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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_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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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이름 = 홍재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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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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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모음==
 
기사1. <강화방직계>
 
기사1. <강화방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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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직물연산 백만원으로서 단연 조선산업계에 두각을 내여밀고잇는 강화도에 다시 오십만원의 거자를 던져 방적회사창립의 기뿐소식을 듣게되엇다
 
강화직물연산 백만원으로서 단연 조선산업계에 두각을 내여밀고잇는 강화도에 다시 오십만원의 거자를 던져 방적회사창립의 기뿐소식을 듣게되엇다
부군의 명칭을 듣고잇는강화부호급의사업열이없다는평판이 가장 높은 요지음 단연 그 "테프"를 끈코나선이는 과연누구인가? 그는 부내면 신문리 홍재묵씨로서 여러해 전부터 무엇이나 대중의 이익을 위한 사업을 찾기에 여러가지로 연구하든 바로 금춘동경모대학을 마치고도라온 가장 유망하고 대표산업의 직물회사를 창설함으로서 산업강화에 획기적 사업으로 영리와 봉사를 겸한 일석양조적인것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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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의 명칭을 듣고잇는강화부호급의사업열이없다는평판이 가장 높은 요지음 단연 그 "테프"를 끈코나선이는 과연누구인가? 그는 부내면 신문리 홍재묵씨로서 여러해 전부터 무엇이나 대중의 이익을 위한 사업을 찾기에 여러가지로 연구하든 바로 금춘동경모대학을 마치고도라온 가장 유망하고 대표산업의 직물회사를 창설함으로서 산업강화에 획기적 사업으로 영리와 봉사를 겸한 일석양조적인것이라한다.
  
 
그리하야 방금부내면신무리에 공장지대를 선택하야 공장의 일부를 건설고앗에 착수를 보앗다하며 일보내지모기계회사에 직조기를 주문중이라 한다.
 
그리하야 방금부내면신무리에 공장지대를 선택하야 공장의 일부를 건설고앗에 착수를 보앗다하며 일보내지모기계회사에 직조기를 주문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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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978년 5월 19일
 
동아일보 978년 5월 19일
 
물이 귀해 농사마저 시원찮던 섬 사람들은 끈질긴 전쟁과 식량난을 위해 싸우면서 일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곳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가내부업이 발달한 것은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요. 농사가 시원찮아 머고살기 힘드니까 남자느 ㄴ멀리 개성까지 인삼밭 품팔이 나갔고 부녀자들은 비단짜기, 아이들은 화문석만들기로 살림을 도왔지요."이곳재벌 쌍과부의 설명이다. 6.25 때 남편을 잃은 뒤 인조견행상으로 근근히 모은돈으로 쪽딱 직소기 8대를 사 인조견공장으로 시작, 지금은 쌍과부 직물공장으로 불리는 남화견직을 세워 억대의 여성재벌이 된 황순흥 황순신 두부인은 멀리 북간도까지 비단 화문석행상을 벌였던 강화여인들의 후예로서 손색이없다. 넉살좋은 강화년이라는 말은 이처럼 생활력이 강한 강화여인들을 시기해서 나온 말인듯 싶다. 대소직물공장 24개 남화견직말고도 강화엔 김재소씨가 경영하는 심도견직 홍재묵씨가 세운 조양방직, 박영묵씨의 경도직물, 마진수씨의 평화직물, 동광직물 경화방직 등 24개의 크고 작은 직물공장들이있다.
 
물이 귀해 농사마저 시원찮던 섬 사람들은 끈질긴 전쟁과 식량난을 위해 싸우면서 일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곳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가내부업이 발달한 것은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요. 농사가 시원찮아 머고살기 힘드니까 남자느 ㄴ멀리 개성까지 인삼밭 품팔이 나갔고 부녀자들은 비단짜기, 아이들은 화문석만들기로 살림을 도왔지요."이곳재벌 쌍과부의 설명이다. 6.25 때 남편을 잃은 뒤 인조견행상으로 근근히 모은돈으로 쪽딱 직소기 8대를 사 인조견공장으로 시작, 지금은 쌍과부 직물공장으로 불리는 남화견직을 세워 억대의 여성재벌이 된 황순흥 황순신 두부인은 멀리 북간도까지 비단 화문석행상을 벌였던 강화여인들의 후예로서 손색이없다. 넉살좋은 강화년이라는 말은 이처럼 생활력이 강한 강화여인들을 시기해서 나온 말인듯 싶다. 대소직물공장 24개 남화견직말고도 강화엔 김재소씨가 경영하는 심도견직 홍재묵씨가 세운 조양방직, 박영묵씨의 경도직물, 마진수씨의 평화직물, 동광직물 경화방직 등 24개의 크고 작은 직물공장들이있다.
 
