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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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fs정다운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25일 (화) 23:5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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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과 이에 대한 사후 조치

제작의도

6월은 호국 보훈의 달로 6.25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비극적인 전쟁이다. 특히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러한 민간인의 피해가 단순히 전쟁 중 양측의 전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측 병력에서 일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례도 꽤 많다. 이 문서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우리측 병력에 의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사건들에 대해 다루고 현재 이 사건들에 대한 대우와 보상은 어떠한지 알아보아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노드 리스트

CLASS NODE
인물 이승만, 노무현,
사건 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장소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상남도 거창군
국가 대한민국, 미국
사상 빨갱이
군대 국군, 미군
법원 대법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청야, 웰컴 투 동막골, 작은 연못

주요 노드

CLASS NODE
인물 이승만, 노무현,
사건 6.25 전쟁, 보도연맹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사상 빨갱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노드들간 관련

보도연맹 학살사건

사건

6.25 전쟁

인물

사상

영화

사건 내용

보도연맹 학살 당시 장면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의 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6.25 전쟁이 터져 북한이 침공하자, 한국 정부는 과거 좌익운동 경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즉 빨갱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육군은 이들을 잡아들여 구금한 후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모조리 총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식으로 확인된 군경에 의해 처형당한 민간인 피해자만 4934명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사건

장소

국가

사상

영화

사건 내용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6.25 전쟁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 임계리 주민, 타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피난 중 미 육군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빨갱이)들이 잠입했다고 오인하여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이며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심지어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

거창 양민 학살사건

사건

장소

국가

사상

영화

사건 내용

거창 양민 학살사건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군인들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빨갱이) 토벌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여겨 그 지역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거창만 기준으로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사건

인물

국가

영화

사건 내용

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6.25 전쟁 3일차이던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과 군인, 경찰 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이 서울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면서 라디오로 서울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하며 본인 역시도 서울에 있는 척 하였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코 앞에 진격해서야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8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학살 이후 사후 조치

보도연맹 학살사건

울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이 사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다.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피고(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는 법률해석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2년 8월 27일 대법원은 국민보도연맹 '오창창고 사건' 희생자와 유가족 497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희생자 본인과 유족에 8000~400만원씩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법 제정과는 별개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거창 양민 학살사건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1]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별다른 보상을 찾을 수 없다.

  • 위의 사건들은 모두 6.25 전쟁중 국군/미군/정부 즉 우리측의 군사 세력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각 사건은 적게는 수 백명 많게는 수 천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정부는 그 동안 위의 사건들을 무시하며 진상 조사는 커녕 유족들의 입을 막고 불이익을 주는 등 어떻게든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덮으려하였다. 물론1990~2000년대 들어서 각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시민들의 관심 또한 커졌으며 정부 역시 과거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소극적이며 오히려 피해 유족들이 진상 규명을 위해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있다. 위의 사건들은 [6.25 전쟁]당시 일어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들이다. 이렇게 큰 사건들에도 정부가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더 작은 사건의 억울한 희생자의 경우 진상규명이나 보상을 거의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에 더 관심을 가지고 피해자를 위한 노력에 더욱 힘써야한다.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창사건(居昌事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