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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로 보는 신라 말 고려 초 한국 불교 이야기

탑비


Storyline

Episode 1: 구산선문을 연 승려들

남원_실상사


구산선문(九山禪門)은 한국에서 선종이 확립되기 시작한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세워진 9개의 산문(山門)[1]을 말한다.

한국불교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여겨지는 도의(道義)는 중국의 남종선(南宗禪)을 신라에 최초로 소개한 승려이다.[2] 37년간 당나라에서 구법 유학한 도의가 821년 귀국하여 신라에 선을 소개하였으나, 당시 왕실이나 귀족 사이에서는 교학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도의의 사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수도하였고, 그의 법맥을 이은 제자들이 장흥 보림사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었다. 그 뒤 당나라에서 선법을 체득한 선사들이 속속 신라로 돌아와 전국 각지에 산문을 열었다.

당시 왕성인 경주에는 교학이 득세하고 있던 반면, 지방 호족들이 선종에 호의를 보였기 때문에 선문은 대부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에 들어섰다. 그러나 점차 인식이 바뀌면서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면 선종이 불교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4]

구산선문을 열고 발전시킨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당나라에서 평균 20년 이상 체류하며 불교 사상은 물론, 당나라의 문화와 사상을 흡수하였다.[5] 그리고 신라로 돌아온 이들은 귀족과 결탁하여 타락한 신라 불교를 비판하며, 중생 누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펼쳤다.[6]

Episode 2: 두려울 것이 없는 네 명의 큰 스님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는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 스님”이라는 뜻으로, 선각대사 형미(先覺大師 逈微, 864-917),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862-930), 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870-936),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871-921)를 말한다.

이 네 명의 고승은 모두 860~870년대에 출생하여 신라말 고려초에 활동하였고, 각각 태안, 보령, 흥덕, 영암 등 바닷가 출신이며, 당나라에 유학하여 운거 도응(雲居 道膺, 846~902)의 문하에서 수행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왕건과 결연하여 고려 왕조의 개창과 통일과정에 기여하기도 하였다.[7]

경유의 탑비인 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운거 선사가 말하기를 ‘말을 걸어보면 선비임을 알고,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만리에 동풍(同風)이요, 천년에 한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들 사현(四賢)은 마음으로 흠모하면서 불경을 배우고, 감개하면서 개당하여 이후 선풍을 펼쳤다.[8]

Episode 3: 고려 초 불교와 충주유씨


고려 태조의 제3후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는 충주 지역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호족이었다. 충주유씨는 당대의 선승과도 깊은 관계를 맺으며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였다.

943년에 건립된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비문에 따르면, 법경대사 현휘(玄暉, 879~941)는 말년에 정토사에 상주하면서 유권열(劉權說) 등 충주 호족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중부 내륙지역민에 대한 교화에 힘씀으로써 다수의 호족 세력을 태조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9]

944년에 건립된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의 뒷면에는 징효대사 절중(折中, 826~900)의 제자뿐만 아니라 대사가 생전에 관계를 맺었던 당대의 대표적 고승과 고위 관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신명순성왕후의 아들인 왕요(王堯, 고려 제3대 왕 정종), 왕소(王昭, 고려 제4대 왕 광종) 등의 이름도 보이고 있어 이 비의 건립에 충주유씨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10]

Episode 4: 문장가 최언위


최언위(崔彦撝, 868~944)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신이다. 나이 18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문과에 급제하였고 42세에 신라에 귀국하였다.[11] 935년(태조 18)에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최언위도 고려에 가서 글 짓는 일을 담당하는 관직을 지냈고 고위층 자제를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12]

최언위는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선사 비문의 찬술을 전담하면서 고려의 이념과 태조의 정교를 선양하는 데 앞장섰다.[13]


Metaverse 구현 예시

주석

  1. “(1) 우리나라 선의 효시-구산선문(九山禪門) ①”, 불교저널, 2009.06.09.
  2. 김신곤, 김봉규, 『불맥, 한국의 선사들』, 우리출판사, 2004, 191쪽.
  3. 김신곤, 김봉규, 『불맥, 한국의 선사들』, 우리출판사, 2004, 194쪽.
  4. “선종의 전래와 구산선문의 성립”, 조계종 약사,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 http://buddhism.or.kr/jongdan/sub1/sub1-4-t2.php
  5. “45 구산선문의 형성”, 불교신문, 2007.11.24.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4335
  6. “구산선문 선사들의 치열한 삶의 흔적”, 법보신문, 2016.02.29.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1368
  7. 강봉룡(목포대 역사문화학부), [남도사람들] 왕건의 고승 포섭과 서남해지역 진출, 한국역사연구회, 2004.10.01. http://www.koreanhistory.org/4332
  8. “[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19> 수미산문 이엄 등 사무외대사 (여엄, 형미, 경유)”, 불교신문, 2018.06.28.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7438
  9. “법경대사”, 디지털충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chungju.grandculture.net/chungju/toc/GC01902014; 이지관,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239-240쪽.
  10. 최연식, 「흥녕선원 징효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9 : 고려3 비문3』,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11. 『고려사(高麗史)』 열전 권제5(列傳 卷第五) 제신(諸臣). 온라인 참조: “최언위”,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http://db.history.go.kr/id/kr_092r_0010_0040
  12. 김보경, 「비문에 새겨진 최언위의 삶, 사유, 문학」, 『고전과 해석』 Vol.5,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08, 159쪽.
  13. 김보경, 「비문에 새겨진 최언위의 삶, 사유, 문학」, 『고전과 해석』 Vol.5,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08, 1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