 
 
조양방직은 1937년 홍재용, 홍재묵 형제가 설립한 방직공장이다. 설립 당시 125,000원(현시가 60억 원 내외)의 자본금으로 시작하였으며 700여 평의 2층 건물과 50여대의 직조기를 갖추고 인견과 마직물 염색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설립 이후 착공에 이르기 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공장 가동 후 1년여가 되는 1939년에 큰 화재가 나서 소실되고 말았고 피해액은 40만원(200억 원 내외)에 달했다고 한다.​
 
 
설립 초기에 사장은 형인 홍세묵이 맡고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동생 홍재용이 부사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하지만 1942년 미쓰비시 산업에서 일하던 이세현에게 공장을 매각하였으며, 이세현은 아들 이현일과 함께 조양방직을 운영하다가 한국전쟁을 거쳐 1958년에 폐업한다.
 
 
조양방직은 강화의 직물업체 중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 그렇지만 다른 직물업체에 비해 단명했는데 이는 자본 구성(홍씨 형제와 평북 정주의 이정근)이 복잡하였고 더불어 초기 화재로 인해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6.25 전쟁 기간 동안 일민주의 청년동지회 등 우익의 본거지처럼 활용되는 등 전쟁의 여파로 인해 산업 활동이 원활하지 못했던 점이 아닌 가 추측된다.
 
 
조양방직 설립은 강화의 대지주가 지주-소작관계에 의존하는 봉건적 경영 형태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대표적인 경우라 볼 수 있다.
 
 
<신편 강화사>에 따르면 홍씨 집안이 소유한 논 면적은 600여ha(180만평 규모)가 넘고, 일하는 소작인 숫자도 3000명이 넘었다. 소유자는 홍재용(2대 강화군수 1946 - 1947), 홍재묵 형제와 홍재승(6,25 전쟁 때 강화치안대장), 홍두섭(강화금융조합장), 홍재준(강화소방조두)이 대표적이었으며, 이들은 1910년대 이후 강화의 최대 지주로서 쌀의 대일 수출을 전제로 지주경영을 하였다.
 
 
 
작년 7월부터 리모델링되어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 조양방직 내부
 
홍씨 집안과 쌍벽을 이루는 대지주로 김씨 집안이 있다. 이들도 홍씨 집안 못지않게 많은 논을 소유하고 있었다. 홍씨와 김씨 집안은 강화의 농업과 지주제 연구에 있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집안들이다.
 
 
1910년대 이후 일본의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고자 경기도 일원에서 생산된 쌀의 상당량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때 개통된 수인선은 경기도의 쌀을 항구인 인천항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의 논농사도 기본적으로 대일 수출을 위한 것이었다. 이때 강화의 대지주들은 밭을 논으로 개량하는 등 꾸준히 논의 면적을 확대하는 한편 품질 개량을 통해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늘려갔다.
 
 
하지만 1920-1930년대 일제의 저미가정책, 농업공황으로 인하여 한국인 지주경영의 성장이 막히기 시작한다. 농업공황으로 인한 쌀값 하락은 소작인의 몰락, 농가경제의 파탄으로 이어졌다. 또한 일본의 밭농사 장려, 조선 쌀 반대운동 등으로 일본 식민지 당국은 조선 쌀의 대일 수출을 저지함으로써 국내의 쌀값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이와 같은 생산력의 정체에 부딪힌 강화의 대지주들은 산업자본으로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양방직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 강화의 농업사회는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소작 쟁의가 활발히 일어나지만 강화에서는 그런 사례들이 없었고, 지주들 역시 고율의 소작료를 매긴다든지 하는 폭압적 수탈 사례도 보고된 바 없다.
 
 
특히 홍씨 집안은 재해가 날 시에 의연금, 동정금 등을 출연하여 시설을 고치거나, 구휼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사회지도층 역할도 일정하게 수행하였다. 홍재용이 제2대 강화군수를 역임하거나 홍재승이 6.25 전쟁 시 강화치안대장을 맡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해방 이후 대지주 중에는 송정헌(치안대활동)이 눈에 띄고, 기존의 대지주인 김우중(길상면 온수리), 홍재용, 홍재묵 형제, 홍재승. 홍종문 등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대지주였다.
 
