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련봉 2보루 '庚子'명 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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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6월 24일 (금) 18:3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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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은 남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고구려 연화문 와당으로, 홍련봉 1보루 기와 건물지에 사용된 기와로 확인되었다.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홍련봉 1보루에서 연화문 와당을 사용하는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는 점은 아차산에 행정관청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홍련봉 1보루 보다 규모가 크고, 많은 시설과 중요 유물들이 확인된 아차산 3보루아차산 4보루에서는 기와가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 또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규모가 가장 큰 아차산 3보루아차산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투구나 명문접시 등과 같은 주요 유물이 출토된 아차산 4보루에서는 아차산 보루군을 관장하는 군사지휘소 역할을 담당했고, 홍련봉 1보루는 해발 125m에 위치하여, 아차산에서 가장 낮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가장 접근하기 쉽기 때문에 대민(對民)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차산 보루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행정관청을 홍련봉 1보루에 축조함으로써 한강 유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차산의 첫 번째 봉우리에 축조된 기와 건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 대민 기능의 효율을 높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지도

클래스

  • 사물

관련 문서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아차산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홍련봉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발견되었다 홍련봉 1보루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에서 조사되었다 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
홍련봉 1보루 연화문 와당 A는 B시대에 만들어졌다 고구려

주석

  1. 아래 사진출처: '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동아닷컴, 2016년 5월 26일 기사

참고

  • 양시은,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구조 및 성격』고문화, (79), 2012년, 5-28쪽.

기여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발굴조사된 유적의 구조나 농기구와 간이대 장간 등의 시설물의 존재, 출토 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비교적 오랫동안 고구 려군이 주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홍련봉 2보루에서 520년에 해당하는 ‘경자庚子’명 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새로운 절대연대가 확보되었으며, 아 차산보루에 대한 연대관은 더욱 명확해졌다. 이러한 연구성과에 따르면 몽 촌토성 내 고구려 유적은 475년 직후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어 500년을 전후 한 시점까지 사용되었으며,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50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551년까지 사용된 것이다.


홍련봉 2보루에서 출토된 것으로 경자 년庚子年을 의미하며 서기 520년에 해당된다. 아차산보루의 연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울 대학교박물관(왼쪽부터 3장), 최종택(오른쪽)


백제가 점차 세력을 회복하는 6세기가 되면, 금강 유역의 고구려 성곽은 석축 성벽으로 전환 되지 못하고 폐기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선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아차산 보루군이 목책에서 석축단계로 전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6세기대 백제 유물이 아직까지 서울 인근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한강 유역은 여전히 고구려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방어를 위해 한강 이남보다는 이북에 대규모 보루군을 축조했 을 가능성이 있다30). 필자의 고구려 토기 편년에 따르면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대부분 6세기대에 해당하는 유물만 확인되고 있는데, 근래 홍련봉 2보루에서 520년에 비정되는‘庚子’가 새겨진 접시가 발견되어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경자(庚子)」명문 토기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발굴조사된 유적의 구조나 농기구와 간이대 장간 등의 시설물의 존재, 출토 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비교적 오랫동안 고구 려군이 주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홍련봉 2보루에서 520년에 해당하는 ‘경자庚子’명 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새로운 절대연대가 확보되었으며, 아 차산보루에 대한 연대관은 더욱 명확해졌다. 이러한 연구성과에 따르면 몽 촌토성 내 고구려 유적은 475년 직후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어 500년을 전후 한 시점까지 사용되었으며,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50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551년까지 사용된 것이다.


홍련봉 2보루에서 출토된 것으로 경자 년庚子年을 의미하며 서기 520년에 해당된다. 아차산보루의 연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울 대학교박물관(왼쪽부터 3장), 최종택(오른쪽)


백제가 점차 세력을 회복하는 6세기가 되면, 금강 유역의 고구려 성곽은 석축 성벽으로 전환 되지 못하고 폐기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선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아차산 보루군이 목책에서 석축단계로 전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6세기대 백제 유물이 아직까지 서울 인근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한강 유역은 여전히 고구려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방어를 위해 한강 이남보다는 이북에 대규모 보루군을 축조했 을 가능성이 있다30). 필자의 고구려 토기 편년에 따르면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대부분 6세기대에 해당하는 유물만 확인되고 있는데, 근래 홍련봉 2보루에서 520년에 비정되는‘庚子’가 새겨진 접시가 발견되어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경자(庚子)」명문 토기