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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을 이용한 한국풍 한국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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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4일 (월) 18:39 기준 최신판

정의

신라의 심신 수련을 하던 무사 조직이다.

내용

명칭

화랑(花郞)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꽃사내,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란 뜻으로 역사적 기원은 원화(源花)와 닿아 있다. 화랑은 화판(花判)·선랑(仙郎)·국선(國仙)·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서 교육적·군사적·사교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1]

기원

화랑도의 기원은 원시 미성년집회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이 견해는 3~4세기경의 한반도가 원시부족사회였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원시부족사회에서는 일정한 연령에 도달한 남자들이 부족 단위로 비밀결사를 만들어 단체생활을 한다. 이들은 서로 공동 의식을 수행하면서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배우고, 동시에 가무와 무예를 익히는데 화랑도 역시 원시 미성년집회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다.그러나 화랑의 역사를 다룬 책인 『화랑세기』에서, 김대문은 ‘화랑은 선도(仙徒)이다’라는 말로 서문을 여는데 이는 화랑이 선도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의미하며 선도는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이다.[2]

화랑의 제도적 설치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진흥왕 37년(576)에 기술되어 있다.[3]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앞서 화랑 사다함(斯多含)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어 화랑도의 기원을 원화(源花)가 만들어진 때부다 훨씬 이전임을 암시한다. 화랑도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확립되지 않았지만 삼국 전체에 행해 오던 우리 고대 사회의 독특한 기풍, 애국심 혹은 종교가 신라에 와서 화랑도로 정립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기능 및 역할

화랑도는 진흥왕 때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한 세기 동안에 활기를 띠었고 이 시기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역사가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1백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던 신라의 국가적 위기에 화랑도는 전사단으로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들은 사태가 중대한 때에는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국가의 정규부대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하였다. 더 나아가 화랑도조직은 매우 의협심이 강한 집단으로서 약한 자를 돕는데 서슴지 않았고 사회질서의 안녕을 위해 마을의 야경을 맡기도 하였다. 한편, 화랑도가 크게 활동하던 시기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때였다. 화랑도는 이러한 신분계층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데도 부분적으로 기여하였는데 화랑도가 진골귀족 및 하급귀족, 일반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집단 자체는 어디까지나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4]

이념

화랑도의 이념은 오로지 개인의 수양과 단련을 통한 국가에의 봉사였으므로, 서로 도의를 닦았고, 가악을 즐겼으며, 명산대천을 찾아다녔다. 또한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준수했다. 또 경문왕(景文王)의 고사에 관련되었듯이 겸손하고 검소하고 방자하지않는 삼이(三異)를 생활신조로 삼았다.[5]

  • 세속오계

1.사군이충(事君以忠) :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2.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3.교우이신(交友以信) :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4.임전무퇴(臨戰無退) :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5.살생유택(殺生有擇) :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대표적인 인물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NATV 국회방송| 한국의 정신 통일대업을 이룬 주역 화랑도

KBS 한국방송| 이다지선생님과 함께하는 화랑 탐구영역

기여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랑
  2. 문화콘텐츠닷컴 화랑의 기원
  3. 위키백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진흥왕 37년(576), "봄 최초로 원화를 받들었다. 처음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함에 근심하였다. 그래서 무리들이 모여 서로 어울리게 하고 그 행실을 봄으로써 자연스럽게 이후 뽑아 쓰려 하였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뽑았으니 남모와 준정이었다. 3백여 명의 무리가 모였다. 그런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고 서로 시샘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강권하여 취하게 만들고는 끌어 내어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모인 무리들은 화목하지 못하여 해산하였다. 그 후 다시 얼굴이 잘생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 부르며 받들었다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랑도
  5. 위키백과 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