 
하지만 군수를 지내던 홍재용은 9월 28일 강화에 재침입한 북한군에 의해 잡혀 납북되고, 10월 2일 조양방직에서 일민주의청년 동지회가 치안대를 구성한다. 일민주의 청년동지회는 다음날 다른 우익 치안 조직과 함께 강화치안대를 구성하는데 홍재승이 치안대장을 맡게 된다.
 
 
​조양방직은 일제 강점기에도 기업운영에 있어서 지금의 산재보험과 같은 보험에 가입하여 노동자의 산재에 대비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폐업이후 1960년대 접어들면서 강화를 대표하는 직물업체는 김재소가 설립한 심도직물로 넘어가게 된다.
 
 
그 이후 조양방직 터는 다른 형태로 활용되다가 2000년대에 오면서 잡동사니가 쌓인 버려진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18년에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낡았으나 새롭고 옛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강화의 농업구조의 변화와 조양방직의 설립, 그리고 강화의 농촌사회의 특징과 6.25 전쟁기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문제, 지주-소작관계와 산업화 과정, 강화양명학의 관계 등 연구할 만한 소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조양방직의 역사는 강화 근현대사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향후 강화의 농업구조 변화 과정, 6.25전쟁을 둘러싼 좌우대립, 그리고 강화양명학과의 관계 등 연구할 만한 소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출처 : 인터넷 강화뉴스(http://www.ganghwanews.com)
 

2019년 5월 29일 (수) 00:12 판


기사 모음

기사1. <강화방직계>

동아일보 1935.08.26 동아일보

강화직물연산 백만원으로서 단연 조선산업계에 두각을 내여밀고잇는 강화도에 다시 오십만원의 거자를 던져 방적회사창립의 기뿐소식을 듣게되엇다 부군의 명칭을 듣고잇는강화부호급의사업열이없다는평판이 가장 높은 요지음 단연 그 "테프"를 끈코나선이는 과연누구인가? 그는 부내면 신문리 홍재묵씨로서 여러해 전부터 무엇이나 대중의 이익을 위한 사업을 찾기에 여러가지로 연구하든 바로 금춘동경모대학을 마치고도라온 가장 유망하고 대표산업의 직물회사를 창설함으로서 산업강화에 획기적 사업으로 영리와 봉사를 겸한 일석양조적인것이라한다.

그리하야 방금부내면신무리에 공장지대를 선택하야 공장의 일부를 건설고앗에 착수를 보앗다하며 일보내지모기계회사에 직조기를 주문중이라 한다. 이리하야 공장준공과 함께 개업이 되는 날에는 당당히 오십만원의 큰 회사의 깃발을 날리게 됨을 따라 일반유민해소에 큰도움이 될것은 물로 ㄴ장내 조선적으로 보아 손색이 없는 산업계의 이채라하야 일반은만은 기대를 가지고잇어 앞으로 큰 발전이 잇기를 심축한다고 한다.

2. 기사 <우리의 손으로 처음된 강화인조견공장> 우리의 손으로 처음 된 강화인조견공장 인견, 마사, 염색등으로 장내유망 자본근 오십만원으로 조선사람의 손으로 처음되는 인조견회사가 설립되엇다.

강화의 인조견은 견고하고 우수한 것으로 외국산을 압두하야 일반가정에서 다수 사용하는 터인데 아즉 통일된 회사가 없이 강화도 00점에서 수공업으로 생신됨을 유감으로 생각하야 강화의 유수한 실업가 홍재묵, 홍재룡 양씨와 정주이정근씨와 수인이발기인이 되어 조양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되엇다. 

회사의 구성은 자본금이 오십만원으로 만주라하여 벌서 이주간 이내로 제일회 불입을 마쳣다하는바 기계는 '노가미'식으로 삼십대를 일본내지에 주문하였다 하여 상품은 인조견, 마사, 염색 드으로 장래가 유망하다고 한다.


3. 기사 <인사> 경향신문, 1949년 4월 13일 홍재용씨 강화요업사장 사월구일 강화읍자택에서 조내간상

4. 기사 <강화서의 활동 군자모집범인수색> 방금강화경찰서에서는 모범인의자최를 엄중히수색중인데 그 내용을 들은즉 지나간 십률일오전에 강화군 부내면 신문리 일백륙십일번디에 사는 부호의 아들 홍재묵에게 수백원의군자금을 뎨공하라는 협박장이 도착되엇슴으로 그범인을잡고저 그와가치 활동하는 것이라더라.

5. 기사 <노상에서 해산 강화걸인이> 지난 십일 오후여섯시경에 걸인이 강화읍신문리길가에서 해산을하얏다는바 산모와 유아는 당디중앙청년회관에서 즉시수용하고 청산의원의사가가 무료로 시료중이며 식량은 홍재묵씨가약이주일간을 예뎡하고 방금수용중이라는 데 산모와 유아는 아즉건전하다더라.


