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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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1410년 1월 19일

  •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1월 19일 병술 1번째기사 1410년 명 영락(永樂) 8년

일본 국왕(日本國王) 사신(使臣)이 대궐에 나아와 하직하니,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좌기(坐起)하여 불러 보고 말하기를,
"왕의 부친(父親)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차 사람을 보내 조상하려 하였는데, 왕이 잡혀 간 인구(人口)를 찾아 보내고, 인하여 도적을 금하니, 후의(厚意)에 몹시 감사하는 바이다."

1410년 2월 4일

  •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2월 4일 신축 1번째기사 1410년 명 영락(永樂) 8년

전 해주 목사(海州牧使) 양수(梁需)를 일본(日本)에 보내어 국왕(國王)에게 글을 전하게 하였으니, 보빙(報聘)과 조상(弔喪)을 위함이었다.
부물(賻物)은 백세저포(白細苧布)·흑세마포(黑細麻布) 각 25필(匹), 인삼(人蔘)·송자(松子) 각 50근(斤), 잡채화석(雜彩花席) 10장(張), 호피(虎皮)·표피(豹皮) 각 1령(領)이고, 전물(奠物)은 백세저포·흑세마포 각 10필, 청주(淸酒) 1백 병(甁)이었다.

1411년 1월 26일

양수(梁需)가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다. 그 국왕(國王)의 답서(答書)에 이르기를,
"일본국(日本國) 원의지(源義持)는 삼가 아룁니다. 사람을 보내시어 유시하는 글과 겸하여 물건까지 주시는 은혜를 받었는데 어제 해상(海上)에서 호적(豪賊)들을 만나 겁탈(劫奪)을 당하여, 겨우 사지(死地)를 벗어나 알몸으로 이르렀습니다. 이미 후한 예의(禮義)를 받았사오니, 직접 뵙고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간사한 백성들이 주토(誅討)를 피하여 외딴섬[絶島]에 도망가 숨어 있으면서, 〈해상(海上)에〉 자주 나와 장삿배[商船]를 표략(剽掠)하는 지가 오래 되었는데, 지금 또다시 이 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희 나라에서 어찌 강구[討究]하는 데 뜻이 없겠습니까? 이미 연해(沿海) 관리(官吏)에게 명령을 내려 사신(使臣)을 호송해 돌려보내고, 변변치 않은 물건을 보내드려 지극한 정성(精誠)을 표할 뿐입니다."

1411년 2월 22일

일본 국왕(日本國王) 원의지(源義持)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 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5두(斗)씩을 소비하였다.

1411년 3월 20일

  •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3월 20일 경진 1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창덕궁에 행차하여 광연루에서 일본 국왕의 사신을 접견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창덕궁(昌德宮)에 행차하여 광연루(廣延樓)에 나아가 일본 국왕(日本國王)의 사신을 접견하였다. 사신이 장차 하직하려고 전하를 뵙기를 원하였으므로, 마지못하여 접견한 것이었다.

1411년 10월 21일

  •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0월 21일 기유 2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토물(土物)을 바쳤으니, 《대장경(大藏經)》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대내전(大內殿) 다다량 덕웅(多多良德雄)이 사자를 보내어 수레[輿]와 병기(兵器)를 바쳤으니, 또한 대장경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1411년 12월 1일

  •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2월 1일 정해 1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일본 국왕(日本國王)의 사신과 대내전(大內殿)의 사인(使人)이 돌아간다고 고하니, 임금이 경연청(經筵廳)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고,
"너희 왕이 양수(梁需)를 겁박하고 노략질한 도적을 끝까지 토벌할 뜻을 보이니, 내가 심히 기뻐하고 감사한다."
하니, 사인이 대답하였다.
"우리 왕이 《대장경(大藏經)》을 구합니다."
이에 1부(部)를 주라고 명하였다.

1412년 12월 10일

전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우(李瑀)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순상(馴象)302) 을 바치므로 3군부(三軍府)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1413년 11월 5일

코끼리[象]를 전라도의 해도(海島)에 두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유정현(柳廷顯)이 진언(進言)하였다.
"일본 나라에서 바친바, 길들인 코끼리는 이미 성상의 완호(玩好)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으로 마땅합니다. 또 일 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周公)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故事)를 본받아 전라도의 해도(海島)에 두소서." 임금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

1415년 5월 3일

길들인 코끼리[象]를 육지(陸地)로 내보내라고 명하였다.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順天府) 장도(獐島)에 방목(放牧)하는데, 수초(水草)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瘦瘠)하여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서 불쌍히 여겼던 까닭에 육지에 내보내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하였다.

세종실록

1420년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코끼리[象]란 것이 쓸 데에 유익되는 점이 없거늘, 지금 도내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하여 돌려 가면서 먹여 기르라 하였으니,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忠淸)·경상도까지 아울러 명하여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1421년 3월 14일

충청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공주(公州)에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 씩이온즉,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
하였다. 선지(宣旨)하기를,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하였다.

日本イスラーム史(小村不仁男著)

応永十五年(一四〇八)六月二十二日、若挾(福井県)の中長浜に一夜暴風雨にあった二隻の南蛮船が漂着した。
この難破船の中に亜烈進(アラジン卿)というサルタン(首長)一行が日本の国王に献上するための生家一頭、アラビア馬数頭、孔雀二対その他オウムなど、当時としては、たいへん珍しい南海の特産物を積載していた。この南蛮船の亜烈進卿はアラビア人ではなく実は今のマレーシア系の首長でこの船自体もスマトラ島の船であったであろうと推考されている。
ともあれ同船は修理されて翌年十月一日、一年半振りに小浜を出帆して帰国の途についた。日本人としては初めて見た巨象はさっそく京都へ運ばれ、ときの将軍足利義持をして一驚を吃せしめた。恐らくこの象は当時南蛮貿易に従事していたジャワの商人がインドから輸入したものであろう。そしてこの象は応永十八年(一四一一)二月に義持から朝鮮国王の太宗に献送された。義持が以前この朝鮮から大蔵経をもらった返礼の意味でのプレゼソトであったのかも知れない。朝鮮でも実際に活きている巨象を見たのはこれが最初であった。太宗はこれを大切に飼育していたが日々豆を四・五斗も喰い、その士見物に来ていた人を踏み殺したので、やむを得ず某島に隔離して飼育することにしたという。以上は「李朝太宗実録」に記載されている史実である。
(小村不仁男,「室町時代」,『日本イスラーム史』, 1988, 東京・日本イスラーム友好連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