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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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Cho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25일 (화) 12:4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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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강화 남부지역 선교는 홍의교회 출신 종순일 가족이 길상으로 내려와 전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길상면 중심부인 온수리에 자리 잡은 종순일은 인근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였는데 제일 먼저 결실 맺은 곳이 피뫼와 다로지였다. 피뫼는 지금의 길직을 의미하는데 길직(吉稷)이란 이름 외에 직산(稷山)으로도 불리었다 길직에서 처음 믿은 사람은 장윤백이었으며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1903년 피뫼교회(길직교회)가 창립되었다. 그 후 독자적인 예배당을 마련하였으며 1916년에 이 르러 조종렬, 정윤백 등 교인들이 헌금하여 예배당을 증축하였다. 길직교회는 주일학교가 활발하였다. [1]

독립운동개요

1919년 3월 8~9일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 사택에 장윤백, 조종환, 조종렬, 장명순, 장동원, 장흥환, 황명희, 홍관우, 염성오, 유희철, 황도문 등이 모여 3월 1일 서울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을 이어 받아 강화에서도 동일한 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이진형 목사가 부내면 신문리의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와 의논하여 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했다. [2] 이후 이들은 3월 18일 강화읍 곳곳에서 2만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63명이 시위 주도 혐의로 체포됐고 43명이 재판에 회부돼 상당수 옥고를 치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중 길상면 주민이 24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3]

독립운동전개

다음은 연합기독교뉴스의 2015년 03월 12일 정찬성 목사 칼럼이다.

강화도 지역의 3.11만세운동은 길상지역에서 준비되었고 강화읍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강화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그 만세운동은 봉화불로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는 그런 열정적인 운동이었습니다. 길상지역의 피뫼(길직)교회 이진형 목사, 다루지(선두)교회 황유부 전도사, 온수리의 유봉진 권사, 연희전문학교 황도문 등이 만세운동을 준비했습니다.

서울에서 벌어진 삼일운동에 대해서 보고하고 독립선언문을 보면서 사전준비를 했습니다. 9일 주일예배를 마친 후 길직교회에서 앞에서 말씀드린 네사람과 뜻을 같이하는 장윤백, 조종환, 장명순, 장동원 등 10여명이 만세운동을 할 지도부를 구성하고 만세시위준비를 본격화했습니다.

이들은 길직교회(강화초대교회)를 비롯해서 직하교회(길촌교회), 다로지교회(선두교회) 산뒤교회(선두중앙교회) 소속 청년들이었습니다.

3월 18일을 만세운동 거사일로 잡고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기로 인쇄했습니다. 강화인민에게 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어 비밀리에 각 교회에 보냈습니다.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 전도부인 김유의는 독립선언서를 17일에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알렸습니다. 유봉진 권사는 섬으로 다니면서 독려했고, 16일 주일에는 보름도에서 열변을 토하며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고 전합니다. 거사전날인 17일에는 장윤백 집에서 밤을 세우고 일찍 강화읍에 들어온 유희철, 황일남, 황윤실, 장동원, 장명순 등의 결사대원들이 장보기 위해서 들어오는 주민들이 가장 많은 오후 2시경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습니다.강화읍 관청리와 신문리 사이에 흐르는 시냇물 사이에 있는 돌다리 부근에 있는 사람들을 한 곳으로 불러모아 태극기를 어깨에 걸고 백마를 타고 달려나와서 시위를 이끈 결사대장 유봉진이 종각에 올라 종을 치며 군중들을 종각 앞으로 집결시키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자 일제경찰은 태극기를 나눠주고 있는 유희철, 장상용, 조사신 등을 현장에서 체포합니다. 그러나 시위대가 2만명에 이르자 일제경찰이 당황하기에 이릅니다. 한국인 순사들에게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유봉진은 시위대를 이끌고 군청에 이르러 당시 군수인 이봉종에게 만세 부를 것을 요구하자 겁에 질린 군수도 만세를 불렀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잡혀간 사람들을 석방하게 하고 일경은 함성의 물결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3월 18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21-24일까지 교동에서 계속되었고, 길상면 온수리, 송해면, 하점면, 양사면, 삼산면 석모리, 선원면 냉정리, 양도면 인산리와 길정리, 불은면 두운리 등 강화 전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가열 차게 전개되었다고 전합니다. 육지로 쫒겨갔던 일본경찰이 다시 들어와서 과격한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자 야간을 이용해서 봉화불 시위로 그 방법을 바꿔 만세운동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만세운동의 불길은 강화지역의 교육과 독립운동, 흥천학교와 합일초등학교 등을 설립하는 교육운동, 대동단 활동, 맹인들을 위한 점자 창안 등으로 이어져서 지금까지 교회 중심의 3.1운동은 강화군민들과 강화사회의 정신적 유산과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4]

시각자료


출처

  1. 출처: 감리교회 강화구역 선교확장 [1]
  2. 출처: 강화디아스포라[2]
  3. 출처: 강화군, 3·1운동 발상지 '길직교회 예배당 복원' 삽떴다. 경인일보 [3]
  4. 출처: 정찬성 목사의 토요일에 쓰는 편지[4]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6. 편집 최원재 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