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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y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4월 28일 (목) 17: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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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조선왕실 개창의 산물: 백자
조선시대 관요와 관요생산 백자 이야기

Synopsis

Storyline

intro: 조선 왕실문화의 한 단면, 조선백자와 사옹원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문소전, 휘덕전에 쓰는 '은그릇'을 '백자기'로 대신한다는 기록과 백자기의 일반사용을 금한다는 <세조실록> 세조 12년(1466)의 기록은 백자기가 조선왕실의 어용자기로 전용(全用)되는 흐름을 보여준다. 여러 연구자들은 문헌기록과 실물자료들을 바탕으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15세기 백자가 왕실용 그릇으로 사용된 배경과 관요가 경기도 광주지역에 설치되는 시점 그리고 관요의 이동과정 등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내었다. 개별 연구성과들은 당시의 국내 정치, 경제, 외교 상황처럼 조선왕실의 큰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음식을 담는 용도로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자기는 그 문양과 기형에서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 생활상 더 나아가 한 왕조의 통치 철학이 내포된 물질자료이자 지식정보를 담고 있다.
고려왕실의 청자문화에서 조선왕실의 백자문화로 이행하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빠뜨릴 수 없는 중심단어는 조선시대 관청 사옹원과 경기도 광주라는 특정 지역이다. 도자 가운데 백자, 여러 관청 가운데 사옹원 그리고 경기도 광주 지역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면서 조선왕실 문화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Episode 1: 관요의 등장

조선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던 자기를 생산하였던 가마는 경기도 광주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 광주지역에 국가 직영 사기소인 관요가 설립되는 시점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통하여 1432년 이전까지는 전국 군현 별로 운영되었던 184개의 자기소에서 자기를 공납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토산품으로 공납되었던 백자는 1467년경 궁중 주방인 사옹원의 분원 가마가 광주에 설치되면서 관영수공업체제를 갖추고 직접 생산, 조달하게 되었다.</br> 관요 중의 하나였던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사옹원으로 추정되는 ‘司’자가 인각기법으로 새겨진 백자 접시 편이 출토되었다. 본래 사옹원은 고려시대의 사옹司饔이다. 사옹의 ‘옹’은 <주례周禮>의 주에서 割烹煎和, 즉 ‘고기를 베어 삶고 간을 맞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즉 사옹은 왕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을 담당하는 동시에 공납용 자기 제작을 감독하고 수취해왔다. 고려시대의 사옹은 조선시대에는 사옹방으로 吏曹에 편제되었고, 1467년에 첨설직에서 녹관을 둔 정3품의 정식 행정 관사인 사옹원으로 개칭되었다. 관요는 사옹원의 분원으로 설립되어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는 자기소로 운영되었다. 공납물이었던 자기는 광주 자기소에서 직접 조달받게 된 것이다.
사옹원 소속의 번조관과 경공장은 관요 운영과 관련한 구성원이었다. 번조관은 경공장을 관리하는 역할이었고, 경공장은 <경국대전> 공전 사옹원 조에 명시된 사기장 380명이었다.

Episode 2: 시기별 경기도 광주지역 관요의 특징

분원(관요)에서는 전국에서 차출되어 부역을 하던 1140명의 사기장沙器匠이 380명씩 3개조로 나뉘어 돌아가며 일했고, 사옹원에서 파견된 감관(낭청)이 봄, 가을로 제작된 그릇을 배에 실어 한양으로 수송했다. 약 10년을 주기로 수목(땔감)이 무성한 곳을 찾아 옮겨 다녔던 분원가마는 1752년(영조 28년),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물자를 수송하기에 유리한 분원리에 정착하여 이후 130여년간 요업을 지속하였다. 현재까지 광주시 전역에는 340여개소에 이르는 분원가마터 유적이 고스라니 남아있다. 그 가운데 약 22개소의 분원 가마터가 여러 기관에 의해 발굴조사보고·연구되어 조선전기에서 후기까지 시대에 따라 발전된 제작기술과 도자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관요 가마터에서는 관사를 뜻하는 글자 외에도 천⦁지⦁현⦁황, 간지, 좌우, 숫자 등의 글자가 새겨진 자기가 확인된다. 각각 다른 시기에 운영되었던 가마터에서 확인되는 명문들은 해당 가마터들의 선후 관계를 파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천⦁지⦁현⦁황’명 명문은 경기도 광주시 우산리, 경기도 광주시 도마리, 경기도 광주시 무갑리 가마터에서 확인된다. 해당 명문은 조선 전기에 사용되었고, 중기에는 간지, 간지, 좌우, 숫자 등의 글자 조합들이 확인된다.

Episode 3: 관요에서 제작된 왕실과 관청의 자기 백자

1467년경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되고 왕실과 관청에 소용되는 백자를 직접 조달하게 되면서 광주 백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분원설립 이후, 우산리, 도마리, 번천리, 관음리를 중심으로 화원이 그린 기품있는 청화백자와 함꼐 '천 지 현 황', '좌 우 별'명문을 새긴 고품격의 백자가 생산되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는 17세기에는 철화백자가 등장하는 동시에 진상백자에 간지를 새겨 관리 효율을 높였으며,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정지리, 탄벌동, 학동리, 상림리, 선동리, 송정동, 유사리, 신대리, 지월리 순으로 가마가 약 10년 주기로 이동하였다. 18세기에 들어, 오향리, 금사리 등지에서 활동하던 분원가마는 한강을 지나던 선박에 세금을 거둬 땔나무를 구입하면서 더 이상 이전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분원리에 정착하여 130여 년간 운영하였다.</br>

Episode 4: 조선시대 관요의 모습, 상번천리 요지 보호각

Episode 5: 백자의 새로운 용도 지석

[지석]은 조상계보와 인적사항, 그리고 업적과 무덤의 위치를 꼼꼼히 기록한 생의 마지막 기록물이다. 본래 지석은 네모난 석제에 글자를 새겨 제작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새기는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석제 대신 제작 공정이 간편한 도자기 지석이 유행하였다.[1]</br> 도자 지석은 사대부층에서 선호되다가 왕실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청화백자를 가장 고급으로 쳐주었다. 장방형의 판석이 일반적이지만, 조선후기에 접어들면 묵서를 써놓은 생활용기가 유행하기도 한다. </br> 백자지석은 죽인 이의 기록을 담은 물품이기에, 묘주의 몰년과 지석의 제작시기가 동일한 편이다. 그렇기에 해당 백자지석은 무문, 청화, 철화 등의 시기별 백자의 유행양식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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