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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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fs오미래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25일 (화) 23:4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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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이다.

내용

역사적 배경

병인사옥이라고도 한다. 1866년 초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금압령으로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이 학살된 병인박해가 발생했다. 이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이 3명 중, 리델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되었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은 프랑스 군대가 방심하는 사이 기습하여 프랑스군 3명을 죽였고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경과

표1-2. 병인양요의 경과
날짜 내용
1866.10.16 강화부 점령
1866.10.26 문수산성 전투
1866.11.09 정족산성 전투
1866.11.10 프랑스군 함대 철수

결과

병인양요는 두 달 만에 끝났지만 그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고 방화로 인해 외규장각 전각이 소실되었다.[1][2] 반면,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로 자신감을 가진 대원군은 기존에 고수하고 있었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또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3]

강화 고려산 백련사와 병인양요 이야기

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3)(103쪽)에 의하면 ...

"1866년 프랑스 군대강화도를 침법해 온 병인양요 때, 장녕전에 봉안되어 있던 숙종영조어진백련사에 잠시 보관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강화유수 이인기가 장계를 올려 장녕전에 모셨던 주 어진을 서문 밨에 있는 백련사로 옮겨 놓았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다시 어진은 왕명으로 서울의 궁궐로 옮기게 되었다. 고재형이 지음 심도기행에는 1866년 9월 프랑스 군이 쳐들어 와 강화성이 함락되었을 때, 별검 최씨가 두 어진을 받들고 서울로 들어와 궁 안의 진전에 종안하였다고 하였다."

멀티미디어

연표

전자지도

네트워크 그래프

... 등

참고문헌

기여

오미래:최초작성

주석

  1. 병인양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외규장각 의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병인양요,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