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 전적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 교육용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잔글
잔글
18번째 줄: 18번째 줄:
 
황토로 덮인 작은 산으로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전승지이다. 1894년 4월 초, 관군이 농민군을 쫓아나서자 농민군들은 이를 유인하여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날로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흥덕, 고창, 무장을 점령하였으며, 경상, 충청지방으로까지 농민혁명의 불길이 번져 갔다. 지금 이곳 황토현 마루턱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있고, 이 기념탑 동남쪽 기슭에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이 있다. 탑을 등지고 앉아 내려다보이는 길건너 붉은 흙 둔덕과 밭이 강한 인상을 주는 곳이다.  <ref>출처: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6380 대한민국 구석구석]</ref><br/>
 
황토로 덮인 작은 산으로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전승지이다. 1894년 4월 초, 관군이 농민군을 쫓아나서자 농민군들은 이를 유인하여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날로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흥덕, 고창, 무장을 점령하였으며, 경상, 충청지방으로까지 농민혁명의 불길이 번져 갔다. 지금 이곳 황토현 마루턱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있고, 이 기념탑 동남쪽 기슭에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이 있다. 탑을 등지고 앉아 내려다보이는 길건너 붉은 흙 둔덕과 밭이 강한 인상을 주는 곳이다.  <ref>출처: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6380 대한민국 구석구석]</ref><br/>
  
=='''사진 및 도면'''==
+
=='''황토현 전투'''==
  
==='''사진'''===
+
[파일:전봉준동상.jpg|thumb|전봉준 동상]]
  
==='''도면'''===
+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전북 고부에서 고부 민란을 시작으로 발발한 농민 운동은 규모가 커져 4월 5일(음력 2월 30일) 전북 고창군 무장에서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남접계 지도자들이 4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정읍군 태인 주산리에서 태인접주 최경선이 이끄는 300명의 농민군과 말목장터에 집결한 수백 명의 농민군들까지 합세해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관련 사이트'''==
+
후에 금주, 부안, 고창 등 여러 곳에서 농민군이 집결하고 5월 5일(음력 4월 1일) 태인과 5월 8일(음력 4월 4일) 부안 관아를 점령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감사 김문현, 영관 이경호 등이 영내 잡색군 등 총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정읍 황토현으로 진격했다.
  
 +
감영군 700명과 향군 600명 등 1300명의 관군이 태인을 지나 백산으로 가고 있었는데 4월 6일 태인 인근 화호 나루 일대에서 첫 접전이 이루어졌다.
 +
 +
농민군은 패주하는 척하였고 관군은 농민군을 추격했다. 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 진을 치고 관군도 황토현 부근에 진을 쳤다.
 +
 +
4월 7일 새벽 농민군은 관군에게 포를 쏘아 혼란에 빠뜨린 뒤 미처 대처하지 못한 관군을 추격해 패주시켰고 이 과정에서 영관 이경호가 농민군들에게 체포되어 전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고 전주로도 진격할 수 있었다. <ref>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D%86%A0%ED%98%84_%EC%A0%84%ED%88%AC 황토현 전투]</ref>]]
 +
 +
 +
==='''사진'''===
 +
 +
=='''관련 사이트'''==
  
 
*문화재청 (http://www.cha.go.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
 +
*정읍시 문화관광(http://www.jeongeup.go.kr/culture/index.jeongeup)
  
 
=='''참고문헌'''==
 
=='''참고문헌'''==
 
*안승수·이남석, 『공산성 백제추정왕궁지 발굴보고서』 (공주 : 공주대학교 박물관, 1987)
 
  
 
=='''출처'''==
 
=='''출처'''==
  
 
<references/>
 
<references/>
 +
 +
=='''답사 후기'''==
 +
 +
*답사 중/후에 느낀 것.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있으면 적어주세요!
  
 
=='''기여'''==
 
=='''기여'''==
43번째 줄: 56번째 줄:
 
!역할|| 이름 || 전공
 
!역할|| 이름 || 전공
 
|-
 
|-
| 정리 || ||  
+
| 정리 || 전인혁 || 인문정보학
 
|-
 
|-
 
| 편집 ||  ||  
 
| 편집 ||  ||  

2018년 4월 2일 (월) 23:21 판


개관

황토로 덮인 작은 산으로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전승지이다. 1894년 4월 초, 관군이 농민군을 쫓아나서자 농민군들은 이를 유인하여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날로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흥덕, 고창, 무장을 점령하였으며, 경상, 충청지방으로까지 농민혁명의 불길이 번져 갔다. 지금 이곳 황토현 마루턱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있고, 이 기념탑 동남쪽 기슭에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이 있다. 탑을 등지고 앉아 내려다보이는 길건너 붉은 흙 둔덕과 밭이 강한 인상을 주는 곳이다. [1]

황토현 전투

[파일:전봉준동상.jpg|thumb|전봉준 동상]]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전북 고부에서 고부 민란을 시작으로 발발한 농민 운동은 규모가 커져 4월 5일(음력 2월 30일) 전북 고창군 무장에서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남접계 지도자들이 4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정읍군 태인 주산리에서 태인접주 최경선이 이끄는 300명의 농민군과 말목장터에 집결한 수백 명의 농민군들까지 합세해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후에 금주, 부안, 고창 등 여러 곳에서 농민군이 집결하고 5월 5일(음력 4월 1일) 태인과 5월 8일(음력 4월 4일) 부안 관아를 점령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감사 김문현, 영관 이경호 등이 영내 잡색군 등 총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정읍 황토현으로 진격했다.

감영군 700명과 향군 600명 등 1300명의 관군이 태인을 지나 백산으로 가고 있었는데 4월 6일 태인 인근 화호 나루 일대에서 첫 접전이 이루어졌다.

농민군은 패주하는 척하였고 관군은 농민군을 추격했다. 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 진을 치고 관군도 황토현 부근에 진을 쳤다.

4월 7일 새벽 농민군은 관군에게 포를 쏘아 혼란에 빠뜨린 뒤 미처 대처하지 못한 관군을 추격해 패주시켰고 이 과정에서 영관 이경호가 농민군들에게 체포되어 전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고 전주로도 진격할 수 있었다. [2]]]


사진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출처

  1.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2. 출처: 황토현 전투

답사 후기

  • 답사 중/후에 느낀 것.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있으면 적어주세요!

기여

역할 이름 전공
정리 전인혁 인문정보학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