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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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명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4월 23일 (화) 14: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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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은 13세기 말엽(1271~1273) 원나라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거한 고려무인의 정서가 서린 삼별초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곳이다. 이후 삼별초군은 남하하여 진도의 용장성을 근거지로 항전하였으나, 원나라 세력에 의해 원종 12년(1271) 진도가 함락되고 배중손 장군이 전사하게 되자 김통정 장군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탐라(제주)에 들어와 이 곳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계속 항전하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 원종 14년(1273) 1만2천여 명에 달하는 여ㆍ몽연합군의 총공격을 받아 항파두성이 함락되고 삼별초 군사들은 전원 순의하였다.

상세

이 성은 해발 약 190∼215m에 있으며, 남고북저의 지형이다. 북쪽인 경우 토성부근이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완만하나 서쪽은 단애를 이루는 하천을 두고 있어 성을 쌓기에 적합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당시에 쌓았던 토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돌쩌귀, 기와, 자기, 연못터, 장수물, 구시물, 옹성물, 살 맞은 돌 등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고, 주요 시설로는 전시관, 순의문, 순의비를 두고 있다

• 항몽순의비: 몽고군에 대항해 최후를 맞이한 삼별초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으로, 비석 전면의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란 제자(題字)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항몽순의비.jpg

• 토성: 김통정 장군은 삼별초군의 거점지인 항파두리에 흙을 이용하여 토성을 쌓아 여몽연합군과 대항하였다.

• 돌쩌귀: 삼별초군이 항파두성 성문의 밑틀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이다. 항파두성에는 네 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 돌쩌귀 10기가 보존되어 있다.

• 살맞은 돌: 극락봉에서 삼별초군이 궁술연마시 과녁으로 사용했던 거대한 입석(立石)으로, 암석 표면에 화살촉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 장수물: 김통정 장군이 쫓기다가 토성 위에서 뛰어 내릴 때 바위에 발자국이 패여 그 곳에서 샘이 솟아나게 되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 구시물: 성밖 서민 및 병사들의 음용수로 사용하였던 물이다.

• 옹성물: 항파두성 북쪽 극락사 사찰 경내에 있는 생수로, 삼별초가 항파두리에 웅거할 당시 귀족계급들이 음료수로 사용했던 샘물이다.

• 파군봉[바굼지오름]: 파군봉은 해발 약 100m에 이르는 봉우리로 몽고군의 상륙부대를 맞아 삼별초가 항전했던 전적지다.

• 고성천과 소왕천: 항파두성을 둘러싸고 있는 하천으로 성의 동편에는 고성천, 서편에는 소왕천이 있어 천연적인 방어 요새를 이루고 있다 이 곳 삼별초 유적지를 사적 제396호로 지정(1997.4.18)하여 1978년부터 연차 사업으로 계속 복원ㆍ정비해 나가고 있다.

사진

출처


참고문헌

관련 사이트

|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 제주시 문화유적 통합 홈페이지

|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기여

역할 이름 전공
정리 이자경 고전번역학
편집 최여명 한국문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