6. 기사 <장단군 우승> 1932년 6월 1일 경긔도강화군 주최인 장단파주김포강화사군 연합정구대회는 지난 칠일에 강화군읍내홍재묵씨의코트에서개최하얏다 영예의우승긔는 장단군에게로 돌아갓다한다

7. 동아일보 1932년 6월1일 강화체육회주최와 본보지국의 후원읹회전강화륙상경기대회 전강화육상경기대회는 예정과가티 오는 십이일을 택하야 신록이 무르녹는 냉정현운동장에서 열리게되엇다 긔일이 박도함을 따라 일반의읜기는자못불등되어잇서 성향을 예긔한다는바일반유지의의연금품이 지난 삼십일까지 체육회에 접수된 것은 다음과갓다 의연자방명 무순 이십원식홍재묵

8. 남산코트준고오가 강화정구대회 본지국이 주최 동아일보 7월 22일 남산코트준공과 강화정구대회 본지국이 주최 삼개월의 시일과 거액의 공사비를 드려 공사중이든 강화남산구장은 얼마전에 제이리차공사를 준공하얏다. 이는 시내유지 홍재묵씨의 소유로 일반에게 개하게되어 변변한 코트도 강화의 면목이 일신하게 되였다오는 삼신일을 긔하야 본보강화지국주최로 개장식을 겸한 전강화개인정구대회를 열게되였슴으로 벌서부터일반의인기는불등되여잇서 성향이예긔된ㄷ. 후원은 남산정구구락부에서 하기로 되엿다. 이코트는 홍씨의호의로본사지국에 위임하얏스며 또대회에 우승긔하나를긔증하얏다 대회의 참가신청은이십오일까지 참가금은 매조팔십전이며 선수에게는 점심을 제공한다. 경기는 오판삼승이다.

9. 나예방협회 기부금 동아일보 1933년 2월 2일오십원홍재묵

10. 회합 동아일보 1934년 8월 16일 홍재묵씨 강화실업가 만몽방면 여행중 금십사일귀임 홍재용동상 김근호씨 강화유치장 원용무로 상경중 십사일귀원

11. 소식 동아일보 1935년 8월 7일 홍재묵씨 강화방적회사창립위 원장용무를 대하고 상경

12. 경성강화간 운수사 창립 동아일보 1935년 12월 8일 경성 김포 강화 간에 아직 화물운수긔관의 충분치못하야 강화상버게에선느 항상문제꺼리로 지내오든바이를 유감으로 생각한 시진사업가홍재묵씨의 수씨의 발긔로 여러달동안 그운싀관창립에 활동해온 것은 이미 보도한 바어니와 이지음 그 준비의 일단락을 보게되어 경성, 김포, 강화도의 인사등으로 자본금 십만원의 경강화물운수회사를 창립키로 저간경긔도자동차협회안에서 극약을 체결한후즉시 좌긔제씨의연대명의로 도당국에인가신청을하엿다하야 일반은 큰 기대를 가지고 하로바삐 회사의실현을 기대한다고 한다.

13. 만여평토지로 자작농창설 동아일보 1935년 12월 25일 만여평토지로 자작농창설 십오년간 연부로 환부케 강화홍재묵씨특지 강화군 부내면 신문리 홍재묵씨는 금번 삼산면에잇는 토지만여평으로 종래소작인 십구명에 대하야 자작농창설ㅇ르 하도록하얏다. 그리하야 지가는 십오년간년부로 환부키로되엇다하야 일반은씨의특지를 칭송한다고 하며 그들 소작인들은 전긔홍씨의 긔념비를 세우라고 준비중이라한다.

14. 조선인공업회사의 프로필 동아일보 1938년 1월1일 조양방적 이회사는 작년십일월십일창립, 공칭자본금오십만원 불입자본금십이만오천원으로 강화읍에 본점을 두고 홍재묵씨의 주체경영의의것인데 순연히 인견을 본업으로 하고 부대를 마직염색이며 아직 조업은 시작치안혓으나 금년삼월부터 작업을 시작하리라한다. 우리의 완전한 인견회사로서 금후조업시작이후 동시발전이 기대된다.


