토색질하던 악질 군수를 비판하였다. 이 작품의 전체 문장은 한글로만 썼고, 부득이 한자어에 한자를 쓸 경우 괄호 안에 넣어 표기하였다.

『조선어대사전』편찬[3]

  • 한징은 사전편찬의 전담집필에 이극로, 이윤재, 김선기, 이용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 2년 간 사전편찬원들은 순조롭게 각종의 어휘를 분담 수집하면서 사전편찬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극로는 순수한 조선어를 맡았고, 한징은 한문계통의 어휘를 정리하였다. 한징은 서울 사람이어서 서울말에 정통하여 사전 편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조선어사전편찬회는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사전편찬 작업은 1933년 6월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 한징은 생계 때문에 1933년에서 1935년까지 『조선중앙일보』에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다. 다시 조선어학회가 사전편찬의 기초공작인 철자법 통일과 표준어 사정을 사회에 발표하자, 사회인사들의 물질적 원조가 이어졌는데 1936년 이극로의 설득으로 경남 의령의 이우식은 1만 원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을 기부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 예심종결 결정문에 의하면, 이우식이 조선어학회에 사전편찬 자금으로 16,140원과 기관지 『한글』 발행 자금으로 1,050원을 제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1920년대 후반 경성방직 여공의 한 달 임금이 21원이었다. 이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우식의 지원은 대단하였던 것이다.
  • 한징은 서울 태생이어서 서울 구석구석의 유래, 의복, 음식, 길흉간의 민속, 주택, 사색(四色)에 따라 다른 풍습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이들의 어휘는 모두 그의 힘을 입어 조선어대사전에 수록되었다. 사전 원고를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하여 사전 원고지의 양이 많기로는 이극로와 한징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지경이었다.
  • 당시 함께 사전편찬원으로 있었던 권승욱은 한징이 “언제나 쉴 새 없이 원고 쓰시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일제말기 조선어학회의 서기로 근무하였던 이석린은 당시 조선어학회가 주는 월급이 박봉이어서 한징도 조선어학회에서 퇴근한 뒤 인쇄소에 가서 교정 일을 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어학회사건[4]

  • 1942년 10월 일제가 자행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 작업은 중단되었다. 일제는 사전원고와 서적들까지 전부 압수하였다. 사전 원고도 사전편찬원과 함께 함흥으로 이송되었다.
  •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이 언어독립투쟁임을 간파한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학회의 사무실을 여섯 내지 일곱 차례나 철저히 수색하였고, 급기야 조선어학회의 회원 33명을 검거하여 탄압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어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고문치사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 한징은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942년 10월 1일에 체포되어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투옥 중 일제 형사로부터 물고문을 받고 날마다 난타를 당하다가 1943년 9월 13일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었다.
  • 계속되는 고문 속에서도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말을 쓰고, 조선말을 사랑하는 데에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항의하던 한징은 1944년 2월 22일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 한징의 유골은 그의 처가 함흥감옥에서 찾아와 경기도 과천에 안장하였다.

어록

“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 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 [5]


“원고를 속히 마치도록 합시다. 그래서 큰 사전을 하루 빨리 활자화하여 얼른 세상에 퍼뜨려야지,

까딱했다가는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어. 왜놈들 하는 짓이 날로 수상해." [6]


평가[7]

  • 뒷날 조선어학회 간사장이었던 이극로는 “한징선생은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에 종시 일관 관계하여 사전편찬에는 누구보다도 그의 공로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이극로, 「이미 세상을 떠난 조선어학자들」, 『경향신문』, 1946. 10. 9.)고 높게 평가하였다.
  • 해방 뒤 한글날을 맞이하여 조선어학회의 동지 이중화는 한징에 대해 “한징 씨는 그 집안이 4백여 년 서울에 근거를 가진 집이니만큼 정확한 발음을 압니다. 발음과 한자말 주석에 공적이 큽니다. 이 사람 역시 빈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의 부모에 대한 효성은 유명한 이야기로 참으로 모범적인 인물이었지요.”(「존귀한 희생자」, 『자유신문』, 1945, 10, 9)라고 회고하였다.

멀티미디어

이미지

한징2.jpg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1937)[8]

한징3.jpg

▲「조선말 지명」 (「한글」48)[9]

동영상

참고문헌

기여

주석

  1. 위키백과 한징
  2. 네이버 지식백과-네이버캐스트
  3. 네이버 지식백과-네이버캐스트
  4. 네이버 지식백과-네이버캐스트
  5. 네이버 지식백과-네이버캐스트
  6. 네이버 지식백과-네이버캐스트
  7. 네이버 지식백과-네이버캐스트
  8. 네이버지식백과
  9. 네이버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