15. 강화부내면에 공장촌형성 강화부내면에 공장촌형성, 조양방적, 산단, 상직공장, 강화산업계활황 강화연산백삽만원을 돌파하고잇는강화의특유한 산업 강화직물은 그후 일본내지의 대자벌회사조선진출의 반향인지 모르나 근일강화도의 산업열은 더욱 고조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강화부호 홍재묵 홍재용양씨의경영으로 방금 건축공사를 진행하는 조양방적회사와 강화산업조합 경영의 염색직조공장 성일석씨경영의 강화직물공장은 강화읍서부에다 그일대 공장촌을 건설하고 잇어 강화산업계에 일대활기를 정하고잇어 농가부업으로의 수직기로만 제출하든 강화직도 건축중의 공장실현과같이 동력을 이용하는 최신식 기계로의 제품개량 품질선택드으로 외국산 그것에비하야 손색없는 직물을 산출할 것으로 그 전도를 축복한다고 한다

16. 강화조양방직 확충계획수립 동아일보 1937년 7월 1일 강화산업강화의 취진사업가로 명망잇는홍재묵 홍재용양씨역영의 조양방직 주식회사는 소화십일년구월에 자본금 오십만원으로 창립한바 그동안 이십만원의 합자투하야 공장과 사무실건축을필하고금춘그낙성을보게되여 신흥도상에잇는강화읍의명ㅍ물이며 산업강화도의총아로 군림하고잇는바그후제일차계획으로직기오십대를설치하고인견을직출하야성히각지로제품을수출하고잇는바현재제품부족을보아방금일본내지로직기를주문중으로수히공장의증축과기계의증설을하야 부족되는생산을 완화하리라는 바장차 연산오십만원을 목표로 매진하리라한다.

17. 강화교통사업계은인 유씨찬하회성황 강화에 초유의 회합 동아일보 1938년 7월 19일 강화교통사업계은인 유씨찬하회성황 강화에 초유의 회합 강화 삼시운수회사 사장 우석유진식씨의 찬하회는 강화신문기자단 주최로 지난 십일 오후 1시부터 구군청사내에서 개최된바참회자는 경성 인천 김포에서까지 다수참석리에 회장 황우천씨의 개회사를 비롯하야 유씨의 약력보고 기렴품과 표창장증여가 잇은 후 래빈축사에 드러가 강화군수 박제승, 김포군수 권갑중, 조양방직 사장 홍재묵, 경기도회의원 김근호, 강화요업회사장 홍재용 제씨등의 축사가잇엇고 다음측전량독유씨의답사등으로끝을 마치고 일동기념촬영후 축하연회로 옭겨 주빈 화기애애리에 동사시무사히폐회하였는데 씨는 명치 삼십일년으로 대정 십일년까지 이십육년간 황성신문 대한매일, 매일신보 지국을 경영하야 강화사회에 만흔문화적공헌을 남기고 다시 대정육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릇 이십여년간 교통사업에 종사하야 산업과 교통에 이바지한 공로자이다.

18. 강화기선운수 조합을 수창설 경향신문 1949년 6월 13일 조합을 수창설 강화도와 본토와으이 교통난이 날로폭주하여 일반여객의불편이막심하므로 이를 타개코자 군내유지등이 전강회사의 독특한 사업제로 강화기선 운수조합을 구성코자 예어준비중이던바 지난 오일드디어 강화읍 합일학교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신발족을 하였는데 역원은 다음과 같다.

조합장홍재묵 이사장 윤일상

19. 신팔도기 강화 동아일보 978년 5월 19일 물이 귀해 농사마저 시원찮던 섬 사람들은 끈질긴 전쟁과 식량난을 위해 싸우면서 일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곳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가내부업이 발달한 것은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요. 농사가 시원찮아 머고살기 힘드니까 남자느 ㄴ멀리 개성까지 인삼밭 품팔이 나갔고 부녀자들은 비단짜기, 아이들은 화문석만들기로 살림을 도왔지요."이곳재벌 쌍과부의 설명이다. 6.25 때 남편을 잃은 뒤 인조견행상으로 근근히 모은돈으로 쪽딱 직소기 8대를 사 인조견공장으로 시작, 지금은 쌍과부 직물공장으로 불리는 남화견직을 세워 억대의 여성재벌이 된 황순흥 황순신 두부인은 멀리 북간도까지 비단 화문석행상을 벌였던 강화여인들의 후예로서 손색이없다. 넉살좋은 강화년이라는 말은 이처럼 생활력이 강한 강화여인들을 시기해서 나온 말인듯 싶다. 대소직물공장 24개 남화견직말고도 강화엔 김재소씨가 경영하는 심도견직 홍재묵씨가 세운 조양방직, 박영묵씨의 경도직물, 마진수씨의 평화직물, 동광직물 경화방직 등 24개의 크고 작은 직물공장들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